< 895. 단기 알바-5- >
전화를 건 상대는 다름 아닌 교대생 하린이었다.
편의점주 허영자의 딸.
"여보세요?"
-오빠, 오랜만이에요! 방학했죠?
도훈은 그제야 여름 방학 때 하린과 만나기로 약속한 사실을 떠올렸다.
‘아, 하린이도 방학했나 보구나.’
"응. 엊그제. 넌?"
-전 방금 했어요!
"방금?"
-네, 마지막 시험 끝나자마자 오빠한테 전화 거는 거예요! 헤헷!
도훈은 갑자기 아프리카 소때처럼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휴, 대체 몇 명을 더 만나야 이 순회공연이 끝이 나는 거야.’
하지만 약속을 했기에 쉽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응. 근데 우리보다 방학이 늦네?"
-교대 커리큘럼이 엄청 빡빡해요. 그래서 저희들끼리도 농담삼아 그러거든요. 고등학교 4학년 올라온 거 같다고.
‘넌 재수했으니 5학년 아니야?’
라고 말하려던 도훈은 겨우 방정맞은 입을 참았다.
"고생했다. 시험 치르느라 날 샌 거 아냐? 좀 쉬어야지."
-아니에요. 마지막 시험 한 과목 남아서 대충 봤어요. 바로 서울 올라가려고요.
"바, 바로?"
오늘 바로 귀경한다는 말에 도훈도 살짝 당황해 말을 더듬고 말았다. 하린이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목소리가 돌변해 따졌다.
-왜요? 오빤 저 안 보고 싶었나봐요?
‘에이, 눈치 하난 귀신이네.’
사실 도훈은 방학하자마자 쉴 새 없이 여자들을 만난 탓에 피로감이 상당히 축적된 상태였다. 특히 최근 며칠간 지리산을 다녀오질 않나, 오늘은 오전부터 장시간 촬영을 하느라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황.
그 와중에도 덤벼드는 여자들을 한 번씩 달래느라 고추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아 놔, 왜 하필 오늘이야. 며칠 더 있다가 오지.’
도훈이 곧바로 둘러댔다.
"아니, 너 거기 남자친구 있잖아. 방학했다고 바로 서울 올라와 버리면 남친이 섭섭해하지 않겠어?"
-남친···. 흠.
하린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눈치가 빠른 도훈은 하린의 애정전선에 이상이 생긴걸 곧바로 캐치했다.
"왜? 남친이랑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에요. 그냥···.
"무슨 일 있는 거 같은데? 고민 있으면 말이나 해봐. 오빠 좋다는 게 뭐야. 그런 얘기 편히 터놓으라고 있는 거잖아."
도훈이 은근슬쩍 하린과의 관계를 재확인시켰다.
자신은 엄연히 ‘아는 오빠’다.
남친과의 문제도 상담가능한 편한 오빠.
물론 가끔 떡을 치기도 하는.
하린이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별건 아닌데요. 오빠가 요새 좀 이상해져서요.
"응? 왜? 설마 바람피워?"
-아, 아뇨! 뜬금없이 무슨 소리세요?
도훈은 자신이 물어놓고도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엄밀히 말하면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는 사람은 바로 하린이었다. 하린은 예전부터 타지생활의 외로움을 덜기 위한 목적으로 현지 남자친구를 만나는 거라고 강조했다. 진짜 좋아해서라기보단, 딱히 나쁘지 않으니까 만나는 사이라면서.
-울 오빠는 저 말고 다른 여자랑은 깨톡도 안한다고 했잖아요.
"아, 그렇지?"
[하린양은 어떤 면에선 참 약은 것 같습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자긴 실컷 주인님을 몰래 만나면서 정작 남자친구는 꼼짝 못하게 꽉 잡는 타입이랄까요?]
‘내가 봐도 그래.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랄까?’
[엇? 그건 주인님 종특 아닙니까?]
‘뭐래? 나는 그냥 플레이어로서 임무수행하는 거고.’
[뉘에, 뉘에. 어련하시겠습니까만.]
‘자꾸 비꼰다?’
-오빠가 최근에 이상한 종교에 심취한 것 같아요.
"응? 종교? 사이비?"
-정확히는 말을 안 해주는데, 뭔가 좀 이상해요. 집회 같은 것도 다녀오고. 실은 원래 방학하고 부산으로 잠깐 놀러 가기로 했었는데, 단체에 갑자기 모임이 생겼다고 먼저 캔슬을 놨거든요.
"으잉? 너랑 선약을 했는데도?"
-그러니까요. 솔직히 그거 때문에 짜증나서 바로 서울 올라가려는 것도 있어요.
도훈은 하린의 심정을 이해는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녀의 품행을 지적했다.
‘약속 깼다고 바로 다른 남자 만나러 가는 하린이도 딱히 잘 한 건 없는 거 같은데.’
[만나주는 주인님도 한패긴 하죠.]
‘뭐 인마?’
-진짜 짜증 나 죽겠어요. 무슨 플레이어니 뭐니··· 자꾸 헛소리만 해대고.
도훈은 순간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고 말았다.
뒤따라온 차가 연쇄적으로 멈춰 서며 클락션을 세게 눌렀다.
빠아아앙!
"야 이새끼야! 운전 똑바로 못해!"
사이드 미러로 보니 흥분한 뒷차 운전자가 운전석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도훈은 미안한 마음에 비상 깜빡이를 켜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의 정신은 하린이 내뱉은 한마디에 완전히 쏠렸다.
"자, 잠깐만 방금 뭐라고 했어?"
-네?
"아니 네 남친이 플레이어라는 말을 했다고?"
-네. 제가 하도 궁금해서 어디 다니는 거냐고 물어봤거든요. 절대로 말 안 해주더니 나중에 플레이어 어쩌고 하더라고요.
‘로, 로시!’
[확실합니다. PK단과 관련된 단체 같습니다.]
‘설마 하린이 남친이 PK단이었다고? 씨발, 이거 바람 핀 것 걸리면 나 죽이러 오는 거 아니냐?’
도훈이 놀란 마음에 묻자 로시가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진짜로 PK단 멤버였다면 하린양이 사귀기 전부터 조짐이 있었을 겁니다. 비교적 최근에 단체 활동을 한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끄나풀 정도로 의심됩니다.]
‘끄나풀이면···. 그때 그 오타쿠 새끼들처럼 말이야?’
[네. 생각보다 PK단의 활동 범위가 넓혀져 있군요. 어쩌면 전국의 각 대학마다 지부를 설치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플레이어 색출을 위해서요.]
‘허어-. 어떻게 이런 공교로운 일이.’
도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정차한 차에서 내려 담배를 꼬나물었다.
통화모드를 블루투스에서 핸드폰으로 바꾼 도훈은 차밖으로 나와 통화를 이어갔다.
"하린아 혹시 남자친구가 들어갔다는 종교단체인가 뭔가 아는 거 있어?"
-네? 왜요?
"아니 나도 최근에 그런 비슷한 사이비 단체를 어디서 들은 것 같아서."
-정말요? 서울에도 있어요? 여기 사이비 맞죠?
"나도 정확히는 몰라. 종교단체는 아닐수도 있고."
-하아-. 진짜 거기 들어가고 나서부턴 제정신이 아니라니까요? 가끔 집회하면 하루 꼬박 날 새고 올 때도 있고, 뭐했냐고 물어보면 잠복근무를 했다질 않나. 진짜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굴더라고요.
내용을 들어본 도훈은 하린의 남자친구가 PK단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했다.
‘로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할 것 없습니다. 하린양을 손절하시는 수밖에요.]
‘손절이라고?’
[주인님의 섹파인 하린양은 공교롭게도 PK단의 끄나풀과 연인관계인 상황입니다. 이런 와중에 하린양과 관계를 유지하셨다가 만에 하나라도 PK단에 단서를 흘리게 되면···.]
도훈도 물론 그 점을 우려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정체를 전혀 알지 못했던 PK단의 전모를 밝혀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잠깐. 어쨌든 하린이 남친이 킬러일 확률은 거의 없는 거잖아.’
[들은 내용만으로는요.]
‘이거 잘하면···.’
[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플레이어들이 PK단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놈들의 정체를 몰라서잖아.’
[주인님 설마···.]
‘만약 내가 먼저 놈들을 친다면?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놈들 조직의 규모나 타켓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안됩니다! 지나치게 위험한 발상입니다! 꿈에도 꾸지 마십시요!]
로시가 강하게 반발했다.
가끔 빈정거리긴 해도 도훈에게 최대한 협조적이었던 로시의 태도를 비추어보면 이례적인 경고였다. 하지만 고집이 센 도훈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왜? 이런 좋은 기회가 어딨어? 하린이 남친이 PK단의 끄나풀이 되었다잖아?’
[주인님에겐 경보장치가 있지 않습니까? 조용히 은둔하면서 힘을 숨기며 살면 되는데 굳이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십니까?]
‘나라고 살해 위협받으면서 사는 게 좋은 것 같아? 티는 안내지만 밖에 다닐 때마다 신경 쓰인다고! 언제 어떤 놈이 나한테 칼빵 놓을지도 모르는데, 평생 그렇게 덜덜 떨면서 숨어 살라고?’
[주인님···.]
‘이유도 모를 사냥감이 되느니, 차라리 사냥꾼을 죽여버리는 게 나아.’
[안 됩니다. 저는 결사반대입니다. 이건 너무 무모합니다.]
‘왜?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으로 보여? 내가 현직 조폭도 때려눕히는 거 너도 봤잖아?’
[주인님은 PK단에 대해서 조금도 모르십니다. 그들에게 일반인 수준의 무력은 통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놈들은 무슨 씨팔, 무쇠 인간이야? 맞으면 안 아파? 각목으로 후려치면 뚝배기 안 깨져?’
[···그들 역시 플레이어의 권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그들은 타락한 플레이어의 후손입니다. 즉, 주인님이 가진 능력이라면 그들 역시 똑같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럼 나보다 세다고?’
[주인님의 현 클래스는 섹서. 전형적인 비전투 계열입니다. 아니 어디에 속한다고 말하기도 민망하군요. 그런데 어떻게 그들과 겨루시려고요?]
‘나에겐 아이템이 있잖아.’
[그들도 블랙마켓을 이용합니다만.]
‘흠···.’
-오빠? 뭐해요? 왜 갑자기 말이 없어요?
"어, 아, 아니. 잠깐 운전하느라고."
-아, 그럼 나중에 통화할까요?
"하린이 너 그럼 언제 올라올 건데?"
-저요? 2시간 뒤?
"엉? 너 충주 아냐? 거기서 2시간 밖에 안걸려?"
-KTX 역까지 이동하면 서울까진 금방이죠. 헤헤, 오늘 볼 거예요?
"당연하지. 하린이가 방학하자마자 날 보러 온다는데."
-고마워요. 안 그래도 오빠 많이 보고 싶었는데···.
"남자친구한테는 잘 말해놨지?"
-네. 엄마 편의점때문에 도와주러 간다고 말해놨어요.
"혹시 요새도 알바 땜빵하는 거야?"
-아니요. 잘 돌아가고 있어요. 그냥 핑계대기 좋으니까. 걱정마요. 남자친구는 둔탱이라서 오빠에 대해선 조금도 모르니까.
"뭐 그럼 다행이지만."
-저 이제 준비할게요. 도착시간 톡으로 남길 테니까 나중에 봐요.
"그래."
통화를 끊은 도훈은 연달아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대체 어쩌시려고요? 정말로 PK단의 배후를 조사하실 생각입니까?]
‘아니야. 하린이가 보러 온다니까 만나는 거지.’
[왠지 핑계 같은데요?]
‘온 김에 이것저것 물어봐도 좋고.’
[주인님. 제가 어지간해선 주인님 하는 일에 참견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엔 정말로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알았어. 적당히만 파볼게. 적당히만.’
[흐음···.]
‘걱정말라고. 제 무덤을 파는 미련한 짓은 안 하니까.’
도훈은 절반이나 남은 담배를 끊고 다시 차에 올랐다. 하린을 만나기 전까지 시간이 있으니 잠시 휴식할 요량이었다.
***
플레이어 킬러.
속칭, PK단.
세상을 게임처럼 살아가는 플레이어의 유일한 대적단체.
나는 어째서 PK단이 플레이어를 노리는지 궁금했다.
‘로시.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뭔가요?]
‘PK단은 왜 선량한 플레이어들을 죽이려 드는 거야?’
[저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대대로 원수처럼 지내왔다는 사실만 알뿐.]
물론 난 로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아마 알고 있어도 보안등급이 높아서 알려주지 않는 다거나, 그러한 질문에 대해선 답변을 회피하도록 프로그래밍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의식하고 살짝 로시를 떠보았다.
‘솔직히 이 새끼들 순 나쁜 새끼들 이잖아? 알려진 플레이어 중에 위인들이 얼마나 많아? 아인슈타인도, 스티브 잡스도 내로라하는 위인들은 죄다 플레이어 출신이라며? 플레이어들이 인류를 위해 공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우리를 핍박하느냐 이 말이야.’
[음···.]
‘안 그래? 신이 있다면 이거야말로 모순이잖아.’
[지금 신성 모독의 선을 넘기 직전입니다만?]
‘아니, 그렇잖아. 어떻게 전지전능한 신께서···.’
찌릿-.
"으앗! 아이 씨, 진짜. 내가 무슨 못 할 말 했어? 플레이어가 선이고 PK단이 악의 축이 분명한데 왜 신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느냔 말이야, 내 말은!"
한 번 전기충격이 올 것을 대비했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로시?’
[정말 이유가 궁금하십니까?]
‘오, 대답해 주는 거야?’
[아뇨. 플레이어가 정말로 선인인가 하는 점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로시가 작심한 듯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주인님은 선인입니까?]
‘나?’
[네. 플레이어 이도훈은 인류를 위해 공헌하고 있습니까?]
‘나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바람둥이.
내로 남불의 화신.
108업적을 클리어한다는 핑계로 수십, 수백명의 여자들을 멋대로 희롱하는 대물 플레이어.
그런 내가 선인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글쎄···. 그래도 나쁜 놈은 아니지 않나?’
[그렇죠. 주인님의 경우만 봐도 플레이어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딱히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 세운 사명을 수행하며 나아갈 뿐이죠.]
‘그게 뭐가 어때서? 목표를 두고 전력투구하는 자세야말로 훌륭한 인간의 표본아니야?’
[잘못된 신념을 가진 인간만큼 위험한 존재는 없으니까요.]
‘뭐?’
[지금껏 굳이 말씀은 안 드렸습니다만, 히틀러 또한 플레이어였습니다.]
‘히, 히틀러? 독일 나찌 히틀러 말이야?’
[네.]
‘아, 아니 무슨 그런 미치광이 새끼가···.’
[말씀드렸지만 플레이어에겐 선과 악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력한 신념. 그리고 목표를 향한 집착. 위대한 게르만 민족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히틀러야말로 플레이어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죠.]
‘말도 안돼. 플레이어는 결코 범법행위를···.’
[맞습니다. 법을 어기는 것이 금지되어 있죠. 하지만 본인이 헌법을 좌우할 수 있다면요?]
‘아니···. 그게···.’
[법은 시대적 한계에 얽매입니다. 한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이 허용된 적도 있었죠. 최근까지도 명예살인을 눈감아 준 나라도 있고요. 조선 시대만 해도 노예제도는 합법이었습니다. 제 말 뜻 이해하겠습니까?]
‘아니 그럼 독일이 2차대전 때 말도 안 되는 전력으로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맞습니다. 히틀러 또한 플레이어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비단 히틀러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많은 이들이 전쟁영웅이기도 했습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 만 명을 죽이면 영웅.’
[여전히 플레이어가 선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895. 단기 알바-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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