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1. 단기 알바-1- >
***
하여간 옛말에 틀린 말이 없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속담 말이다.
하긴 이 경우는 고양이가 아니라 정숙한 처녀가 남자 위에 먼저 올라 탄다더니로 바꿔야겠지만.
한 번 맛(?)을 본 장군은 이미 내숭 따윈 진즉 집어 던진 모양이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나와 붙어있고 싶어 했다.
"나 마사지도 잘해. 어렸을 때 아버지 많이 주물러드렸거든."
"그, 그렇구나."
하지만 아무리 먹기 좋은 떡도 계속 먹다 보면 물리는 법. 장군 입장에서야 나와의 섹스가 인생의 새로운 발견과도 같은 기쁨이겠지만, 솔직히 나는 편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젠장. 은근히 끈질긴데 무슨 핑계를 대지?’
그때 전화가 걸려오는지 블루투스로 연동된 차량 스피커에서 신호음이 들렸다.
"응? 무슨 소리야?"
"어, 내 전화야."
핸드폰을 들고 수신인을 확인하는 데 아뿔싸.
‘허헉, 나예림!’
[예림 양이요?]
‘아니 그 육덕 돼지가 무슨 일이람?’
[돼지라뇨? 주인님 다시 만난 이후 살도 많이 빠졌는걸요.]
‘뭐든 간에. 이거 타이밍이 영 좋지 않은데.’
내가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망설이자 장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해? 안 받아?"
"으, 응. 운전 중이라 나중에."
"차랑 연결되어 있으니 그냥 받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장군이 날카롭게 물었다.
여자의 직감일까, 무당의 신내림일까?
그녀의 목소리엔 살짝 노기가 섞여 있었다.
‘나 지금 의심받고 있는 건가?’
[그래 보이는데요.]
‘와, 생각보다 집착 쩌는 데? 만난 지 하루만에 질투하는 거?’
[장군 양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주인님이 분명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했고, 그 말을 믿고 처녀를 준 것도 있을 텐데요.]
‘그럼 절대 받으면 안 되겠네.’
나는 재빨리 둘러댔다.
"안 받는게 좋겠어."
"왜?"
"사채업자야."
"사, 사채?"
"어. 내가 일전에 큰 빚을 졌다고 했잖아. 그때 사채도 끌어 썼는데 지금도 가끔 연락 와."
"아···."
한참 통화를 무시하니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다행이라 여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장군이 물었다.
"빚이 얼마나 남았는데?"
"좀 많이."
"내가 갚아 줄까?"
"왜, 왜 니가 내 빚을 갚아?"
장군도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는지 대충 얼버무렸다.
"물론 빌려준다는 소리지. 아까도 말했듯 나는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거든."
"됐어. 말만으로 고마워. 그래도 내 빚은 내가 갚을 거야."
"그러니까 빚이 얼만데?"
"많다니까. 사채라서 이자에 이자가 붙는 바람에···."
"그거 불법 아냐?"
그때 또다시 자동차 안에 벨이 울렸다. 한 번 안 받았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연이어 전화를 거는 예림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젠장. 얘는 눈치도 없나?’
[예림 양이 주인님 사정을 어떻게 알고요?]
‘아니 그래도 한 번 못 받으면 바쁜 사정이 있겠거니 짐작을 해야지.’
나는 수신 거부를 누르기 위해 정차 중 잠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장군이 팔을 뻗더니 전화를 뺏어 드는 게 아닌가.
"아, 아니!"
"줘봐. 내가 한 번 얘기해 볼 테니까."
"그, 그게 아니라."
"여보세요?"
‘으악, 받았어! 홀리 쉣!’
-응? 누구··· 이거 도훈이 폰? 아닌가요?
자동차 스피커로 놀란 예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맞는데요?"
-근데 왜 그쪽이 전화를 받아요?
"사채업자 아니에요?"
-네? 사··· 뭐요?
나는 결국 다시 핸드폰을 뺏어 들고 소리쳤다.
"예림아.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뚝-
강제로 통화를 끄고는 운전석 옆으로 폰을 치웠다.
장군이 팔짱을 끼며 나를 노려보았다.
"사채업자가 예림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누군데, 저 여자는?"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내가 속인 건 잘못이지만, 막말로 지가 내 여자친구도 아닌데 너무 참견이 깊었다. 한마디로 장군은 선을 넘고 있었다.
"그냥 알바할 때 알게 된 친구야."
"아하, 친구? 여친?"
"여친 아니고, 여자 사람 친구라고."
"그렇구나. 가끔 사채업도 하는 여자 사람 친구 구나."
명백한 비아냥.
울컥 하긴 했지만, 일단은 한 번 참았다.
"너 뭔가 오해하나 본데, 먼저 통화를 건 사람은 사채업자가 맞아. 다시 걸린 줄 알았더니 예림이가 전화를 건 거고."
"예림이랑은 그럼 무슨 사인데?"
"뭐? 방금 얘기했잖아. 그냥 여사친이라고."
"저녁에 가끔 통화도 하는?"
‘어우씨! 이 집착. 도저히 안 되겠네. 가위 가져와.’
[주인님, 부디 이성을.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아니 무슨 지가 내 여자친구도 아닌데 너무 오지랖 아냐?’
[장군 양의 입장에선 당연히 서운할 만도 할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누가 이 상황에서 질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곰곰이 듣고 보니 로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집착하는 여자는 간만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적응되질 않았다.
"무슨 뜻으로 묻는 건지 모르겠는데, 예림이는 알바때 우연히 알게 된 친구야. 못 믿겠으면 네가 다시 전화해 보던가."
나는 화난 듯 핸드폰을 다시 장군에게 건넸다.
이렇게까지 나갔는데 설마 전화를 걸진 않겠지.
아니, 설사 걸어도 상관없다.
장군의 의심은 나와 예림이 무슨 사이냐는 것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섹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친이냐고 물어봐야 들려올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막상 세게 나가자 장군도 한풀 꺾였는지 다시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아, 아니야. 무슨 통화까지. 난 그냥 궁금해서···."
"나 너한테 거짓말 한 거 없어. 너 무당이잖아. 내 속을 한 번 읽어 보든지."
장군은 내 말에 더욱 민망해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독심술사도 아니고. 미안. 내가 너무 오버했나봐."
"흐음. 네가 왜 그러는 줄은 알겠어. 근데 우리 아직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잖아. 맞지?"
"으, 응."
"그러니까 좀 더 서로를 믿고 배려하도록 하자. 조금 전 일은 오해로 빚어진 것이니 그냥 없었던 일로 할게."
"알았어, 도훈아."
‘휴-. 다행이다. 진짜 통화했으면 좆될 뻔했는데.’
[임기응변으로 넘기는 기지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주인님 말씀대로 장군 양의 집착은 살짝 도를 넘는 부분이 있군요.]
‘내 말이. 한 번 잤다고 안방마님 행세하려는 거 보니까 소름이 쫙 돋는 거 있지. 정음이도 이렇게는 안 했다.’
[그러니까 주인님이 정음 양을 좋아하시는 거죠.]
‘여튼.’
한바탕 해프닝이 있고 나서 장군도 민망했던지 분위기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어느새 장군의 집 앞까지 당도한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피곤하겠다. 오늘은 그냥 푹 쉬어. 나도 집에서 쉴게."
"으, 응. 저 도훈아···."
"응?"
"혹시 아까 일··· . 화난 거 아니지?"
헐, 지금까지 꿍해 있었다니. 쿨하지 못한 것까지 완벽 집착녀 그 자체다. 나는 일부러 활짝 웃으며 장군에게 말했다.
"에이, 무슨 소리야? 걱정 말고 푹 쉬어. 다음에 또 연락할게."
"나, 난 괜히 신경 쓰여서."
"걱정도 팔자다. 나중에 유골 가져다드릴 때 부모님께 설명 잘하고."
"응."
"마무리도 같이 해야 했는데 너한테 맡긴 거 같아서 미안."
"아니야.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네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절대 혼자서 못 했을 거야. 고마워. 여러모로."
"그래. 그럼 조심히 들어가."
"꼭 연락해야해?"
"응."
"아니다. 내가 연락할게."
"그, 그래."
장군은 헤어지는 와중에도 질척거렸다.
와우, 진짜 강적을 만난 느낌이다.
결국 내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드는 장군을 보며 나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어휴, 이거 괜한 여자 잘 못 건드려서 코 꿰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주인님도 한 번 당할 때가 되긴 했죠.]
‘뭐, 인마?’
[아참, 예림 양에게 다시 전화하신다고.]
‘말 돌리지 말고.’
그나저나 왜 뜬금없이 전화했을까?
설마 요요가 온 건 아니겠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전화를 걸자 다짜고짜 예림이 퍼붓기 시작했다.
-야, 아까 뭔데, 그 여자는?
"왜 전화했어?"
-아니 누구냐고.
"알면 뭐하게?"
-하-. 진짜 너 또 그새 다른 여자 만나?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새 여자라니?"
-저번에 법대 다니는 누구야, 설 뭐시기.
"설수지?"
-그래! 걔랑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사이 아니야. 그냥 일 때문에 같이 차 타고 간 거야."
-하, 니가? 퍽이나?
"너 지금 그 말 하려고 전화했어? 나 끊는다."
-아, 아니 잠깐.
"야, 그리고 너랑 나랑 이런 거 서로 간섭할 사이는 아니지 않아?"
장군에게 한 번 데인 이후라 그런지 말이 막 나왔다. 막말로 예림과는 진즉 끝난 사인데, 내가 잘못한 것도 있고 하니 미안해서 거두어(?) 주고 있는 형편이었다. 나 때문에 잘났던 미모를 잃고 육덕이 된게 미안해서.
그런데 그런 마음도 모르고 장군과 똑같이 나를 비난하자 욱하는 마음을 참기 어려웠다. 예림도 눈치가 있었는지 더 캐묻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성질이 급하니? 간만에 통화하면서.
"아니 너까지 날 이상한 사람 만드니까 그렇지."
-너까지? 암튼 그건 됐고, 너 요새 방학했지?
"어. 했지."
-혹시 별다른 일 없으면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설마 또 섹다이어트 하자고 부르는 건가?’
"바쁜데."
일단 튕겼다.
내가 무슨 콜맨도 아니고 부르는 족족 끌려다닐 순 없다.
-아니 넌 무슨 방학한 대학생이 내 얘기는 다 들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바쁘데?
"바쁘니까 바쁘다고 하지 그럼."
-잠깐도 시간 안 나?
"뭔 일인데?"
-아니 근데 통화로 얘기하긴 좀 그렇고. 너 지금 어디야? 아까 보니 차 타고 가는 것 같은데 이쪽으로 좀 와 줄 수 있어?
"니가 어딘데?"
-집 근처야. 밖에 나왔어.
"나 오늘 운전 너무 오래 해서 좀 피곤하거든."
-도훈아 한 번만. 응? 내가 너한테 부탁 잘 안 하는 거 알잖아.
아씨, 또 마음 약해지게.
예림에게는 약간의 부채의식 같은 게 있었다.
어찌 됐건 나 때문에 기춘에게 강간을 당할 뻔했고, 그 트라우마로 학교도 자퇴하고 스트레스로 식욕이 폭발해 육덕으로 변했던 전력이 있다.
물론 그 뒤로 나를 법대생 설수지랑 엮어 좆되게 만들려고 했던 일도 있지만, 서로 한 방씩 주고받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튼, 그녀 말대로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하거나 뭔가를 부탁한 적은 거의 없긴 했다. 또 통화도 아니고 굳이 만나서 얘기하자는 걸 보면 섹다이어트가 아닌 뭔가 다른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예감이 들었다.
‘흐음. 이걸 어쩐다.’
[저리 사정하는데 한 번 만나보시죠. 또 압니까? 미션이라도 하나 받을지?]
‘그런가? 아, 맞다. 그거 한번 써먹어 보면 되겠네.’
[어떤 거요?]
‘귀기묘묘스킬 말이야. 앞날을 예측할 수 있다면서. 스킬도 시험해 볼 겸.’
[좋은 아이디업니다. 참고로 한 번 스킬을 쓰고 나면 쿨타임이 한 달은 가는 걸 참고하십시오.]
‘알겠어. 근데 그 스킬은 어떻게 쓰는 거야?’
[아직 레벨이 낮기 때문에 뭉뚱그려 점괘를 보시면 미래의 길흉화복을 대략적으로 알려줄 겁니다. 대흉(大凶), 흉(凶), 평(平), 길(吉), 대길(大吉)의 다섯 단계이며 스마트 워치 디스플레이에 표시됩니다.]
‘무슨 사이버 운세 뽑기도 아니고···.’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야. 한 번 점괘 봐보자. 오늘 예림이를 만나면 운세가 어떨지.’
주문을 외운 뒤 귀기묘묘스킬을 실행시키자 잠시 후 스마트 워치에 글씨가 나타났다.
大吉!
[오, 초심자의 행운인가요? 첫 스킬부터 대길이!]
‘응? 이거 운이 좋다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대길이면 극상의 운빨을 받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근데 이거 효과가 얼마나 가는 건데?’
[아직은 스킬 레벨이 낮으므로 짧은 미래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길어봐야 3일 정도?]
‘3일 앞을 보고 한 달을 못 보는 거야? 이거 영 효율이 떨어지는데?’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스킬 레벨을 올리시면 나중에는 좀 더 먼 미래를 볼 수 있으실 겁니다.]
‘아무튼, 대길이라 이거지.’
-이도후우우운! 도훈 오빠!
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예림은 지치지도 않고 나에게 사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못해 허락하는 투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진짜 오늘 너무 피곤한데···. 알았어. 너 지금 어디야?"
-올 거야? 역시 도훈이 너밖에 없다니까?
"신소리 말고 위치나 말해."
나는 예림이 알려준 장소로 차를 몰았다.
그나저나 앞으로 3일 안에 운 빨이 터진다니 괜히 기대되었다. 로또를 사봐야 하나?
하긴 뭐 로또 1등도 출근한다는 세상인데 무슨.
***
도훈이 카페에 도착해 예림을 찾았다.
‘어디 보자, 여기서 제일 육덕녀가···.’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굉장히 늘씬해진 미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의 정액의 효과 덕분인지 몰라도 예림은 예전의 몸매와 미모의 완전히 되찾은 상태였다.
"어, 도훈아. 여기야."
도훈은 손을 흔드는 예림에게 다가가다 그의 옆에 다른 남자가 앉아 있는 걸 보았다. 20대 중반쯤 되었을까? 안경을 쓴 남자는 무척이나 평범한 인상이었다.
‘남자를 대동하고 나를 만나? 무슨 일이지.’
"뭐 마실래? 내가 시켜줄게."
"어, 근데 이 쪽분은 누구···?"
"아참, 내 정신 좀 봐. 소개를 안 했네. 이 분은···."
< 891. 단기 알바-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