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907화 (874/2,000)

< 890. 처녀 보살-32- >

***

‘이거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장군의 의식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괜히 나중에 시체유기 같은 흉악범죄로 오인당하였다간 둘러댈 말이 마땅치 않았다.

[신고라뇨?]

‘막말로 10년 가까이 묻혀 있던 사체를, 그것도 귀신의 안내를 받아 발굴했노라 하는 말을 누가 믿겠어? 괜히 나중에 경찰 조사받고 그러면 골치 아파진단 말씀이야.’

[듣고 보니 그렇군요. 지금이라도 연락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미 장군은 경건한 표정으로 향불을 피우며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천도재가 시작하기 전에 말했으면 모를까 중간에 끊기도 모호했다.

‘으음. 일단 등산왔다가 우연히 사람 뼈가 보여서 파보았다고 둘러대자. 나중에 치아 대조니 뭐니 신원 확인해 보면 누군지 밝혀내겠지. 실종신고도 되었을 테니까 조난객 명단을 뒤져도 상관없고.’

[그나저나 참으로 딱한 처자군요. 실족사한 것도 모자라, 유해마저 땅속으로 파묻혔다니. 원한이 깊을 만도 했겠습니다.]

‘나는 저것보다 더했어.’

[네?]

‘너도 알잖아? 칼 맞은 죽은 내 시체가 어디에 던져졌는지. 이름도 모를 저수지였어. 나중엔 물에 탱탱 불은 시체를 내 눈으로 직접 보는데···.’

[흠, 전생의 기억은 그만 잊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다 잊었어. 그냥 갑자기 이 아가씨 보니까 생각나서.’

거짓말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손발이 부들부들 떨린다.

차라리 이도훈으로 다시 태어날 때 전생의 기억을 모두 소거시켰어야 했다. 세상에 어떤 일들은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다. 아마 죽는 날까지 이 원한은 씻을 수 없을 거다.

[주인님? 괜찮으신 거죠?]

‘어.’

[방금 굉장히 무서운 표정을 지으셨는데요.]

‘내가? 무슨?’

[왠지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얼굴이었습니다.]

‘별말을 다 듣겠네.’

로시의 지적을 받고서야 겨우 표정을 숨겼다.

감정 컨트롤에 꽤 능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따금 튀어나오는 분노는 나로서도 조절하기 어렵다.

‘나한테 칼침 먹인 새끼랑 바람난 전 여편네를 내 손으로 찢어 죽어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말이지.’

하지만 당장은 속으로 화를 삼키는 수밖에 없다.

로시가 알게 되면, 나를 관리하는 하급신이 알게 될 것이고, 하급신이 알게 되면 나에게 부여된 플레이어의 권능을 박탈당할지 모른다.

복수를 위해선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을 부여한 신은 복수를 허락지 않는다. 참으로 좆 같은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힘을 주지 말던가, 복수를 허락하던가? 이게 뭐야? 줬다 뺏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 기회가 올 거야. 인내하고 기다리다 보면.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아. 처절하게 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뼈까지 씹어 먹어주마 우라질 년놈들.’

"···이제 다 됐어."

그때 의식을 마친 장군이 초췌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천도재를 올리는 동안 처녀 귀신에 반쯤 동화되어 있었어. 형체도 알 수 없게 뼛조각으로 변한 자신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더라고. 그 고통이 나한테까지 전해져서."

"저런. 처녀 귀신은 뭐래?"

"먼 길까지 와서 유해를 잘 수습해줘서 고맙데. 이 고마움은 평생 잊지 않겠다고."

"별말을 다 듣겠네. 괜찮다고 해."

"참, 그리고 영혼결혼식은 포기하겠데."

"왜? 그토록 간절히 원했으면서?"

장군이 얼굴을 붉혔다.

"아마도 나 때문인 거 같아."

"장군이 너?"

"응. 어젯밤 일을 몰래 지켜봤나 봐. 아침의 그 일까지."

"근데?"

"영혼 상태로 결혼식을 올린다 한들 육이 없는 영 상태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면서. 다 부질없다고."

"저런···. 부러웠나 보군."

"그런 말은 안 했거든?"

"한 거나 마찬가지지."

"아무튼, 이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

"그나저나 뼛조각은 어떻게 하지?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집에도 알려야 한다면서?"

"그 부분도 얘기했어. 일단 잘 수습해서 부모님께 가져달래. 사정은 자기가 설명하겠노라고."

"그것으로 괜찮겠어?"

"이 일은 언젠가 내가 해야 할 일이었어. 여기까지 도와준 것만으로 감사해. 나머진 내가 수습해 볼게."

"뭐, 정 그렇다면···."

나는 장군을 도와 보자기에 뼛조각을 조심스럽게 담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화장터에서 잘 빻아 납골당에 안치시킬 계획이라고 했다. 사망 신고등의 절차도 가족들이 직접 하게 될 것이라며.

일을 마무리한 우리는 짐을 싸 지리산을 하산했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오는 길보다 쉬웠으나 어딘가 마음이 무거워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괜히 울적해지는 하산길이었다.

***

"···미안. 너무 잤네. 얼마나 왔어?"

"앞으로 서울까진 한 시간? 더 자. 도착하면 깨워줄게."

"아니야. 운전하는데 계속 졸기만 했다. 내가 운전을 할 수 있으면 돌아가면서 했을 텐데."

"말이라도 고맙네."

정오쯤 하산해 지리산에서 서울로 출발한 지 3시간째.

천도재를 치르느라 기운을 뺀 장군은 기절하듯 쓰러져 버렸고, 도훈은 묵묵히 운전만 했다. 잠에서 깬 장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옆에서 계속 말을 붙여왔다.

"넌 참 체력도 좋구나."

"내가?"

"응. 나보다 네가 더 피곤할 것 같은데."

장군의 의도를 깨달은 도훈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산신령 덕분에 정력 하나는 끄떡없다고."

"그땐 몰랐는데, 이젠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그치?"

장군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신령께서 그런 능력을 아무 이유 없이 주진 않았을 거야. 분명 쓰임새가 있을 테니까, 잘 다듬어서 좋은 일에 쓰도록 해."

"그래야지."

"참, 방학이랬지 당분간?"

"응."

"앞으론 뭐 할 거야?"

"좀 빈둥거리려고. 믿기 어렵겠지만 학기 중에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 나도 쉬어야지. 그건 왜?"

"할 일 없으면 내 일이나 도우라고."

"일? 점집?"

"응. 실은 혼자 상담 예약받고, 관리하려니까 너무 벅차서. 보조가 있으면 더 손님들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나보고 보조를 해보란 말이야? 네 점집?"

"왜? 별로야?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나 경제적으로 크게 부족한 편은 아니야."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얼마나 버는데?"

"백?"

"에이, 한 달에 백 가지고 알바 쓰다간 적자나요, 이 사람아. 요새 최저시급이 얼만 줄은 알아?"

장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한달이 아니고 하루에 백."

"···뭐? 하루 백 만원?"

"얼추 그 정도 될 거야. 한 달에 못 해도 이삼천은 벌리니까."

"와, 너 대체···."

도훈이 충격으로 입을 쩍 벌렸다.

잘나가는 점쟁이가 고수익을 올린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막상 처녀 보살에게서 월 이삼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 자신이 아니라, 바로 장군이었다.

‘로, 로시 저거 진짜야?’

[왜요? 거짓말 같아 보이시나요?]

‘아니 무슨 한 달에 삼천이나 벌어? 의사도 그 정도는 못 벌텐 데?’

[의사가 아니니까요. 유명한 무당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집안 대대로.]

‘와, 나도 교사 때려 치고 점쟁이나 해야겠다. 아니지. 지금도 가능한 거 아냐? 이번에 공략 보상으로 받은 역법 스킬에, 과부 귀신 공략하고 받은 귀기묘묘 스킬만 있으면 점쟁이 충분히 가능하겠는데?’

[가능이야 하죠. 주인님 외모에 화술이면 사기를 쳐도 성공할  겁니다. 근데 절대 안 되는 건 아시죠?]

‘와, 갑자기 억울하네. 능력이 있어도 써먹질 못하다니.’

[하지만 어차피 주인님은 더 뛰어난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무슨 능력?’

[저렇게 돈 잘 버는 여자를 원하는대로 꼬실 수 있는 능력요.]

‘아···. 그렇네.’

도훈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굳이 부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장군이 알바를 제안한 이유가 단순히 보조로 쓰기 위함은 아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크크. 그나저나 장군이도 은근히 음흉하지 않냐?’

[장군 양이요?]

‘생각해봐. 완전 처녀빗치 스타일이잖아. 거기만 안 뚫렸지 자위 경력만 십수년에, 한 번 맛보고 나니까 자는 사람 면간하는 클라스까지. 잘 생각해보면 지가 먼저 날 덥쳤다고.’

[듣고 보니 그렇군요. 변녀였다니.]

‘장군이 쟤 옆에 있다간 진짜로 기 빨려 일찍 죽을지도.’

[참, 그러고 보니 과부 귀신이 알려준 산삼은 왜 놔두고 오셨습니까? 100년 묵은 삼이면 굉장히 귀한 영약일텐데요.]

‘같이 하산하는데 중간에 들르면 의심받을 거 아냐. 장군이 바보도 아니고 내려가는 우연히 산삼 발견했다면 퍽이나 믿겠다. 어쨌든 위치는 파악해 놨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캐올 수 있어.’

[위치가 지리산인데요?]

‘산장을 머릿속에 담아 놨거든. 나에겐 손잡이가 있잖아.’

[오오! 역시. 주인님은 가끔 보면 기발하게 머리가 돌아간단 말이죠?]

‘인마. 내가 달리 천잰 줄 알고.’

"왜 대답이 없어? 별로야? 내 제안?"

"아···. 생각 좀 하고 있었어. 다 괜찮은데, 나 실은 방학 중에 일정이 있거든."

"무슨 일정?"

"여름 방학 때 캠프도 가야 하고, 외국으로 여행갈 계획도 있고. 어디 진득하니 붙어있긴 어려울 것 같아."

"아쉽네. 아무튼, 언제든 알바 자린 비워둘게."

"말로만으로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덕분에 처녀 귀신의 한도 풀어 줬는데···."

도훈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맞다. 어제 과부 귀신은 소원 성취하고 그 자리에서 승천했잖아."

"응."

"그럼 혹시 처녀 귀신도 이제 원한이 풀렸으니 떠나는 거 아냐?"

"아마 부모님께 유해를 인도하고 나면 그럴지도."

"괜찮은 거야? 접신한 귀신이 떠나고 나면 신기가 떨어질 텐데."

"걱정 마. 난 타고난 영매야. 아마 또 다른 귀신을 받게 될 거야."

"아하. 그렇네. 아, 그리고 너 좀 조심해야 겠더라."

"뭘?"

"가끔 기절할 때 말이야. 귀신들이 네 몸에 달라 붙는 거."

"응. 나도 그것 때문에 신경 쓰고 있어. 그래서 다음번에는 영기가 강한 귀신으로 받으려고. 그럼 잡귀들은 주변에 얼씬도 못하거든."

"무시무시하네. 귀신이 붙은 사람이란."

"그래서 겁나?"

"아니. 난 귀신은 겁 안나."

"신기해. 도훈이 넌 특별한 아이야. 보통은 귀신이 붙으면 질색을 하는데."

도훈이 속으로 웃었다.

‘나도 귀신이 되어 봤으니까 말이야.’

"어, 곧 휴게소다. 마지막이니까 잠시 들르자. 나 담배 떨어졌어."

"응. 나도 마침 화장실 가려던 참이야."

"응? 이제 편하게 말하네?"

"응. 나 이제 너 편해졌어. 많이."

장군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

마지막 휴게소 이후로 서울까진 금방이었다. 헤어지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장군의 표정이 초조해졌다.

"···벌써 서울 들어왔네."

"응. 아마 30분이면 도착하지 않을까?"

"배고프지? 저녁 해줄까?

"저녁?"

"응. 내가 차려줄게. 저녁 먹고 가."

도훈은 왠지 계속 끌려다녔다간 장군에게서 못 벗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 큰일이네. 처녀를 잘못 건드렸어.’

[장군양이 직찹하는 것처럼 보이는 군요.]

‘아마 여행자 효과 같은 걸거야.’

[여행자 효과라뇨?]

‘원래 외국 같은 데서 우연히 원나잇 하고 나면 한국보다 훨씬 더 애정이 깊어지기도 하거든. 그래서 한국 돌아와서 계속 사귀는 경우도 흔하고.’

[그건 왜 그럴까요?]

‘낯선 곳, 처음 보는 사람, 특별한 추억. 뭔가 뇌리에 강하게 기억이 되는 모양이지. 이번 지리산행 역시 처녀인 장군에겐 잊지못할 추억이 되었을 거고.’

[아하. 그래서 장군양이 저렇게 집착하는군요. 목적도 다 이뤘으니 평소처럼 적당히 손절 하시지요?]

‘물론 그러면야 편하긴 한데.’

하지만 문제는 귀신의 비호를 받는 장군에게 스킬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정신 조작과 같은 마인드 컨트롤 계열은 거의 통하지 않았다.

‘지금도 정보창 안보이지.’

[네. 물음표가 너무 많습니다.]

‘아마 상식개변은 통하지 않을 것 같고, 방법이 있다면 인연을 끊는 것 뿐인데···.’

인연의 붉은 실 가위를 이용하면 손절이 가능한 상황.

하지만 도훈은 그것만은 보류하고 싶었다.

‘장군이 나쁜 아이도 아니고, 목적을 이뤘다고 바로 방생하는 것도 좀 미안해서 말이야.’

[그럼 어쩌시게요?]

‘일단 오늘만 적당히 핑계대고 빠져 나간 뒤 방법을 찾아보자. 분명 다른 수가 있겠지.’

[설마 주인님도 장군양에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니죠?]

‘호감이 없다면 거짓말이지. 근데 그것보단 책임감의 문제라고.’

[책임감요?]

‘아니. 그래도 처녀를 홀랑 따먹어놓고 먹튀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쉽게 인연을 저버리는 스타일도 아니고. 또 장군이랑 앞으로 친하게 지내서 손해볼 것도 아닌데.’

도훈은 장군이 마음에 들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어마어마한 폭유에, 점쟁이라는 특이한 직접도 이색적이었다. 마냥 인연을 끊기엔 아직 잔정이 많이 남아 있었다.

[설마 돈 잘 벌어서 혹 한건 아니죠?]

‘어떻게 알았냐? 남자의 최고의 로망은 셔터맨···’

[아니, 주인님!]

‘농담이야. 일단 오늘은 적당히 둘러대야겠다.’

"아···. 저녁은 좀 힘들 것 같은데."

"응? 왜? 약속 있어?"

"그것보단 좀 피곤해서. 운전을 내리 4시간을 했더니 허리도 뻐근하고."

"아···. 미안. 그 생각을 못 했어."

"아니야."

"그럼 내가 허리라도 주물러 줄까?"

어쩐지 장군은 쉽게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이런···.’

< 890. 처녀 보살-32-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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