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0. 처녀 보살-22- >
도훈이 빠르게 로시에게 말했다.
‘안 되겠다. 따자.’
[네? 지금 바로요? 여태껏 잘 참아놓고서는···.]
‘무슨 소리야? 문을 따자는 말인데.’
[아! 제가 오해했군요.]
‘하여간 음란마귀 같으니라고.’
[주인님이 하도 그런 소릴 하시니까 헛갈린 것 뿐입니다.]
‘잠긴 문 정도, 금방 딸 수 있지?’
[만능열쇠 아이템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거 침입에 해당하지 않을까요?]
‘여기가 누가 사는 집은 아니잖아? 국립공원에서 관리하는 건물일 뿐. 사용 비용은 현금으로 놓고 가면 돼.’
[알겠습니다. 주머니로 만능키를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도훈아?"
문 앞에 우두커니 선 도훈을 향해 장군이 불안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도훈은 태연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이런, 당겨야 하는 문인데 밀고 있었지 뭐야?"
"아···. 난 또."
열쇠를 전송받아 문을 따자 놀랍게도 키의 외피가 액체물질처럼 변하더니 꼭 맞춰졌다. 잠금쇠를 딴 도훈이 활짝 문을 열었다.
"들어가자."
도훈이 산장 내부에 불을 켜며 말했다. 뒤이어 피곤에 찌든 장군이 터벅터벅 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곧바로 신발을 벗더니 마루바닥에 쓰러졌다.
"휴, 오늘 처음으로 맘편히 누워보네."
"수고했어. 다친 다리로 여기까지 오느라."
도훈은 장군이 벗어 던진 가방과 커다란 배낭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가만. 근데 여기 우리밖에 없는 거야?"
장군이 내부를 둘러보았다. 산장은 도훈의 말처럼 구형 내무반과 흡사했다. 가운에 통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사람 하나가 겨우 침낭을 펴고 누울 수 있는 복도식 마루가 펼쳐졌다. 폭으로 보아 좌우 최대 10명, 총 2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보였다. 두 사람이 쓰기엔 지나치게 넓은 공간이었다.
"저녁에 추가로 사람이 오지 않으면 그렇겠지?"
도훈은 후속으로 들어올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는 눈치로 보니 예약자가 있을 경우만 산장을 개방하는 시스템 같았다. 자신들이 도착했을 때 건물이 잠겨있었다는 건 오늘의 예약자는 전무하다는 뜻이었다.
‘잘 됐어.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둘밖에 없겠네.’
장군이 산장의 왼쪽 마루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며 말했다.
"만약에 우리 둘밖에 없으면 내가 이쪽에서 자는 거다?"
"그렇게 해. 난 그럼 이쪽 쓸게."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복도는 심리적 저항선에 지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지만, 공간을 철저히 분리했다는 명분 정도였다.
‘말은 이렇게 해놓고 건너가면 끝이지.’
"안쪽에 샤워실 있는 것 같은데 먼저 씻을래?"
"샤, 샤워?"
"응. 찝찝하지 않아? 비누랑 샴푸는 내 가방에서 꺼내 줄게."
장군은 비를 쫄딱 맞은 데다 하루 종일 땀을 흘린 터라 당연히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산장 안에 도훈과 단 둘뿐이라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샤워는 그렇고 손발 씻고 세수만 할게."
"그래. 편한 대로 해. 난 그럼 밖에서 먹을 것좀 준비하고 있을 게."
"먹을 거? 아, 제사 음식?"
"그거 말고 혹시 몰라 좀 챙겨왔어."
"응."
장군이 산장 안쪽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도훈이 산장 밖으로 나갔다. 산장은 경사진 땅을 평탄화 한곳에 세워졌는데, 마당으로 보이는 곳에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숙박객을 위한 휴식공간이었다.
‘가만있자. 그렇다고 과일 같은 것만 먹어서는 영 부실할 것 같은데.’
[어쩌시려고요? 식용할 수 있는 아이템은 몇 개 있지만, 비상시를 대비한 프로틴 바와 영양제 종류뿐입니다. 천상계는 음식배달을 하지 않으니까요.]
‘아이템으로 안 살 건데?’
[그럼요?]
‘장 좀 보고 오려고.’
[장을요? 지금 하산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내가 왜?’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국립공원지역이다 보니 산장 내 취사도구는 전무한 상황. 간단한 음식이라도 만들어 먹기 위해선 가스버너부터 냄비까지 모두 공수해 봐야 하는 실정이었다.
도훈이 말했다.
‘마법의 문고리 꺼내봐. 충전 다 돼 있지?’
[아하! 문고리를!]
‘응. 그것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잖아. 마트가서 장 좀 보고 오게.’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군요. 근데 갑자기 음식이 튀어나오면 장군양이 의심하지 않을까요?]
‘적당히만 사 올 거야. 가방 밑에 넣어 놨다고 하지 뭐. 장군이 내 가방을 밑까지 다 뒤져본 것도 아니니까.’
[그렇군요. 마법의 문고리가 준비되었습니다.]
도훈은 문손잡이만 덩그러니 집어 들고선 다시 산장 문 앞에 섰다. 그리곤 그것을 문에 붙인 채 가야 할 장소를 상상한 후 힘껏 열었다. 활짝 열린 문은 칙칙한 산장 안이 아닌 조명이 훤히 커진 동네 마트로 연결되었다.
쿵-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나자 화장실에 있던 장군이 움찔 놀랐다.
"···도훈아? 너야?"
장군이 열린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지만, 산장 내부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닫힌 건가?"
장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손발을 다 씻고 머리를 감기 위해 준비 중이었는데 막상 몸에 물을 묻히자 샤워 생각이 간절해졌다. 비에 젖고 땀이 흐른 곳은 정작 씻지도 못한 채 시늉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냥 도훈이 말대로 샤워나 할 걸 그랬나?’
물은 차가웠지만, 여름이라 샤워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화장실 문을 안에서 잠그면 도훈이 훔쳐볼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여기서 안 씻으면 오히려 도훈이 기분 나쁘게 생각할지도 몰라. 자길 의심하는 줄 알고.’
도훈이 자신을 덮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다. 특히 토굴에서 악귀에 씌여 자신이 먼저 덮치려고 했을 때 그냥 순순히 받아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도훈은 그러지 않았다.
‘내가 도훈이를 너무 의심했나 봐. 도훈이는 절대 그런 남자가 아닌데 말이야.’
결심을 굳힌 장군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는 샤워를 준비했다. 만에 하나 도훈이 욕정을 못 참고 덤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미필적 고의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
산장 문을 통과하니 물건이 잔뜩 쌓인 마트 창고로 연결되었다. 등 뒤로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 적힌 경고문이 보였다.
‘헐! 완전 순간이동이네, 이건.’
나는 캠핑용품코너를 들러 초소형 버너와 부탄가스, 그리고 접이식 코펠을 집어 들었다. 가방 속에서 나왔다고 해도 믿을 만한 사이즈였다. 그리곤 라면 두 봉과 포기김치 하나를 챙겨 계산대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마트 안쪽에서 등장했는데 그대로 들고 가도 되는 거 아냐?’
[그건 절돕니다, 주인님. 천상계의 아이템을 한낱 좀도둑질에 쓰려는 건 아니죠?]
‘아니 말이 그렇다고.’
계산을 마친 나는 직원들 눈치를 살핀 후 관계자 외 출입금지로 적힌 철문에 마법의 문고리를 붙여 돌렸다. 이어지는 곳은 다시 산장 바깥.
"깔끔하네. 지리산에서 우리 동네 마트까지 10분이면 쇼핑 끝이라니."
[마법의 문고리 아이템을 고작 장보기에 쓰시는 플레이어는 주인님이 최초일 겁니다.]
‘뭐 어때? 당분간 쓸 일도 없는데. 충천이야 또 하면 되고.’
채비를 마친 나는 나무 테이블 위에 미니 버너를 올려두고 부탄을 꽂았다. 캠핑용품 소형화의 끝판왕인 미니 버너는 부탄을 꽂지 않을 때는 가스레인지에서 냄비 받침대만 떼놓은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수돗가에서 코펠에 물을 담은 후 냄비에 올리는데 산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뭐하고 있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고 있는 장군이었다.
"어, 라면 끓여."
"라면? 라면이 어디서 나서?"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몰랐어? 네가 하루종일 메고 다닌 가방 밑에 넣어 놨었는데."
"그, 그걸 다?"
장군은 부탄가스와 미니버너, 코펠을 보더니 믿기지 않는 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분명 가방에 그런게 들어있는 느낌은 없었는데."
"그럼 이게 어디서 났겠어? 너 씻는 동안 산 밑에 내려가서 사 오기라도 했을까 봐?"
진실을 말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장군이 젖을 머리를 털어내며 말했다.
"진짜 몰랐어. 근데 저걸 어떻게 챙겨 온 거야?"
"혹시 몰라서. 구급낭도 그래서 챙겨온 거잖아.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으니까."
"으응, 도훈이 넌 준비성이 철저한 편이구나."
"그냥 얻어 걸린 거지. 어, 물 다 끓었다. 라면 넣을게."
"도훈이 너도 씻어. 내가 준비하고 있을 게."
나는 장군이 아까 입던 후드 잠바로 갈아입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었다.
"응? 너 혹시 샤워했어?"
"씻다보니 찝찝해서."
"그래. 그게 낫다니까. 나도 그럼 씻고 올게. 부탁해."
"응."
장군에게 라면을 일임시키고 산장 내부의 화장실로 향했다.
‘아, 샤워할 줄 알았으면 여기 있다가 기회를 엿보는 건데.’
[왜요? 덮치기라도 하시게요?]
‘그건 아닌데 은근히 기대했을 수도 있잖아.’
[샤워 중에 덮쳐지길 바라는 여자는 야동에서 밖에 안 나올 걸요?]
‘모르지 또. 장군이 무슨 속셈인지는.’
옷을 벗고 샤워를 시작하는데 수건걸이에 수상한 게 걸려있었다.
"이게 뭐지?"
끝을 잡고 조심스럽게 들어보니 여자 팬티였다.
"엇, 뭐야. 장군이 쟤 팬티 빤 거야?"
아마도 속옷을 여벌로 챙겨오지 않아 샤워를 하는 김에 속옷 빨래도 같이했던 모양이다. 그걸 보란 듯이 공용으로 쓰는 화장실에 걸어 놓고 가다니···. 나참, 이건 뭐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팬티를 들어 코 끝에 갔다댔지만, 비누 냄새가 가득했다.
[뭐 하십니까?]
‘처녀 봊이 향기나나 보려고.’
그때 우당탕 소리가 들였다.
"자, 잠깐 도훈아!"
장군의 목소리였다. 나는 얼른 팬티를 다시 수건걸이에 걸고 화장실 안에서 대답했다.
"왜? 무슨 일인데?"
"아, 아니 그··· 내가 깜빡하고 중요한 걸 놓고 왔는데, 잠깐 들어가도 될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걸 보니 뒤늦게 손빨래한 팬티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 샤워하려고 지금 다 벗었는데."
"···아!"
탄식하는 소리가 들여왔다.
그녀의 반응이 재밌어서 놀리듯이 물었다.
"뭔데 그래? 내가 챙겨 나갈게. 어디있어?"
"악! 안 돼! 아니야! 그냥 내가,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장군은 차마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지도 그렇다고 기다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은근히 칠칠치 못한 모습이, 점 볼 때의 냉철하던 모습과 상반되며 인간미를 더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20대 아가씬데 말이야.’
[살짝 푼수 같기도 하네요. 자기가 실수해놓고 말이죠.]
‘놀리는 재미가 있단 말이지.’
"옷 다시 입을 테니까 잠깐 들어올래?"
"아니야! 아니, 그래. 그, 그럼 잠시만 나와줄래?"
"나보고 나가라고?"
"응, 도훈아. 진짜로 미안해. 내가 너무 중요한 걸 놓고 와서."
나는 별수 없다는 듯 수건으로 밑을 두른 채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장군은 나를 보더니 꺄악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그, 그건."
"나오라면서. 급한 것 같아서 중요한데만 가렸어."
"아니, 그래도···."
"급한 거 아니었어?"
장군은 그제야 두고 온 팬티가 생각났는지 후다닥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가 도로 나왔다. 바지 뒷주머니에 뭔가를 급하게 챙기는 모습이었지만 일부러 모른 체 했다.
"챙겼어?"
"어, 어. 미안해 정말."
"뭐였는데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 난 아무것도 못 봤는데."
"아니야. 아무것도. 헛, 라면 불겠다. 난 그럼!"
장군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후다닥 산장으로 나갔다. 어찌나 허둥대던지 그녀의 뒷주머니에 꽂아 둔 팬티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장군아."
"어, 어?"
"바닥에 팬티 흘렸어."
"아아아악!"
장군이 미친 여자처럼 뛰어오더니 전광석화처럼 팬티를 집어들더니 산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풉-. 생각보다 재밌는 구석이 있네."
[얼른 씻기나 하십시오. 순진한 처자 놀리기나 하고.]
‘내가 벗겼냐? 지가 내렸지.’
한바탕 헤프닝을 끝나고 샤워를 시작했다. 샤워를 하는 내내 장군의 혼비백산한 표정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여간 골 때리는 애라니까. 귀신 들리는 것도 그렇고.’
장군을 생각하며 대물에 비누칠을 하는데 자극을 받았는지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나는 비누를 구석구석 묻혀 꼼꼼하게 씻었다.
‘이건 입에 들어갈 거니까 깨끗하게.’
[그나저나 장군양은 괜찮을까요? 엄청 창피해 하는 것 같았는데요.]
‘뭘 그런 거 가지고? 노브라도 걸리고 노팬티까지 걸렸으니, 이제 해탈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처녀인데 배려 좀 해주시지.]
‘장군은 몰라서 순진한 것뿐 절대 순수한 타입은 아닐 걸.’
[그걸 어떻게 장담하시나요?]
‘장군이 왜 팬티를 굳이 손빨래했을 까?’
[네?]
‘속옷을 벗어서 빤 이유를 모르겠냐고. 아까 야외 섹스 훔쳐보다 흠뻑 젖었다는 소리잖아. 내가 볼 때 오늘 종일 그 생각으로 가득할 걸?’
[공략하긴 딱 좋은 상황이군요.]
‘그러니까 말이야. 왠지 일이 술술 풀리는 기분이야. 지리산 까지 따라온 보람이 있겠어.’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하였습니다. 늘 신중하고 또 경계하셔야 됩니다. 마지막까지 긴장 풀지 마시고요.]
‘걱정도 많다. 귀신도 안 무서워하는 내가 뭐가 무섭겠어?’
내 자신감을 증명하듯 우뚝 발기된 대물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하여간 내가 오늘 장군이 시원하게 한 번 뚫어 준다.’
< 880. 처녀 보살-22-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