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7. 처녀 보살-19- >
"악귀라는 게 뭐야?"
"악귀는 악행을 일삼는 귀신을 말해. 영적인 부분이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복잡한데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줄게."
"응. 말해봐."
"사람 중에도 나쁜 사람이 있고 착한 사람이 있잖아."
"그렇지."
"귀신이란 결국 사람이 죽어서 된 거란 말이지. 그렇다면 귀신 중에도 나쁜 귀신이 있고 좋은 귀신이 있는 거야."
"아하, 이해했어. 그럼 너에게 붙었던 악귀가 나쁜 귀신인 거구나?"
"그런 것 같아. 그리고 사람 중에도 힘이 센 사람과 약한 사람이 있잖아. 귀신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귀신에겐 물리력이란 게 없지 않나?"
나 역시 귀신이 되어본 적이 있기에 그것만은 명확히 알고 잇었다. 인간계와 영계의 관계는 전혀 다른 차원에 겹쳐있다. 즉, 영화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사람은 귀신을 만질 수 없으며, 그 역 또한 성립한다.
"네 말이 맞아. 힘은 물리력을 말하는 게 아니야. 영적인 능력을 의미하는 거야."
"영적인 능력이라고?"
"죽은 사람이 현몽한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지?"
"어. 꿈에서 조상님이 나타나 로또 번호 알려줬다는 얘기 같은 거?"
"맞아. 그게 바로 귀신이 가진 능력 중 하나야. 대부분은 사람들은 귀신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꿈으로 나타나는 거야. 이 또한 귀신이 가진 능력이고."
"오호, 그리고 또?"
"영력이 강한 귀신인 아까처럼 영매에 대한 강제 빙의가 가능해."
"한마디로 인간의 몸을 뺏을 수 있다고?"
"음, 물론 누구에게나 빙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대체로 사람들은 그··· 파장이라고 해야 하나?"
"주파수?"
"맞아. 그거랑 비슷해. 주파수가 다르기 때문에 빙의가 쉽지 않아. 하지만 나처럼 귀신의 파장과 흡사한 사람에겐 쉽게 빙의할 수 있는 거야."
"혹시 장군이 너 귀신 들린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거야?"
"···당연히 처음은 아니지."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 놀라서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어쩐지 저렇게 예쁘고 가슴 빵빵한 여자가 숫처녀라는 게 이상하긴 했다. 귀신들린 여자라고 하니 이제야 납득이 간다.
"물론 영매라고 해서 무작정 몸을 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아깐 그럼 왜 그런 건데?"
"그게···."
장군이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술에 취해서 정신이 몽롱해졌어."
"아···."
"악귀는 심력이 약해진 사람에게 접근해. 그리곤 빙의를 통해 몸을 빼앗고 나쁜 짓을 일삼지. 혹시 이런 얘기 들어 본 적 없어? 평소엔 멀쩡한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미친 사람이 되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
"아아, 그럼 그게 설마!"
"정신과 의사들은 조현병이라고 판정하지만, 그중 일부는 정말로 악귀의 농간일 수 있어. 그래서 몇몇 사람은 그렇게 말한다잖아. 누군가 자신에게 다른 사람을 죽이라고 속삭였다고."
"세상에. 그런 짓을 대체 왜 하는 건데?"
"나쁜 사람에게 왜 나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 것 같아?"
"나쁜 놈이라서?"
"똑같아. 나쁜 귀신은 성정이 고약하기 때문에 나쁜 짓을 일삼는 거야. 별 이유는 없어."
"저승사자들은 대체 뭐하는 거야? 그런 놈들 안 잡아가고?"
"저승사자도 바쁘겠지. 한 해 동안 죽는 사람이 태어나는 사람보다 많은 세상인데."
"그렇군."
그나저나 귀신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는 장군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그녀가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다중인격자를 보는 것처럼 그녀도 얼마든지 귀신이 들리면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건가? 무당과의 섹스가 녹록한 건 아니군.
"혹시 아까 그 악귀가 또 나타나는 건 아니지?"
"걱정마. 아까처럼 정신을 잃을 일은 없을 테니까."
"아깐 진짜 얼마나 놀랐다고? 갑자기 막 날 덮치는데, 어휴."
장군이 얼굴을 붉히며 고마워했다.
"잘은 기억이 나질 않아. 그치만 네가 날 도와주려고 했던 건 알 것 같아. ···고마워."
"아, 아니야. 딱히 공치사 들으려고 한 소리는 아니고."
어찌 됐건 결과적으로 나는 장군에게 점수를 딴 꼴이 되었다. 조금씩 점수를 따다 보면 언젠간 기회가 올 수도 있겠지? 그게 너무 늦어지지 않으면 좋으련만.
"참, 근데 아까 그 악귀의 정체는 뭐였어? 남자야 여자야?"
"여자였어. 영력을 봐선 오랜 세월 구천을 떠돈 느낌이었고."
"누군지는 전혀 짐작은 안 되고?"
"귀신들은 대체로 멀리 이동하지 않아. 주로 살아생전에 살았던 주변을 배회해. 산자락 밑에서부터 따라왔다는 걸 보면 아마도 지리산 인근 마을에 살던 사람인가봐."
나는 다시 한번 입맛을 다시던 악귀를 떠올렸다.
놰쇄적인 눈빛과 음탕하기 짝이 없는 말투.
모르긴 몰라도 상대는 전생에 굉장한 변태였을 것이다.
‘아, 그래서 음기가 강하다는 말이 있는 건가?’
[음기가 강하다뇨?]
‘왜, 남자 없인 절대로 못 자는 애들 있잖아. 음기가 강하면 그런 귀신이 되는 거구나.’
[다시 생각해보니 아쉽습니까? 줄 때 받을 걸 하고요.]
‘설마? 아깐 얼마나 끔찍했는데. 힘은 또 어찌나 세던지.’
"이제 빗소리가 안 들리는 걸 보니 그친 것 같아. 옷도 다 녹인 것 같으니 슬슬 나갈래?"
"그래. 나가자. 여긴 무서워서 더 못 있겠다."
아무리 내가 강심장이라도 막상 악귀를 만나고 보니 꺼림칙한 마음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귀신과 맞닺뜨리는 게 무섭다기 보다는, 도무지 상대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였다.
"먼저 나가 있어. 혹시 모르니까 불 꺼드리고 나갈게."
"어떻게?"
"남자들한테 천연 소화기가 달려있잖아."
"아, 앗!"
장군이 부끄러워하며 먼저 짐을 챙겨 나갔다.
나는 뒷정리를 하는 척하며 모닥불의 불을 끄고 아이템을 다시 챙겨 넣었다. 1회용으로 쓰고 버리긴 아깝고, 챙겨 두면 나중에 다시 쓸 기회가 있을 것 같았다.
[알뜰하시군요.]
‘왜 어차피 가스만 채우면 반 영구적이라면서.’
[그게 아니고 어차피 1+1으로 받앗으니 다음에 새걸 쓰면 되는데요.]
‘아차. 그러네? 진작 말했어야지.’
[주인님이 안물어 보셨잖습니까.]
‘참. 근데 혹시 또 장군이 귀신 들릴까 봐 걱정돼 그러는데, 나로선 전혀 대항할 수단이 없는 거야?’
[대항할 수단이라뇨?]
‘아니, 퇴마 능력 같은 거 말이야. 하다못해 귀신을 쫓는 부적이라든가 귀신이 싫어하는 십자가나 염주 같은 거.’
[그거 다 미신입니다. 종교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럴듯한 거짓말이죠. 대신 퇴마 능력을 가진 아이템이라면 몇가지 있습니다.]
‘있어? 역시 천상계엔 없는 게 없구나.’
[자세히 설명하자면 아까 장군 아가씨께서 말하던 귀신과의 주파수를 맞추는 능력입니다. 영계와 접촉할 수 있도록 싱크를 맞추는 것이죠.]
‘그럼 귀신과 접촉이 가능하겠네?’
[네. 직접적인 물리력의 교환이 가능해집니다.]
‘뭔데?’
[귀신잡는 해병대 모자입니다.]
‘뭐?’
[아이템 이름이 그렇습니다. 모자형 아이템인 이것은 영계와 접촉할 수 있도록 파장을 바꿀 수 있게 해줍니다.]
‘네이밍 센스하고는. 설마 이거 한국인이 만든 거냐?’
[어떻게 아셨습니까?]
‘딱 들으니까 알겠네. 하여간 한국인들은 꼭 티를 내요. 얼만데?’
[소모품이 아니므로 가격이 제법 나갑니다. 5000포인트입니다. 근데 정말로 구매하시려고요? 소모품이 아니다보니 1+1 대상도 아닙니다.]
‘어차피 두 개 있어 봐야 쓸데없어. 머리가 두 개씩 달린 것도 아니고. 일단 준비만 해둬. 언제든 가방에서 꺼낼 수 있게. 만에 하나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대처할 수단은 있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모닥불 아이템을 정리해 토굴 바깥으로 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소나기가 내린 흔적이라곤, 진흙탕처럼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패인 경사로 뿐이었다.
"엇? 언제 옷 갈아입었어?"
"으, 응. 너 오기 전에."
장군은 어느새 후드 집업을 벗고 등산복으로 다시 갈아입은 채였다. 게다가 다시 브라를 했는지 아까까지 마중 나와 있었던 젖꼭지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쓰읍-. 아쉽게 됐네. 보기 좋았는데.’
[주인님이 노골적으로 쳐다보니 다시 입었겠지요.]
‘괜찮아. 한 번 만지긴 했으니까.’
고의는 아니었지만, 악귀가 손을 잡아당긴 덕에 장군의 처녀 가슴을 주무를 수 있었다. 아직도 손에 남아있는 촉감이 생생했다. 근데 젖꼭지는 또 왜 서 있었을까?
"다시 출발하자. 목적지까지 이제 얼마 안남았을 거야."
"으, 응."
"해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야 해. 산속은 비교적 해가 일찍 지니까."
핸드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5시.
대략 동굴에서 2시간가량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빨치산 토굴을 뒤로하고 다시 처녀 귀신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산속으로 계속 들어갔다.
***
"아이, 이런 데서 정말 해야 해?···. 누가 보면 어쩔라고잉?"
"이런 곳까지 누가 온다 그랴? 흐흐. 순희, 얼른 벗어보랑께."
등산복을 입은 중년 남녀가 널찍한 공간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있었다. 이들은 등산을 핑계로 지리산에 오른 소위 산악회 맴버 중 하나였다.
모든 산악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속한 산악회는 대대로 불륜의 온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어떤 이들은 산에 간다는 핑계만 대고 관광버스 집결지에서 사라졌고, 또 어떤 이들은 버스를 타고 산까지는 이동하되 산밑에서부터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그렇게 눈에 띄는 개인행동을 했다간 산악회 맴버들 사이에서 소문 날 확률이 높았다. 이에 좀 더 노련한 이들은 실제 산에 오르고 나서 거사를 치르는 편이었는데 중간까지만 올랐다가 몰래 내려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산하는 길에 샛길로 빠져 토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이 두 커플처럼 아예 산속 깊이 들어가 야외플레이를 즐기는 예도 있었다. 이런 이들은 적당히 사인을 맞춘다. 가령 오늘 바람이 나고 싶다고 하면 일부러 등산복 바지 한쪽을 무릎 아래까지 걷어 올리는 식으로 표식을 해놓는 것이다. 사인을 알아본 이성이 접근해 눈이 맞으면 산행을 하며 오르다가 무리와 거리가 벌어지는 사이 적당히 옆으로 빠져서 현장(?)에서 치고 빠지며 완전 범죄를 노리는 것이다.
소위 말해 산악회 불륜에 있어서는 끝판왕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어이쿠, 이 젖통 보소. 살이 통통하게 올라브렀네잉."
"민식이 아빠, 나 지금 살쪘다고 놀리는 거지?"
"아따, 뭔 소리당가? 나가 글래머 타입 좋아하는 거 알잖여."
중년의 사내는 야외플레이에 흥분한 것인지, 아니면 새롭게 파트너를 이룬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것에 흥분한 것이지 몹시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옷을 벗기기도 전부터 가슴을 주물럭거리던 그는 여자의 배꼽 아래 손을 넣어 바지 속을 마음껏 휘저었다.
"오메, 오메 나 죽는 그."
"허벌라게 젖어 브렀구마잉. 어째 하기도 전부터 이렇게 물난리여."
"몰러. 후딱 넣기나 해. 누가 보면 우세스러운께."
남녀는 옷을 모두 벗지도 않고 교합을 시도했다. 인근 수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정신이 딴데 팔린 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도저히 이 길로는 못 가겠는데."
비가 한바탕 쏟아진 이후라 그런지 계곡물이 불어 있었다. 유속도 거센 것이 자칫 휩쓸려 들어가면 맨몸으로 급류를 타게 될지도 모를 아찔한 상황.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도훈이 다시 어플을 켜 지도를 확인했다.
"여기 보이지. 위로 쭉 돌아가면 될 것 같아. 여기 보면 등산로 하나가 계곡 위를 지나게 돼 있잖아."
"다시 위로 오르자고? 여기까지 와서?"
한참을 헉헉대며 걸어온 장군은 불어난 계곡물에 우회해야 한다는 소리에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외쳤다. 최단거리로 가로지른다는 소리에 험난한 산길을 헤쳐 왔더니만, 결국 크게 한 바퀴 우회해야 하는 상황 앞에 허탈해진 것이었다.
도훈이 그녀를 격려했다.
"조금만 힘내. 여기만 건너면 끝이야. 아직 시간 있으니 해 떨어지기 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
"알았어. 나보다 네가 더 힘들 텐데. 괜히 투정 부려 미안."
장군은 커다란 배낭을 메고도 불만 한 번 표시하지 않는 도훈의 모습에 다시 용기를 냈다. 자신 때문에 엄한 도훈만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이럴수록 더 힘을 내야지. 근데 도훈인 참 씩씩한 아이구나.’
처음 만났을 땐 변태로만 생각했는데 알면 알수록 진국인 사내였다. 특히 토굴에서의 일을 떠올리자 장군이 자기도 모르게 낯이 뜨거워졌다.
‘···실은 아까 너한테 거짓말했어. 내가 뭘 했는지 다 기억나.’
빙의된 순간은 끔찍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의식만 깨어있고 몸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악귀에게 통제권을 빼앗기면서 자신의 의지로 손가락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도훈이 보여준 모습은 의연함 그 자체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상스럽고 낯뜨거운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데도 도훈은 끝까지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목이 졸리는 위기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저항을 포기했다. 장군은 자신을 위해 그렇게 온몸(?)을 내던지는 도훈의 모습에 감동했고, 이성으로서 호감도가 많이 올라간 상태였다.
‘이번 일정이 끝나고 도훈이랑은 계속 연락하고 지냈으면 좋겠어. 무, 물론 순수하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이 빨개져 있는 장군을 향해 앞서가던 도훈이 갑자기 쉿-! 소리를 내며 동작을 멈추었다.
"왜 그래?"
"앞에 누군가 있어."
"사, 사람이 있다고?"
장군이 귀를 쫑긋 세우자 전방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 877. 처녀 보살-1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