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8. 처녀 보살-10- >
***
도훈은 아침 일찍부터 짐을 꾸렸다. 서울에서 지리산까지의 여정은 생각보다 먼 길이었지만, 그나마 차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도훈이 처녀 보살 김장군의 집 앞에 도착해 전화를 했다.
"도착했어요. 지금 나오시면 돼요."
-네, 금방 나가요.
일어나자마자 연락을 했기 때문인지 장군도 이미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훈은 집에서 나오는 장군의 차림새를 보고 살짝 놀랐다.
‘오, 평상복으로 입은 모습도 되게 이쁘잖아?’
그가 장군을 봤을 땐 늘 한복차림이었다.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저고리에 치마를 걸친 모습만 보다가, 여느 20대 아가씨처럼 평범한 차림을 한 모습이 색달랐다. 단순히 흰 반팔티에 청바지, 흰 운동화만 신었을 뿐인데도 상큼함이 물씬 풍겨 나오는 것 같
았다.
그녀는 커다란 등산용 백 팩을 둘러매고 있었는데, 얼마나 가방이 큰지 머리 위로 올라올 정도였다. 차에서 기다리던 도훈이 트렁크를 열고 마중 나갔다.
"무슨 짐을 그렇게 한 가득 가져왔어요?"
"혹시 몰라서요. 이것저것 챙길 장비도 있고."
"장비요?"
도훈이 백 팩을 대신 받아 트렁크에 정리하며 물었다.
"나중에 제사라도 올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줘야 하니까요."
"아···."
도훈이 트렁크를 닫으려고 하자 장군이 제지했다.
"아, 잠시만요. 간식 좀 빼고요."
"간식이요?"
"아침 못 드셨죠? 출출하실 까봐 먹을 것좀 미리 준비했어요."
장군이 가방 윗부분을 열더니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도시락처럼 보이는 플라스틱 용기였다.
"일찍부터 일어나셨나 보네."
"제가 좀 새벽잠이 없어서요."
"암튼 출발하죠."
도훈이 운전석에 앉아 네비를 켜는데 보조석에 앉은 장군이 안전띠를 맸다. 평소처럼 압박붕대를 하지 않았는지, 벨트 끈이 가슴골을 가로지르며 깊숙한 골짜기를 만들었다.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있던 도훈은 시선을 옆으로 힐끔거리며 군침을 삼켰다.
‘오우, F컵 대박. 반 팔 안이 비출까 봐 붕대를 못했나 보구나.’
도훈이 자꾸 곁눈질을 하자 시선을 의식한 장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뒤에 앉을까요? 보조석에 앉는 게 예의라고 배워서···."
"아니에요. 장거리 운전이니까 보조석에서 말 좀 걸어주세요."
"말을 걸다뇨?"
"고속도로 달리다 보면 졸음운전 할 수도 있거든요."
"아앗···. 넵!"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일단 노고단으로 찍었어요. 휴게소는 중간에 필요하면 들를게요. 쉬 마려울 것 같으면 말하세요."
도훈은 고의로 불편한 얘기를 건네며 서서히 운을 띄웠다.
이는 일종의 예방주사 효과였는데, 처음부터 거리낌 없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이 이런 류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과연 예상대로 장군이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생면부지의 남자와 먼 길을 가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이제 휴게소를 들르자는 말을 꺼내기도 부끄러워진 상황이었다.
장거리 운전이 오랜만인 도훈도 살짝 긴장했는지 톨 게이트를 빠져나갈 때까지 말수가 없었다. 오히려 고속도로로 접어들면서 속도가 나자 조금은 여유가 생긴 표정이었다.
"운전 되게 잘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요?"
"네. 나이에 비해서요. 대학생 아니셨어요?"
도훈의 외모는 누가 봐도 직장인으로 보기 어려웠다. 끽해야 대학생 정도.
"아, 학생인 건 맞아요. 근데 일찍부터 차를 몰아서 운전에는 익숙해요."
"그러시구나."
"비트코인으로 날려 먹지만 않았어도 더 좋은 차를 몰았을 텐데···."
도훈은 현재 자신이 아닌 정명훈으로 위장한 상태.
그가 연기하는 정명훈은 투자 실패로 재산을 날리고 지리산에서 자살하려다 귀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특별한(?) 능력을 하사받은 사람이었다.
"음, 비트코인. 그러잖아도 요 몇 달간 그런 상담이 많이 왔었어요."
"정말요?"
"네. 자신이 투자한 코인이 앞으로 어떻게 되겠냐면서···."
"그런 것도 볼 줄 아세요?"
"아뇨. 제가 보는 건 일생 동안 쌓을 수 있는 재물 운 정도에요. 사람마다 타고난 팔자라는 게 있거든요. 하지만 그 사람이 어느 종목에 투자해서 얼마나 벌지는 저도 잘 몰라요."
"저는 어때 보여요?"
"네?"
"관상적으로요. 재물 운이 좀 있는 편인가요?"
도훈이 장난스럽게 묻자 장군이 그의 옆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어제 그건 자세히 안 봐서. 한 번 봐 드려요?"
"공짜로 봐주심 저야 좋죠."
"근데 얼굴을 정면에서 봐야 정확한데···."
"이렇게요?"
운전대를 잡은 도훈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장군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정면 봐요! 정면!"
"괜찮아요. 주변에 차도 없는데."
"다 봤으니까 운전에 집중하세요!"
장군은 생각외로 겁이 많은지 도훈이 운전대를 놓고 자신을 쳐다보자 화들짝 놀랐다. 뻥 뚫린 고속도로에서 잠깐 한눈 판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원체 조심성이 많은 성격인 듯 했다.
"어때요? 제 제물운은?"
"가늠키 어려워요."
"왜요?"
"관상이 좀···."
"제 관상이 뭐 잘못됐어요?"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기탄없이 말해주셔도 됩니다. 쪽 빡 찰 운센가요?"
"그게 아니라. 실은 명훈씨는 초년 운만 보여요. 아마도 손금과 영향이 있는 듯한데 본래대로면 명줄이 끊어져서 그런지 말년 운을 읽을 수가 없어요."
"···그렇구나."
도훈은 장군의 신통력에 놀랐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본 주인 이도훈은 20대에 박명할 운세였다. 그러니 손금도 생명선이 짧은 게 맞았고, 말년의 재복 역시 읽어내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럼 초년 운이라도 맞춰보세요. 제가 어떻게 살았을 것 같아요?"
"유복했네요. 부족함 없는 삶은 사셨을 거예요."
도훈의 실제 아버지는 국내의 유명한 소설가.
현재는 여동생 이혜은의 뒷바라지를 위해 부모님 두 분 다 미국에 거주하는 상태였다. 그것만 봐도 실제 이도훈의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았을 거란걸 유추할 수 있었다.
"아···. 리플을 들어가선 안 됐는데."
"네?"
"아니에요. 투자를 괜히 했나 싶어 가지고."
"아무튼 명훈씨 관상은 잘 못 읽겠어요."
"명훈말고 도훈이라고 불러주실래요?"
"네? 명훈씨 맞지 않나요?"
"그게 아니라 실은 명훈은 개명 전 이름이거든요. 익숙해서 그걸로 썼는데 지금은 도훈이에요."
"혹시 개명하셨어요?"
"네. 올 초에요."
"특별한 사연이라도···."
"죽다 살았잖아요. 하필 성까지 박씨라 박명훈이란 이름 때문에 박명(薄命)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는 마음으로 개명했어요. 도훈으로."
"아하."
"그러고 보니 보살님은 이름이 어떻게 돼요? 아직까지 이름도 못 물어봤네요."
"그냥 편하신 데로 불러주세요. 님까진 안 붙여도 돼요."
"에이, 그래도 이렇게 동행하는 것도 인연인데 서로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 개명 전 이름이랑 실명까지 다 공개했는데···."
도훈이 섭섭한 투로 얘기하자 장군이 귀 뒷머리를 슬쩍 넘기며 부끄러워했다.
"아, 그, 그런 뜻이 아니고···. 사실 이름이 별로 안 예뻐서요."
"이름이요? 뭔데요? 설마 숙자, 말자, 춘자 뭐 이런 거예요?"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닌데 왜요? 혹시 박 하늘별님구름햇님보다사랑스러우리 같은 건 아니죠? 아니면 김 황금독수리온세상을놀라게하다 라던가, 최 박차고나온놈이샘이나 같은 건?"
"그, 그게 뭐예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이름이래요."
"그게 실명이라고요?"
"네. 근데 저도 개명할 때 알아보니까 93년 이후로는 5글자 이상 못 쓰게 바뀌었다더라고요. 아 맞다. 보살님 나이도 모르는구나. 93년생 이전은 아니죠?"
"아니에요. 그보다 뒤에요."
"암튼 이름이 뭔데요? 저렇게 긴 이름도 아니면···."
"김장군이요."
"네?"
"자, 장군이라고요."
"장군님이시구나."
"님 자는 좀 빼주시면···."
"근데 이름이 살짝."
"부모님께서 남잔 줄 알고 지어주셨데요."
"아···."
"저는 그냥 주어진 대로 살려고요. 그리고 올해 스물넷이에요."
"엇? 그래요? 저보다 어린 줄 알았는데."
"명훈씨, 아니 도훈씨는 몇 살인데요?"
"스물 셋이요. 그럼 앞으로 누나라고 불러야 겠네요."
"아···. 아니 뭐 괜찮아요. 한 살 차이는."
"그래도 누나는 누나죠. 장군이 누나."
도훈이 살짝 놀리는 투로 말하자 장군도 살짝 골이 났는지 대답 없이 팔짱을 끼고 창밖으로 바라보았다. 마침 표지판에<경기도 오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산이면 얼마나 온 거에요?"
"한참 남았어요. 그리고 누나 말 편하게 하세요."
"저는 이게 편해요."
"누나가 그럼 저도 계속 존댓말로 해야 하잖아요."
"도훈씨는 그럼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놓는 도훈을 보며 장군도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상한 사람이야. 가진 능력도 살짝 변태 같고. 괜히 따라 온다 했나 모르겠네.’
"휴게실은 안 가고 싶어?"
"괘, 괜찮아요 아직."
"그럼 안 멈추고 계속 간다."
그때 운전하던 도훈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남자 혼자 사는 데다 아침 일찍 채비를 하느라 끼니를 걸렀기 때문이었다.
"배고프세요?"
"살짝?"
"김밥 드실래요?"
"왠 김밥?"
"혹시 몰라서 제가 좀 싸 왔어요."
장군이 아까 백 팩에서 꺼낸 플라스틱 통을 열었다.
그러자 기름을 발랐는지 유난히 번들거리는 김밥향이 솔솔 올라왔다.
"드셔보실래요?"
"보다시피 운전 중이라. 혹시 입에 넣어 줄 수 있어?"
도훈이 염치없이 입을 아- 벌렸다.
장군은 어이없어하면서도 또 아까처럼 운전대를 놓을까 두려워 손으로 직접 김밥을 들어 도훈이 입속에 넣어주었다.
"맛있을지 모르겠네요. 오랜만에 싸본거라."
"음, 좋은데? 하나만 더."
"네."
도훈은 손으로 건네준 김밥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어찌 보면 뻔뻔하다고 할 수도 있는 도훈의 넉살에 장군도 슬슬 적응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이런 사람인가 보구나. 근데 얼굴이 잘생기긴 했네.’
김밥을 입에 넣어주며 유심히 도훈의 옆모습을 보던 장군은 문득 도훈이 무척 미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직업적으로 관상을 읽는 습관이 있어 사람 얼굴을 곧이곧대로 안 보고 늘 해석하려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제서야 도훈의 얼굴을 이성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코가 무척 잘생겼구나. 이런 사람이 어쩌다 아깝게 목숨을 던지려고 했을까.’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왜 그렇게 뚫어지게 봐?"
장군의 시선을 의식한 도훈이 넌지시 찔렀다.
장군은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김밥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머나!"
"앗, 김밥이."
떨어진 김밥은 공교롭게도 도훈의 허벅지에 튕기더니 가랑이 사이로 쏙 들어갔다. 도훈이 난처해 하며 말했다.
"아니 그걸 흘리면 어떡해."
"죄,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손이 미끄러져서."
"아 놔. 안으로 굴러들어 가버렸네. 엉덩이에 눌리면 바지 버릴 것 같은데."
"그, 근처 휴게소라도."
"없어. 아까 지나친 게 마지막이야. 앞으로 30분은 더 가야 해."
"아···. 어, 어떡하죠 그럼?"
"운전대를 놓을 수도 없고···. 난감하네. 좀 빼줄래?"
"제가요?"
"그럼 내가 할까?"
"아, 아니요."
괜히 위험해질까 우려한 장군이 스스로 나섰다. 그러나 하필 김밥이 굴러 떨어진 위치가 도훈의 가랑이 사이 깊숙한 곳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도훈이 재촉했다.
"뭐해? 밥알 터져서 바지에 달라붙겠어. 아, 찝찝하네."
"잠시만요."
장군은 하는 수 없이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안전벨트가 걸리면서 팔을 쭉 뻗기가 힘들었다.
"아잇, 벨트가."
그녀는 보조석 벨트를 풀더니 도훈의 허벅지 사이를 더듬었다. 허리를 앞으로 숙인 자세가 되자 입고 있던 반팔 티가 아래로 늘어지며 가슴골이 훤히 비췄다.
‘오, 갈매기 날개 보소.’
[웬 갈매깁니까?]
‘아니 브래지어 라인 말이야. 가슴골이 옹골차게 깊은 게 꼭 갈매기가 거꾸로 나는 것 같지 않아?’
[역시 주인님은 구제불능이군요. 그 와중에 그런것만 보고 계시니. 운전에 집중하셔야죠.]
‘오전이라 차도 없는데 뭘. 그리고 일부러 바깥차선 타면서 느긋하게 가는 중이야. 최대한 천천히.’
[천천히요?]
‘그래야 당일 치기로 못 돌아오고 산속에서 하룻밤 묶고 갈 거 아니야. 그때를 노려야지.’
[주인님은 역시 철저하시군요. 근데 산속에 머무를 곳이 있을까요?]
‘내 기억이 맞는다면 지리산 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산장들이 몇 개 있을 거야. 보통 일출 보러 가는 사람들이 중간쯤 잤다가 새벽에 오르기도 하거든.’
[오호.]
"이쯤인가요?"
얼굴이 달아오른 장군이 민망하게 도훈의 허벅지 사이를 더듬으며 물었다. 처녀인 그녀로선 남자의 양물 근처에 손을 밀어 넣는 것도 무척이나 용기를 낸 행동이었다.
도훈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안 쪽."
"여기에요?"
"완전히 깊이 들어가 버렸다니까? 됐어, 그냥 내가 할게."
"아, 아니에요. 운전에 집중하세요. 저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장군은 점점 귀밑까지 빨개졌다.
그러나 자기 실수로 떨어뜨린 것이니 결자해지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허벅지 깊숙한 곳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뭉클-
그때 장군의 손에 뭔가 뭉클한게 만져졌다.
‘뭐, 뭐지 이건?’
숫처녀인 장군으로선 난생 처음겪는 촉감이었다.
< 868. 처녀 보살-10-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