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7. 처녀 보살-9- >
***
"그럼 다음에 꼭 연락해!"
"네, 누나도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모텔은 나선 시각은 밤 12시가 다 돼서였다.
저녁을 먹고 곧장 들어왔으니 모텔에서만 장장 6시간의 사투(?)를 벌인 셈이었다.
먼저 출발하는 미나를 배웅해주고 모텔 주창에 홀로 남아 담배를 꼬나물었다.
"와, 진짜 다리 후덜덜하네."
간만에 만난 미나는 여전히 강적이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싸이어인처럼 2차전, 3차전이 거듭될수록 나를 아죽 반쯤 죽여 놓았다. 한판에 최소 한 시간씩 거의 3시간 이상 풀발기 상태로 있었을 것이다.
"이 정도 눌러 줬으니 여행 가기 전까진 좀 잠잠하겠지."
[진짜 해외에 가시려고요?]
‘못 갈건 뭐야. 나도 어차피 여름 휴가는 한 번 다녀와야지. 그리고 싸이판이면 유명한 관광지잖아.’
[그렇죠?]
‘외국인들도 제법 올 거고.’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 덴 이유가 있겠죠?]
‘내가 가진 비밀의 문고리 아이템 말이야.’
[네.]
‘어디든 직접 다녀온 곳만 쓸 수 있다며?’
[아! 그런 차후에 다시 싸이판을?]
‘그렇지. 아직 해결 못 한 업적 중에 흑마 업적도 있잖아. 그밖에 외국인하고 같이 해야 하는 업적들.’
[네.]
‘그쪽으로 길을 터놓으면 다음에도 뭔가 수가 생기지 않겠어?’
[그렇다면 여행 동행은 차후 업적을 대비한 설계였군요! 역시 주인님은 멀리 내다보시는 분입니다. 감탄했습니다!]
‘기왕이면 꿩 먹고 알 먹고라는 거지. 얼마나 좋아? 심심하면 미국령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뚫리는 셈인데.’
[분명 쓸모가 있을 겁니다.]
‘어우, 그나저나 미나도 장난 없구나. 진짜 오늘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다.’
[왜 근데 스킬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스킬?’
[마지막에 말입니다. 아직 한 발 남았다는 아끼셨잖습니까. 그 때문에 무리하게 정력을 고갈하신 것도 있구요.]
‘쿨타임이 길잖아. 앞으로 어떻게 될 줄 알고 스킬을 남용하겠어.’
[처녀 보살을 염두해 두신 거군요.]
‘그렇다고 봐야지. 그나저나 집에 가자마자 뻗겠네. 아침 일찍부터 지리산 출발해야 하는데.’
담배를 비벼 끈 나는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돌아가는 내내 미나가 나에게 한 얘기가 마음에 걸렸다.
-그럼 만약에 누군가가 먹고 살게 해주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있어?
사실 이도훈의 몸을 물려받고 두 번째 기회를 잡았을 땐 아무 생각 없었다. 그저 전생에 못 누렸던 것들, 그리고 지금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원없이 누려보고 싶었다. 특히나 예쁜 여자들과의 섹스는 평생 한으로 남았던 일이었기 때문에 주야장천, 기회가 닿
으면, 닥치는 데로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짐승처럼 살아온 지 6개월여.
대학 1학기 내내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다 보니 이제 한을 풀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자 문득 생각이 들었다. 원할 만큼 충분히 섹스를 즐기고, 나중엔 벗은 여자를 봐도 좆도 미동도 없는 지경에 이르면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선생? 선생은 솔직히 내 소원이 아니다.
죽은 이도훈의 마지막 소원이었고, 그것을 대신 이루는 조건으로 그의 몸을 빌렸다. 한마디로 이건 이 몸에 남겨진 부채인 셈이다.
그렇다면 선생이 되고 나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
설마 평생 연금 타 먹고 죽을 때까지 선생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힘을 숨긴 선생이라니···.
뭔가 이 엄청난 능력에 걸맞지(?) 않은 느낌이다.
지금의 능력이면 더 위대한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가수가 될 수도 있고, 프로 운동선수로 성공할 정도의 역량도 있으며, 그도 아니면 하다못해 인터넷에 소설을 올리는 웹소설가가 되더라도 성공할 것이다.
좀 더 불법적인 일로 빠진다면 호빠 선수로 대성해 밤의 황제로 불리거나, 예전에 잠깐 만났던 조폭을 따라가 조직세계에 발을 들일 수도 있다. 심지어 나는 이미 데뷔까지 마친 배우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선 불법이지만 일본으로 넘어가 레전드 오브 레전드로
불리는 ‘시마 켄’을 뛰어넘는 포르노 스타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을 소망해도 어떤 것이든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서, 고작 선생이라니.
이건 선생이라는 직업을 폄훼하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선생이 되는 게 내 꿈도 아니지 않는가? 갑자기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두 번째 삶의 기회를 얻었지만, 발목에 걸린 족쇄가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느낌이었다. 미나가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아무 생각이 없었을 텐데, 그녀가 나에게 뭔가 화두를 던져 준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응? 아니야. 아무것도.’
[가끔 주인님을 보면 멍하니 혼자 생각하실 때가 있더군요. 저와 소통을 하지 않는 이상 제가 강제로 들여다볼 순 없지만, 뭔가 저에게 숨기시는 게 많은 것 같아서 섭섭합니다.]
‘인공지능도 섭섭을 알아?’
[고도로 발달된 인공지능은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학습할 수 있죠.]
‘그쯤되면 기계와 인간의 구분이 불명확할 정도 아니야?’
[···제가 정말로 프로그램이라고만 생각되시나요?]
로시가 뜬금없는 소릴했다.
가끔 보면 얼토당토 않는 얘기를 할 때가 있다.
‘뭔 소리야 갑자기?’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냥 아까 미나가 어깨 주물러 주면서 한 얘기가 생각나서.’
[무슨 얘기요?]
‘선생 말고 다른 걸 할 수 있다면 해보고 싶은 게 있냐고.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참내, 내가 여자한테 빌붙어 사는 남자처럼 보였나?’
[그런 의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주인님이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어떻게든 뒷바라지게 해주겠다는 의미같던데요. 거기에 기분이 상하셨나요?]
‘아니. 뭐 상한 것까진 아닌데. 솔직히 말하면 나도 돈 많잖아.’
[대학생치곤 어마어마하죠.]
‘언제까지 이렇게 힘을 숨기고 살아야 하나 싶어서.’
[늘 조심하셔야 합니다. 요새 들어 경계가 풀어지신 것 같은데 플레이어를 노리는 PK단의 존재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알지. 경보장치도 늘 챙겨 다니는데. 그나저나 로시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넵, 말씀하십시오.]
‘내가 선생이 안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네? 그게 무슨···.]
‘아니 막말로 죽은 사람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 근데 만약 임용에 실패하거나 불미스러운 일로 교사가 짤렸다고 쳐보자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고.’
[흐음. 원래의 제약이 무엇인지는 기억 나시죠?]
‘응. 죽은 이도훈의 마지막 소원이었던 교사가 되는 것. 근데 이게 너무 막연하지 않아?’
[어떤 점에서요?]
‘임용에 떨어지면 재수를 해야 할 텐데 그건 소원이 실패한 건지 아니면, 유예된 건지. 그리고 국공립이 아닌 사립학교의 교원도 선생은 선생인데 그래도 되는지. 마지막으로 선생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면 소원을 이뤘다고 봐야하는지 포기했다고 봐야 하는
지 등등 말이지.’
[복잡한 계산을 하고 계셨군요. 일단 그 부분부터 명확히 하겠습니다. 죽은 원주인분의 소원은 시험을 합격하여 국공립학교에 정식으로 임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사립학교는 우선 배제해야죠.]
‘오케이. 그럼 시험에 탈락하는 건?’
[죽은 원주인분도 경쟁률이 높은 시험을 단번에 붙을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최소 재수, 삼수가 당연하니까요. 그러니 어느정도는 유예가 될 겁니다.]
‘어느정도는?’
[재수를 핑계로 완전히 다른 일로 빠지면 계약 파기가 되겠죠?]
‘그것도 그렇다 쳐. 마지막 질문은?’
[그 부분은 좀 애매합니다.]
‘그치? 설마 선생 됐는데 다음 미션은 보직교사 되기라던가, 그 다음에 교감이나 장학사 승진, 마지막 미션으로 교장달기 이런 거 나오는건 아니지?’
[그러니까요. 좀 더 유연한 해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만약 이 부분이 궁금하시다면, 천상계와 교신하여 정확한 답변을 알아봐 드릴 순 있습니다.]
‘엇? 천상계와 교신도 가능했던 거야? 저 하늘나라랑?’
[물리적인 측면에서 지구 대기권과 천상계는 아무 관련 없습니다. 애초에 천상계란 물질적인 3차원의 공간을 뛰어넘는 개념이니까요.]
‘뭔 소린 줄 모르겠군.’
[아무튼 교신은 가능합니다. 아마도 주인님을 관리하는 분에게 답변을 드릴 수 있겠죠.]
‘나를 관리하다니? 설마 나 감시받고 있는 거였어?’
충격적이었다.
환생 이후에는 로시를 제외하고선 신과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관리라니?
[감시의 개념은 아닙니다. 다만 주인님이 플레이어로서의 규약을 위반하거나 환생 때의 약속을 어길 시 그것을 심판하는 관리자는 있죠.]
‘그게 그 뜻이잖아? 설마 갓?
찌릿-!
[신성 모독입니다. 신님을 부를 땐 꼭 존칭을 붙이기 바랍니다.]
‘아읏. 따가워! 하마터면 사고 날 뻔했잖아. 운전 중에 손목에 전기 충격을 가하면 어쩌자는 건데?’
[그러니 늘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참나. 그러니까 대체 누구시냐고.’
[밝힐 수 없습니다.]
‘비밀도 많아 진짜. 근데 환생의 약속을 어긴다는 건 뭔 소린데? 교사를 포기하는 뭐 그런 거 말이야?’
[주의사항을 벌써 까먹으셨습니까?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죠. 첫째 본인이 환생자라는 걸 누구에게도 누설해선 안된다.]
‘그건 잘 지키고 있어.’
[둘째 과거의 인연과 다시 얽혀선 안 된다. 전생에 주인님의 친구나 가족들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근데 만약에 우연히라도 만나면?’
[우연히요?]
‘그래 길 가다 옛날 이정우 시절의 직장 동료나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는 거잖아. 혹은 그 재수 없는 전 마누라라든지. 그것도 약속을 어기게 되는 거야?’
[의도성이 없는 행위에 대해선 심판받지 않을 겁니다. 또한 주인님의 외모가 젊은 대학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어차피 상대도 누군지 짐작 못 할 테구요.]
‘아무튼 우연히는 상관없다는 거네.’
[그리고 마지막이 죽은 원주인의 마지막 소원이었던 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아까 질문하신 대로 평생 교사직을 유지해야 하는 지에 대해선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니 원하시면 질의를 남겨놓겠습니다.]
‘질의를 남기다니? 다이렉트로 질문하고 답하는 건 안 되나?’
[한 명의 담당자에게 플레이어가 몇 명이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빠르게 처리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또 만에 하나라도 해석과 관련하여 이견이 충돌할 경우 천상계에서도 명확한 해석을 위한 논의가 벌어질 테고요.]
‘일처리 한 번 복잡하네.’
[어쨌든 절차는 그렇습니다.]
‘그럼 일단 문의만 남겨 둬. 교사가 되는 데까지 인지, 교사를 평생 하라는 말인지 모르겠다면서.’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인님 뭔가 딴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죠?]
‘무슨 딴생각?’
[다른 직업을 갖고 싶다거나, 학교를 그만두겠다거나 하는.]
‘아니야. 대학은 일단 나와야지. 그리고 아직까진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교사를 유지하는 것이 차후의 미션과 업적을 해결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
[왜 그렇죠?]
‘생각해봐. 교사만큼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공무원 집단이 어딨다고? 그런 내가 난봉꾼처럼 여자들 따먹고 다니다 학부모나 학생들에게 걸리기라도 해봐. 얼마나 피곤하겠어?’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하지만 주인님의 성장 속도라면 대학교 졸업할 때 쯤이면 랭커를 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빠른 거야? 난 아직도 한참 남은 것 같은데? 이제 겨우 중수 1레벨이잖아.’
[빠릅니다. 이례적인 속도라도 제가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요.]
‘난 그게 실감이 안나.’
[이렇게 비유하면 이해가 빠르실 것 같군요.]
‘어떻게?’
[주인님이 만약 전사라고 가정을 해보죠. 물론 지구 시스템에는 현재는 사라진 클래스지만요.]
‘응.’
[전사들의 미션과 업적은 이런 식입니다. 고블린 10마리를 죽여라, 오크 대장과 1:1 대결에서 승리하라. 드래곤 레어를 침투하라.]
‘무슨 판타지 게임이냐?’
[모르셨습니까? 그 게임을 개발한 사람이 천상계를 통해 타차원계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아, 맞다. 그렇지.’
[근데 전사 클래스는 매일 싸우는 게 불가능하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니 준비도 많이 필요하고, 혹시나 부상을 입게 되면 회복기간만 몇 달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파티에 힐러가 있지 않는 이상요.]
‘그렇겠지?’
[게다가 미션과 업적의 물리적인 이동 거리도 상당합니다. 유니크한 몬스터를 해치워야 하는 업적이라면 대륙을 건너야 하기도 하고요. 꽁꽁 숨겨진 아티펙트를 찾으려면 몇 년을 해맬 수도 있죠.]
‘아티펙트가 뭔데?’
[Made in Heaven이 아닌 인간들이 만든 일종의 아이템입니다. 인첸터 계열의 대장장이들이 제작하는.]
‘아아, 그니까 사제 아이템이구나.’
[아티펙트라고 합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레벨업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정상입니다. 전사를 예로 들었지만 다른 클래스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주인님의 클래스가 뭡니까?]
‘섹서?’
[그렇죠. 그게 포인트입니다. 전사가 전투를 통해 레벨업을 한다면 주인님은 섹스를 통해 하잖습니까?]
‘그렇지. 아아아! 그렇구나. 난 그럼 거의 매일같이 전투를 하고 있던 셈이구나!’
[그렇죠. 그것도 하루에도 몇 명씩. 한 번에 여러 명을 상대하기도 했죠. 그러니 다른 클래스에 비해 폭랩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게 주인님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성장한 비결이고요.]
역시.
JYP가 옳았다.
섹스는 게임이다.
그것도 레벨업이 빠른 게임.
갑자기 이런 직업을 고른 내가 자랑스러워 졌다.
The Sexer, 이도훈.
나는 세상에 몇 없는 대물 플레이어다.
< 867. 처녀 보살-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