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4. 처녀 보살-6- >
***
간만에 미나를 만나는 데 대충 가기 미안했다. 약속까지 시간이 남아 미용실에서 머리를 새로 하기로 했다. 괜히 여자 디자이너와 얽힐까 남자 디자이너를 골랐는데 하필 그게 패착이었다.
"어휴, 어쩜 이렇게 미남이실까? 정말 잘생기셨군요."
"······."
립서비스로 의례 하는 칭찬이 아니었다. 미용사들이 손님들과 수다 떨기 좋아하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눈빛이 끈적거리는 것이 예감이 좋지 않았다.
괜히 머리를 만지는 척 은근슬쩍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데 소름이 돋을 지경. 불편한 마음에 최대한 대꾸 안 하고 자는 척을 했지만, 어찌나 귀찮게 굴던지 머리를 다듬는 내내 좀처럼 방심할 수가 없었다.
‘아씨, 잘못 걸렸네, 뭐야? 귀걸이까지 했잖아?’
[왜요? 숨겨왔던 나의 업적을 하기 좋은 상대 아닙니까?]
‘죽을래? 내가 그건 안 한댔지?’
[편견을 가지시면 안 됩니다. 가만 보면 주인님은 쉬운 업적만 골라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랭커가 되는데 108개 업적을 다할 필욘 없잖아? 안 해도 되는 건 절대 안 할 거야. 그리고 쉬운 것만 골라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걸 우선하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참고로 말씀드리면 ‘숨겨왔던 나의···’ 업적 달성 보상은 모든 성병으로부터 면역입니다. 심지어 불치병이라 불리는 에이즈까지 포함이고요.]
‘됐어. 차라리 에이즈 걸려서 뒈지면 뒈졌지.’
[아, 아니 주인님 무슨 말씀을 또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싫어하는 티를 내자 로시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정신을 못 차리고 직접 머리를 샴푸를 준다면서 끝까지 수작을 걸어왔다. 시다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손수 하는 걸 보면 불순한 의도가 잔뜩 묻어 나왔다.
"은근 근육질이시네요. 혹시 언제 한번 시간 되시면···."
"···너 계속 까불면 죽인다. 진짜로 죽일 거다."
목소리를 깔고 눈을 부라리자 그제야 디자이너의 수작질이 멈추었다. 성질 같아선 확 그냥 디자이너고 뭐고 업어치기로 맨바닥에 메다꽂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안녕히 가세요."
협박(?)에 통했는지 남자 디자이너는 두 번 다시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법 솜씨가 좋은 편이라 머리가 한결 깔끔해졌다는 사실이었다.
미용실을 나오자마자 담배를 한 대 물었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라 기분이 꿀꿀 했다.
"어으, 내가 진짜 별꼴을 다 당해보네. 여자 피하려고 했더니 남자가 들러붙질 않나."
[잘생긴 값을 치르는 거죠. 세금이라고 생각하십쇼.]
‘무슨 세금?’
[홈런왕에게 삼진이 세금이듯 말입니다. 잘생기면 피곤한 법이니까요.]
‘그래도 남자는 절대 사양이거든?’
[하지만 미션을 위해선 좀 더 포용적인 태도를 갖는 게 좋을 겁니다. 주인님은 너무 호불호가 분명한 게 문제랄까요.]
‘됐어, 인마. 때려 죽어도 싫으니까 다신 권유 마.’
[넵, 그렇다면 뭐.]
머리를 하고 나오니 약속 시간이 되었다. 미나가 알려준 고깃집에 도착하자 주차장에서 미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왔니?"
"어? 혹시 차 바꿨어요?"
미나는 외제 차 앞에 서 있었다. 3시리즈라곤 해도 굉장히 비싼 차였다.
"에이, 할부야 할부."
"누나 진짜 돈 많이 벌었나 보다. 차도 좋은 거 타시고."
"그냥 필요해서 산 거지. 암튼, 들어가자."
"네."
왠지 고의로 부를 과시하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잘나가는 미나를 보니 보기 좋았다.
학기 초만 해도 헬스장에서 PT강사를 하던 그녀는, 이제 어엿한 필라테스 학원의 원장이 되었다. 나이를 감안하면 정말로 성공한 셈이다.
"먹고 싶은 거 다 골라."
"여기 너무 비싼 것 같은데요."
메뉴판을 보니 가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식육 식당의 두 배는 넘어 보였다. 인테리어만 봐도 단순 식사를 하는 곳이라기 보다 중요한 만남이나 접대를 위한 장소 같았다.
"이러면 죄송해서···."
"괜찮다니까 그래. 오랜만에 봐서 이런 얘기하는 게 민망하지만, 나 요새 잘 나가."
"학원 잘 되시나 봐요?"
"응. 입소문이 나더니 원생이 부쩍 늘었어. 혼자 하기 벅차서 강사도 두 명이나 더 고용했다니까?"
"와, 이제 어디 가서 사장님 소리 듣겠다."
"호호, 그러니까 많이 먹어. 오랜만에 만나니까 맛있는 거 먹이고 싶어서 그래."
"그럼 진짜로 먹고 싶은 거 다 고릅니다?"
"얼마든지. 아, 대신 밥값은 할 거지?"
"밥값요?"
미나는 대답 없이 윙크만 했다.
못 보던 사이 굉장히 과감해진 느낌이다.
화장도 더 짙어지고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 이른 나이에 성공하면 성격이 달라진다던데 미나도 조금은 변했을까?
주문한 고기가 나오자 알바생이 달라붙어 고기를 구웠다.
미나는 집게를 뺏어 들고는 알바생에게 말했다.
"저희가 할게요."
"앗, 그래도 제 일인데."
"괜찮아요. 가서 좀 쉬세요."
"감사합니다."
알바생이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물러났다.
알바에게 친절한 걸 보니 사람이 바뀌진 않은 것 같다.
원래 성공한 사람에게 가장 보기 싫은 모습이 자기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 막대하는 건데 여전히 미나는 예전처럼 친절하고 사려 깊었다.
‘괜한 우려였군. 미나는 여전히 착해.’
[좋은 여자죠. 늘 주인님만 바라보는 것도 그렇고요.]
‘뭐 그런 여자가 한 둘인가?’
"그래. 시험은 잘 봤어?"
"시험요?"
"공부 열심히 한다고 나 안 만난 준 거 아니었어? 그러고 놀기만 했음 누나 엄청 섭섭한데."
"당연히 잘 봤죠. 전장 받을 거 같아요."
"전장?"
"전액 장학금요. 과 수석에게만 주는."
"와! 진짜로? 수석이야 그럼?"
"아직 성적은 안 나왔어요. 다음 주에나 통보될 거에요."
"에이, 그럼 아직 모르는 거잖아?"
"느낌이란 게 있잖아요. 공부 엄청 열심히 했거든요."
"다행이다. 내가 참은 보람이 있네. 자, 아~ 해. 기특하니까 내가 쌈 싸줄게."
미나는 상추 위에 소고기와 파절이, 마늘에 된장을 바르더니 나에게 건넸다. 생마늘이 너무 크다고 투정하자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왜? 마늘이 남자한테 그렇게 좋다는데."
‘윽. 왜 저래 진짜? 사람이 좀 뻔뻔해진 느낌인데?’
[그만큼 주인님이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하긴. 정말 지금껏 나만 기다리며 독수공방(?) 했다면, 욕구불만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받아줘야지.
"에이, 뭘 그런 걱정을. 제가 마늘 먹어야 힘나는 사람 같아서요?"
"호호. 몸에 좋으니까 먹으라는 거지. 아~."
미나가 싸준 쌈을 우걱우걱 씹었다.
특A++ 이라 그런지 육즙이 살아 있었다. 적절히 마블링이 조화된 꽃등심이 입에서 살살 녹았다.
"너무 맛있다. 누나도 좀 드세요."
"난 네가 먹는 모습만 봐도 좋은데?"
미나는 나를 본 순간부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나 좋을까?
왠지 그녀가 지조를 지키는 사이 마음껏 여자들을 만나고 다닌 게 살짝 미안해졌다.
"참, 방학 때는 뭐 할 거야? 또 공부하는 건 아니지?"
"공부는 학기 중에만 해요. 방학 땐 쉬어야죠."
"그래? 그럼 계획은 있고?"
"이제 세워보려고요."
"휴가는?"
"휴가요?"
"응. 여름 휴가 안 가? 그러려고 몸 만드는 줄 알았는데?"
미나가 그말을 하며 은근슬쩍 내 이두박근을 꾹 눌렀다.
"어, 아직도 탄탄하네."
"그래도 좀 빠졌어요. 운동을 너무 쉬어서. 그리고 헬스는 휴가 때문이 아니고 여름 방학 캠프 대비로 하는 거예요."
"캠프 대비라니?"
"저희 과가 체육전공이다 보니 방학 때마다 스포츠 캠프를 열거든요. 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수영."
"수영? 아, 그럼 수영장 가는 거야?"
"해수욕장요. 바다 수영 배운다고."
"재밌겠다."
"제가 강사로 차출됐거든요."
"도훈이 너 수영도 잘하니? 어쩜 못하는 게 없어."
"그냥 뭐···. 할 사람이 없어서요. 이제 2학년이니 해야 하기도 하고."
"그랬구나. 그건 언제야?"
"이 주 남았나? 그쯤 되는 거 같아요."
"그래? 그 뒤에는 뭐해? 너네 방학 2달이라며. 너네 학교 다니는 우리 원생이 그러던데?"
아무래도 미나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없어요. 누나는요?"
"응. 나도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방학 특강 때문에 바쁠 것 같아. 원래 이런 쪽은 7월 말까지 성수기거든. 다들 다이어트 한다고."
"그렇구나."
"그래서 휴가는 한 달 뒤에나 가려고."
"어디로 가실건데요?"
"글쎄? 국내는 시시하니 외국이나 한 번?"
"외국요?"
"응, 싸이판 생각 중이야."
"오, 좋겠다. 누구랑 가요?"
"아직 안 정했어."
"네?"
"친구들은 몇 명 물어봤는데 다들 휴가가 안 맞더라고. 직장인들이 많은데 다들 직급이 낮아서 그런지 날짜는 고르지도 못하더라."
"아···."
"정 없으면 가서 확 꼬실까?"
"오. 멋있는데요. 현지 헌팅이라!"
"···그게 다야?"
미나가 짐짓 삐친 표정을 지었다.
이쯤에서 답정너를 해줘야겠지?
"저도 가고는 싶은데, 가려면 지금부터 알바해도 힘들 것 같아요. 비행기 값이 워낙···."
"정말? 돈은 걱정 마 내가 대줄게."
"누나가 왜요."
"왜? 여자한테 얻어 먹으려니 자존심 상해?"
"그건 아닌데···. 한 두푼도 아니고 에이, 어떻게 그래요."
"그래도 돼. 실은 너한테 같이 휴가 가자는 말 하려고 보자고 한 거야. 여자 혼자 외국 나가긴 무섭잖아."
"그럼 이게 그 밥값이에요? 여행 동행?"
미나가 풉- 하고 웃었다.
"아닌데? 밥값은 나중에 다른 걸로 받을 건데?"
"암튼, 가요 같이. 저도 누나랑 같이 가면 좋죠."
"치. 마지못해 가주는 것 같다?"
"아니에요. 솔직히 누나가 돈 잘 번다고 제가 덕 보는 건 너무 염치없잖아요. 제가 누나한테 해준 게 뭐 있다고."
"있어."
"있어요?"
"응. ···그런 게 있어."
미나의 눈빛이 조금은 촉촉해졌다.
‘뭐지? 이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로시 마음의 소리.’
[넵.]
{내가 열심히 돈 버는 건 다 너를 위해서라고, 도훈아. 너는 나중에 누나한테 몸만 오면 돼. 알았지?}
"헉!"
"왜, 왜 그래?"
"아, 아니 혀 깨물었어요."
"저런 조심하지 않고."
"고기가 너무 부드러워서 혀까지 씹어 버렸네요."
‘이런, 미나는 설마 나를 결혼 상대로 생각하는 거야?’
[그런 것 같은데요? 저번부터 그런 기미가 있긴 했지만.]
‘아, 이건 살짝 부담스러운데.’
[왜요? 미나양 좋지 않습니까? 얼굴 예쁘지, 몸매 좋지. 심지어 돈도 잘 벌지. 심지어 성격도 여성스럽고 다정다감한데.]
‘아니 미나가 싫다는 건 아닌데···.’
싫을 리가 없다.
난 평생 저런 여자를 꿈꿔 왔다.
남자의 로망은 능력 있는 여자의 셔터맨!
아, 이건 아닌가?
아무튼 미나가 좋은 건 좋은 거지만, 나를 결혼 상대로 점찍은 것은 확실히 부담이다. 만에 하나 그녀를 실망시키면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신기하군요. 평소 주인님 성격이면 좋다고 이용해먹을 텐데요.]
‘야. 내가 좀 내로남불이긴 해도 양심은 있는 남자야. 그리고 한 번 스쳐 가는 여자랑, 두고두고 볼 여자랑 구분하기도 하고.’
[미나양은 후자입니까?]
‘그렇지. 미나는···. 좋은 사람이니까.’
[다른 여자분이 걸려서 그렇군요.]
‘솔직히 맞아. 양심에 털 난 채 살기로 했지만, 저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주는 여자를 배신하는 건 도저히 못 하겠어.’
[너무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쨌든 미나양은 주인님이 졸업할 때까지 쭉 기다릴 테니까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그 사이 미나양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죠. 혹은 주인님도.]
‘그런가?’
[주인님답지 않습니다. 이런 걸로 쩔쩔매는 모습은.]
하긴. 내가 너무 앞서갔다.
미나가 지금 나를 결혼 적임자로 생각한다고 해서 몇 년 뒤에도 그럴거라곤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 그냥 지금을 즐기자. 난 이제 대학교 2학년이니까.
"아무튼, 제 여행경비는 제가 마련해 볼게요."
"괜찮대도 그래. 나 그 정도 능력 돼."
"아니에요. 이건 남자로서 자존심이 이런 것 때문이 아니라, 염치의 문제에요."
"염치라니?"
"누나한테 밥을 얻어먹는 것 정도는 괜찮아요. 하지만 해외로 나가는 데 여행경비를 혼자 다 내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누나가 돈을 대줘서 제가 따라가는 게 아니잖아요."
"음···."
"저도 누나랑 가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적어도 제 몫은 제가 낼 수 있게 해주세요."
{아···. 도훈이는 역시 어른스럽구나. 그래. 내가 좀 경솔했던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 근데 진짜로 괜찮겠어? 알바할 시간도 없을 것 같은데?"
"안되면 막노동이라도 뛸게요. 요새 인부 구하기 힘들어서 돈 많이 준대요."
"아휴, 무슨 막노동이야."
"농담이고, 과외 구하려고요. 과외는 선불이니까 한 달 뒤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요?"
"알았어. 그건 네 뜻대로 해. 암튼 그럼 같이 가는 거다?"
"네."
미나는 나와 단둘이 해외로 나가는 게 기쁜지 무척 신나 보였다. 고기를 먹으며 한참 여행에 대해 떠들었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나자 계산을 마치고 나온 미나가 말했다.
"자, 그럼 배도 채웠으니 후식 먹으러 갈까?"
"커피는 제가 살게요."
"아니 커피 말고."
"그럼요?"
미나가 씽긋 윙크했다.
"커피도 먹고, 운동도 하고, 후식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음, 후식이 너무 거한 거 아닐까?
< 864. 처녀 보살-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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