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3. 처녀 보살-5- >
당연히 나는 아니다.
나는 결혼도 했던 유부남이니까.
가만, 그럼 난 지금 돌싱이라고 봐야하나? 이번 생은 결혼도 아직 안 했는데···.
아무튼.
본래 이 몸의 주인인 이도훈은 총각으로 비명횡사했다. 비록 날라리 선배에게 동정을 뺏기긴 했지만, 어쨌든 총각은 총각이다.
‘이도훈 있잖아.’
[주인님이요?]
‘아니 나 말고 진짜 이도훈. 걔 총각 귀신 됐지 않아?’
[그렇긴 하죠. 근데 이미 저승으로 끌려간 사람을 무슨 수로 데려오시려고요?]
‘혹시 한 번 가면 못 오는 거야?’
[저승문이 무슨 들락날락할 수 있는 회전문인 줄 아십니까?]
‘나는 갔다가 왔는데?’
[그래서 주인님이 특별하다는 겁니다. 본래 윤회를 하게 되면 레테의 강에 기억을 씻고, 전생을 완전히 잊게 되거든요.]
‘그럼 진짜 이도훈도 지금쯤 다시 태어났나?’
[그야 업보에 따라 다르지요. 지옥으로 떨어졌다면 형량만큼 죗값을 치르고 있을 것이고, 선행을 충분히 쌓았다면 천상계에서 제2의 삶을 살고 있을 테니까요. 윤회는 전생의 삶으로 판정이 쉽지 않을 때 주어지는 두 번째 기횝니다.]
‘그렇구나. 흠. 그럼 총각 귀신을 대체 어디서 구한담?’
[주인님이 귀안(鬼眼)을 갖게 되면 모를까, 찾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귀안이 뭔데?’
[말 그대로 귀신을 보는 눈입니다.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사람만이 귀신을 볼 수가 있지요.]
‘그렇구만. 혹시 아이템으로 볼 순 없나?’
[영계에 대한 부분은 차원을 넘나드는 문제기 때문에 마켓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닙니다. 설사 있어도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싸고요.]
‘얼만데 그래?’
[최소 2만 포인트부터 시작일 겁니다.]
‘2만이라고? 에이씨, 업적 하나 때문에 그간 쌓아둔 포인트를 탕진할 순 없지.’
[아니면 능력을 통해 얻어야 하는데, 관련 능력을 얻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대게는 퇴마 능력자들에게 개방되는 종류라서.]
‘퇴마? 실제 퇴마사가 있는 거였어? 뻥 아니고?’
[영혼의 존재를 이미 알고 계시지 않나요?]
‘아니, 알지. 알긴 아는데···. 진짜 퇴마사가 있는 줄은 몰랐네.’
[존재합니다. 극소수이긴 하지만요. 가끔 신의 섭리를 벗어난 존재들이 탄생하기도 하니까.]
‘예컨대 드라큘라 같은?’
[네. 벰파이어는 실존합니다. 전에도 한번 말씀 드린 것 같은데요?]
‘그럼 뭐 늑대인간이나 구미호도 있겠네?’
[없다고 믿으십니까?]
소름이다.
사실 섹서라는 클래스 특성상 영적인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무슨 귀신과 섹스를 할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플레이어가 있고 PK단이 설치는 세상에, 뱀파이어든 늑대인간이든 구미호든 없을 건 뭔가?
‘혹시 슈퍼맨같은 것도.’
[그건 지어낸 이야깁니다.]
‘에이, 난 또.’
[하지만 지구가 아닌 다른 시스템에선 그러한 능력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요.]
‘진짜로 가능?’
[그 이상도요, 얼마든지.]
역시 세상은 넓고, 우주는 더 넓다.
로시의 말에 따르면 지구라는 시스템은 신이 만든 셀 수 없이 많은 별 중 하나일 뿐이다. 즉, 지구상에서 불가능하다고 해서 우주적 차원에서 불가능한 일은 없다.
당장 나만 해도 평범한 인간을 월등히 뛰어넘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장군은 플레이어가 아님에도 신기한 영적인 능력자기도 하고.
한참 로시랑 얘기를 하고 있는데, 침묵이 길었는지 처녀 귀신이 다시 애원했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제발 자비를 베푸시길···."
"내가 들어주면?"
"저, 정말이십니까?"
"잠깐. 내가 들어주면 너는 나에게 뭘 해줄 수 있지?"
이것은 일종의 거래다.
장군이 아닌 처녀 귀신 이현경과 서로의 이해를 주고받는 것이다.
"사자님이 바라시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어떻게 도울 건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요."
"내가 원하는 건 처녀 보살이야."
"장군요?"
"그래. 솔직히 말하지."
물론 거짓말이다.
"난 네가 아닌 장군에게 특별한 볼일이 있어 온 거야."
"무슨···."
"처녀혈이 필요하거든."
"처, 처녀혈요?"
"아, 오해는 말고. 밝힐 수 없는 모종의 이유때문에 순수한 무녀의 처녀 혈을 구하는 중이니까. 장군이 딱 적임자랄까?"
"하, 하지만 처녀에게 처녀혈은···."
"무슨 일이든 돕겠다며?"
"그건 제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
"장군이 저에게 몸을 빌려주는 것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대신 말을 하거나 가볍게 움직일 순 있지만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할 경우 접신이 풀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네 힘으론 장군의 몸을 통제할 수 없다?"
"장군을 직접 설득하셔야 할 겁니다."
"그럼 협상은 결렬이네. 수고해."
어차피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니다.
나로선 굳이 귀찮을 일은 도맡을 필요가 없으니까.
"자, 잠시만요 사자님!"
"자꾸 사자라고 부르지 마. 그러니까 무슨 짐승 같잖아. 내가 밀림의 왕도 아니고."
"그럼 호칭을 뭐라고···. 혹시 선생님이라 부르면 될까요?"
"선생님? 오글거리긴 하지만 차라리 그게 더 낫네."
나중에 실제로 선생이 될 몸이기도 하고.
"선생님. 제가 비록 직접 몸을 통제할 순 없지만, 장군을 설득해 볼 순 있습니다."
"설득?"
"선생님. 장군은 특별한 아입니다. 평생을 박수 무당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초등학교 이후론 학교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남자와 개인적으로 접촉해 본 적도 없을뿐더러, 사교성이라곤 전혀 없는 정말로 순수한 처녀입니다. 그런 장군에게 처녀혈을 요구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군은 제 말을 잘 따릅니다. 아마도 저를 어미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밑에서만 커서 그런지 모성이 결핍되어 있거든요. 제가 잘 구슬리면 선생님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흠. 듣고 보니 썩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살아온 환경을 들어보니 공략에 상당히 애를 먹을 게 뻔한데, 옆에서 엄마처럼 받들고 살아온 처녀 귀신이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리산 기슭에서 유해를 수습하는 건 그렇다 쳐도, 총각 귀신을 구해 영혼결혼식까지 올리는 건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이걸 어쩐다?’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지키지 못할 약속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거부하기엔 귀신의 영향력이 너무 강력해. 자기 입으로 그랬잖아. 장군이 자신을 어미처럼 여긴다고. 괜히 부탁을 안 들어줬다가 훼방이라도 놓게 되면 오히려 내 공략이 더 힘들어진단 말이지. 아까 봤지? 정보창 스킬이나 마음의 소리도 제대로 안 통하는 거. 정신 조작 종류의 스킬이 귀신의 방해로 차단되버리면 자칫 미션 기간 내에 공략을 못 끝낼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그럼 어쩌시려고요? 볼 수도 없는 총각 귀신을 어디서 무슨 수로 구한단 말씀이십니까?]
‘그건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일단 받아들이자.’
[아니, 그렇게 대책 없이···.]
"좋아. 그 조건이면."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대신 너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약속해."
"감사합니다, 흑흑. 선생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저도 마침내 한을 풀고 원없이 저승으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흐느껴 우는 처녀 귀신을 보자 괜히 마음 한구석이 뭉클했다. 나 역시 억울함에 한때 구천을 떠돌았던 동질감 때문일까? 장장 10년을 넘게 귀신으로 살아가는 현경은 도무지 어느 정도 기분일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뭐, 한 번쯤을 선행을 베푸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
장군이 깨어난 건 현경이 빠져나간 지 10분쯤 지나서였다.
잠든 것처럼 쓰러진 장군을 쳐다보며 스스로 정신을 차리기 까지 곁을 지켜야 했다.
"으으···."
정신을 차린 장군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죄, 죄송한데 무, 물을 좀···."
"물?"
"온몸이 기력이 다 빠져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장군의 입술은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처음 봤을 때 분명 윤기가 좔좔 흘렀던 기억이 나는데, 빙의되는 동안 굉장히 무리한 모양이다.
냉장고를 뒤져 물을 꺼내 갖다 주자, 물을 꿀떡꿀떡 마신 장군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으으, 머리야. 감사합니다.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죠?"
"글쎄요. 대충 10분쯤? 계속 안 깨어나면 구급차라도 부르려고 했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건 신병과 비슷한 종류라 병원에 간다한들 고쳐질 것이 아닙니다."
"신병요?"
"무당들이 걸리는 병입니다. 완전한 접신을 하게 되면 생기를 소모하게 되므로 체력이 단숨에 고갈되어 버리고 맙니다."
"아아, 그래서···."
"한데 이상하군요. 굿을 할 때 말고는 이렇게 완전빙의된 것은 처음인데. 혹시 두분이서 무슨 얘길 나누셨나요?"
"전혀 기억 안 나세요?"
"네. 전혀요. 보통은 깨어나면 기억이 떠오르는 편인데 지금은 기절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처녀 귀신은 귀신대로 장군을 설득한다 했으니, 나도 내 나름 머리를 써야겠다.
"보살님이 모시는 귀신이 처녀 귀신이란 걸 알고 계셨습니까?"
"어느 정도는요. 하지만 되도록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습니다."
"대뜸 저에게 부탁을 하더군요. 원통해서 구천을 떠돌고 있는데,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요."
"도와요?"
"네. 유해를 수습해 달라고 합니다."
"유, 유해라면."
"잘 모르셨겠지만, 보살님께 붙은 처녀 귀신은 제대로 장례도 치르지 못했습니다. 산에서 실족을 하는 바람에 시체도 못 찾고 실종되었거든요. 아마 실종이 길어지자 사망으로 처리한 것 같은데, 부모님께선 빈 관에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아,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왜 저한텐 한 번도 그 얘기를 안 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를 보고는 대뜸 기다렸다는 듯 그 얘기를 하더군요."
"어쩌면 귀인을 기다렸던 걸까요?"
"아무튼, 저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사정을 듣고 보니 너무 딱해 도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곳이 어디라고 했죠?"
"지리산입니다. 종주 중에 사고를 당했다고."
"아···."
장군은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말했다.
"여기서 지리산까진 먼 길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저랑 같이 출발하셔요.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보살님이요?"
"네. 어째서 지금까지 저에게 얘기를 안 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알고서도 모른 척 할 순 없는 일입니다."
"음. 근데 예약된 손님이 있지 않던가요?"
"그건 어쩔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일찍 데리러 오겠습니다."
"네, 그럼."
***
장군과의 대면을 끝낸 도훈은 곧바로 등산 장비를 구매하러 갔다. 유해가 낭떠러지 밑에 떨어져 있으니 등산로가 아닌 험준한 산길을 타고 가야 할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가만. 근데 장군도 등산 장비는 따로 없을 것 아냐?’
장군의 한복차림을 떠올린 도훈은 기왕 사는 거 커플 세트처럼 두 세트를 구매했다. 등산복과 등산화 그리고 백팩과 아이젠을 비롯한 각종 산악 용품 일체였다.
생각보다 거금이 들었지만, 길도 없는 산행을 준비 없이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쇼핑을 마치고 다시 차에 오르는 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웬일로 전화를 다 하셨어요? 미나 누나?"
전화를 건 상대는 필라테스 학원 원장이 된 미나였다.
-보고 싶어서 연락했지. 섭섭하게 말한다 너?
"저도 보고 싶었죠. 갑자기 전화해서 놀라서 그랬죠."
-방학 했다면서 연락도 안해놓고?
도훈이 깜짝 놀랐다.
"저 방학 한 건 어떻게 아셨어요?"
-오늘 등록하러 온 여학생이 그러더라. 방학 동안 몸매 교정하려고 2달 끊는다면서. 근데 너네 학교지 뭐니?
"아아, 그렇구나. 네 저도 어제 방학했어요."
-근데 연락도 안 했다 이거야?
"하려고 했죠. 안 그래도 운동도 다시 시작했어요."
-진짜? 무슨 운동?
"그때 다니던 헬스장요."
-에이, 그냥 우리 학원 끊지. 공짜로 운동해도 되는데.
"필라테스도 좋은데 근력 운동이 힘들잖아요. 게다가 여자 원생이 너무 많아서 눈치 보여요."
-왜 눈치를 봐?
"누난 그럼 다른 여자가 저한테 작업 걸어도 괜찮겠어요?"
-음, 생각해보니 그건 좀 별로다. 그냥 헬스장 다녀.
"넵."
-암튼, 오늘 나 쉬는 날이라 고기나 사주려고 전화했어.
"고기요? 저 살 빼야 하는데···."
-고기 먹고 운동 빡세게 하면 되지.
미나가 은근슬쩍 유혹했다.
도훈은 내일 지리산 산행이 잡혀 난처해 하면서도 간만에 전화를 건 미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학기 중엔 되도록 공부에 전념하라며 연락을 자제한 그녀의 배려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참. 고기를 먹고 싶은 건지 나를 먹고 싶은 건지.’
[뻔하지 않습니까? 근데 미나 양도 되게 뻔뻔해 졌군요. 저렇게 노골적이라니.]
‘원래 여자들은 한해 한해 갈수록 더 야해지잖아. 미나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뭐.’
[어쩌시려고요?]
‘간만인데 꽃에 물이나 주러 가야지. 안 그래도 방학하면 한 바퀴 순회나 하려고 했는데 첫 빠따로 당첨이네.’
[거참 물 줄 꽃 많아서 좋겠습니다.]
"알았어요. 어디서 볼 건지 알려줘요."
-오랜만에 보니까 오늘은 내가 소고기 사줄게.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나 그 정도 능력은 되거든? 장소 문자로 남겨놓을 테니까 이따 봐.
< 863. 처녀 보살-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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