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2. 처녀 보살-4- >
나는 본래 괴력 난신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관심이 없던 사람이다.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영화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몇몇 특수 분장과 섬뜩한 음향효과로 포장한 돈벌이 수단정도로 치부해 왔다. 온갖 음모론이나 세계 8대 불가사의 같은, 혹은 영혼이나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도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
의 산물쯤으로 여겼다.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수학을 좋아해 이공계를 갔고, 외국물을 먹으며 해당 분야의 박사학위까지 받았던 몸이다. 과학적 실증주의에 입각하면 이 세상에 증명할 수 없는 건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러한 일을 겪지 못했고, 들어본 적도 없으며, 따라도 믿을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전형적인 불가지론자였다.
알지 못하니 믿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 이후 나는 혼령이 되어 90일간 구천을 떠돌았다. 후에 저승에 끌려갔으며, 나중에는 신과 직접 대면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제는 다른 사람 몸에 빙의하여 초능력을 가진 플레이어가 되어 두 번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나에게 귀신은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또한 이미 알고 있으니 별로 놀랍지도 않다.
"누구냐 넌?"
너무 심드렁하게 물었을까?
강신한 장군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당돌한 놈이로다! 어디서 감히 무엄하게!"
"무엄? 한낱 귀신 주제에 신을 빙자에 혹세무민하는 네년이 할 소리냐? 이게 확 죽을 라고."
더 강하게 받아치자 장군의 움찔 놀랐다.
"호, 혹시 퇴, 퇴마사!"
"쫄지 마. 너 안 잡아가니까."
영혼은 구천을 떠돌더라도, 결국엔 저승에 끌려가 심판을 받게 된다. 장군의 몸을 붙은 저 여인은 어찌하여 지금까지 지상에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허, 허면 대체 누구십니까?"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 돌아간다고 하던가? 귀신 앞에서 쫄지않는 나를 보자, 도리어 상대가 겁을 집어먹었다. 아마도 일전에 저승사자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었던 모양이다.
‘잡귀군.’
[네?]
‘별것도 아닌게 센척하다가 딱 걸린 거라고. 난 또 뭐라도 되는 줄 알았잖아?’
[주인님이 영계에 대해 그리 해박하신 줄은 몰랐군요.]
‘한 번 죽어 봤으니까. 영혼이 되어 전 마누라 근처를 배회하기도 했었고.’
[아하.]
‘한데 이상한 건 왜 지금까지 저승사자가 안 잡아간 거지? 나도 결국엔 잡혀갔는데 말이야.’
[이승에 한이 남아 원귀가 되면 오랫동안 끌려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뭐라?’
[주인님도 결국엔 원한이 해소되면서 스스로 출두하신 거잖습니까?]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나는 전 마누라가 기소되고 구속되는 것을 보고 저승으로 향했다. 더는 지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저 귀신은 아직도 원한이 남아 있단 소린가?’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겁먹은 귀신을 보자 기발한 궁리가 떠올랐다.
"내가 누구냐고? 그전에 하나만 묻지. 지금 장군은 온 정신인가?"
"네?"
"장군이 지금 상황을 인지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저와 의식을 공유하기에 깨어나면 꿈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면 장군의 의식을 완전히 거둬라. 그 뒤에 내 정체를 알려주지."
플레이어의 정체를 밝혀선 안 된다.
정체가 드러나면 세상에 혼란이 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신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 잠시 후 귀신이 장군의 몸을 완전히 접수했는지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
"완전히 빙의하였습니다. 이후의 일은 장군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좋아. 내가 누구냐 물었지? 나는 신의 사자다."
"사자면 자, 저승사자?"
귀신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오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신을 대신해 신의 뜻을 수행한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저승사자는 아니니 오해 말도록."
"저, 저를 잡아가려고 오신 것 아닙니까?"
"쫄지말라니까 그러네. 너 저승 한 번도 안 가봤지?"
장군이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커다랗게 뜬 게 겁에 질린 강아지를 보는 듯했다. 왠지 골려주고 싶은 귀신이다.
"바닥에선 유황불이 끓고 온갖 악귀가 날뛰는 곳 말이야."
더 겁을 주자 귀신이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완전 겁쟁이잖아?
"지, 진짜로 그런 곳인가요?"
"틀린 말은 아니다. 어디 보자, 너는 특히 저승의 명을 어겼기 때문에 100년간 유황불에 뒹굴어야겠구나."
"아아! 억울하옵니다!"
갑자기 귀신이 사극톤이 되어 울부짖었다.
한복까지 입혀 놓으니 저리도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억울하니까 원귀가 되었겠지. 그래, 무엇이 억울하더냐?"
"저, 저는···."
귀신이 말을 망설이며 말을 머뭇거렸다.
"말해보거라."
"저는 처녀 귀신입니다."
"처녀 귀신? 그래서 같은 처녀인 장군에게 들러붙은 것이냐?"
"아, 아닙니다. 장군은 타고나길 강신을 잘 받는 체질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비도 박수 무당이었고, 그 피를 이어받았으니까요."
"그러면 장군에게 들러붙은 이유가 무엇이냐? 이 처자는 너 때문에 나이가 차도록 남자도 못 만나고 이렇게 골방에 틀어 박힌 신세가 되지 않았느냐?"
"저는 장군을 일방적으로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신기를 주어 부를 쌓게 하였고, 그렇다고 가난한 자를 착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건 네 사정이고, 장군도 장군의 인생이 있지 않느냐? 장군도 너처럼 처녀로 살다 귀신으로 만들 셈이었느냐?"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옵고."
‘로시, 특수 효과 좀 넣어봐.’
[네? 특수 효과라뇨?]
‘뭔가 신비감을 좀 줘야 할 것 아니야. 신의 사자로서 능력을 보여야 더 신뢰가 가지 않겠어?’
[주인님이 사기를 도우라는 말씀인가요?]
‘플레이어는 신의 대리인이니 엄밀히 말하면 사기는 아니지.’
[나참.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자꾸 변명만 늘어놓을 셈이냐!"
"아, 아닙니다. 소녀는 억울하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그리 억울하다는 말이냐?"
"소녀는···."
[주인님. 찾았습니다. 사자후를 일갈할 수 있게 만드는 증폭 마이크입니다.]
‘사자후? 그거 무공 아니었어?’
[무공의 일종입니다만, 호랑이의 울음 소리 같은 초저주파를 생성하여 근위축 효과를 내는 장치입니다. 아마 범인들은 소리만 듣고도 온 몸이 굳어 버릴 것입니다.]
‘좋네. 구매해.’
[본 장치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한 번 사용 후 자동 소멸됩니다.]
‘알았어.’
주머니에 손을 넣자 립스틱 크기의 길죽한 아이템이 만져졌다. 위에는 똑딱이 버튼이 달려있었다.
‘이게 스위치인가?’
버튼을 누르자 아이템이 작동 신호가 떴다.
"네 이녀언!!!!!!"
와우!천상계의 과학으로 흉내낸 사자후의 위력은 엄청났다.
내 입에서 이렇게 굉장한 사운드가 발출될 줄이야.
마치 초고감도의 저음까지 잡아내는 우퍼스피커처럼 거대한 울림과 함께 살결을 진동시키는 저주파가 전방으로 쏟아졌다. 이것은 맹수의 울음. 듣는 순간 사지를 마비시키는 호랑이의 울음과 같은 것이었다.
장군의 몸에 붙은 귀신이 어찌나 놀랐는지 순간 그녀의 영혼이 장군의 몸에서 이탈하는 것처럼 혼백이 정수리로 튕겨 나올 뻔 했다. 희끄무레 한 것이 머리 위로 불쑥 솟아오르더니 겨우 되돌아갔다.
"하, 하악!"
"네년이 감히 신의 사자 앞에서 농간을 부리느냐?"
"아, 아니옵니다."
사자후에 겁을 먹은 장군이, 아니 처녀 귀신이 이마에 머리를 붙이고 납작 엎드렸다. 그 바람에 엉덩이가 불룩 솟구치며 장군의 훌륭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역시 가슴이 크면 엉덩이도 튼실하네.’
[주인님! 이 상황에 그게 할 소립니까?]
‘쓰읍. 좀 그랬나?’
"요, 용서해 주십시오. 농간을 부리려는 것이 아니옵고, 말씀 드리기 낯부끄러운 내용이라···."
"허어. 괘념치 말고 말해 보거라."
"그러니까 실은···."
처녀 귀신이 마침내 진실을 들려주었다.
***
처녀 귀신의 이름은 이현경.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22살의 젊은 나이에 실족사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실족사?"
"네."
"그러니까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는 말이냐?"
"네."
"실수로 발을 헛디뎌 죽은 것이 어찌 원한이 되었을꼬?"
"그게 사실은···."
현경은 대학교 산악동아리 회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얼굴이 예뻐 인기가 많았지만, 겁이 많던 그녀는 그때까지 남자를 사귀지 못했다. 당시 산악동아리 회장은 졸업반 4학년 선배였는데, 대학생 때 벌써 에베레스트 등반으로 유명한 산악인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잘생겼다고?"
"···네."
"크흠."
잘생긴 회장을 동경해 따라 들어간 산악동아리에서 지리산으로 엠티를 갔다. 7박 8일짜리 종주. 종주란 정상을 정복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산 전체를 오르락내리락 모든 등반코스를 따라가는 길고 험난한 일정이었다.
대장인 회장이 워낙 실력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남녀 회원 8명이 함께 믿고 따르며 종주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야밤에 텐트를 치고 산에서 비박을 하는데 찬바람에 잠에 서 깬 현경은 함께 온 여자 동기 하나가 텐트에서 사라진 걸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텐트 문이 살짝 벌어져 외풍이 들어왔던 것.
화장실을 갔겠거니 하고 다시 문을 닫고 잠자리에 드는데, 근처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럼?"
"맞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선배와 제 동기가···."
하필 야외에서 노출 플레이를 즐기던 그들을, 현경이 현장목격하고 말았다.
"남녀사이에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냐?"
"그 선배에겐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습니다."
"아! 바람이구나."
믿었던 선배가 동기와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야외에서 변태적인 섹스를 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현경은 하필 나뭇가지를 밟는 바람에 정체를 들키게 되었다.
당황한 현경은 야밤에 등산로를 벗어나 도망치다가 그만,
"···그렇게 어이없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습니다."
"쯧쯧. 그러게 밤길을 조심했어야지. 더구나 야산에서. 한데 아직도 나는 네가 원한이 깊은 연유를 모르겠구나."
"···처녀인 체로 죽은 게 억울하였습니다."
"뭐라?"
"귀신이 되어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저처럼 정조를 지키며 사는 여자들이 거의 없는 것을 깨닫고, 미련하게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너무도 원통하고 분하였습니다."
"······."
"그렇게 구천을 떠돌다가 우연히 장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된 그녀는 원혼이 되어 산 주변을 헤매다 우연히 지리산으로 산행을 나온 장군의 아버지 박수 무당과 당시 15살이던 장군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뛰어난 접신 능력이 있음을 감지한 그녀는, 그렇게 장군에게 들러붙게 되었고, 신기하게도 빙의가 된 다음부터는 저승사자가 더이상 쫓지 않았다고 하였다.
"대대로 무녀 집안인 장군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녀 근처로는 저승사자가 얼씬도 안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지금껏 장군의 곁에 숨어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해가 가는구나. 한데 나에 대해선 어떻게 안 것이냐? 한낱 잡귀가 나를 알아챘다고?"
"네?"
"지난번에도 나를 본 적이 있지않느냐?"
"마, 맞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게 보이더냐?"
"모르셨습니까?"
"뭐를?"
"그···. 보통 사람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래? 하긴 내가 보통 사람은 아니지."
"하면 사자님은 무슨 연유로 장군을 찾아오셨습니까? 저를 잡아기기 위한 게 아니라면요."
"지난 번 봤겠지만 그땐 다른 여인과 함께 왔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 술집 여자 말씀이시군요. 혼백이 더렵혀진 여인과 함께. 그래서 더욱 사자님을 경계했었습니다."
"크흠. 그땐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임무라면···."
"신의 일에 대해선 묻지 말라."
"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날 장군과 너를 처음 보고 뭔가 곡절이 있겠거니 싶었다. 듣고 보니 네 사정도 딱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젊고 예쁜 처자를 평생 저리 살아가게 하는 것 역시 불행한 일이 아니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장군의 몸에 깃들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순결한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육신만이 저 같은 원귀를 거둘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장군의 몸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말이냐?"
"···산에서 실족하여 죽은 자는 아직도 시체를 찾지 못해 부모님께서 빈 관으로 장례를 치르셨습니다. 제 육신은 이제 백골이 부서질 정도로 바스러졌고요. 처녀의 몸으로 죽은 것이 너무도 원통하고 분하여 이대로는 저승에 갈 수가 없습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너의 죄가 더해질 뿐이다."
"그렇다면 사자님. 저를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뭐라?"
"사자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저 역시 장군의 인생을 가로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진 무녀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도움을 준다고 여겼지만, 따지고 보면 장군도 집안의 혈통때문에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그렇지."
"그러니 저도 이제 가야 할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다만, 제 지리산 산골에 묻힌 제 육신을 거두어 주시고 저희 부모님께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부모님은 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것에 한이 맺혀 지금도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게 네 소원이냐?"
"하나 더 있습니다."
"뭐냐?"
"총각으로 죽은 귀신과 영혼결혼식을 치러주소서."
"그게 그리도 억울한 일이었느냐?"
"···네."
크흠.
갑자기 중매쟁이를 하라는 거냐?
근데 내가 총각 귀신을 어떻게 섭외···.
아, 어쩜 가까운곳에?
< 862. 처녀 보살-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