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873화 (841/2,000)

< 855. 기말 시즌-55- >

"아니 뭘 이런 걸 다···."

감격당해 버렸다.

역시 나를 챙겨주는 건 정음이 뿐이다.

다른 여자애들도 시시때때 톡을 보내며 관심을 드러냈지만, 이처럼 행동으로 옮기는 여자는 역시 정음이 뿐이었다.

"일단 앉자."

"네."

빈 벤치에 자릴 잡았다. 가로등이 포근히 내리쬐는 운치 좋은 곳이었다. 3단으로 된 도시락을 풀자 맨 위에 삼각으로 자른 샌드위치, 그 아래 이쑤시개를 꽂은 베이컨 말이, 마지막 칸에는 청포도 송이와 자몽과 멜론을 공들여 깎은 게 보였다. 보온병에는 내가

좋아하는 드립 커피가 들어있었다.

화려한 비주얼에 나도 모르게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우와, 이걸 혼자 다 준비한 거야?"

"헤헤, 네. 솜씨는 별로지만 맛있게 드셔요."

"고마워 정음아. 나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오빠가 맛있게 먹어주면 저는 그것만으로 기뻐요."

예쁜 정음은 말도 예쁘게 했다.

세상에 저런 천사 같은 애가 있을까?

정성껏 만든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하고 달달한 맛이 올라왔다. 정음은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맛엔 맞으세요?"

"응. 너무 맛있어."

"잘됐다. 인터넷 보고 따라 한 거거든요. 요새 유행하는 대만 샌드위치라면서."

"오, 그래?"

자세히 보니 식빵 테두리의 딱딱한 부분도 깔끔하게 커팅되어 있었다. 과하지 않게 햄과 크림치즈만 들어있어 먹기에도 부담이 없었다.

"이것도 한 번 드셔보세요."

정음이 긴 이쑤시개에 꼬치처럼 꿰인 베이컨 말이를 내밀었다. 바싹하게 구워진 베이컨에 겉에는 노란 겨자 소스와 케첩이 조화롭게 발라져 있었다.

정음이 떠먹여 준 걸 한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안에 야채 같은 게 들었는지 톡 하고 터지며 고소한 맛이 났다.

"음? 안에는 뭐야?"

"아스파라거스 구운 걸 넣었어요. 이건 어떠세요?"

"맛있어. 정말 맛있어. 너 요리도 잘하는구나."

"헤헤. 오빠한테 칭찬받으니까 기분 좋아요."

"당장 시집가도 되겠네."

"정말요?"

"응."

정음이 뭔가를 상상하는지 몹시 부끄러워했다.

가로등 조명 사이로 붉게 물든 그녀의 두 뺨은 솜털이 보일 만큼 맑고 투명했다. 아직 젖살이 남아 통통한 그녀의 볼을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진짜 이러니까 정음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헌신적인 여성이긴 하네요. 근데 정음양도 시험 기간 아닌가요?]

‘어랍쇼? 그렇네?’

생각해보니 기말시험은 당연히 1학년도 같이 보았다.

특히 교양의 비율이 유독 높은 1학년이면 대부분의 과목을 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맞다. 너 근데 시험공부는 어떡하고?"

"네?"

정음이 깜짝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도 다음 주부터 시험 아니야?"

"그, 그쵸."

"근데 이거 쌀 시간이 어딨어?"

정음이 민망한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오빠 전 머리가 멍청해서 공부 못해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늘 자신감 넘치던 정음이 자기 비하적인 발언을 하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정음은 그것이 자신을 책망한다고 생각했던지 더욱 의기소침해져 대답했다.

"···저, 특기생처럼 들어 온 거 아시잖아요."

"특기생이라니?"

생각났다.

정음이 사실상 태권도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했던 이력을 바탕으로 입학했던 아이라는 걸.

실기에선 전 부문 만점.

이론에서는 내신과 수능을 합쳐 꼴등.

그마저도 떨어질 뻔 하다 추가합격으로 문 닫고 들어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저 원래부터 공부는 잘 못했어요."

정음이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자신의 못난 모습을 고백해야 하는 입장이 얼마나 부끄러울까.

나는 갑자기 나의 무신경함에 화가 났다.

"아니야!"

"네, 네? 뭐가 아니에요?"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고!"

"그, 그럼요?"

언성을 높이자 정음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엉덩이로 하는 거야."

"엉덩이요?"

벤치에 앉아있던 정음이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말이지 백치미 100%다.

"아니 내 말뜻은 성실히만 하면 누구든 잘할 수 있다는 거야."

"그치만···."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럽고 운동 천재에 요리까지 곧잘 하는 정음이 빠가라는 사실이 말이다.

빠가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정음이가 빠가라니!

정음이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 번도 100점 맞은 적이 없어요. 중학교 때부턴 늘 하위권이었고요. 다른 사람들은 운동만 해서 그런 줄로 알지만 실은 저도 몰래 열심히 했거든요. 근데 해도 안 되더라고요."

정음의 말에 내가 반박했다.

"아니야."

"뭐가 아니에요?"

"노력의 방향이 잘못된 거라고."

"제, 제가요?"

"공부는 누구나 잘 할 수 있어. 그래, 물론 타고난 애들을 이기긴 어렵지. 네가 운동을 타고났듯이 말이야."

"전 운동만 잘해요."

"하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한다면 누구나 중간은 갈 수 있어."

"전···. 안 될 거예요."

정음은 계속 안된다는 말만 했다.

그녀의 증상은 전형적인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노력해도 안 된다는 실패의 학습이 트라우마로 이어진 것이다.

스스럼없이 머리가 나쁘다는 둥 공부를 못한다는 둥 하는 것만 봐도 자신감이 바닥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나를 이렇게 아껴주는 여자가 빠가 취급당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누구인가?

한때 대치동을 주름잡던 과외 선생 아닌가?

공부의 신이라 불렸던 남자의 영혼이 정음을 향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일단 해보자. 나랑 공부하는 거 싫어?"

"아, 아뇨. 저야 좋은데···. 괜히 저 때문에 공부에 방해될까 봐요."

이럴 수가.

정음은 그 순간까지도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긴, 전화 한 통이면 되는 걸 방해하지 않기 위해 도서관 열람실 좌석을 일일이 뒤진 것만 봐도 나를 얼마나 배려하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차마 나와 함께 하고 싶어도 나를 위해 참은 것이다.

"아니야. 방해는 무슨. 나 사실 일찍 시작해서 공부 거의 끝났어."

[주인님. 정말이십니까? 3회독 하신다면서요? 단대 탑이 되신다면서요?]

‘인마. 그래도 어떻게 정음이가 저 지경인데 그냥 놔둬. 가만 두면 학고 맞게 생겼는데.’

[허어. 역시 시험 기간에 여자를 만나는 게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물론 성적은 잘 받을 거야. 내가 좀 무리하면 돼.’

"하아-. 저 지금 공부할 거 하나도 안 들고 왔는데···."

"뭐? 학교를 왔는데 책도 안 들고 왔어?"

"네···. 도서관에서 공부를 잘 못하는 스타일이거든요. 너무 조용하면 잠이 와서."

세상에.

백치미에 잠순이 특성까지!

완벽하다.

완벽한 빠가의 자세다.

사실 그녀 정도의 외모라면 공부하다 내내 퍼자다 백수가 되어도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들이 알아서 모셔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성공의 경험을 안겨주고 싶었다. 내가 아끼는 정음이 공부에서 주눅 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정음은 언제 어디

서나 늘 빛나야 했다.

"이거 먹고 있을 때가 아니네. 가자 당장."

"어, 어딜요?"

"공부하러."

"아, 아니 그게···. 주, 준비가."

"준비는 무슨. 그거 준비하다 공부 시작도 못 해."

나는 정음을 끌고 갔다.

모텔이 아닌 카페로.

***

시험 기간 중에는 대학 근처의 커피숍도 만원이다.

겨우 자릴 잡은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연습장을 하나 꺼냈다.

"시험 보는 과목 다 읊어봐."

"지, 지금요?"

"응. 일단 계획부터 짜줄 게."

도훈은 연습장을 펼쳐놓고 계획표를 짰다.

정음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지 핸드폰 시간표를 뒤져가며 하나하나 과목을 불렀다.

"음, 생활영어까지 시험 보는 게 모두 8과목이네."

"네, 그런 것 같아요."

"진도는? 어디서 출제되는지는 알아?"

"글쎄, 거기까진 잘···."

"정말로?"

"죄송해요. 제가 공부를 거의 포기한 상황이라···."

"너 나랑 듣는 종교미술의 이해 과목은 열심히 했잖아?"

"아, 그거요? 그게 제일 잘한 과목이에요."

"나참. 물어볼 사람은 있어?"

"같이 듣는 친구들한테 물어볼까요?"

"어. 카톡방에 띄워봐.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건 주로 어디서 출제되냐고."

도훈은 자신의 공부를 제쳐두고 정음의 시험공부를 도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지만, 가슴이 시키는 걸 거부할 수 없었다.

늘 이기적인 도훈이었지만, 정음이 앞에서만큼은 강렬한 의지도 꺾이고 말았다.

다행히 체육과 1학년 동기들은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며 정음에게 시험 범위와 출제 힌트, 그리고 족보까지 몇 개 파일로 보내주었다.

정음은 동기들이 보내준 사진 파일을 열어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아! 이런 게 다 있었네요? 전혀 몰랐어요."

"너 빼곤 다 알았을걸?"

"저, 정말요? 근데 작년 시험지 이런 건 어디서 구하는 거예요? 재주도 좋네요."

"보통 오래된 교수는 근처 복사집에서 다 팔아. 그 외의 족보는 동방이나 친한 과 선후배끼리 알음알음 물려주는 편이고."

"근데 이걸 저한테 왜 줬을까요? 자기들도 어렵게 구했을 텐데···."

정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훈은 그 이유를 알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만큼 너를 경쟁상대로 의식하지 않는다는 거지. 족보를 던져줘도 못 먹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동기들 사이에서도 이런 인식이었다니···. 내가 정음이를 너무 안 돌봤구나.’

도훈은 정음이 이렇게 된 데는 자신의 탓도 있다고 여겼다.

학교 마치면 매일 알바를 하며, 알바하며 번 돈도 선물을 샀고 지금처럼 시험 기간임에도 자신을 위해 도시락을 싸 오는 여자였다. 사랑에 빠져 있으니 공부는 뒷전일 수밖에.

도훈은 자신이 가진 뛰어난 계획력을 이용해 빠듯한 시간 스케줄을 짰다. 하지만 애초에 남은 시간이 부족해 당장 월화에 보는 과목을 먼저 공부하고, 뒷과목은 벼락치기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다. 너 지금 집에 가서 공부할 것 들고 와야겠어. 시간이 너무 부족해."

"오, 오늘부터요? 내일부터 하면 안 될까요?"

"안 돼."

"아···. 그, 그럼 택시 타고 후딱 다녀올게요."

"그래. 그럼 난 도서관에서 내 짐 챙겨서 여기로 다시 올 게."

"저 근데 오빠. 저 진짜로 시험 못 봐도 괜찮아요. 어차피 해도 안 될 텐데···. 오빠 실망시켜 드릴까 봐요."

"아니. 해도 안되는 건 세상에 없어. 내가 너 어떻게든 성적 올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 네, 넵."

"그리고 내가 집에 바래다 줄 테니까 부모님껜 늦게까지 공부하고 온다고 해."

"몇 시까지요?"

"도서관에서 날 새면 좋은데, 조용한 곳에선 공부를 못한다니 카페 마감할 때까지만이라도. 아마 12시면 끝날 거야."

"네. 금방 다녀올게요."

두 사람은 30분 뒤 다시 만났다.

정음은 시작부터 지쳐 보였다.

오히려 열등생을 가르친다는 도전 과제에 도훈만 불타고 있었다.

"책 펴봐."

"네, 네."

정음이 첫 번째 시험 교제를 폈다.

‘세상에. 필기가 하나도 없어. 실화냐?’

정음의 책은 그대로 중고책방에 가져다줘도 A급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제대로 펼친 적도 없는지 표지까지 빳빳했다.

"흐음. 책은 됐고, 족보 위주로 공부하자."

"네, 넵."

도훈이 최근 3년간 기출 문제를 분석하더니 대략적인 방향을 짚어주었다.

"이 교수는 주로 마지막 파트에서 문제를 많이 출제하는 편이야. 그리고 제일 비중이 높은 문항은 서술형이고."

"그, 그렇구나."

"뭐가 그렇구나야. 지금부터 내가 페이지 찍어 줄 테니까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공부해. 알았어?"

"네!"

정음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 원래 이렇게 찍어서 하는 공부는 반쪽짜린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학 시험이란 사실 배운 걸 평가한다기보다 줄 세우기의 의미가 커. 상대평가니만큼 누군가는 상위권에 위치하고 누군가는 하위권으로 내려가야 하거든. 즉 변별시험이라는 거지.’

[그런데요?]

‘그럼 결국엔 당락을 가르는 건 모든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부분에서 나오는 거거든. 그걸 맞히려면 책 전체를 꼼꼼히 읽어야 하고. 디테일의 차이가 A+과 A를 가른달까?’

[캬-. 역시 주인님은 공부로 돌아오시니까 정말 천재처럼 보이는군요. 이런 모습은 처음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전국단위에서 놀던 몸이야. 공부라면 누구한테도 안 꿀려.’

정음에게 숙제를 내준 도훈은 다시 자기 공부에 몰입했다. 시간을 많이 뺏기긴 했지만,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잠을 조금만 줄이면 돼. 정음이를 평균은 맞게 해줘야지.’

도훈이 집중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앞에 앉아있던 정음이 휘청이는 게 보였다.

‘응?’

도훈이 고개를 들어 보니 이니 눈이 반쯤 감긴 정음이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이른바 UFO 턴이었다.

‘으아니! 시작한 지 30분 만에 잠을 자?’

어이가 없어진 도훈은 매서운 눈으로 정음을 노려보았다.

그새 잠이 깬 정음이 화들짝 놀라며 입가의 침을 훔쳤다.

"크흡, 저, 저 안 졸았어요!"

"···집중이 잘 안 돼?"

"그, 그게 아니라 봐도 뭔 말인지 모르겠어서···. 죄송해요. 오빠가 시간 내서 알려줬는데. 전 이것밖에 안 되나 봐요."

정음이 또 자기비하를 시작했다.

도훈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리를 옮겨 정음의 옆에 앉았다.

"아니야. 내가 잘못했다. 너는 그냥 입에 떠먹이는 게 빠를 것 같아."

"아, 아앗."

"잘 봐. 여기서 외울 건 딱 이 부분인데···."

도훈이 옆에 바짝 붙어 암기할 것을 찍어주는데, 정음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도훈의 몸에서 나는 체취에 저도 모르게 몸이 반응하는 것이었다.

‘아···. 좋다. 오빠 냄새.’

여전히 정음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 855. 기말 시즌-55-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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