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4. 기말 시즌-54- >
***
기말시험 삼 일 전.
슬슬 학생들 표정에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한 학기의 학점을 결정짓는 마지막 대단원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것이다.
문과에선 나름 상위권에 속하는 우리 단대 경우, 마치 고등학교 때로 되돌아간 풍경이다. 여학생들은 치마 대신 츄리닝 바지에 야구모자를 쓰기 시작했고, 남학생들은 한 손에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를 끼고 다닌다.
도서관엔 빽빽하게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으며, 날 새울 각오를 하고 담요와 쿠션을 자리에 가져다 놓은 학생들도 있었다.
사실 나는 이미 일주일 전부터 계획을 세워 시험 대비를 하는 중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쌍둥이 자매와의 발표 수업을 마친 직후부터 였다.
정희와 정란 자매를 그렇게 떠나 보내고 나니 왠지 모를 허탈감이 들었다. 인연의 붉은 실 가위의 위력이 그토록 강력한 줄은 이전에는 잘 몰랐었다.
떠나가는 자매를 바라보며 로시에게 물었다.
‘저들은 나를 이제 영영 기억 못 하는 건가? 아예 기억에서 삭제된 거야?’
[아닙니다. 아이템 설명에도 나왔지만, 기억은 삭제되는 건 아닙니다.]
‘그럼?’
[망각 될 뿐이죠.]
‘망각이라고? 그렇다기엔 나를 완전히 지워버린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그들의 기억 속 어딘가에는 주인님과 함께한 추억이 담겨 있을 겁니다. 하지만 주인님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먹었던 9월 3째주 목요일 급식이 무엇 있는 지 기억나십니까?]
‘그걸 어떻게 기억해?’
[그렇죠. 마찬가집니다. 없었던 일은 아닙니다. 다만 기억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판단되어 사라져 버린 것뿐. 처음 인연을 잘랐던 것보다는 지금이,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주인님을 영영 잊어버리게 될겁니다. 마치 그때 먹었던 급식처럼요.]
‘하-. 허무하고만. 잠깐. 근데 정희는 나랑 섹스까지 했는데?’
[상관없습니다. 주인님은 두 달 전 누구와 언제 어디서 섹스했는지를 기억하시던가요?]
‘나야 워낙에 여자가 많으니까 헛갈릴 수도 있지. 하지만 정희에게 나는 첫 남자였잖아. 내가 아다를 떼줬다고.’
[보통의 경우라면 잊지 못할 추억이 되겠죠. 설사 잊혀진다 하더라도 첫 경험이라는 단어에 문득문득 떠오를 수도 있고요.]
‘원래 그렇잖아.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하지만 붉은실이 잘린 이상 주인님과 관련된 기억은 인위적으로 조작되고 통제됩니다. 쉽게 말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억으로 취급되어 망각이 가속화되었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도 정희도 언젠간 자신이 처녀가 아닌지 알게 되지 않을까?’
[모든 처녀가 초야에 혈흔이 남진 않죠. 실제로 정희양은 피도 흘리지 않았고요.]
‘아···.’
[그만 미련을 접으시지요. 서로를 위한 최선의 판단이었습니다. 주인님은 미션을 달성했고, 저 두 사람은 이제 주인님과의 추억을 점점 잊어갈 것입니다.]
‘알아, 아는데. 사람이 사람을 잊는다는 게 그리 쉽냐? 특히 몸으로 얽히고 정이 통했던 남녀 사이에 말이야.’
[그 또한 주인님이 짊어져야 할 짐이 되겠죠.]
‘결국 나 혼자 삭이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구나.’
그 뒤로 시작한 시험공부였다.
어차피 시험 기간이라 허튼짓할 생각도 없었지만, 쌍둥이 자매와의 결별을 달래기 위해 뭔가에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교양 및 전공 등 필기시험 보는 과목들을 세세히 구분하고 시험 스케줄에 맞추어 공부 계획을 꼼꼼하게 세웠다. 이런 것이야말로 나의 주특기였다. 바로 이정우의 주특기.
사실 벼락치기도 계획적으로 해야 한다. 막무가내로 교재만 달달 외우며 날 샌다고 고학점이 보장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잠을 충분히, 그러나 집중할 때만큼은 세상에 혼자 밖에 없는 느낌으로 빡세게.
계획을 세워 공부를 한 결과 시험 3일 전이 되었을 때 이미 난 시험 볼 전과목을 1회독 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시험을 쳐도 A 이상의 학점을 받을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노리는 건 단순한 고학점이 아닌 우리과 수석이었다. 아니, 가능하면 사범대 수석. 따라서 오늘부터 2회독, 그리고 시험 직전까지 모든 과목을 최소 3번을 보고 들어갈 작정이다.
"아니 이게 누구야?"
머리를 식히러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데 성수가 다가왔다. 간만에 본 녀석은 예전보다 더 덩치가 비대해져 있었다.
"성수형?"
"도훈이, 짜식 오랜만이다."
성수가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아프다, 곰탱이 새끼야!
"어쭈? 요새 운동 안 하냐? 몸이 왜 이렇게 말랑말랑해? 말랑카우야?"
성수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나의 삼두를 모욕했다.
"기말 공부하는데 운동할 짬이 나야죠?"
"아, 맞다. 시험기간이었지?"
"뭐에요? 형은 마치 시험도 안 보는 사람처럼?"
"껄껄. 우리도 보긴 보지. 근데 3학년부턴 거의다 전공 수업이잖아. 교수님들이 임용 공부 일찍 시작하라고 진작부터 리포트로 대체한 과목이 많거든. 난 뭐 두 과목 쯤 보나?"
"두, 두 과목이요?"
"도훈이 넌 몇 과목인데?"
"일곱 과목···."
"크크크, 노답이네. 포기해, 그럼 편해 인마."
"안 해요. 장학금 받을 거에요."
"그래그래. 군대 갔다 왔으니 달라진 모습 보여야지. 참, 그렇다고 너무 운동은 쉬지 마라. 너 여름 방학 수영 캠프 조교 해야 하는 건 알지?"
"알죠. 근데 그게 왜요?"
성수가 어처구니 없다는 반문했다.
"왜긴 인마. 해수욕장에선 당연히 상의 탈읜데 강사가 몸매가 새끈해야지! 지금처럼 말랑카우 되 가지고 후배들이 귀담아 듣겠냐?"
"고작 그런 이유 였어요?"
"암튼 준비 철저히 해. 알았지? 믿는다."
"나참, 공부에 도움은 못 줄망정."
"껄껄, 그럼 고생해라."
성수는 고생하라는 말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긴 대학생은 시험 끝나자마자 방학이다.
무려 2달이 넘는 긴 방학.
현재까진 수영 캠프를 제외하면 별 다른 스케줄이 계획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그때 학내에서 할 수 없는 다양한 업적들을 도전해야겠지. 물론 그전에 이 시험부터 제대로 끝내고.
도서관으로 다시 올라가려는데 이번엔 1학년 무리가 눈에 띄었다. 태영이를 위시한 여학생들이었다. 시험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몰래 피해 가려 했지만, 한명이 귀신같이 나를 찾아냈다.
"엇, 도훈이 오빠다! 오빠!"
"도훈 오빠?"
"오빠, 어디 가세요?"
나는 어쩔 수 없이 1학년들과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너희들도 도서관 공부하러 왔니?"
태영과 함께 있는 여학생들은 쌍으로 붙어 다니는 나연과 연두였다. 연두가 말했다.
"공부하다가 배고파서 간식 사러 가고 있어요."
"오빠도 같이 가실래요? 태영이가 간만에 쏜다는데."
나연이도 나를 보자 반가운 듯 해맑게 웃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시험공부를 하러 왔다기보다, 도서관에 마실을 나온 모습이었다. 진한 화장에 짧은 치마는 공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혀, 형도 같이 가실래요?"
태영이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여자 동기랑 친분을 쌓으려던 중 내가 끼어든 게 못마땅한 눈치다. 하여간 저 미련한 녀석 같으니. 저런다고 인기를 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미안한 얘기지만 나연과 연두는 그저 공짜로 태영을 벗겨먹는 것뿐이다. 한마디로 물주인 셈. 태영의 호구끼는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다.
"아냐. 난 점심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르네. 너희들끼리 먹고와."
"오빠 공부 너무 열심히 하신다고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그래요. 적당히 쉬시면서 해요."
귀여운 여후배들이 아양을 떨며 유혹했다.
그러나 나의 원칙은 시험 공부를 절대 친구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남자들끼리라면 피씨방, 여자들끼리라면 까페에서 수다, 남녀 혼성이면 지금처럼 군것질이나 하러 몰려다니기 일수다. 이게 다 공부를 하기 싫어서 나오는 반발일 뿐. 혼자라면 망설이다가도 둘 셋이면 금세 의기투합해서 비겁한 자기 합리화를 해버린다.
조금만 놀다 하자.
조금만 자다 하자.
이런 나약한 의지로는 절대 시험을 잘 볼 수 없다.
내가 절대 아는 사람과 함께 공부하지 않는 이유다.
둘이 있으면 서로를 독려하는 게 아니라, 함께 침몰할 뿐이므로.
"아니야. 진짜로 배불러서 그래. 너희들 맛있게 먹고 와."
연거푸 사양하자 후배들도 결국 권유를 포기했다.
"알겠어요. 그럼 배고플 때 드실 거 사다드릴 테니까 어디서 공부하는지나 알려주세요."
"어, 나중에 톡할게."
"네!"
물론 톡에 응답할 생각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후배들과 헤어지자 마자 사범대 도서관에 짐을 정리했다.
‘여기서 공부하는 것도 이제 텃네.’
일주일 전 공부를 시작할 땐 아는 얼굴이 거의 없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한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험 3일 전이 되자 체육과 선후배 동기들의 얼굴이 점점 눈에 띄었다. 여자들과 썸씽이 많은 나로선 최대한 도망치고 피해 다녀야 하는 상황에 도달했다.
짐을 챙기고 있는데 로시가 물었다.
[굳이 도서관을 옮기실 필요까지 있으신가요?]
‘나 지금 일주일 째 금욕 상태잖아.’
[그게 왜요?]
‘지금 일부러 여자들 안 보고 있는 거란 말이야. 괜히 눈에 보이면 하고 싶어질까 봐.’
[연락도 계속 피하는 실정이죠.]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야. 힘든 일이 닥치면 회피심리가 있단 말이지. 스트레스가 올라가는 시험기간에는 여자들도 성욕이 올라가거든.’
[아···. 설마 그럼?]
‘그래. 여자들이 먼저 달려들까 봐 선수치고 도망치는 거야. 계획대로 공부를 다 해내기 위해선 시험 끝날 때까지 금딸, 아니 금욕할 예정이라.’
[대단한 의지군요. 주인님이 이렇게 독한 분인지 몰랐습니다.]
‘공부는 내 자존심이야. 사실 빠가로 변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유난까지 떨 필욘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과탑 못 찍어.’
[설마 주인님보다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기 있잖아.’
[누구요?]
‘박서현.’
[아! 1학년 수석 입학한 박서현양 말이군요.]
‘쟤도 은근 독한 애야. 이틀 전부터 저 자리거든? 내가 여기 있는 줄 알았는데도 일부러 말도 안 걸어.’
[설마 서현양도 그럼.]
‘그렇지. 자기도 나랑 엮이면 자제가 안 될 것 같으니까 일부러 피하고 있는 거라고. 왜겠어? 자기가 1등 먹겠다는 거잖아.’
[하지만 서현양과 주인님은 학년이 다르지 않나요? 어차피 과 탑은 학년별로 나올 텐데요?]
‘내가 과 탑만 노리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역시 학과 탑입니까?]
‘아니. 그보다 위.’
[단대 탑이요?]
‘그래. 올 A+이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보다 높은 점수는 없으니까.’
[대단한 각오시군요.]
‘하면 한다는 걸 보여줄 생각이야.’
짐을 모두 싼 나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자연대학 도서관으로 자릴 옮겼다. 게다가 귀찮아질 것을 대비해 변장 모자까지 눌러써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보게 만들었다.
그저 공부, 또 공부만 계속할 뿐이다.
***
한참 시험 공부를 이어가던 도훈은 잠시 선잠에 빠졌다.
강행군으로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더니 도저히 버티지 못할 상황에 이른 것이었다.
‘30분만 자야겠다.’
책상에 팔을 괴고 엎드린 도훈은 갑작스러운 호출에 눈을 떴다.
[주인님. 문자 메시지입니다.]
‘···으응? 그게 뭐라고 나를 깨워?’
막 잠이 들자마자 깨우는 알람에 짜증이 난 도훈이 로시를 질책했다.
[그게···. 육정음양입니다.]
‘정음이? 자동 답신 설정해 놓지 않았어?’
[자동 답신 중에도 주인님의 판단이 필요한 경우에는 알리도록 되어 있거든요.]
‘그래?’
도훈이 졸린 눈을 비비며 깨톡을 확인했다.
-육정음 : 오빠, 어디에요? 애들 말로는 도서관에 있다고 하는데 못 찾겠어요.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정음의 문자를 본 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에도 정음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안부문자를 보내곤 했다.
주로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든가, 오늘은 뭐 하세요? 등등의 귀여운 안부문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도서관에 방문한 상황같았다.
‘이래서 깨웠나 보구나.’
도훈은 곧바로 답장했다.
-이도훈 : 나 사범대 도서관 아닌데.
-육정음 : 아, 정말요? 친구들이 여기 있대서 왔는데···.
-이도훈 : 잠깐 나갔는데 메뚜기한테 자리 뺏겨서 그냥 옮겼어. 여기 자연대 도서관이야.
-육정음 : 그랬구나.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못 찾겠더라고요. 방해될까봐 직접 찾았거든요.
‘세상에. 열람실 좌석이 200개는 넘을 텐데 그걸 직접? 아이고, 정음아.’
미안한 마음에 도훈이 곧바로 답장했다.
-이도훈 :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 10분 뒤에 학떨목에서 보자.
-육정음 : 네, 잠깐이면 돼요.
도훈은 도서관을 빠져나와 서둘러 학떨목으로 향했다.
학떨목이란 사범대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거기서 놀면 학점이 떨어진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실제로도 길가 좌우로 벤치가 배치되어 있어 많은 공부에 지친 많은 학생들이 나와 수다를 떠는 곳이었다.
학떨목에 도착하자 먼저 당도한 정음이 도훈을 발견하고 인사했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 가로등이 켜진 학떨목의 풍경은 데이트 코스처럼 운치가 있었다.
"오빠!"
"어, 정음아. 무슨 일이야?"
정음이 수줍게 미소짓더니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물건을 앞으로 내밀었다.
"공부하는 데 출출하실까 봐 샌드위치랑 커피 좀 싸왔어요. 이거 전해드리려고···. 제가 괜히 방해한 건 아니죠?"
오늘따라 유난히 예뻐보이는 정음이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하게 빛내며 말했다.
< 854. 기말 시즌-5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