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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871화 (839/2,000)

< 853. 기말 시즌-53- >

***

도훈은 차가운 촉감에 정신이 들었다. 살갗을 문지르는 촉촉한 기운에 눈을 뜨니 누군가 물수건의 땀에 젖은 자신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깼어요? 땀을 많이 흘리셨더라고요."

도훈은 자신에게 말을 사람이 정란인지 정희인지 헛갈렸다.

"언니도 방금 깨서 씻으러 갔어요."

"···내가 잠들었어?"

"네. 쿨쿨 잘 주무시던데요?"

원래 사정을 하고나면 졸음이 배가되는 법. 하지만 설마 혼절하리라곤 예상 못 했던 도훈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좀 피곤했나봐."

"그럴 만도 했어요. 사우나 같은 방안에서 그렇게 힘을 빼셨으니."

"넌 괜찮아?"

뒤늦게 도훈이 정란의 안부를 물었다.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정란은 질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져 있었다.

"그나마 제가 제일 먼저 정신 차렸어요. 오빠 때문에 밑이 빠지는 줄?"

정란은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홀가분해 보인달까?

도훈은 계속 수건으로 땀을 닦은 정란을 만류했다.

"괜찮아. 이제 내가 할 게."

"아니에요. 거의 다 했어요. 뒤로 돌아 누워 보세요."

정란이 한사코 고집을 부리는 통에 도훈이 침대 위로 돌아누웠다. 홀딱 벗을 채 침대에서 몸을 뒤집자, 마치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정말로 괜찮은데···."

"제가 해드리고 싶어서요."

정란이 젖은 수건으로 등을 문지르며 말했다. 차가운 수건의 촉감에 뜨거웠던 열기가 한풀 가시는 기분이었다. 정란이 몸을 닦아주며 말했다.

"오빤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뭐가?"

"요거 말이에요."

정란이 꼬리처럼 밑으로 삐져나온 대물을 툭툭 건드렸다.

"뭐, 뭐야?"

"왜요? 설마 또 꼴리는 거 아니죠? 이제 시간 없어요."

"시간?"

"좀 있으면 엄마 오실 시간이에요. 오빠가 우리 집에 있는 걸 알면 경을 칠걸요?"

"아···. 부모님이 엄하시구나."

"엄하시죠. 엄마는 중학교 선생님이세요."

"정말?"

"네. 그래서 딸들 교육을 야무지게 하셨죠."

"널 보면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도훈이 농을 던졌다. 정란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도훈의 등짝에 스메싱했다.

짝-

"아야! 아프다."

"맞을 말을 골라하니까 그쵸."

분풀이를 한 정란이 말을 이었다.

"맞아요. 오빠 말대로 언니랑 달리 저는 내놓은 딸이었어요."

"내놓다니?"

"공부 잘하는 언니에 비해서 잘난 것이 없었으니까요. 부모님이 마음고생이 심하셨죠."

"누구나 철없는 시절은 있는 법이야. 지금은 어엿하게 대학생이 되었잖아."

"그것도 언니 아니었음 힘들었을 걸요?"

"정희?"

"네. 고2 겨울방학 딱 되니까 언니가 한번은 그러더라고요. 너 그렇게 커서 뭐 될 거냐고."

"정희가 그런 말을 했어?"

"언니 되게 무서워요. 그냥 봐선 순진해 빠진 것 같아도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에요. 나랑은 차원이 다르죠."

"너무 자기비하할 필욘 없어."

"암튼 그렇게 고3 내내 언니한테 벼락치기로 수능을 배웠어요. 1:1 맞춤 과외였던 셈이죠."

"아! 그래서."

"맞아요. 언니가 아니었으면 대학 입학도 못 했을걸요. 오히려 언니가 저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본 셈이죠. 나 가르친다고 자기 공부를 제대로 못했으니까."

"정희는 좋은 언니구나."

정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제 친구들 보셨죠?"

"놀이터에 왔던 애들?"

"네. 고등학교 땐 다들 잘 나갔던 애들이에요. 무서울 게 없던 친구들이죠. 하지만 지금은 보시다시피, 쌩 양아치, 배달, 심지어 룸 뛰는 애도 있어요. 이제 겨우 스무살 밖에 안됐는데."

"언니가 너를 구제해 준 셈이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늘 고마워하고 있어요. 언니가 아니었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뭐 그렇다고 지금도 정신 차린 것 같진 않지만 최악은 면한 셈이죠."

"근데 이 얘기를 왜 하는 거야?"

정란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먼저 깨서 계속 생각해 봤어요."

"뭘?"

"아무리 자매 사이에 남자를 공유할 수 있다고 해도, 결국엔 한 사람이랑 사귀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렇겠지?"

"저보단 언니가 훨씬 좋은 사람이에요."

"정란아 그 말은···."

"네. 저희 언니랑 사귀어 주세요."

도훈이 몸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진심이야?"

"네. 그게 맞는 거 같아요. 언니가 저렇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처음 이거든요. 모든 게 다 제 욕심이었던 것 같아요."

정란은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도훈은 간만에 진지한 정란을 보며 생각했다.

‘의외로군. 언니에게 순순히 양보할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정란 양도 심성이 아주 나쁜 동생은 아니었네요.]

"그래 주실 수 있죠?"

"정말 괜찮겠어? 그래도?"

"자꾸 흔들지 마요. 겨우 마음 먹었으니까요."

그때 샤워를 마친 정희가 방으로 들어왔다.

"오빠, 깨어나셨나요. 씻으실래요?"

"아니. 시간 애매할 것 같아. 곧 부모님 오신다며."

"그래도 땀을 많이 흘리셨던데."

"정란이가 물수건으로 닦아줘서 괜찮아."

도훈이 서둘러 옷을 걸쳤다.

정희가 말했다.

"참, 오빠. 과제는 정란이랑 같이 저녁에 해 놓을게요. 오늘도 다 못 해 가지고."

"것보단 너희 둘 잠깐 나랑 커피 한잔 하러 갈래?"

"지금요?"

"응. 우리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지 않아?"

"그럼 과제는···."

"그건 걱정하지 말고."

정란과 정희는 서로를 쳐다보더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

부모님께는 저녁을 먹고 들어간다고 거짓말을 한 쌍둥이 자매는 도훈과 함께 동네 까페로 갔다. 도훈은 그들의 변조된 상식을 똑바로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미션도 마무리했으니 원래대로 돌려놔야겠어.’

"정희야, 정란아."

"네?"

"왜요?"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봐."

도훈은 상식 개변을 이용해 둘의 상식을 원상 복구했다. 그리고 원래대로 상식이 돌아올 경우 혼란스러워할 자매를 위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바로 인연의 붉은 실 가위였다.

‘아무래도 이게 최선이겠지?’

물론 도훈도 이대로 손절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정희와 정란은 매력이 넘쳤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인연을 맺고 싶었다. 하지만 뒤바뀐 상식을 계속 유지할 경우 결국엔 뒷감당을 못 할 것 같았다. 애자매의 경우에서처럼 파국을 막기 위해선 미션을 완수한 지금 그녀들을 풀어주는 게 순리였다.

붉은 실 가위로 두 사람의 끊을 자르자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 불과 며칠 사이 벌어진 일이지만 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도훈은 아주 오래전에 알았던 사람처럼 낯설고 희미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어렴풋 기억나겠지만, 그에게 품었던 호감이나 추억들

은 바래진 사진처럼 희미해질 터였다.

호감도가 원상복구되자 두 사람은 마치 도훈을 처음 만난 것처럼 어색해했다. 마치 방금 전의 일이 꿈이었던 것처럼.

"···과제는 제가 집에서 혼자 해올게요. 그럼 커피 잘 마시고 갑니다."

도훈이 먼저 일어섰다.

두 사람은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다가 서로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저분이 누구더라?"

"같은 조모임하던 사람 맞지?"

"아아, 그렇네. 이름이 이···도훈 이던가?"

"응. 그랬던 것 같아."

"이상하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알게 뭐야? 과제도 혼자 해온다니 잘 됐다. 히히."

"엇, 엄마한테 전화 왔다."

두 자매의 기억속에 도훈이 완전히 리셋되었다.

***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 도훈은 담배를 꺼내물었다.

왠지 입맛이 썼다.

‘씁쓸하구만. 기껏 공들여 공략해 놓고 쌩판 처음 본 사람처럼 초기화되버리다니.’

[잘하신 겁니다. 품을 수 없으면 놓아줘야죠. 무리한 상식개변으로 더 큰 혼란이 오기 전에 수습하셨으니까요.]

‘그런 거겠지?’

[근데 과제는 왜 혼자 떠맡으신 건가요?]

‘둘한테 지은 죄가 있으니 그 정돈 내가 해야지. 어차피 마무리하고 나면 발표만 하면 되니까. 발표도 내가 해야하고.’

[아···. 그럼 조모임으로 다시 볼일은 없겠군요.]

‘그럴 생각으로 떠맡은 거야.’

[미션 보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응. 보여줘봐.’

[구체화 된 형상이 존재하는 아이템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기적의 복리 계산기처럼 시스템에 자동적용됩니다.]

‘그래? 이름이 무슨 복사기였는데···.’

[정밀 복사기, 아이템을 두 개로 복제할 수 있습니다. 복제 횟수는 1회로 제한되지만, 복제된 물품은 진품과 동일한 성능을 발휘합니다. 단 소모품이 아닌 아이템은 복제가 불가능합니다. 이제부터 모든 소모성 아이템을 구매하시면 1+1으로 구입 가능합니다.]

‘아, 이거 보니까 삽질했네.’

[뭘 말씀이십니까?]

‘지능 열매 말이야. 아이큐 올려주는. 어차피 시간도 오래 걸리는 거 이거 얻고 나서 구매할 걸.’

[음, 그 생각은 미처 못 했군요. 다음부터 그렇게 구매하시면 됩니다.]

‘역시 안 되겠다. 이 빡대가리로는. 과제도 마무리 할 겸 오랜만에 두뇌 풀가동 시켜보자.’

[현자타임 말씀이신가요? 부작용은 잘 아시죠?]

‘어차피 쌍둥이 미션도 끝냈겠다, 한동안은 여자 볼 일 없잖아.’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집으로 돌아온 도훈은 현자 타임을 가동해 남은 과제를 순식간에 마무리했다. 두뇌가동이 어찌나 빨라졌는지, 평소에 5시간 걸릴 분량이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정리를 하는 와중에 프리젠테이션까지 완성하여 발표 준비까지 모두 끝낼 수 있었다.

물론 이후 부작용에 시달리느라 주말 간 여자의 여자도 생각나지 않았다.

***

"···이상으로 저희 조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도훈이 조모임 과제 발표를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누가 봐도 단연 돋보이는 훌륭한 발표였다.

프레지로 구성한 PPT는 개성이 넘치고 직관적이었으며, 중간 중간 위트 있는 대사로 청중을 아우르는 솜씨는 지켜보던 교수마저 감탄할 정도였다.

도훈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같은 조인 태영이 흥분해서 떠들었다.

"와, 형 대박이에요! 이거 백퍼 A+각이네요."

뒤에 앉은 정희도 말했다.

"발표 준비하느라 고생하셨어요. 혼자 떠넘긴 것 같아서 죄송했는데."

태영은 정희와 도훈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응? 왜 정희가 태영이 형한테 깍듯하게 하지?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수업이 끝나고 담배를 피우러 가는 도훈을 태영이 따라가 물었다.

"형. 정희랑 무슨 일 있었어요?"

"응? 왜?"

"아니 정희가 좀···. 어색한 느낌인데. 혹시 싸운 건 아니죠?"

"싸우다니?"

"그냥 좀 그렇잖아요. 정희도 그렇고 정란이도 데면데면하던데···."

도훈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설명해도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별일 없었어. 애초에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전 되게 잘 되시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조모임하면서 친하게 지내다가 발표 끝나면서 흐지부지된 거지 뭐. 오늘 수업 마치면 종강이라 다시 볼일도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넌 정란이랑 잘 되고 있냐?"

도훈이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태영은 금세 똥씹은 표정이 되었다.

"아뇨. 제가 또 헛물 켠 거 같아요."

"왜?"

"폰 개통하자마자 연락했거든요. 근데 완전 성의 없이 대답하더라고요."

"뭐라는데?"

"아, 폰 새로 샀냐고."

"걔 때문에 고장난 거라면서?"

"제 말이요! 미안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일언반구도 없더라고요. 완전 어이없어 가지고 거기서 오만정이 떨어지데요."

물론 태영은 그 뒤로도 계속 집쩍거리다 한바탕 욕을 먹고 물러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덕에 마지막 수업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도훈이 말했다.

"괜찮아 인마. 그럴 수도 있지. 내가 그랬잖아. 픽업 아티스트도 백프로 성공하는 건 아니라고. 무슨 시도 끝에 얻어걸리는 거야. 그나마 남들보다 더 노력하니까 그 정도인 거고."

"참, 형···."

태영이 겸연쩍게 물었다.

"저번에 그 제자로 받아주신다는 거요."

"어."

"제가 좀 경솔했던 거 같아요. 혹시 지금이라도···."

도훈은 아쉬워지자 다시 매달리는 태영이 어이가 없었다.

"일단 그건 시험 끝나고 다시 얘기하자. 이번주부터 본격적인 기말 시즌이잖아."

"아, 네···."

[태영군은 참으로 염치도 없군요.]

‘놔둬. 원래 저런 놈이니까. 나도 한 짓이 미워서 도와주기 싫은 데 미션이 걸려 있어서 참는 거야.’

[이 기회에 태영군도 손절해 버리지 말입니다. 도움이라곤 1도 안되는 거 같은데.]

‘인연을 끊는 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야. 쌍둥이는 지금도 조금 아쉽다야.’

그때 도훈과 태영 두 사람 사이로 정희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여기 계셨네요. 한참 찾았어요. 콜록-콜록-."

정희가 담배 연기에 기침을 하자 도훈이 서둘러 담배를 비벼껐다.

"무슨 일로?"

"아, 아뇨. 혼자 발표 다 하셨는데 저희가 묻어가는 거 같아서 염치가 없어서요. 여기 음료수라도."

정희가 쑥스럽게 음료를 건네더니 후다닥 돌아섰다.

멀찌감치 팔짱을 낀 채 쳐다보고 있던 정란이 되돌아오는 정희에게 말했다.

"뭐하러 음료수까지 줘? 이제 볼일도 없는 사람인데."

"그래도 미안하잖아. 덕분에 학점도 잘 받을 것 같은데."

"언니는 참, 마음이 약해서 문제라니까? 남자는 그냥 단물만 쏙 빼먹으면 되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던 정란은 다시 한번 도훈을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왠지 모를 어색함에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괜히 신경 쓰이네. 왜 예전에 만났던 사람 같은 느낌이 들지? 생긴 게 비슷한가?’

기억이 거의 소멸되어 버린 쌍둥이는 도훈에 대해 애매모호한 감정만을 남긴 채 작별을 고했다.

< 853. 기말 시즌-5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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