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0. 기말 시즌-50- >
***
정란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담벼락 옆에 세워진 차는 분명 도훈의 것.
차량 앞에 붙은 핸드폰 번호까지 이미 확인했다.
‘···진짜로 언니랑 하고 있다고?’
그 사실을 듣자 감히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학창시절 제법 문란하게 놀았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고등학생 수준에서다. 그녀의 상식으론 선거의 4대 원칙과 섹스의 4대 원칙이나 똑같은 것이었다.
첫째 보통 섹스다.
연령 이외의 자격 조건을 두지 않고 국민 모두는 섹스할 권리가 있다.
둘째 직접 섹스다.
섹스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대리인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해야 한다.
셋째 비밀 섹스다.
섹스를 하는 사람은 비공개적 장소에서 누구와 하는지 알려져선 안 된다.
마지막으로 평등 섹스다.
섹스하려는 자는 재산, 신분, 성별, 교육 정도, 종교, 문화의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1명당 1명의 파트너가 허용된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도훈은 지금 두 가지 중대한 룰을 위반하고 있었다. 바로 비밀과 평등의 원칙이었다.
‘어떻게 둘도 아니고 셋이서, 그것도 친언니랑 같이 하자고 할 수 있는 거지?’
정란에게는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그것은 절대로 넘어선 안 되는 금기의 영역이었다.
도훈이 지금 그것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진짜 개막장이야. 짐승도 이렇게까진 안 할 거야.’
문고리를 붙잡다가 물러서기만 수차례.
정란은 긴장감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씨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갑자기 담배가 당겼다.
어젯밤 놀이터에서 간만에 핀 것이 화근이었다.
정란은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담뱃값 4,500원에 라이터 500원. 딱 5000원이 들었다.
거칠게 포장지를 뜯어낸 정란이 담배를 입에 물고 생각했다.
역시 머릿속이 복잡할 땐 한 대 빨고 보는 게 최선이었다.
"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훈은 언니와 뒹굴고 있을 것이다.
그 커다란 대물을 쑤컹쑤컹 잘도 쑤시면서···.
"씨발, 설마 장난치는 거 아니겠지?"
문득 정란은 도훈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언니인 정희가 집에 가자마자 홀딱 벗고 침대 위에서 도훈과 뒹군다는 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언니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자신이 아닌 정희는 정숙하고 생각이 깊은 여자였다. 망나니 같던 정란이 언니에게만큼은 그토록 순종했던 이유가, 단순히 자매 사이의 서열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적어도 정란은 마음속으로는 언니 정희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존경했다. 얼굴이 예쁜데도 주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공부에 매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굳이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정희가 미련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 진정성만큼은 정란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맞아. 언니가 그럴 리가 없잖아? 생각해 보니 오빠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웃겨. 오빠도 충분히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건데.’
정란은 이제 도훈을 의심했다.
도훈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이었다.
겉으로는 매너좋은 훈남 선배인 척 위장해놓고, 놀이터에서 자신을 홀랑 따먹을 만큼 변태같은 사내였다.
그런 사내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기만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맞아. 내가 너무 쫄았던 걸지도 몰라.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도저히 못 믿겠어.’
결심을 굳힌 정란이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나 왔어."
정란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선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도훈 오빠 신발이다.’
그녀는 유난히 조용한 집안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거실 테이블에는 과제를 한 흔적이 보였다. 교재와 노트가 펼쳐있고, 알록달록한 필기구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언니? 어딨어?"
정란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여전히 들리는 대답은 없었다.
정란은 도훈과 정희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렇지. 어디서 나를 낚으려고? 분명 방에 숨어 있겠지?’
정란이 살금살금 정희의 방으로 다가갔다.
***
정희가 힘차게 떡방아를 찧어댔다. 처음엔 어색했던 동작도 숙달이 되니 노련한 기수처럼 엉덩이를 찰싹 붙인 채 허리를 흔들 수 있었다.
"흐앗, 핫, 핫!"
푹찍 푹찍!
유난히 물이 많은 탓에 음탕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던 그때. 갑자기 현관문 비번을 누르는 소리가 났다.
띠띠띠띠, 띠리링-
놀란 정희가 석상처럼 굳었다.
도훈 역시 표정 관리를 하며 방문 쪽을 쳐다보았다.
"나왔어."
정란의 목소리.
정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속삭였다.
"도, 동생이에요!"
"정란이 남자친구 만나러 갔다며?"
"그, 그러니까요! 어떻게 지금 왔지?"
정희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언니? 어딨어?"
정란이 재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희가 어쩔 줄 모르고 대답하려 하자 밑에 깔려있던 도훈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쉿-. 그냥 없는 척 해."
"드, 들키고 말 거에요."
"내가 문 잠갔어. 절대 이방에는 못 들어와. 일단 정란이가 자기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조용히 있자."
정희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하지만 도훈이 방문을 잠갔다는 소리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최소한 옷을 다시 입을 시간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끼이익-
분명히 잠갔다는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훈 역시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부, 분명 잠궜는데?"
[정말입니까?]
‘물론 뻥이지. 내가 왜?’
문이 열릴 때까지 두 사람은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말타기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방에 있는데 왜 대답을···."
문을 열던 정란이 두 사람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처럼 손에 쥔 핸드폰과 가방을 떨어뜨렸다.
"언니. 아, 아니 오빠···."
상상하던 최악이 펼쳐졌다.
얼이 빠진 정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둘이 대체···."
"저, 정란아. 그러니까 이건."
정희가 이불을 끌어안으며 정란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정란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쾅! 방문을 닫더니 거실로 나가버렸다. 정희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문 잠갔다면서요!"
"미안, 분명 잠갔다고 생각했는데···."
"하-, 이제 어떡해!"
"정희야. 일단 진정해."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내가 어떻게든 수습해 볼게."
도훈은 최대한 정희를 안심시키며 후다닥 바지를 걸쳤다. 팬티도 입지 않고 바지를 입은 도훈이 셔츠에 팔을 끼우며 말했다.
"우선 정란이부터 잡자. 집을 나가버리면 더 큰 일이야."
"네?"
"부모님한테 이르면 어떡해? 일단 대화로 풀어야지."
"아, 그, 그래요. 먼저 나가보세요."
도훈이 먼저 방을 나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정희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거실 밖에는 정란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빤 진짜로 미친놈이에요."
정란이 폭언을 퍼부었다.
도훈은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그래. 전 진짜로 할 줄 몰랐어요. 이제 어떡할 거예요? 설마 그 꼴을 보고서도 제가 같이 좋다고 끼어들 줄 알았어요?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예요?"
정란은 적잖이 흥분한 상태였다.
처음엔 충격이, 시간이 지나고 나선 분노가 치솟았다. 도훈이라는 난봉꾼이 의좋은 자매 사이를 망가뜨린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전히 정희는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
도훈이 정란을 향해 말했다.
"그러는 너는 아무 잘못 없어?"
"뭐라고요?"
"네 언니랑 잔 걸 알고서도 하자고 덤볐던 건 너야. 기억 안나?"
"그, 그건···."
"그런 짓을 해놓고 이제와서 뻔뻔하게 뭐라고? 나만 나쁜 놈이야? 나만 쓰레기라고? 네가 나한테 한 짓 정희한테 다 불어줘?"
"미쳤어요, 정말?"
"그러니까 순순히 협조해."
"뭘요?"
"무조건 내가 하자는 데로 따르기로."
"싫어요! 이건 제가 생각했던 거랑 너무 달라요."
"뭐가 다른데?"
"오빤 조금도 이해 못 해요. 어차피 남이니까. 하지만 자매끼리 한 남자를 공유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줄 생각 안 해보셨어요?"
정란의 반응은 생각 이상으로 격렬했다.
도훈도 이쯤에서 벽을 느꼈다.
‘역시 쉽지 않구나. 자매 쓰리썸이란건.’
[당연하죠. 남도 아니고 가족인걸요.]
‘어쩔 수 없군.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뭘 하려고요?]
‘상식을 비틀어야지. 너 혹시 형사취수제라는 말 알아?’
[형사취수제요?]
‘고구려 때 있던 풍습인데, 남자 형제가 전쟁에서 죽게 되면 그 아내를 다른 형제가 거두는 거야. 엄밀히 따지면 여자 입장에선 형제 모두를 한 번씩 겪어 보는 거랄까? 이 경우와 비슷하지.’
[아니 그게 무슨···.]
‘두 자매의 상식에 형사취수제를 도입해야 겠어.’
"알았어. 내가 생각이 짧았나 봐. 근데 정란아, 내 말도 한 번 들어봐."
"또 무슨 변명을 늘어놓으시려고요?"
"내 상식에 따르면 말이지···. 원래 몸에 좋은 남자는 자매끼리 공유하게 맞는 거 아닌가?"
"···공유를···."
정란의 눈빛이 흐리멍텅해졌다.
상식이 비틀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렇지. 공유.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좋은 게 좋은 거다. 뭐 그런."
"아···. 그렇죠. 자매끼리 공유할 수도 있긴 하죠."
"그치? 기왕 이렇게 된 거 서로 그냥 함께 즐기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언니가 동의해 줄까요?"
"그건 내가 설득할 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도훈은 이번엔 정희 방으로 들어갔다.
정희는 이미 옷을 다 입은 상태로 어느 타이밍에 나가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도훈이 되돌아오자 정희가 급하게 물었다.
"어, 어떻게 됐어요? 정란이가 뭐래요? 충격받지 않았던가요?"
"···음. 그게 말이 잘 안 통하네."
"어, 어쩌지? 제가 가서 말해볼게요. 오빠보단 제가 직접 용서를 구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용서라니? 이게 왜 용서를 받아야 할 일이야? 집에서 남자친구랑 하다 걸린 건 그 부주의를 책망할 순 있어도 용서를 구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정희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게···. 오빠는 잘 모르겠지만 정란이 충격을 많이 받았을 거예요."
"왜?"
정희는 이미 엎저러진 물이라고 생각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정란이도 오빨 좋아했으니까."
"뭐?"
"미안해요. 말하려고 했는데,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그럼 두 사람이 동시에···."
정희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둘 다 오빠한테 호감이 있었어요. 우린 심지어 누가 먼저 오빨 꼬시나 내기까지 했거든요."
"나를 두고 내기를 했다고?"
"그, 그게···."
모든 걸 이미 알고 있던 도훈이 의도적으로 역정을 냈다.
"너희들 대체 사람 가운데 두고 뭐 하는 건데? 지금 나 가지고 논 거야?"
"아, 아니에요, 오빠!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정작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난 것 같은데?"
"미안해요. 오빠, 제가 표현이 경솔했어요. 저흰 그저 둘 중 누가 오빠를···."
도훈이 정희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지금 상황에 나까지 화내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흑흑, 미안해요. 진짜로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울지마.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부터 하는 게 최선이야."
"제가 정란이한테 잘 말해볼게요. 심성은 착한 아이라서 우릴 이해해 줄지도 몰라요."
"아니면 이런 건 어떨까?"
"뭘요?"
"네가 그랬잖아. 정란이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네."
"그럼 정란이도 우리 사이에 껴주는 거야."
"껴주다뇨?"
정희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 했다.
설마하니 그것이 쓰리썸에 대한 제안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야. 지금 정란이를 달래줄 방법은 내가 안아주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오, 오빠 지금 그게 무슨···."
"그러니까 정란이도 같이 따줄게."
"···네?!"
정희가 충격으로 얼굴이 파리해졌다. 도저히 상식 밖의 의견을 말하는 도훈이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 오빠 도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정희야. 내 상식에 따르면···."
도훈이 타이밍 맞게 상식개변을 걸었다.
자매끼리 남자를 공유할 수도 있는 거다.
다행히 둘 다 호감이 있다고 하니 더 좋은 거 아니냐.
지금 화난 정란을 달래줄 방법은, 셋이 함께 즐기는 수밖에 없다.
초점이 잠시 나가 있던 정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뒤바뀐 상식이 적용되자 그녀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오빠 말에 일리가 있네요. 어차피 자매 사이에 남자를 공유하는 거니까···."
"그치?"
"그렇게 해서 정란이가 위로가 된다면···."
"일단 기다리고 있어봐. 내가 정란이 데리고 올게."
도훈이 씩 웃으며 거실로 나갔다.
< 850. 기말 시즌-50-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