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8. 기말 시즌-48- >
하지만 도훈은 이번만큼은 태영에게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그저 맛있게 태영이 사준 후식을 얻어 먹을 뿐이었다.
"형, 오늘은 따로 조모임 없나요?"
"어. 봐서 내일이나 한 번 더 모이면 거의 끝날 것 같아."
"네, 그럼 오늘 폰이나 맞추러 가야겠네요."
"또 사게? AS는 안 받고?"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할짝 거리던 우선이 물었다.
"제가 하필 파손 보험만 들어와서, 보험비 청구하면 더 손해나겠더라고요. 완전 파손이 되버려가지고. 그냥 효도폰 같은 거라도 하나 구하려고요."
"저런. 그러게 조심해야지. 요샌 핸드폰도 비싼데."
"괜찮아요. 때론 그런 것들이 인연이 되기도 하니까."
태영은 이 모든게 정란과 친해지는 대가라고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히려 거기서 화를 냈거나 변상을 요구했다면 금전적인 득은 있을지언정 정란과는 영영 멀어졌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대담한 희생을 통해 정란은 자신에게 더욱 호감을 갖게 되었을 거라고 믿었다. 정작 정란은 태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내막을 알게 된 도훈은 쯧쯧 속으로 혀를 찼다.
‘어찌 보면 저놈도 호구 중에 호구네. 간도 쓸개도 다 퍼줄 놈이야.’
[그 점 때문에 주인님의 지도편달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놔 둬, 이번 일은. 한 짓이 괴씸하기도 하고 한 번 크게 데여보면 나중에 깨닫는 게 있겠지.’
도훈이 태영에게 말했다.
"커피 잘 얻어먹었다. 참, 태영아 마지막 수업 대출 좀 가능하겠냐?"
"대출이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친구 놈 하나가 군대서 휴가 나온다는 데 역으로 마중 좀 와달라 그러네."
"그렇구나. 형 걱정 마세요. 어차피 다음 수업 교수님 출석 널널한 편이니까.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그래 잘 부탁한다."
태영에게 대출을 떠맡기고 헤어진 도훈은 곧장 정란에게 연락했다.
-이도훈 : 수업은 언제 끝나?
-차정란 : 10분 안에 끝날 것 같아요.
-이도훈 : 정희랑 같은 수업이지.
-차정란 : 네. 오빠 근데 진짜 우리 집에 올 거예요? 언니 별말 없던데.
-이도훈 : 너한테 말하지 않을 걸 보니 말하는 게 부담스러운가 보다. 넌 뭐라고 핑계 댔는데?
-차정란 : 수업 끝나고 약속 있다고요. 친구 만난다고.
-이도훈 : 그럼 먼저 가. 친구 만나는 척. 내가 정희 데리고 집으로 갈 게.
-차정란 : 단둘이서 집에 간다고요? 나 빼고?
-이도훈 : 1시간 뒤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면 되지. 그 전에 내가 분위기 잡아 놓을 게.
-차정란 : 진짜 내가 왜 이 부탁을 들어줬는지 모르겠네. 나 그냥 이거 안 하면 안돼요? 괜히 찝찝한데.
정란이 뒤늦게 캥기는 모양이었다.
마치 가족끼리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랄까? 언니를 도훈에게 팔아 넘기는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훈이 차분히 설득했다.
-이도훈 : 내가 분명히 말했지만, 정희가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짓도 안 할 거야. 그리고 이거 하나는 약속할 게.
-차정란 : 뭐요?
-이도훈 : 오늘 일 잘 안되더라도 너랑은 계속 갈거라고.
-차정란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도훈 : 생각해봐. 정희에게는 몰라도 너한테는 내 응큼한 속내는 다 들켰잖아. 이제와서 내가 정희를 택할 수 있을 거 같아? 니가 다 불어버리면 끝인데.
-차정란 : 그건 그렇죠.
-이도훈 : 너한테 이런 부탁을 한 것만으로 이미 어느 정도 결정은 한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차정란 : 오키.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암튼 그럼 나중에 봐요.
-이도훈 : 응.
정란을 감언이설로 꼬드긴 도훈은 곧이어 쌍둥이 언니 정희에게 연락했다. 수업이 먼저 끝나서 차에게 기다리고 있을테니 학생 주차장 쪽으로 오라는 전언이었다.
-차정희 : 동생 보내고 그쪽으로 갈게요. 정란이랑 같은 교양 수업 듣고 있어서요.
-이도훈 : 너희들 모든 수업 같이 듣는 거야?
-차정희 : 다는 아닌데 마지막 끝나는 수업은 일부러 같이 맞췄어요. 집에 같이 가려고요.
-이도훈 : 그럼 오늘은 나 때문에 따로 가는 거네?
-차정희 : 정란이가 먼저 약속있다고 했어요.
물론 정란은 도훈의 지령으로 행동하는 것이지만, 정희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이도훈 : 금방 집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차정희 : 저녁 먹고 온다는 거 보니 아마 늦지 않을까요? 눈치 보니까 남자 만나러 가는 거 같더라고요.
-이도훈 : 남자? 남친이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다지 않았어?
-차정희 : 정란이가 그런 얘기도 했어요?
-이도훈 : 저 번에 조모임 끝나고 맥주 마실 때 했던 거 같은데?
도훈이 둘러댔다.
-차정희 : 정란이가 좀 그래요. 제 동생이긴 하지만.
도훈은 정희가 정란을 디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훈을 앞에 두고 동생을 흉 볼 만큼 은근슬쩍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정희도 정란이가 마음에 걸렸나 보구나.’
[자매끼리 한 남자를 두고 겨뤘으니 신경쓰이지 않을 리가 없겠죠.]
‘이 부분은 미리 대비해 놔야겠어. 셋이 합방하게 되었을 때 은근히 골치 아플 수 있는 문제같아.’
-이도훈 : 암튼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차정희 : 네, 오빠 있다봐요.
20분 쯤 뒤 정희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 밖에 나와 있던 도훈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정희야. 여기."
"아, 네."
정희는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 쓴 모양새였다. 테니스 치마도 입고, 머리핀을 이용해 스타일을 잡았다. 평소 정란은 화려하게, 정희는 수수하게 옷을 입는 편이라 오늘은 누가 누군지 겉모습만 보고선 헛갈릴 정도였다.
"오늘 예쁘게 하고 나왔네."
도훈은 칭찬에 정희가 만족한 듯 베시시 웃었다.
"뭘요. 그냥 입은 건데."
물론 겸양의 표현이었다. 도훈은 그녀가 자신을 의식해 차림새에 신경 썼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갈까?"
"네."
도훈이 보조석 차 문을 열어주자 정희가 치마를 단정히 여미며 차에 올랐다. 확실히 행동 하나하나가 품행이 바른 아이였다. 동생인 정란과 똑같은 생김새지만 여성스러운 매력이 물씬 풍겼다.
둘이 집으로 향하는데 정희는 어제 일이 자꾸 떠올라 말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도훈이 하루 종일 보고 싶었음에도, 막상 얼굴을 보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 했던 것이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도훈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참, 네 동생 말이야."
"네, 정란이요?"
"이건 그냥 하는 얘긴데 태영이가 관심 보이는 것 같던데."
"태영이가 정란이를요?"
정희가 태영의 이름을 호명하며 말끝을 올렸다.
마치 전혀 쌩뚱맞은 조합이라는 반응이었다.
"왜? 혹시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야?"
"혹시 태영이가 오빠한테 말했어요?"
"아니, 그냥 눈치가 그런 것 같더라고."
정희가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란이는요, 음.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괜찮아. 편하게 얘기해. 우리 사이에 뭘."
우리 사이란 말에 정희의 표정이 환히 밝아졌다.
도훈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인정하는 단어처럼 들였다.
"제 동생이긴 하지만 좀 그래요."
"뭐가 그렇다는 건데?"
"남자 보는 눈이 좀 높은 편이에요."
"그 말은 태영이로는 성이 안찬다는 소린가?"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괜히 태영을 비하하는 것처럼 들렸기에 정희가 당황하며 빠르게 수습했다.
"아, 아뇨. 태영이도 괜찮죠. 애가 착하잖아요. 근데 정란이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 친구를 많이 사겼거든요. 은근히 많이 가리더라고요."
"얼굴을 많이 따져?"
"아마도요? 그리고 키도 좀 보고."
"잘생기고 키 큰 남자?"
도훈의 말에 정희가 슬쩍 고개를 돌려 도훈의 옆 모습을 쳐다보았다. 대학생인데도 차를 몰며 운전을 하고 있는 도훈이 그렇게 어른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그래요. 바로 오빠 같은 사람. 아니 오빠요. 하지만 제가 이겼죠.’
도훈이 말했다.
"그랬구나. 난 혹시 둘이 잘되려나 싶었지. 아까 태영이랑 학식 먹는데 태영이가 잘되어 간다는 식으로 얘기하길래."
"정말요? 태영이가 그런 말을 했어요?"
"응."
"아···. 정란이 남자 가지고 노는 데 선순데."
"그게 무슨 말이야?"
"아, 아니에요. 괜히 동생 흉보는 것 같아서 그만 할래요."
"괜찮아. 말해줘 봐. 궁금하다."
"정란이가 남자를 일찍 만나서 그런지 은근히 여우 같은 구석이 있거든요. 예전에도 보면 자기 좋다는 남자들 은근히 등처먹고 그랬어요."
"혹시 태영이도 그럼···."
"어쩌면 정란이가 가지고 노는 걸지도. 아, 이말은 절대 하면 안돼요. 아셨죠? 오빠니까 얘기해주는 거니까."
"응. 알았어. 괜히 들뜬 것 같아서 걱정이네."
‘그 두 사람보단 우리 사이가 더 궁금한데 난···.’
정희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계속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제 첫 경험을 하고 난 뒤부터 도훈을 보면 자꾸 야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오빠가 오늘 집에서 덮치면 어떡하지. 말려야 하나? 아니야. 나도 또 하고 싶은데···. 그럼 내가 너무 밝히는 여자로 보이지 않을까? 아, 정란이 흉을 너무 봤나봐. 오빠가 날 의리없다고 생각할 것 같아···.’
정희가 혼자 상상에 빠져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집 앞으로 도착했다.
"다 왔나. 여기 맞지?"
쌍둥이 자매의 단독주택 앞이었다.
"가자. 과제하러."
"···네."
정희는 도훈을 집에 들인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심장이 터질것처럼 두근거렸다.
***
"오빠, 과일이라도 드시면서 하세요."
"어. 고마워."
도훈이 거실 테이블에 앉아 과제를 하고 있는데, 부엌을 들렀다 온 정희가 손수 과일 깎아왔다. 도훈은 정이를 멈추고 과일을 먹으며 정희와 담소를 나눴다.
"집이 엄청 깔끔하구나."
"어머니께서 청소를 자주 하는 편이세요."
"정희도 어머니 닮아서 깔끔한가 봐."
"아, 아니에요."
"방은 언제 구경시켜 줄 거야?"
"그, 그게···. 일단 과제부터 하고요."
"그래. 아, 근데 요새 날씨 너무 더운 거 같아."
도훈이 반 팔 티의 가슴께를 잡고선 펄럭거렸다. 후끈 남성의 채취가 퍼져나가자 정희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아, 오빠 땀냄새··· 좋아.’
"에어컨 틀어 드릴까요?"
"아니야. 괜히 전기세 많이 나오게."
"괜찮아요. 평소엔 자주 안 트니까. 잠시만요."
정희가 에어컨을 틀자 거실이 곧 시원해졌다. 도훈은 과일을 먹으며 거실에 걸린 사진 하나를 가리켰다.
"어, 둘 중에 누가 너야?"
쌍둥이의 어렸을 적 모습을 찍은 사진에 노란 유치원생복을 입은 정희와 정란이 나란히 손을 잡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미모가 남달랐던 자매는 아역모델처럼 예쁘고 귀여웠다.
"맞춰 보세요."
도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특징을 살폈다.
하지만 원체 얼굴이 닮은 쌍둥이는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했다. 특히 어렸을 때가 그런지 둘 중 누가 정희고 정란인지 구분이 안갔다.
‘오빠가 과연 눈썰미가 있으려나? 내가 왼쪽인 걸 맞추면 좋겠는데.’
"왼쪽."
"헛,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느낌으로."
"대단하세요. 저희 어렸을 땐 너무 똑같이 생겨서 친구들도 헛갈려 했는데···."
"근데 진짜 닮긴 닮았네. 부모님이 엄청 뿌듯하시겠어. 자매가 둘 다 미인이라."
"아니에요, 민망하게."
"진짜로. 근데 나 궁금한 거 하나 있어."
"뭔데요?"
"쌍둥이는 몸도 똑같아?"
"네?"
도훈이 은근슬쩍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아니 얼굴이야 겉으로 보이니까 바로 알 수 있잖아."
"네."
"근데 신체 조건도 똑같은 거야?"
"음···. 거의 그래요."
"키도?"
"네. 둘 다 164.5로 똑같아요."
"어라, 난 훨씬 크게 봤는데 생각보다 안 크네. 얼굴이 작아서 그런가?"
"자꾸 왜 그러세요."
"몸무게도?"
"네."
"몇 키론데?"
"읏, 그건 왜 물으세요."
"그냥 궁금해서. 말해주면 안 돼? 부끄러워할 몸무게는 아닌 거 같은데."
"47이요."
"이햐. 진짜 늘씬하네. 그럼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또 뭐요?"
"가슴도 똑같아?"
도훈이 질문을 던지며 덮썩 정희의 가슴을 옷위로 만졌다.
뭉클하는 감촉과 함께 정희의 풍만한 가슴이 떡주무르듯 주물러졌다.
"아, 아, 오빠. 갑자기 이러시면···."
"왜? 어제도 실컷 만졌는데."
"그, 그래도 과제하는 중이잖아요."
정희가 당혹해하며 피하려고 했지만 도훈의 집요한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정희도 적극적으로 피하고 있지 않았다.
"아, 아···."
"대답해."
"뭘요."
"가슴 사이즈도 같냐고."
"그,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대답 안 하면 계속 괴롭힐 거야."
도훈은 아예 정희의 뒤로 돌아가 두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옷 위라고 하지만, 여름철 얇은 티 하나 사이로 브라만 입은 상태라 가슴의 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정희가 귀밑까지 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가, 같아요."
"뭐라고?"
"똑같다고요. 이제 그만."
정희가 도훈의 손목을 잡더니 밑으로 끌어내렸다.
도훈은 일부러 져주는 척 그녀의 손에 끌려서 배로 내려갔다. 정희가 등 뒤 에 위치한 도훈을 향해 말했다.
"오빠 너무 응큼해요."
"나만 응큼해?"
배로 내려간 도훈은 그대로 손을 밑으로 내려 사타구니를 꾹 눌렀다. 방심하고 있던 정희는 "꺄악" 소리를 지르며 도훈을 저지했다.
"오, 오빠!"
"왜?"
"하지 마요. 저희 과제 해야 하잖아요."
도훈이 정희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유혹했다.
"···너부터 먹고 하면 안 될까? 집에 아무도 없는데."
< 848. 기말 시즌-4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