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7. 기말 시즌-47- >
-차정란 : 전 분명히 어제 말했어요. 언니가 거부하면 못 한다고.
-이도훈 : 알았어. 너는 그냥 분위기만 적당히 깔아주면 돼.
-차정란 : 대체 무슨 생각인데요? 셋이 같이 모텔을 갈 것도 아니고.
-이도훈 : 꼭 모텔을 고집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차정란 : 그럼요? 설마 무슨 까페가서 하자는 거예요?
-이도훈 : 혹시 집에 부모님 계시니?
-차정란 : 우리 집이요?
-이도훈 : 응. 너네 집 좋아 보이던데. 단독 주택이지?
-차정란 : 부모님이 늦게 들어오시긴 한데···. 잠깐, 그러니까 오빠가 우리 집을 오겠다고요?
-이도훈 : 응. 안돼?
-차정란 : 미쳤어요? 무슨 핑계로요! 언니가 집에 남자 들이는 걸 허락할 거 같아요? 그 순딩이가? 말도 안 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이도훈 : 나랑 내기할래?
-차정란 : 무슨 내기요.
-이도훈 : 정희가 나 집으로 초대 하는 지 안 하는지.
-차정란 : 진짜로 오겠다고는 거예요?
-이도훈 : 일단 과제 핑계 대고 집에서 하자고 꼬실 거야.
-차정란 : 언니가 그런 수작에 넘어갈 사람으로 보여요?
-이도훈 : 고기 맛을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끊지 못하거든.
-차정란 : 오빠 설마!
-이도훈 : 너만 눈 감아 주면 돼. 그 다음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차정란 : 오빤 진짜로 미쳤어요. 완전 이상한 사람이었어.
-이도훈 : 싫으면 넌 빠져. 난 정희랑만 해도 상관없으니까.
-차정란 : 와, 말을 또 그렇게 하냐. 진짜 나쁘다, 오빠.
-이도훈 : 그러니까 왜 그렇게 툴툴대? 그렇다고 네 핑계 대고 집에 가는 것도 이상하잖아. 정희는 너랑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전혀 모르고 있는데.
-차정란 : 엄마는 7시 넘어서 와요. 아빠는 그보다 늦고.
-이도훈 : 알았어. 정희 스케쥴은 어떻게 돼?
-차정란 : 오늘은 3시에 끝나요 둘 다.
-이도훈 : 그럼 내가 그 시간에 맞출게.
-차정란 : 오빤 수업 없어요?
-이도훈 : 땡땡이 칠 거야.
-차정란 : 와, 이 오빠 진짜 막 나가네.
-이도훈 : 태영이한테 대출 부탁하지 뭐. 어차피 같이 듣는 수업이니까.
-차정란 : 아, 몰라요. 난 진짜 이 이상은 안 도와줄 거니까 알아서 해요.
-이도훈 : 충분히 도움이 됐어. 나중에 봐.
-차정란 : 돌았어, 진짜.
-이도훈 : 너도 나 보고 싶은 거 다 알아.
정란은 도훈의 마지막 글을 읽었지만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도훈은 피식 웃으면서 등교 준비를 했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세워 둔 차가 주차장에 보이지 않았다.
"아차, 어제 정란이 바래다주고 택시타고 바로 집으로 와버렸구나."
차는 어제 오후부터 내내 학교 주차장에 주차된 상태였다.
하는 수없이 도훈은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간만에 버스를 타려니 영 불편했다. 처음 환생했을 때만 해도 한동안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그새 차를 몰았다고 자가용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여느 때처럼 버스는 만원. 도훈이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함께 탄 여자 승객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쓱 스치는 듯하면서도 어느새 다시 자신을 힐끔거리는 여자들의 시선에 왠지 기분이 좋았다.
‘갑자기 옛 생각이 나네.’
[옛날이요? 전생 말입니까?]
‘아니 이 몸으로 바뀌고 처음 버스에 탔을 때 말이야. 그때 막 여고생들이 나보고 수군거렸잖아.’
[아아, 그런걸 다 기억하십니까?]
‘그때 처음으로 내가 잘생겨졌다는 사실을 체감했거든. 거울로 볼 때보다 더 확실하게 느껴지더라고.’
[기분이 어떠셨나요?]
‘좋았지. 이건 잘 생겨 본 적 없는 남자는 평생 경험할 수 없는 감정이야. 지나가는 여자마다 힐끔거리고, 눈이 마주치면 미소 보내주고, 쇼핑할 때나 심지어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여직원들이 대놓고 친절한 경험말이야.’
[참으로 행복한 삶이군요.]
‘연락은 또 얼마나 오는지 알아?’
[연락이요?]
도훈이 깨톡을 열자 미확인 된 메시지가 주르륵 나열됐다.
‘이게 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온 거야. 망부석으로 자동 답신 되는 애들 빼고도 5명이나 더 있지?’
[거참, 여자들도 유난스럽네요.]
‘난 여자들이 이렇게 적극적인지 처음 알았잖아. 예전엔 선톡 절대로 안하는 줄?’
[저분은 또 누굽니까? 못 보던 이름인데.]
‘누구?’
[저 위에서 3번째 쪽지 말입니다.]
‘나도 모르겠는데.’
도훈이 깨톡창을 열자 맨 위에 주의 문구가 떴다.
(!)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금전 요구 등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진짜로 모르는 사람인데.’
깨톡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미래 :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교양 수업 같이 듣는 사회교육과 조미래라고 해요. 체육과 이도훈 오빠 맞죠? 다름이 아니라 수업 중에 우연히 봤는데 너무 제 스타일이셔서···.
그 뒤로 구구절절 도훈에 대한 칭찬과 언제 시간이 되면 식사 한 끼 하자는 내용이 이어졌다. 도훈은 프로필 사진을 클릭해 보았다. 본인 사진은 없이, 근사한 야경을 찍은 배경만 달랑 있었다.
도훈은 미련 없이 ‘차단’ 버튼을 눌렀다.
[아니, 답장도 없이 차단을!]
‘간간이 이런 쪽지 오는데 답장해 주기도 귀찮아서.’
[그래도 보낸 사람 성의가 있잖습니까.]
‘예쁘면 사진부터 올렸겠지. 이런 애들은 예선 탈락이야. 재고의 가치도 없지.’
[정말 건방져 지셨군요.]
‘잘생기면 피곤하단 말이지.’
[그러다 언제 한 번 큰코다치실 겁니다.]
‘큭. 다쳐도 상관없어.’
[뭐라고요?]
‘내가 한 번 죽었던 건 알고 있지?’
[네. 저승에 가셨다가 다시 환생하셨잖습니까.]
‘나같은 사례가 얼마나 많은 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 신분이 좀 특별하잖아. 어떻게 생각하면 마흔살 넘게 살다가, 다시 20대로 회귀한 느낌이니까.’
[이 경우엔 회춘이라고 해야죠.]
‘암튼. 사람이 죽을 때면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알어?’
[어떤 생각이요?]
‘다시 태어나면 꼭 전생에 못 했던 일을 해보고 싶어져. 할 수 있지만 하지 못 했던 일이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던 일이건 그게 무엇이건. 두 번 후회하고 싶지 않거든.’
[그래서 이렇게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건드리고 다니는 플레이어가 된 거라고요?]
‘그래. 그게 내가 못 살아본 삶이었어. 지금은 그렇게 살 수 있잖아. 할 수 있으면 하고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게 내가 느낀 교훈이었어. 후회는 뒤늦게 찾아오더라도, 나는 오늘만 살아도 좋으니까.’
[정말로 무대책이십니다, 주인님은.]
그때 깨톡이 울렸다.
다른 사람 깨톡엔 반응도 없던 도훈이 눈을 크게 떴다. 보낸 사람이 정희였기 때문이다.
-차정희 : 오빠, 좋은 아침이에요.
정희가 개인톡으로 연락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도 어제의 일이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도훈은 곧바로 답장했다.
-이도훈 : 정희 잘 잤어?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차정희 : 사실 잘 못잤어요.
-이도훈 : 왜?
-차정희 : 오빠 때문에요.
-이도훈 : 나 때문에?
-차정희 : 몰라요. 여자들만 아는 그런 게 있어요.
도훈은 그것이 첫경험과 관련된 통증의 일종이라고 해석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이도훈 : 그랬구나. 미안해.
-차정희 : 오빠가 왜 미안해요. 나도 좋아서 한 건데.
-이도훈 : 참, 과제는 어떻게 됐어?
-차정희 :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연락했어요. 어젯 밤 늦게까지 혼자 해보려고 했는데 다 못 했거든요.
-이도훈 : 무리하지 말래도.
-차정희 : 아니에요. 실은 정란이가 갑자기 밤늦게 외출하는 바람에 그런 거예요. 친구가 응급실 실려 갔다면서.
-이도훈 : 저런. 많이 다쳤데? 정란이 친구면 네 친구이기도 한 거 아냐?
-차정희 : 아니에요. 전 모르는 애들이에요. 서로 노는 부류가 달랐거든요. 헬멧 안 쓰고 오토바이 타다가 머릴 다쳤다는데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가 봐요.
-이도훈 : 그랬구나. 그럼 오늘도 한 번 모여야 하나?
-차정희 : 안 그래도 단톡방에 물어봤는데 태영이는 어제부터 계속 보지도 않는 것 같고···.
태영의 얘기가 나오자 도훈이 둘러댔다.
-이도훈 : 태영이 어제부터 아프데. 장염인가 보더라고. 어제 배아프다고 갑자기 집에 갔잖아.
-차정희 : 장염요? 아···. 그럼 한동안 조모임도 못 하겠네.
-이도훈 : 어쩔 수 없지. 일부러 아픈 것도 아니니까. 너랑 정란이랑 나랑 셋이라도 해야지.
-차정희 : 정희는 아침에 물어보니까 자긴 오늘 바쁘다는 거예요. 내일부터 하자고.
-이도훈 : 흠. 그럼 너무 늦어지는데. 너랑 나랑 둘이서라도 할까?
-차정희 : 괜찮으시겠어요?
-이도훈 : 나야 너 얼굴 보면 좋지.
-차정희 : 알았어요. 그럼 어디서 봐요?
-이도훈 : 음, 너희 집에서 할까?
곧장 답장을 보내던 정희의 대답이 멈칫했다.
도훈이 차분히 기다리자 정희의 답장이 왔다.
-차정희 : 저희 집에서요?
-이도훈 : 응. 왜? 별로야?
-차정희 : 아니 그건 아닌데···. 다른 장소도 많은데.
-이도훈 : 그냥 네 방 구경하고 싶어서.
-차정희 : 아···.
-이도훈 :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너무 급한가?
도훈이 일부러 흘리자 정희가 덮썩 물었다.
-차정희 :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대신 엄마 퇴근하시기 전까지는 끝내야 해요. 집에 남자 친구 데려 온적이 한 번도 없어서 놀라실 거예요.
-이도훈 : 몇시 쯤 돌아오시는데?
-차정희 : 음, 7시 쯤. 전 3시부터 시간 괜찮아요. 오빠는 수업 언제 끝나세요?
-이도훈 : 다행이네 나도 그때 끝나. 그럼 그때 데리러 갈게.
-차정희 : 네. 4시간이면 아마 충분히 끝낼 수 있을 거에요.
-이도훈 : 더 일찍 끝내고 같이 놀면 안돼?
-차정희 : 네?
-이도훈 : 아니야. 그럼 좀있다 봐.
-차정희 : 네, 오빠.
***
오전 수업을 마친 도훈은 여느 때처럼 태영과 학식을 먹었다. 오늘은 시간이 맞아 2학년 과대를 맞고 있는 우선이도 함께였다. 태영은 도훈에게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자꾸 시선을 피했다.
식판을 받고 기다리던 중 우선이 말했다.
"태영아. 너 왜 답장이 없냐?"
"무슨 답장이요?"
"여름 방학 수영캠프 말이야. 참석 여부 확인하려고 문자 보냈는데 너만 답장이 없어."
"아, 형, 저 폰이 어제 박살나 가지고."
"폰? 니 폰 산지 몇 달 안된 거 아니야?"
"네."
"헐. 어쩌다가?"
"그, 그럴 일이 있었어요."
태영이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암튼 지금 대답해 줘도 돼. 참석하는 거지?"
"네."
"애들 많이 참가한데?"
도훈이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1학년들은 2명인가 빼고 다 오는 거 같고, 오히려 저희 동기들이 제일 참석률이 저조하네요."
"다들 뭐하는데?"
"뭐 이런저런 일정이 많더라고요. 가족 여행도 있고, 해외로 나가는 애들도 있고, 무슨 자격증 시험이랑 겹친다는 애들도 있고. 형은 강사로 오시는 거 맞죠? 성수 형이 그러던데."
"어, 맞어. 네가 바쁘구나."
"기말고사 끝나면 바로 방학이잖아요. 이런 건 학기 중에 미리 다 인원파악 끝내놔야지 방학하고 나면 연락두절 되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니라."
"하긴 그렇지."
"형은 근데 방학 때 뭐 따로 하는 거 없으세요?"
"나?"
"네, 뭐 알바를 한다거나 아님 어디 여행이라도."
"난 뭐··· 제자 하나 받기로 했어."
"제자요? 혹시 과외 하세요?"
도훈은 일부러 태영이 들으라는 듯 태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뭐 일종의 과외라면 과외지."
"오호. 역시 형은 능력자라니까. 과외도 금방금방 구하고."
"······."
여전히 태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식판에 밥을 타 셋이 식사를 하는데 우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우선이 양해를 구하고 전화기를 들고 나갔다.
둘만 남게 된 태영은 계속 도훈의 눈치를 보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도훈은 잠자코 있다가 말을 걸었다.
"넌 왜 오늘 별말이 없냐? 집에 우환 있냐?"
"아, 아뇨. 그냥···. 저 형."
"응?"
"어제 말씀하셨던 거 말인데요."
"뭐? 픽업 아티스트?"
"네. 제가 집에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안 받아도 될 것 같아서요."
도훈은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갑자기 왜? 여자친구 사귀고 싶다지 않았어?"
"그게···. 어쩌면 조만간 사귈 수도···."
"엉? 진짜? 누구?"
"아직은 말씀 못 드리는데 암튼 그럴 것 같아요."
도훈은 태영이 말하는 대상이 정란임을 알고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잘됐네. 축하한다. 사실 그런 잡기술 배워서 뭐하겠냐. 여친 있으면 필요도 없는 건데."
"네. 어쨌든 형 덕분이에요."
"나? 내가 뭘 했다고."
"음, 암튼 형한테 고맙다는 말 하고 싶었어요."
"참나.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형. 오늘은 제가 후식 쏠게요."
마침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우선이 태영의 말을 듣고 반색했다.
"왠일이냐? 니가?"
"엇, 선배도 같이 사드릴게요."
"폰도 고장 났다는 얘가 무리하네. 무슨 좋은 일 있냐?"
"어쩌면 조만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요."
태영은 도훈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미안했지만, 그덕에 정란과 잘되고 있다고 착각하는 중이었다.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도훈만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거참, 정란이 어젯밤 홀랑 따먹었다는 사실 알면 또 상처받겠네. 오늘은 자매 둘 다 자빠뜨릴 건데 말이야.’
< 847. 기말 시즌-4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