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3. 기말 시즌-43- >
아무도 없는 공터 한가운데 삐걱거리는 그네 소리가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낮에 아이들이 뛰어놀 때는 그렇게 활기차 보이던 놀이터가, 어슴푸레한 조명이 비추는 저녁이 되자 범죄자가 출몰할 것처럼 스산하게 느껴졌다.
정란이 한기를 느끼는 듯 양손을 겨드랑이 끼우며 몸을 떨었다.
‘이 새끼들 진짜, 밤늦게 사람 불러 놓고 뭐하는 짓이야?’
정란은 동창들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여전히 숨바꼭질 놀이나 하는 동창들의 정신연령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간만에 연락했음에도 흔쾌히 부탁을 들어준 성의를 봐 나왔더니만.
"야! 김창건! 이런 거 하나도 재미 없거든! 좋은 말 할 때 나와라."
정란이 놀이터 한가운데서 소리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정란이 다시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박평구! 당장 안 튀어나와? 오랜만에 누나한테 맞고 싶어 그러는 거지 지금 너희들!"
여전히 묵묵부답.
공원 한가운데 외따로 떨어진 놀이터라 밤에는 지나가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정란은 문득 공원 입구에 적힌 우범지대 표식이 떠으르며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괜히 인적 드문 곳에 있다가 범죄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든 것이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읽은 도시 괴담이 떠오르며 정란의 얼굴이 점점 파리해졌다.
"니들 진짜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나 집에 갈거야!"
겁을 먹은 정란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칠 때였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한 인영이 그녀의 등 뒤에서 불쑥 말을 걸어왔다.
"차정란."
정란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호명되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아 씨발! 깜짝이야! 어? 야! 너희···. 도, 도훈 오빠?"
뒤늦게 얼굴을 확인한 정란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바로 등 뒤에서 도훈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딱딱히 굳은 표정이 굉장히 무서웠다.
"뭘 그렇게 놀래니? 못 볼걸 본 사람처럼?"
"제, 제가 언제 놀랐다고요?"
정란은 최대한 침착을 가장했지만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도훈의 느닷없는 등장은 귀신만큼 충격적이었다.
‘뭐야? 창건이가 분명 통화로 혼내 줬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거지?’
도훈이 계속 말했다.
"왜? 너무 말짱해 보여서 놀랐니? 네 친구들하곤 아까 재밌게 놀아줬어. 혹시 병원비 많이 나오면 나한테 청구하라고 해. 물론 그 다음엔 조의금으로 갚아준다고."
"오, 오빠···."
"차정란."
"네, 네?"
"하는 짓이 너무 깜찍한 거 아니니?"
도훈이 협박하듯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하필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새까맣게 암전되어 있었다. 커다란 덩치가 지금만큼 위협적으로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평소 살가웠던 음성은, 당장 누군가를 죽이고 온 사람처럼 지나치게 차분했다.
정란의 몸이 덜덜 떨렸다. 단박에 일이 그르쳤음을 눈치챘다.어떻게 도훈이 일진 동창들을 모두 해치웠는지 알 수 없었다. 특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의 전 남친이던 창건은 실제 현역 생활을 뛰고 있는 조폭이었다.
‘도, 도훈 오빠가 그렇게 싸움을 잘했다고? 이럴 수가.’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운동을 배웠다 해서 다들 싸움을 잘하는 건 아니다. 사람을 거리낌 없이 때릴 수 있는 잔인함이란 속성은 운동능력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도훈을 얕봤던 정란은 제대로 한 방 먹은 것이었다.
정란은 자신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직감했다. 그녀의 뱀같은 혓바닥이 반사적으로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저,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봐요."
"오해? 무슨 오해?"
"그, 그러니까, 제 친구들이 제 의도를 오해하고 뭔가 일을 벌인 것 같은데요···."
도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었다.
그는 매우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배신당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할 이유는 전생에 충분히 누적된 상황이었다. 정란의 얼굴위로 전 마누라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알아서 실토하는 건가?"
정란은 도훈이 너무 무서웠다.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단박에 깨달았다. 걸크러쉬라고 으스대던 정란이었지만, 진심으로 강한 상대 앞에선 도저히 허세를 부릴 수 없었다.
더구나 정란은 친구들이 어디까지 불었는지 알지 못했다. 허튼 변명을 했다간 도훈의 화를 더욱 돋울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간 후회하게 될 것을 직감했다.
도훈이 분명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아니, 넌 나한테 사과부터 했어야 해.
끔찍한 상상에 소름이 돋은 정란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교활함에 절정에 달한 능수능란한 표정연기였다.
"흐, 흑! 죄송해요, 오빠. 진짜 그럴 생각은 아니었거든요···."
"아니었어?"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봐요. 흑흑!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도훈은 정란의 울음이 악어의 눈물이란 걸 간파했다.
그녀의 속마음을 훤히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씨발, 쪽팔리게 진짜. 창건이, 이 개새끼! 너는 친구도 아냐. 그걸 죄다 불었다 이거지? 나를 여기까지 끌어들이고.}
"진짜로 다신 안 그럴게요 오빠, 흑흑."
{그래도 설마 오빠가 우는 여잘 때리기까지 하겠어? 지가 싸움 잘하면 어쩔 건데? 이번만 무사히 넘어가면 그만이야.}
정란의 속마음을 꿰뚫은 도훈의 표정이 더욱 딱딱해 졌다.
예쁘고 어린 여자가 저리 서글피 울며 사과하면 마음이 동할 만도 하건만, 겉 다르고 속 다른 본심을 읽게 되자 그 가증스러움에 되려 혐오감만 밀려왔다.
‘저런 천하의 개썅년을 봤나.’
[그러게요. 정희 양과는 완전 딴판이네요. 어떻게 한 배에서 나고서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요? 가증스럽기 짝이 없군요.]
사람에게 실망한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도훈은 정란의 이중적인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또한 이런 여자를 공략해야만 하는 자신의 상황이 서글퍼졌다.
‘이번 미션은 정말 하고 싶지 않군. 마음에 안들어.’
[주, 주인님···.]
‘내가 빻녀도 먹어보고, 메갈도 먹고, 심지어 일본에서 포르노 찍을 육덕도 가리지 않고 닥치고 다 처먹었지만, 이런 인성 쓰레기까지도 먹어야 하는 거야?’
[그 모순까지 견디는 게 바로 플레이어의 사명이지요.]
‘···뭐?’
[좋아서 여잘꼬시고 따먹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게 프로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요? 주인님께서요.]
‘프로···.’
도훈은 자존심과 실리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다.
당장 정란을 내치고 쌍둥이 미션을 엎어 버리고 싶었다.
사람 때리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해야 한다면 능히 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게 도훈이었다. 딱히 여자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쌍둥이 미션엔 치명적인 패널티가 존재했다. 바로 실패 시 좆이 두 개로 갈라지는 저주가 걸리는 것이었다.
‘씨발, 진짜 마음 같아선 다신 저딴 양아치 짓 못하게 참교육을 시켜주고 싶지만.’
도훈은 고민 끝에 실리를 택하기로 했다.
물론 쉽게 정란을 용서한 건 아니었다.
그의 신조는 받은 대로 갚아준다는 것이다.
"그쳐. 징징대는 여자는 질색이니까."
"흐, 흣, 네, 죄송해요. 정말."
"한가지만 묻자."
"네."
"어떻게 태영이 폰으로 연락한 거지? 혹시 태영이랑 같이 작당했어?"
"아니에요. 실은···."
정란이 태영의 폰을 빌려 문자를 보낸 이야기를 요약했다. 어차피 들킨 마당에 태영을 끌어들인다 한들 삼자대면에서 뽀록날 게 뻔했으니까.
모든 내막을 알게 된 도훈이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정란에 대한 분노도 분노지만, 보빨에 미쳐버린 태영이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 없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태영이가 이렇게 나한테 실망을 주는구나.’
[태영군을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렇게 여우같은 정란양이 찰싹 붙어서 꼬드긴다면 태영군으로서도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 이건 이제껏 태영이가 짝사랑했던 여자를 뺏었던 마음의 빚은, 이걸로 갚는 것으로 퉁치자. 정란이 설마 이런 짓을 벌일 것은 놈도 몰랐을 테니까.’
"정말 가지가지 했네.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래? 고등학교 친구들 시켜서 패 죽이고 싶을 만큼 내가 미웠어?"
"······."
정란은 이번 질문에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도훈이 다시 물었다.
"대답해 보라고! 내가 너한테 뭘 얼마나 잘못했다는 거야?"
"···오, 오빠가 절 싫어하셨으니까요."
"뭐?"
이미 마음의 소리 스킬 시간이 끝났기에 도훈은 정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이제부턴 그녀의 태도를 보고 짐작하는 수밖에.
"맞잖아요! 언니만 좋아하고. 저는 대놓고 무시하고. 다 알아요, 저도!"
"정희가 여기서 왜 나와?"
"솔직히 자존심 상한단 말이에요! 내가 언니랑 뭐가 다른데요? 우린 쌍둥이에요! 똑같이 생겼잖아요!"
정란이 언성을 높이며 대들었다. 말하다 보니 스스로 감정에 취해 복받친 것 같았다. 도훈은 저것마저 연기라면 대단한 연기력이라고 칭찬을 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란이가 저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단 말이야? 공략 순서 때문에 조금 거리를 뒀을 뿐인데.’
[흐음, 사람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답답하네. 마음의 소리도 쿨이고. 아, 그래 정보창 열어봐. 진심을 알아야겠어.’
[넵, 차정란 양의 정보창을 띄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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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차정란 (비처녀, 15세 6개월)
나이 : 20 #날라리 #도발적 #남성 편력
호감도 : 56/100
개방성 : S
성감대 : 겨드랑이, 발등, 클리토리스
*애무 포인트 : 섹스할 때 키스해 주는 걸 좋아합니다.
성욕지수 : 매우 높음 (임신확률 : 87%)
공략팁
*위 대상은 당신과 애증 관계입니다.
-그녀는 남자를 무척 밝힙니다.
-그녀는 중학생 때부터 발랑 까졌습니다.
-남자친구를 자주 갈아 치우며, 특유의 바람기로 사귀는 중에도 몰래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녀는 당신에 대한 짝사랑이 거부당한 것에 앙심을 품었습니다. 특히 쌍둥이 언니와 당신의 관계에 집착과도 같은 질투를 느끼며, 당신을 파괴하려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증이 강한 만큼 계기만 생기면 금세 당신에게 돌아설 것입니다.
-추천행동 : "뺏을 수 있으면 뺏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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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본 정란의 정보창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져 있었다.
도훈은 급격히 떨어진 호감도를 몇가지 키워드에 대입해 분석했다.
‘집착, 애증, ···파괴? 뭐야, 가질 수 없으면 부셔버리는 주의인가? 확실히 정상은 아니네.’
[정란 양이 확실히 눈치가 빠르군요. 주인님과 쌍둥이 언니와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네요. 그래서 주인님을 해코지하려고 했던 것이고요.]
‘하, 어이가 없네. 한마디로 형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린치를 가하려고 했다는 거 아니야? 단지 자길 바라봐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여자가 질투하면 그보다 무서운 건 없죠. 더구나 일진 출신이라면 더더욱 과격할 수 밖에 없고요.]
‘에이 씨. 괜히 봤어. 아깐 진짜 패 죽여버릴까 했는데 정보창 보고 나니 마음 약해지네.’
[용서하실 생각입니까?]
‘용서? 아니. 그건 앞으로 정란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댓가없는 용서는 없는 거야.’
[댓가라뇨?]
‘저 날라리가 제정신 차리게 혼쭐을 내줘야지.’
"왜 대답을 못해요? 솔직히 할 말 없죠? 언니가 더 예쁜 것도 아니고, 완전 똑같이 생겼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지금 같은 태도 때문이야."
"제 태도가 뭐요!"
"버릇없이 바락바락 대드는 거."
"······."
도훈의 일침에 흥분했던 정란이 꾹 입을 다물었다.
복받쳤던 감정이 천천히 가라앉자 흥분한 나머지 너무 도훈에게 솔직하게 말한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정란아."
"네."
"너 나 좋아해?"
도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긴말 한 것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했었죠. 지금은 아니에요."
"언니 때문이야?"
"아니요."
"그럼."
"그냥 싫어요. 다 싫어요. 오빨 좋아했던 저도 싫고, 언니도 싫어요. 다 집어치우고 싶어요."
도훈이 울먹이는 정란의 손을 감싸쥐었다.
이번만큼은 악어의 눈물이 아니었다.
상처받은 자존심과, 후회가 담긴 눈물이었다.
"흑흑, 오빠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도훈은 기시감이 드는 대사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역시 쌍둥이는 뭔가 통하는 건가.’
"진짜로 나쁜 사람이라고요! 흑흑!"
도훈의 가슴을 두들기던 정란은 와락 도훈의 넓은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도훈에게 다시 내몰고 있었다. 아무리 도훈이 미워졌어도, 전날까지 좋아했던 감정이 쉽게 사라질 순 없었다.
애증의 반댓말은 지독한 집착이므로.
도훈이 서글프게 우는 정란을 감싸 안은 채 등을 토닥였다.
그녀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하자, 조금은 납득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꾸준히 호감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과 또 바람을 맞히는 식으로 기만하는 등 도훈 역시 과실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후-. 내가 어떻게 했음 좋겠어, 그럼?"
"몰라요,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어. 언니랑은 아까 대체 뭐했던 거에요? 왜 둘 다 연락이 안 됐어요?"
"정희가 말 안 했어?"
도훈은 정란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일부러 정희를 발음할 때 감정을 가득담았다. 예상대로 정란은 도훈의 가슴팍을 밀치며 벗어나더니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대꾸했다.
"둘이··· 했구나?"
< 843. 기말 시즌-43-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