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2. 기말 시즌-42- >
"웃어? ···형님, 이 새끼 웃는데요?"
빨간 머리가 등빨이 가장 좋아 보이는 사내에게 말했다. 양옆의 쭉정이들과 달리 제법 덩치가 좋아 보이는 사내는 도훈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이도훈이냐?"
도훈은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처음 등장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놈들은 목적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일단 맞고 시작하자."
도훈은 이름이 불린 순간부터 기민하게 감각을 끌어 올린 상태. 덩치 큰 사내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그 뒤를 바라보는 순간 뭔가를 직감하고 바짝 고개를 숙였다.
부웅-!
도훈이 머리를 숙이는 순간 등 뒤에서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들렸다. 허공을 가른 각목이 애꿎은 그네줄을 강타하는 순간 도훈이 곧바로 몸을 반전시키며 자신을 뒤에서 기습한 놈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리고는 벼락같은 업어치기.
쿵!!!
뒤통수를 노린 각목을 피한 뒤 업어치기로 반격하는 동작은 너무나 순식간이었기 때문에 눈앞의 양아치들은 감히 움직일 생각도 못 했다. 등부터 땅바닥에 처박힌 놈이 기절하고 나서야 양아치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미친!"
"저, 저 새끼 뭔데?"
"운동을 배웠다더니, 유도 선수 출신이었어?"
다들 놀란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는데 도훈이 건방진 자세로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그것은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한 의도적인 허세였다.
"누가 그래?"
"뭐, 뭐라고?"
"누가 나보고 운동 배웠다고 누가 알려줬냐고."
도훈이 배후를 물었다. 이들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게다가 처음에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것을 보아,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습격한 것으로 판단했다.
‘뭐지, 이 쌩양아치 새끼들은?’
[혹시 지난번에 그 조폭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야? 조폭이라는 놈들이 이렇게 허술할 거 같아? 이건 완전 쌩양아치 수준이잖아.’
놈들은 너무 어설펐다. 게다가 한 놈 정도를 제외하면 덩치도 왜소한 것이 도저히 조폭처럼 보이질 않았다. 거기다 나이도 겨우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을 정도로 보이는 옛된 얼굴이었다.
[혹시 최근에 원수진 사람이 있으십니까?]
‘최근? 혹시 조동탁인가?’
[오빠호빠의 에이스 조동탁이요?]
‘그래. 나 때문에 강제 관장 당하고 엠뷸런스 실려 간 놈 있잖아. 이런 양아치들에게 린치를 사주할 놈은 조동탁밖에 없을 것 같은데?’
[괜히 넘겨짚는 게 아닐까요? 조동탁을 주인님이 골탕 먹인 건 맞지만, 주인님이 했다는 증거도 없는데 억하심정을 품을 리가요.]
‘하긴. 그것도 그렇네.’
도훈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움찔한 양아치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동시에 덮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나 뻔한 흐름이었다.
‘내가 유도만 배운 줄 알았지?’
도훈은 재능모방자 스킬을 이용해 관계한 여성의 주특기를 습득했다. 일전에 선보인 유도는 고은성의 보디가드 한지연에게서 익힌 것. 그리고 지금 보여주는 발차기는 바로 국대 선발 직전까지 나갔던 육정음에게 얻은 것이었다.
퍽퍽!
눈 깜짝할 사이에 발차기 두 번이 오가더니 양아치 두 놈이 나가떨어졌다. 어찌나 빠르고 경쾌한지 어디를 어떻게 맞은지도 모르고 기절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덩치 큰 한 놈은 달랐다.
놈은 도훈의 발차기를 보더니 가드를 굳건히 올리고 육탄돌격을 시도했다. 몇 대 맞더라고 급소를 최대한 보호해 근접전으로 붙으려는 것이었다.
‘이놈은 싸움 좀 하는 놈인데?’
한눈에 봐도 날랜 움직임. 게다가 떡대도 상당해서 체급으로도 도훈을 상회할 정도였다.
도훈이 뒷발차기로 가드를 두들기자 파워에 밀린 녀석이 모래 바닥을 쓸며 두세 걸음 뒷걸음질했다. 제대로 무게를 실은 그의 뒷발차기는 과장해 말하면 샌드백으로 천장까지 때릴 정도로 강력했다. 그것을 버텼다는 말은 상대의 맷집이 좋다는 반증이었다.
도훈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안 아프냐?"
"으으! 죽인다, 이 개새끼."
"잠깐. 싸우기 전에 하나만 묻자."
"뭐?"
"너희들 누가 시켰어? 깽 값은 받아야 할 거 아냐."
"알고 싶음 나 때려 눕혀보던가 새끼야."
놈이 다시 돌진했다. 녀석의 튼튼한 내구성을 확인한 도훈이었기에, 쉽사리 공격을 하는 것보다 확실한 기회를 노리는 편이 났다고 생각했다. 도훈은 빠른 횡스텝으로 거리를 벌리더니 로우킥으로 하체를 두들겼다.
뻑!
둔탁한 소리가 날 만큼 강한 일격이었음에도 황소같은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게 최선이냐?"
"아니."
도훈이 한 번 더 속도를 올려 하체를 후렸다.
뻐억!
이번엔 상당히 강하게 들어갔는지 놈의 무릎이 휘청이며 주춤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시선은 도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와, 이 새끼 뭐지?’
[왜 그러십니까?]
‘앞에 쓰러진 놈들하곤 격이 다르잖아? 싸움을 엄청 많이 해본 놈 같아. 보통 하체를 두들기면 시선이 분산되기 마련인데 끝까지 가드를 풀지 않고 있어.’
[확실히 상당히 튼튼해 보입니다. 주인님 정도의 피지컬에서 나오는 타격을 그냥 버티는군요.]
‘쉽게는 안 되겠는데.’
도훈의 로우킥을 버텨낸 놈이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엔 상체를 바짝 숙이고 허리를 들이박는 것처럼 달려드는 동작이었다.
‘파운딩?’
놈의 의도를 깨달은 도훈이 니킥으로 응수했다. 머리를 양손으로 잡고 니킥을 날리자, 도훈을 넘어뜨리려던 놈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허억, 허억. 이 새끼. 너, 뭐하는, 놈이야?"
적절한 반격으로 체력을 아낀 도훈에 비해, 상대는 몇 번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순식간에 지쳐버렸다. 커다란 덩치를 체력이 못 따라 주는 결과였다.
"알고서 찾아왔잖아. 이도훈이다."
"너, 새끼, 내가 허억, 누군지 알고, 허억."
"누군데 니가?"
"석산파라고 들어봤냐?"
‘석산파?’
[그때 주인님을 스카웃 하려고 했던 칼자국 난 조폭이 석산파 아니었습니까?]
‘어 맞네. 이름이 최민수였던가?’
[네 맞습니다. 명함도 받으셨죠.]
"너, 최민수가 보냈냐?"
"최, 최민수라고? 미친! 이 새끼가 감히 누구 앞에서 형님 이름을 함부로!"
"최민수가 네 형님이야?"
"아가리 확 찢어 버리기 전에 조용히 못 해?"
덩치가 흥분하자 도훈이 진정시켰다.
"잠깐 있어 봐. 확인 좀 해보게."
도훈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지난번에 받았던 민수의 명함을 꺼냈다. 하도 화려해서 따로 챙겼던 기억이 났다. 금박의 테두리로 된 명함에는 "㈜도원건설 최민수 실장"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도훈이 명함을 내밀며 물었다.
"이거 맞지. 최민수. 너네 형님."
덩치는 익숙한 명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대경실색해서 물었다.
"아, 아니 어떻게 미, 민수 형님을!"
해당 명함은 다른 말로 골든 카드라고 불렸다. 석산파의 서열 2위인 민수가 보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미, 민수 형님을 어떻게?"
"어, 어쩌다 알게 된 사이."
석산파는 조직의 위계가 상당히 엄했다. 특히 이제 막 생활을 시작한 창건에게 있어 서열 2위 민수는 감히 눈도 못 마주칠 만큼 우러러보는 존재였다.
도훈은 민수의 이름이 나오자 덩치가 꼼짝못하는 것을 보고 핸드폰을 꺼냈다.
"왜? 못 믿겠음 확인시켜줘? 너네 형님 바꿔줄까?"
도훈이 명함에 적힌 번호를 누르려고 하자 덩치가 바짝 엎드렸다.
"아, 아니 자, 잠시만."
"잠시만? 내가 니 친구냐?"
"아, 아닙니다. 형님 제가 사람을 몰라뵙고 죽을 죄를 졌습니다."
창건은 고등학교 때부터 알아주는 주먹이었다. 탱크처럼 강력한 맷집과 불도져 같은 돌파력으로 지역 내에선 상대가 없다시피 했다.
따라서 도훈과 몇합 겨루는 순간 상대가 자신보다 몇 수 위에 있음을 단박에 알아챘다. 싸우다 보면 결국엔 자신이 쓰러질 것이라는 것도.
‘실력이 보통내기가 아냐. 민수 형님이랑 아는 사이라는 걸 보면 우리 쪽에 발을 걸친 사람 같기도 하고. 정란이는 왜 하필 이런 사람을 건드린 거지?’
"너 몇살이냐?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스, 스물입니다."
"스물? 하-. 이 새끼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
"누가 시켜서 왔는데? 혹시 민수···."
"미, 민수 형님은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럼 누구?"
창건은 갈등했다. 정란의 이름을 함부로 팔았다간 그녀를 배신하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지나간 고등학교 동창 간의 의리보다 앞으로 평생 해 나아가야 할 조직 생활이 더 중요했다.
"저, 정란이가···."
"정란이? 너네 혹시 차정란이랑 아는 애들이야?"
"네."
"저놈들도?"
"네. 동창입니다."
"차정란이 시키드나? 뭐라고 하면서?"
"그, 그게."
"괜찮아. 말해봐."
"혀, 형님이 정란이를 스토킹한다고···. 좀 떼어 달라고."
"하-. 차정란이가 그랬어?"
도훈이 허탈감에 웃었다.
분명 놀이터에서 만나자는 연락은 태영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태영과 정란이 서로 짜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는 소리밖에는 안 되었다.
[김태영군이 설마 배신한 겁니까?]
‘하-. 이 새끼 오냐오냐 했더니 내 뒤통수를 쳐?’
도훈은 정란보다는 태영의 배신이 더 뼈아팠다.
도훈의 표정이 무섭게 변하자 창건이 겁을 먹고 땅바닥에 무릎 꿇었다.
"민수형님 지인분 것도 모르고 저희가 죽을 죄를 졌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고개 들어봐."
"네, 넵."
"지금 정란이 어딨어?"
"그, 그게 저도 잘."
"연락은 되지?"
"네."
"전화해서 나오라고 해."
"여기로요?"
"그래."
"호, 혹시 정란이를···."
창건이 그래도 친구라고 정란을 감쌌다.
도훈이 어이없어하며 대꾸했다.
"설마 여자를 패겠냐? 부르기나 해."
"네, 넵."
창건은 곧바로 정란에게 연락해 거짓말을 했다.
도훈을 혼쭐내줬으니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통화를 끝낸 창건이 말했다.
"통화했습니다, 형님."
"나온데?"
"네. 30분 안에 나온다고."
"너 내가 정란이 스토킹할 얼굴로 보이냐?"
무릎 꿇은 창건이 고개를 들어 도훈을 우러러보았다.
훤칠한 키. 잘생긴 외모. 거기다 말도 안되는 싸움 실력까지.
아무리 정란이 예쁘다고 해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사내였다. 더욱이 조직에 몸담고 있는 창건의 입장에선, 민수와 안면이 있는 도훈이 훨씬 대단해 보였다.
"절대 아닙니다."
"그치? 나도 지금 어이가 없거든?"
"죄송합니다. 정란이 말만 믿고···."
"근데 니들 좀 심하네. 각목으로 뒤통수 후려치다 뒤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죄, 죄송합니다. 확실히 한다는게."
"내가 열 받아서 그냥은 못 보내겠고, 한 대씩만 맞자."
"···네?"
"귀 안들려?"
"아, 아닙니다."
"애들 깨워."
창건이 부리나케 움직여 쓰러진 친구들을 깨웠다. 단톡방에 있던 동창들 셋과, 오토바이를 타고 따라온 아는 동생이었다.
네 사람이 정신을 차리자 도훈이 말했다.
"엎드려 새끼들아."
이미 창건에게서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네 사람은 군말 없이 땅바닥에 엎드렸다.
"이건 첨 보는 사람 겁도 없이 각목으로 후려치려 한 죄."
뻑!
도훈이 힘차게 각목을 휘둘러 엉덩이를 내리쳤다.
먼저 맞은 놈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도훈은 놈을 발로 밀어 치우고는 두 번째 놈을 응징했다.
"이건 자세한 사정 알아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사람을 린치하려고 한 죄."
뻑!
"넌 그냥···. 못 생긴 죄. 염색 빼라 새끼야."
뻑!
어찌나 세게 때렸던지 3번째 놈을 때렸을 때 각목이 두 동강이 났다. 반토막 난 각목을 든 도훈이 마지막으로 남은 덩치 큰 창건을 쳐다보았다.
"어라? 때릴 게 없네."
"그냥 맞겠습니다!"
창건은 민수에게 혼날 것이 두려웠기에 매맞기를 자청했다.
도훈이 씩 웃었다.
‘그 조폭도 도움이 되는 구나.’
"안 때린다곤 안 했는데? 다리 벌려."
"네, 네?"
"벌리라고 새끼야."
도훈이 발로 다리를 확 젖히자 창건이 엎드려 뻗친 상태로 다리를 넓게 벌렸다. 도훈은 벌어진 다리 사이에 위치하더니 부러진 각목을 창건의 엉덩이에 찔렀다.
"헉!"
"물어."
"무, 물라고요?"
창건이 괄약근에 힘을 꽉 주며 각목을 붙잡았다.
만약 도훈이 진짜로 힘을 주어 찔렀다면 큰 상처를 입을 뻔한 위치였다. 손을 놓아도 각목이 서는 것을 보면서 도훈이 말했다.
"니들 한 번만 더 이따위 양아치 짓하면 다음에는 확 똥구멍에 각목 박아 버린다. 알았어?"
"네, 넵!"
"민수 씨 얼굴 봐서 봐주는 거니까 얼른 꺼져."
"넵!"
도훈에게 두들겨 맞은 양아치 넷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
혼자 남게 된 도훈은 다시 그네에 걸터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태영이 남긴 문자를 두 번 세 번 읽으며 재확인했다.
‘···이상하긴 하네.’
[뭐가 말입니까?]
‘다시 보니 태영이가 남긴 문자. 평소 말투랑 좀 다른데?’
[태영군의 폰으로 온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정란양과 태영군이 내통한 것은 사실인 것 같은데요.]
‘뭐 그건 정란이 오면 두고 볼 일이지. 하여간 이 년 내가 곱게 보내나 봐라. 어디서 쌩양아치 같은 짓을.’
도훈이 담배를 물고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한 여자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확인하니 정란이었다. 도훈은 재빨리 모습을 숨긴 뒤 정란이 놀이터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뭐야? 이것들 놀이터로 오라면서 어딜 갔어?"
정란이 영문을 모르고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놀이터에서 기다린다는 동창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부러진 각목 잔해만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 842. 기말 시즌-42-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