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4. 기말 시즌-34- >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모텔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클리닝 이후 처음 발을 디딘 모양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깔끔한 모텔의 상태에 정희도 적잖이 안심했다.
‘모텔이 이렇게 깔끔하구나. 우리 집보다 나은 것 같네.’
가운데 커다란 침대가 놓인 모습은 신혼방을 연상시켰다. 이리저리 방안을 둘러보던 정희는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 근데 여긴 거울이 왜 이렇게 많아요?"
"거울?"
"네. 사방에 다 있잖아요. 침대 머리맡에도 있고 옆에도 그리고 천장에도."
도훈은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대답하질 않았다.
"방을 넓게 보이려고 그런 게 아닐까?"
"아 그렇구나."
‘정확한 이유는 좀 있다 알아서 깨닫게 될 거야.’
도훈은 씩 웃으며 화장대 앞 의자를 빼 걸터앉았다
"난 여기서 작업하면 될 것 같아."
"네. 오빠가 컴퓨터 쓰실 거죠? 전 그럼 여기서 노트북으로 할게요."
"응. 그래."
정희는 화장대에서 살짝 떨어진 응접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펼쳤다. 모텔까지 따라와 놓고도 여전히 조모임 과제에 신경쓰는 모습이 정말로 아무 의심없는 순진한 처녀였다.
도훈은 시작부터 본색을 드러냈다간 정희가 겁을 먹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 처음엔 조용히 과제에만 집중했다. 열심히 과제에 힘을 쓰다 보니 바깥의 뜨거운 날씨 때문에 점점 방안이 후덥지근해졌다.
도훈은 몰래 통합 리모컨에서 건전지를 빼내 숨긴 뒤 정희에게 물었다.
"더운데 에어컨 좀 켜도 되지?"
"아, 네. 저도 마침 그 생각하고 있었어요."
"실은 여기로 온 이유가 마음껏 에어콘 빵빵히 틀려고 했던 것도 있는데 말이지."
"맞아요."
도훈이 리모컨을 들어 에어컨을 켜는 시늉을 했으나, 베터리가 빠진 리모컨이 작동될 리가 없었다. 한참 에어컨을 향해 리모컨 버튼을 누르던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라? 이거 고장인가 본데?"
"고장이요?"
"아무리 눌러도 안 되는데? 정희 네가 해볼래?"
정희가 리모컨을 인계받아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당연히 될 리가 없었다. 도훈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장 맞나 봐. 아, 너무 더운데."
"그러니까요."
"방을 바꿔 달라 해볼까?"
정희가 살짝 망설였다. 2만원짜리 대실로 방을 빌려놓고 1시간 가까이 흐른 지금 방을 교체해 달라고 말하기가 민망했다.
"그냥 창문을 활짝 열까요? 그럼 좀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자."
도훈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깥에서 바람이 불어와 조금은 나아졌지만, 원체 뜨거운 날씨 탓에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이래도 여전히 덥네."
"그러게요. 오빠 땀을 너무 많이 흘리셨어요."
도훈은 실제로 땀 때문에 위에 받쳐 입은 셔츠가 땀에 젖은 상태였다. 도훈이 민망해하며 말했다.
"안 되겠어. 차라리 찬물로 샤워라도 해야지."
"샤, 샤워를요? 지금요?"
"응. 그럼 한결 나을 것 같아서."
정희는 난처했지만, 도훈이 워낙에 더위를 많이 타는 것 같아서 말릴 수가 없었다.
"오빠 편한 데로 하세요."
"그래. 나 잠깐 샤워하고 올게."
"네."
도훈이 샤워실로 들어갔다. 옷을 입은 채 들어갔기 때문에 잠시 후 안에서 옷 벗는 소리가 났다. 혼자 방에 남겨진 정희는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졌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정희는 티비를 켜려고 리모컨을 눌렀다. 그러나 건전지가 빠진 리모컨이 작동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티비에서 전원 버튼을 직접 눌렀다.
"아!"
하필 맞춰진 채널이 성인 채널이었다. 시작부터 남녀 두명이 얽혀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오자 정희가 화들짝 놀라며 몸둘바를 몰랐다.
"아, 아니 이게!"
하필 볼륨까지 올라간 상태라 큰 소리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안에서 샤워를 하고 있던 도훈이 무슨일인가 하고 물었다.
"정희야? 무슨 소리야?"
"아, 아니요! 잠시만!"
정희가 후다닥 티비를 껐다.
하지만 이미 도훈이 눈치챈 것 같았다.
‘아흑, 어떡하지. 하필 왜 저런 게 틀어져 있는 거야.’
정희가 몸 둘 바를 모르는데 안에서 도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희야. 미안한데 혹시 수건 있으면 하나만 갖다 줄래?"
"수건요?"
"응. 실수로 안에 있던 수건을 샤워기로 다 적셔 버렸네."
"잠시만요."
정희가 후다닥 화장대에 비치된 수건을 집어 들고 샤워실 문을 노크했다.
"여, 여기 손잡이에 걸어두고 갈게요."
"응, 고마워."
정희는 문고리에 수건을 걸어두고 후다닥 침대에 뛰어왔다.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유난히 심장이 콩딱거렸다.
‘어휴, 오빠랑만 있으면 왜 이렇게 실수를 하는 거야. 차정희. 정신차려. 너 과제하러 여기 온 거야. 다른 생각 하지 마.’
정희가 겨우 멘탈을 잡고 있는데 샤워를 마친 도훈이 안에서 나왔다.
"오, 오빠!"
정희는 도훈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도훈이 옷을 입지 않고 타월로 주요부위만 가린 채 나온 것이었다. 놀란 정희가 소리쳤다.
"뭐, 뭐에요 지금! 오, 옷은 왜!"
도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수건 있는곳에 옷을 같이 올려놨는데 샤워기 물줄기가 너무 세서 다 젖어버렸지 뭐야. 가운으로 입을게."
"빠, 빨리 입어요."
"응, 잠깐."
도훈이 빠르게 슬립 가운을 걸쳤다. 가운데 끈을 모두 묶은 도훈이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정희에게 말했다.
"다 입었어."
"확실히 다 입었어요?"
"응."
정희는 그제야 도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운을 입고 있자 한결 보기가 편했다.
"얼마나 놀랬다고요. 오빠가 벗고 나온 줄 알고."
"미안. 가운도 가져달라고 할걸. 몸을 다 닦고 나니까 생각나더라고. 근데 이거 입고 있으니까 훨 낫다."
"좀 나아요?"
"응. 씻고 났더니 한결 개운해. 너도 씻을래?"
"저, 전 괜찮아요. 많이 안 더워요."
"땀을 많이 흘린 거 같은데?"
"아니에요. 잠깐 놀라서 그런 거예요."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근데 아까 뭐 보고 있었어?"
도훈이 일부러 TV전원 버튼을 눌렀다. 정희가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TV가 켜지며 아까에 이어 두 남녀가 뒹구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아, 앗! 꺼, 꺼요, 얼른!"
"아, 왜 이런 게···."
도훈이 티비를 끄는 척했지만 오히려 오히려 볼륨을 올렸다. 명백한 고의였다.
"아아앙, 아앙 오빠, 아아앙!"
민망한 장면과 신음이 흘러나오자 정희가 계속 소리쳤다.
"오, 오빠 끄라니까요!"
"미안, 버튼이 뭔 줄 모르겠어. 잠시만."
도훈은 한참을 해마다 겨우 버튼을 껐다. 정희는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져서 중얼거렸다.
"아니 왜 저런 게···."
"네가 돌린 거 아니었어?"
"아, 아니에요. 그냥 켜자마자 나왔어요."
"모텔이라 그런가 보다."
"그러니까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희는 자꾸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수신은 잡히질 않았다.
"왜 폰이 안 될까요?"
"고장 난 거 아냐?"
"정말 고장이려나? 한 번도 떨어뜨린 적도 없었는데."
"내 것도 가끔 안 될 때가 있어. 전화 써야 해?"
"아니에요. 그냥 정란이 집에 잘 들어갔나 보려고요."
도훈은 슬슬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모텔까지 제발로 따라오긴 했지만, 숫처녀인 정란은 가만 나두면 정말로 과제만 하다가 나갈 기세였다.
‘좀 더 자극을 줘야겠어.’
[어떻게요?]
‘우선 옷부터 벗게 만들어야지.’
[과연 통할까요? 방안이 찜통인데도 미련할 정도로 꾹 참고 있는데.]
‘창문을 닫아 버려야지.’
[무슨 핑계로요?]
‘여긴 모텔이잖아. 옆 방에서 신음 소리가 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말이지.’
[옆방에 손님이 들어와야 할 텐데요.]
‘들어온 척 믿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혹시 초소형 음향 장비 같은 건 없나?’
[음향 장비요? 아, 있습니다. 어떤 소리든 재현해 주는 재생 장치입니다.]
‘어떤 소리든? 그럼 야동 소리도 가능해?’
[물론입니다. 디지털처리 된 음향이면 무엇이든 재생가능합니다.]
‘오케이. 그럼 전송시켜.’
도훈은 로시를 이용해 초소형 음향 재생장치를 구매했다. 전송되어 온 장치는 초소형이란 말이 어울리듯 바둑돌 크기의 블루투스 스피커였다.
‘너무 작은데? 소리도 너무 작은 거 아니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천상계의 기술력이 집약된 첨단 장비입니다. 최고 출력이 50W가 넘고 3d 입체 음향 시스템까지 구현 가능합니다. 또한 우퍼 기능까지 포함되어 저음도 강력하지요.]
‘오오, 역시 천상계다. 혹시 그럼 소리가 벽을 건너 나는 것처럼 프리셋 조절 가능해?’
[물론입니다. 필터를 이용해 조정하면 됩니다.]
‘컨트롤은 어떻게 하는데?’
[스마트 워치와 연동되어 있어서 화면 터치를 통해 조정가능합니다.]
‘벽면에도 부착할 수 있어?’
[네. 뒷면에 특수 접착제가 붙어 있어서 어디에든 붙일 수 있고 또 뗄 수도 있습니다.]
‘완벽하군. 좋아, 재생시킬 음향은 야동으로 해주고 우퍼를 강하게 켜서 벽면이 쿵쿵 울리게끔 해주면 좋겠어.’
[세팅하겠습니다.]
아이템 조종을 마친 도훈은 안보이게 벽면에 음향 재생 장치를 부착한 뒤 스마트 워치 패널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둘만 있는 모텔방으로 민망한 사운드가 들려왔다.
"Oh yeah! ah, ah!"
반대편 벽을 뚫고 전해오는 음감은 너무도 현장감이 넘쳤기에 정희가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Yes, Yes!!!"
아무래도 서양 야동을 튼 모양이었지만, 도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부러 못 들은 척 하는 정희를 향해 도훈이 말했다.
"음, 옆 방에 누가 있나보네."
"그, 그러게요."
"티비를 너무 크게 틀었나 봐. 너무 크게 들리는데."
"음. 그러니까요."
도훈이 열린 창문을 보고 말했다.
"민망한데 창문이라도 닫을까? 저것 때문에 더 크게 울리는 거 같은데."
민망해진 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을 닫으면서 스마트 워치 다이얼을 돌려 볼륨을 낮추자 이내 소리가 조용해졌다.
"훨 낫네. 그치?"
"네. 창문 닫으니까 조용하네요."
"옆 방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티비를 봤나봐."
"음, 그러니까요."
창문을 닫자 민망한 소음은 차단되었지만, 후덥지근한 날씨탓에 점점 방안의 온도가 올라갔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가운으로 갈아입은 도훈도 다시 땀을 흘릴 정도였으니 정희는 점점 견딜 수 없을 만큼 더위를 느꼈다.
브라 패드가 가슴에 쩍 달라붙을 만큼 끈적거렸고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처럼 접힌 부위도 점점 땀에 적셔졌다.
‘하아-. 하필 옆방 손님들 때문에 창문까지 닫아 버려서는···.’
더위를 견디다 못한 정희가 이마의 땀을 훔치자 도훈이 걱정스레 말했다.
"여긴 너무 더워서 안 되겠다. 그만하고 나갈까? 못 다한 건 내가 집에 가져가서 해 놓을게."
"아, 아니에요. 오빠 혼자 이 많은 걸 어떻게 해요. 태영이나 정란이는 하지도 않는데. 저랑 같이해요."
"난 괜찮은데 네가 너무 더워하는 거 같아서."
도훈이 손으로 정희를 가리켰다.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정희는 하도 땀을 흘려 겨드랑이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땀자국이 크게 번져 팔을 들지 않았는데도 비칠 정도였다. 그제야 자신의 심각한 상태를 확인한 정희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아, 아앗."
"그냥 너도 샤워 한번 하고 와. 이대로는 더워서 일을 못 하겠어."
"그, 그냥 창문을 다시 열까요? 어쩌면 옆방에서 티비를 껐을지도 모르는데."
"그럴까?"
도훈이 창문을 열면서 소리를 켜자 다시 민망한 소리가 방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다, 다시 닫아요!"
도훈이 창문을 닫자 거짓말처럼 소리가 잦아들었다. 정희도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샤워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도 몰라. 정작 오빠는 별 신경도 안 쓰는 거 같은데.’
모텔에 들어온 이후 도훈은 지금껏 훌륭한 매너를 보여주었다. 그것이 정희를 적잖이 안심시켰다. 괜히 혼자만 오버해 도훈을 이상한 사람으로 의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도훈이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물었다.
"아, 그렇구나. 미안. 내가 배려가 부족했다. 샤워하는 동안 밖에 나가 있을게."
"아, 아니에요. 오빠. 굳이 그러실 필요는."
"그래도. 네가 민망해 할까 봐."
"괜찮아요. 오빠 이상한 사람 아니니까. 저 그럼 샤워 좀 하고 올게요."
"그럴래? 참, 들어가기 전에 타월 들고 들어가. 안에 있는 건 다 젖어 버려서."
"네."
정희가 샤워실에 들어가더니 문을 꾹 잠갔다.
그러나 여전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 큰 남녀가 대낮에 모텔에 온 것도 어색한데, 서로 번갈아 가며 씻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치 섹스할 준비를 마치는 것처럼 생각이 든 것이었다.
‘무, 무슨 생각이야! 정신 차려, 차정희! 넌 여기 조모임 과제 하러 온 거야. 더워서 찬물로 샤워를 하는 것 뿐이고!’
정희는 점점 야한 쪽으로 몰려가는 생각을 겉잡을 수 없었다. 오히려 도훈이 아무런 티도 안 낸다는 점에서 혼자만 고민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의 손만 닿아도 젖어버리는 예민해진 몸.
어쩌면 그보다 자신이 더욱 도훈을 바라는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휴, 내가 대체 왜 이러지? 정신 바짝 챙겨야지. 난 결혼하고 나서 할 거야. 아니면 적어도 약혼한 사람이랑만.’
정희가 샤워실 안에서 하나씩 옷을 벗었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팬티는 축축이 젖어 있었다.
< 834. 기말 시즌-3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