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851화 (819/2,000)

< 833. 기말 시즌-33- >

"후문 쪽이요?"

"응, 별별 다방 후문에 있지 않아?"

"아, 맞아요. 거기 있어요."

교묘한 유도 질문이었다. 나중에 책잡히더라도 상호명을 듣고 착각했다는 식으로 빠져나갈 구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짐을 챙겨 도서관을 나섰다. 이제 도훈에게 남은 마지막 과제는 정희가 손에 쥔 핸드폰.

[바람맞은 사실을 깨달은 정란 양이 언니인 정희양을 찾지 않을까요?]

‘나도 그게 걱정이야. 저 핸드폰을 어떻게 처리한다? 훔치기라도 해야 하나?’

[절도는 불가입니다.]

‘그럼 다른 방법을 알려줘.’

[전파 방해 아이템은 어떻습니까?]

‘전파 방해 아이템?’

[네. 특정 섹터로 수신되는 무선 신호를 일정 시간 차단하는 장치입니다. 보통은 첨단 감시 장비들의 추적을 피하는 데 사용되지만, 이 경우에도 통할 것 같군요.]

‘그러니까 정희 핸드폰을 먹통으로 만들자 이 말이지? 신호가 안 가도록?’

[정확합니다. 아울러 근거리 안에선 주인님의 핸드폰 역시 차단이 될 것입니다.]

‘나는 상관없어. 연락 올 사람도 없으니까.’

도훈은 로시의 조언에 따라 전파 방해 아이템을 구매했다. 일회용이지만 특수장비에 준하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에 1,500포인트를 소모해야 했다.

볼팬처럼 생긴 아이템 뚜껑을 꾹 누르자 그의 주변으로 강한 자기장이 형성되었다. 실제로 스마트폰을 확인해보니 수신막대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장치가 가동된 것이었다.

[앞으로 5시간 동안 아이템 반경 3M 이내에 강한 전자파 방해 막이 형성됩니다.]

‘그 말은 내가 정희랑 3M 이상 떨어지면 안 된다는 소리구나.’

[네, 그렇죠.]

‘오케이. 이제 모든 조건이 갖춰졌군.’

도훈이 정희 옆으로 바짝 붙었다.

***

"어휴 씨, 태영이 그 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늦은 오후지만 달궈진 아스팔트는 여전히 열기가 식지 않았다. 정란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느라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도서관에 당도란 정란은 스터디 룸을 모두 뒤지며 도훈을 찾았다. 스터디 룸은 불투명 유리 사이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영역이 있어 밖에서도 내부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서관에 있는 스터디룸과 세미나실, 심지어 휴게실까지 모두 뒤졌음에도 도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정희와 태영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분명히 언니가 여기 있다 했는데?"

정란이 정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가 먹통이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정란은 대상을 바꾸어 이번엔 도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도훈 역시 똑같았다.

"아씨, 뭐야. 왜 아무도 전화를 안 받는 건데?"

정란은 어쩔 수 없이 태영에게 다시 전화했다.

그녀는 화장실에 있다 대답한 태영이 여전히 도서관에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다행히 태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말 다툼을 한 이후라 그런지 여전히 목소리는 냉랭했다.

"···뭐야 또?"

"어디야?"

"어디냐니. 집이지."

"집이라고? 벌써 끝났어? 겨우 한 시간 밖에 안 지났는데?"

"몰라. 난 오늘 배탈 나서 집으로 바로 왔어. 더 할 말 없지? 그럼 끊는다."

"자, 잠깐 태영아."

"왜 또?"

정란은 몹시 다급해졌다.

자신의 밥이라 여기던 태영은 완전히 적으로 돌변했고, 정희와 도훈은 서로 짠 것처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언니가 도훈 오빠랑 단둘이서?’

불쾌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필 도훈을 사이에 두고 자매끼리 연적이 되는 바람에 불안감은 가중되었다. 자신이 오늘 하려던 일을 언니가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정란이 이제 의지할 사람은 태영뿐이었다.

"많이 아프니?"

-···응?

"배탈 났다면서. 많이 아픈 거냐고."

통화를 하던 태영은 갑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정란의 목소리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뭔데, 이 계집애는 갑자기?’

태영은 마음이 약한 사내였으므로 정란이 걱정하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버렸다.

-그냥···. 뭘 잘못 먹었나 봐. 아까부터 계속 설사하고 있어.

"장염인가 보네. 여름에 많이 걸리던데."

-장염이랑은 좀 다른 것 같긴 한데···. 뭐 그럴지도.

"고생하는구나. 저 태영아···. 나 사과할 거 있어."

-무슨 사과?

"어제 너한테 막 대했던 거. 미안해. 생각해보니 내가 좀 심했던 거 같아."

-······.

태영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아, 정란이가 이렇게 착한 애였다니! 난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심하게···.’

태영은 여자에 약했다.

약해도 너무 약한 남자였다.

-아, 아니야! 나도 미안해. 배가 아파서 순간적으로 짜증을 많이 부린 것 같아. 나도 사과할게.

"듣고 보니 그럴수도 있겠다. 그럼 이제 우리 화해한 거지?"

-응!

태영은 깜깜하던 미래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정란이 자신을 이렇게 살갑게 대한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여우처럼 태영을 홀린 정란이 넌지시 태영에게 물었다.

"근데 도훈 오빠랑 언니는 어딜 갔을까? 조모임하려고 다시 왔는데 도서관에 도통 보이질 않네. 혼자서 계속 헤매는 중이야."

-전화는 걸어봤어?

"둘 다 안 받아."

-둘 다?

"응. 다리 아파 죽겠다. 정문에서부터 여기까지 뛰어왔는데. 에효, 누가 좀 주물러 줬음 좋겠네."

정란이 가증스럽게 귀여운 목소리를 내며 태영을 살살 녹엿다. 도훈에게 경도되었던 태영은 마구마구 흔들렸다.

‘아씨, 뭔데 이건? 도훈이 형이 분명 정란이는 가망 없다고 접으라 했는데 지금 태도를 봐선 전혀 그렇지 않잖아? 아까는 분명 츤츤거렸는데, 지금은 엄청 또 데레데레하단 말이지.’

태영은 자신을 들었다 놨다하는 정란의 태도에 갈팡질팡했다.

어쩌면 정란은 처음부터 좋은 여자였고, 다만 츤데레 끼가 너무 강해 그렇게 행동했었던 건 아닐까 상상했다.

‘그래. 도훈이 형이라고 연애 고수는 아니잖아? 운좋게 픽업 아티스트를 만나 어깨너머로 잠깐 여자 꼬시는 법을 배웠을 뿐. 이거 괜히 도훈이 형 말 따랐다가 좋은 여자 놓치는 거 아냐?’

태영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통화하는 정란의 태도만 봐선 절대 그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정란이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태영이 넌 뭐 아는 거 없니? 둘이 어디로 간 걸까?"

-···그, 그게.

"응."

태영은 망설였다.

어젯밤 도훈의 비밀을 들었을 때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알고보니 도훈은 전설적인 픽업 아티스트였고, 후배인 자신을 어여삐 여겨 사부를 자청했다. 하지만 태영의 결심은 정란의 몇마디 말에 씻은 듯 사라졌다.

‘정란이는 썅년이 아니였어!’

결심한 태영이 모든 걸 술술 불기 시작했다.

-저, 정란아···.

"응. 말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사실 너 바람 맞힌 건 도훈이 형이···.

태영이 모든 걸 실토했다.

태영은 몰랐지만 통화를 듣는 정란의 얼굴이 무섭게 딱딱해졌다.

-···그렇게 된 거 였어. 미안, 아까 욕해서. 그건 정말 내 진심이 아니었어.

"방금 그 말 다 진짜야?"

-그렇다니까.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하겠어. 아직도 다리 아파? 나 배 좀 괜찮아진 것 같은데 내가 그쪽으로···.

뚝.

전화가 끊겼다.

태영은 통화가 끊어진 줄도 모르고 실컷 떠들다가 뒤늦게 혼잣말을 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어라? 왜 끊어졌지."

태영이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정란은 두 번 다시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제야 정란의 감언이설에 속은 걸 깨달은 태영이 아연실색했다.

"미, 미친! 내가 지금 뭔 소릴 한 거야? 아아, 도훈이 형이 절대 말하지 말랬는데!"

당황한 태영은 급히 도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란의 성미로 볼 때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까딱하면 조모임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었다.

자신의 방정맞은 입 때문에.

"아, 미치겠네. 도훈이 형은 왜 또 전화를 안 받는 건데."

다급해진 태영이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던 차.

잠잠하던 배가 또 다시 아려왔다. 3차 복통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흑, 이놈의 배는 오늘 따라 왜 이모양이야!"

태영이 절규하며 화장실로 뛰어갔다.

한편 정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완전 둘이서 나를 가지고 놀았다 이거네?"

정란은 진심으로 빡쳐 있었다. 태영의 말에 따르면 오늘 바람 맞힌 것은 도훈의 계획이었다. 심지어 정란이 나쁜 여자라고 태영을 설득해 떨어져 나가게 만든 것도 도훈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순진한 정희를 꼬시기 위해 단 둘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 세상에 믿을 남자 하나 없다더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두고 봐. 내가 오늘 일 그냥 넘어가면 사람이 아니다."

정란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

"저기 있네요. 별별다방."

"응. 그래 정란이 있는지 한 번 가보자."

매장을 뒤졌으나 당연히 정란은 없었다.

"어? 얘는 또 어디가버렸지?"

"혹시 엇갈린게 아닐까?"

"전화해 볼까요?"

"응."

정희가 폰을 들고 통화를 시도 했지만 통화권이탈이라는 문구만 반복될 뿐이었다.

"어? 왜 이러지?"

"왜?"

"전화가 안 돼요."

"이리 줘봐."

도훈이 폰을 살피는 척하더니 수신막대를 가리켰다.

"여기 봐봐. 수신이 전혀 안 되는 데? 혹시 고장난 거 아냐?"

"이상하네···. 아까까지 멀쩡히 됐는데."

"아니면 뭔가 전파방해를 받는 걸수도 있어. 다른 곳으로 옮겨보자."

"네."

도훈은 일부러 장소를 바꾸며 으슥한 곳으로 정희를 이끌었다. 안테나를 잡는 것처럼 폰을 머리 위로 들고 한참을 이동했지만, 당연히 수신막대는 올라가지 않았다.

"안돼요. 진짜 고장인가? 혹시 오빠 전화돼요?"

"응. 잠깐만."

도훈이 폰을 꺼내더니 당황하며 말했다.

"아, 맞다. 나 아까 오는 길에 베터리 다 돼서 폰 꺼졌는데."

"아···. 어떡하지?"

"아니면 내 생각인데 정란이가 그냥 집으로 가버린 게 아닐까?"

정희도 그럴싸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원래 성실한 편은 아니라서."

"그니까. 장소까지 엇갈리는 바람에 혼자 기다리다 가버렸나보다."

"그럼 어쩌죠? 둘이서라도 할까요?"

"그렇게 해."

"그럼 커피숍으로···."

"음, 근데 내 상식에 따르면···."

도훈이 씩 웃으며 상식개변을 걸었다.

호감도가 충분히 오른 상태라 말이 먹힐 것이라 본 것이다.

"남녀가 둘이서 조모임을 할때는 모텔이 가장 합리적이라는데?"

"···네? 아, 아 그런가요?"

"왜, 둘이서 커피 마시면 얼마야."

"음, 한 잔에 4,500원이니까 둘이 9,000원?"

"거기에 디져트라도 곁들이면?"

"대충 15,000원 정도 하지 않을까요?"

"그지? 모텔도 그 정도 하거든."

"진짜요?"

"응. 대실 3시간에 보통 15,000원 하잖아. 게다가 요즘에 컴퓨터도 설치되어 있거든. 노트북 하나로 하는 거보다 둘이서 같이 정리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상식 개변은 말도 안 되는 개념을 지극히 정상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데 있다. 도훈이 조목조목 합리적으로 근거를 제시하자 정희는 둘이서 까페를 가는 것보다 모텔이 더 낫다는 궤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오빠 말이 맞네요. 둘이서는 역시 모텔이죠."

"그치? 다행히 바로 앞에 모텔이 있네."

도훈이 일부러 으슥한 골목길로 끌고 온 이유였다.

대로변을 지나 한참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곧바로 모텔이 보였다. 모텔 앞에는 요금이 적혀 있었다.

<대실 2만원 / 숙박 5만원

"음, 살짝 비싸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을 거 같아. 피곤하면 잠깐 누울 수도 있으니까."

"아, 그렇구나. 역시 둘이서 조모임을 할 때는 모텔이 합리적이네요."

"들어갈까?"

도훈이 앞장서는데 정희가 걸음을 주춤했다.

상식 개변으로 정신을 조작하긴 했지만, 모텔에 대해 가지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 저 오빠···."

"응?"

"저 근데 이런 곳은 처음이라···."

"괜찮아. 요샌 대학생들 공부하러 많이 온다더라고."

"정말요?"

"응. 시험 기간에 아예 통째로 빌려서 날 새는 애들도 있어. 독서실 끊는 것하고 비슷한데 뭐하면 누워서 잘 수도 있으니까."

"아···. 그렇구나."

"가자. 설마 다른 생각하는 거 아니지?"

"다, 다른 생각이라뇨?"

정희가 얼굴이 빨개져 대답했다.

도훈이 씩 웃었다.

"근데 뭘 망설여? 응큼한 생각이라도 한 것처럼."

"아, 아니라니까요!"

정희는 도훈에게 오해받기 싫었으므로 스스로 성큼성큼 앞장 섰다. 도훈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이 옆으로 찢어졌다.

‘능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식은 죽 먹기 구나.’

[그만큼 물밑 작업이 힘드셨잖습니까. 정란양을 떼놓기 위해 태영군의 사부까지 자처하시고요.]

‘흐흐. 태영이가 잘해줬어. 은근히 믿을만 하단 말이지.’

[참, 근데 태영군 입단속 하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맞네. 아까 너무 급하게 아이템을 쓰다가 깜빡해버렸네. 내일 하지 뭐. 설마 하루 사이에 떠들고 다닐라고. 정란이랑 대판 싸우기까지 한 마당에.’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정희 먹고 나면 바로 정란이야. 걔도 나한테 몸이 달았을 테니 간만에 일사천리로구나.’

[호사다마라 했습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알지. 하지만 능력의 제약 풀린 나에겐 처녀 고쟁이 푸는 게 코 푸는 것만큼 쉬운것도 사실이니까.’

도훈이 의기양양 모텔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간만에 이지모드로 진행되는 기분이었다.

< 833. 기말 시즌-33- > 끝

ⓒ 성난불기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