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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850화 (818/2,000)

< 832. 기말 시즌-32- >

‘내가 대체 왜 이러지? 어제도 오빠랑 손잡을 때 기분이 이상하더니만···.’

어젯밤, 도훈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몸에 좋은 크림을 듬뿍 바른 손은 정희의 손을 예민한 성감대로 만들어 버렸고, 정희는 길거리를 걷다가 주저앉을 뻔할 정도의 짜릿한 자극을 느꼈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나자 정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무 기분이 이상해 집에 돌아가 샤워할 때 보니 팬티가 축축이 젖어있었다. 정희는 평소 몸가짐이 바른 처녀긴 하지만, 그 끈적한 액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마냥 순진한 학생이진 않았다.

‘아아···. 이유를 모르겠네. 남자 앞에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문제는 정희가 어젯밤의 그 사건으로 도훈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제는 다 같이 취했으니 술김에 일어난 해프닝으로 치부하더라도, 오늘은 공교롭게 밀폐된 공간에 두 사람뿐이었다.

갑자기 그 사실이 의식되자 목구멍이 가늘게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하니?"

정희가 평소와 달리 낯빛이 상기되어 있자 도훈이 물었다.

"아, 아니요."

정희는 이제 도훈의 목소리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강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의 중저음이 섞인 도훈의 목소리는 평소 정희가 무척 선호하는 음색. 그녀는 얼굴이나 몸매에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유독 목소리에 취약했다.

도훈은 그녀의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정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박에 파악했다.

‘···과일이 무르익어 가고 있구나. 이제 슬슬 따 먹을 채비를 해볼까나?’

"아닌 게 아닌데? 왜 그렇게 얼굴이 빨게? 열 있는 거 아냐?"

도훈은 걱정하는 척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은 정희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물론 어제와 같이 몸에 좋은 크림을 듬뿍 발라놓은 손이었다.

"아, 앗!"

또다시 자극이 시작되자 정희가 움찔 놀라며 물러섰다.

"오, 오빠."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근데 열은 안 나는 거 같은데?"

정희가 화들짝 놀란 이유를 뻔히 알고 있었지만, 도훈은 일부러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정희는 어제와 같은 자극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아아, 또 시작이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영문을 알 수 없던 정희는 또다시 밑이 축축해지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어, 그래. 혼자 정리하고 있을게."

정희가 후다닥 스터디룸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훈과 단둘이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벅찰 지경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여자 화장실 칸막이로 뛰어든 정희는 휴지로 밑을 닦은 후 난처함을 금치 못했다.

‘진짜 이상하네. 내가 요즘 왜 이렇게 예민하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정희는 자꾸 현실을 부정하려고 했다. 그때 핸드폰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동생 정란이었다.

"란이니, 너 왜 이렇게 늦어?"

전화를 받자마자 정희가 쏘아붙였다. 어젯밤 투닥거린 일 때문에 동생이 늦는다고 오해한 것이다. 사적인 두 사람 사이의 문제로, 공적인 조모임을 보이콧 하는 것은 정희의 상식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란은 언니의 물음엔 대답도 않고 일방적으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왔어?

"당연히 다 왔지. 내가 너 약속시간 지키랬잖아. 가뜩이나 조원도 부족한 데 이런 식으로 할 거야?"

-···진짜 다 거깄다고? 도훈 오빠도?

여전히 정란은 본인 얘기뿐이었다.

"오늘 학교 중앙도서관 스터디룸 5시. 기억 안 나?"

-하-! 나 이 새끼 진짜···. 잠깐 끊어봐. 언니.

"뭐야? 란아, 너 어딘데? 무슨 일인데?"

-일단 끊어봐. 내가 다시 걸게.

전화가 뚝 끊겼다.

안 그래도 도훈 때문에 기분이 싱숭생숭하던 정희는 동생의 일방적인 통화에 어이가 없었다. 이건 통화가 아니라 숫제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어후, 진짜 동생만 아니만 콱 쥐어박아 버리고 싶네.’

도훈 때문에 싱숭생숭하던 정희는 제멋대로인 정란 때문에 확 짜증이 올라왔다.

***

-차정란 : 야! 왜 거기 모여 있는데? 내가 도훈 오빠한테 모임 장소 바뀌었다고 전달하라 했잖아!

정란이 씩씩거리며 태영에게 톡을 남겼다.

마음 같아선 당장 핸드폰을 붙잡고 쌍욕을 날리고 싶었지만, 세 사람이 다 함께 모여 있다고 생각하자 전화를 걸 수 없었다. 괜히 통화내용을 들켰다가 자신의 속셈이 들통날까 두려웠다.

잠시 후 태영에게서 답장이 왔다.

-김태영 : 도훈이 형한테 말했어.

-차정란 : 근데 왜 오빠가 거기 있는데?

-김태영 : 나도 물어보니까 톡을 못 봤다더라고.

정란은 성의 없는 태영의 답변에 부아가 치밀었다.

평소보다 훨씬 공들여 화장하고, 옷도 제일 예쁜 것으로 골라 왔는데 까페에서 하릴없이 30분을 허비한 셈이었다. 모임 변경 공지를 전달해 달라니까 확인도 없이 톡하나만 달랑 보내놓은 태영의 무성의한 태도 때문에.

열이 잔뜩 받은 정란이 태영에게 다시 문자를 다다다 쏟아냈다.

-차정란 : 야, 너 당장 밖으로 나가서 나한테 전화 걸어. 당장!

-김태영 : 나 지금 화장실이야. 좀 만 있다가.

화장실이란 단어에 정란이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화장실이면 당연히 혼자 떨어져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야, 김태영!"

-왜?

"너 지금 혼자야?"

-어, 똥 싸고 있어.

"똥? 이 새끼가 진짜!"

-배 아프니까 끊는다.

뚝-

태영이 달라졌다.

아무리 쥐어패도 고분고분 말을 따르던 어제의 태영이 아니었다.

당황한 정란은 달라진 태영의 태도에 한동안 얼빠진 표정으로 여보세요를 연발했다.

"여보세요? 야, 김태영. 여보세요? 설마 끊은 거야?"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태에 정란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모든 계획을 망친 태영의 반응이 너무도 뻔뻔스러웠다. 조용한 커피숍에 혼자 앉았있던 정란이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이 좆만한 새끼가, 진짜!"

여자가 드러대놓고 욕을 하는 모습은 보기 드문 광경이다.

더구나 그 여자가 보기 드물게 예쁘게 생긴 여대생이라면 더더욱.

정란은 손님들의 이목에도 아랑곳 않고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사람처럼 한참을 광분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당장이라도 태영을 만나면 두들겨 패버리겠다는 기세였다.

다시 전화를 걸자 태영이 힘겨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 진짜, 똥 싸고 있다니까.

"야이, 개새끼야!"

-······.

사자후를 일갈하자 태영은 대답이 없었다.

정란은 태영이 쫄았다고 생각하고 계속 퍼부었다.

"너 나랑 장난해 지금? 내가 우스워? 이게 확 그냥···."

-···확 그냥 뭐?

잠자코 듣고 있던 태영이 받아쳤다.

생각지도 못한 딱딱한 말투로.

"뭐, 뭐라고?"

-확 그냥 뭐? 어쩌라고?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 근데 안 된 걸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미쳤니? 돌았어? 아직 덜 처 맞았구나 니가?"

정란은 여전히 세게 나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고, 태영이 전화상이라고 한 번 개기는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태영은 진심으로 달라져 있었다.

콩깍지가 벗겨지고 난 뒤 바라본 정란은 그저 썅년 그 자체였다. 마음이 떠난 그에겐 더 이상 밑질 것이 없었다. 어차피 정란이 아니더라도 도훈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겼다. 이제 여자 꼬시는 데 비굴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태영이 소리쳤다.

-덜 맞아? 어 그래, 너 말 한번 잘했다. 나보고 여자한테 한번도 안 맞아 봤다고 했었지? 그런 너는 남자한테 한 번도 안 맞아 봤지?

"뭐, 뭐래, 이 미친놈이."

-남자들이 오냐오냐 봐주니까 조금도 안 무섭지? 너 진짜로 나랑 한 번 싸워볼래? 확 그냥 계급장 띠고 맞장 까?

‘이런 미친···.’

태영이 워낙에 세게 나오자 도리어 정란이 쫄고 말았다.

태영은 뭘 잘 못 먹었는지 거침없이 울분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까불지마. 남자가 참아주는 것도 한도가 있어. 병신같이 계속 참고 있으니까 내가 만만해 보여? 나한테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욕 지껄여. 여자고 뭐고 아갈머리를 찢어 버릴라니까!

"너 무슨···."

-아, 배야. 나 지금은 배 아파서 끊는다. 그딴 소리 할 거면 다신 전화하지 마.

뚝-

정란이 움찔 놀랐다.

태영의 미친 박력에 기가 꺾이고 만 것이다. 특히 남자한테 안 맞아 봤냐고 할 때는 전화상이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놈은 진짜였다.

‘와, 변태같은 놈인 줄로만 알았는데 완전 상또라이 였잖아? 어휴,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그냥 상종을 말아야지.’

사실 태영은 도훈에 비해 몸집이 작을 뿐 여자인 정란과 정희에 비하면 월등히 체격이 좋은 편이었다. 그 역시 체육과였고 일반인과는 당연히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런 태영이 진심으로 협박을 해오자 되바라진 정란이라도 기가 죽은 것이었다. 아무리 힘이 센 여자라도 평범한 남자 근력 하나 당해내기 힘든데, 하물며 상대는 운동을 배운 전공자였다.

‘아씨, 진짜 쪽팔리게···.’

정란은 완전히 풀이 죽었다. 이런 무식한 놈은 난생 처음이었다. 더구나 본인이 어제 한 짓이 있으므로 성희롱이나 협박으로 보복을 할 수도 없었다. 괜히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정란이 울컥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도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단 하나도.

***

도훈은 정희가 다가오자 열심히 과제를 하는 척 했다.

"어, 왔어?"

"네."

도훈이 펼쳐져있던 정희의 노트북을 내밀었다.

"노트북에 정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게 떠버렸어."

"어? 윈도우 업데이트에요?"

"응. 밀려 있던 게 많나 봐. 아까 시작되더니 여태껏 이러네?"

"아···."

실은 도훈은 보류되어 있던 업데이트를 고의적 몽땅 실행시킨 것이었다. 당연히 한번에 하기엔 분량이 원체 많았으므로 컴퓨터는 개점휴업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내용 정리를 컴퓨터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덩달아 두 사람도 할 일이 없게 되었다.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흐음, 의도치 않게 강제 휴식하게 생겼네."

"그러니까요."

정희는 일할 것 마저 할게 없어 지자 더욱 민망해 졌다.

차라리 과제 정리라도 하면서 태영이 오기를 기다리면 어색함이 사라질 텐데, 당분간은 꼼짝없이 도훈과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도훈의 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 태영아. 언제 다시 오니?"

-형···. 생각보다 속이 많이 안 좋은 가 봐요. 설사가 또 시작 됐어요.

도훈이 힐끔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최초의 복통으로부터 1시간이 지났다. 3주기로 반복되는 장 청소 알약의 2차복통이 발발할 시기였다.

"저런···.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보는 게 좋지 않겠어?"

-일단 움직일 수가 없어요. 나가려고만 하면 갑자기 줄줄···. 아 참, 이말 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형. 옆에 정희 있어요?

"어."

-통화 안들리게 해주세요. 말하게 있어서요.

"알았어 잠깐만."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구석으로 갔다.

"말해."

-방금 전에 정란이랑 통화했는데, 제대로 한 방 먹여 줬어요.

"먹여줬다니? 그게 무슨 소린데."

-아니 계집애가 바람 한 번 맞혔다고 저한테 갑자기 쌍욕을 퍼붓잖아요. 듣다 듣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저도 똑같이 욕해 버렸어요. 속이 다 후련하네요.

"흐음. 그랬구나. 그럼 이제 알고 있는 거네?"

-네. 나머지 셋 다 거기 아직도 거기 있는 줄 알아요.

"오케이. 암튼 몸조리 잘하고. 오늘은 너 빼고 어떻게든 해볼게."

-네, 죄송해요 형.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아프면 미련하게 참지 말고 늦게라도 응급실이라도 가."

-네, 형.

도훈은 일부러 마지막 대사를 다 들리게 말해 정희의 이목을 끌었다. 도훈이 통화를 마치자 자연스럽게 정희가 물었다.

"누구에요? 응급실이라뇨?"

"어. 태영이. 많이 아픈가 본데?"

"아파요? 일이 있어서 집에 가지 않았어요?"

"응. 그게 본인 일이었거든. 갑자기 배탈이 났나 보더라고. 가라앉으면 다시 오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심각한가봐."

"저런···."

"일단 오늘은 집에서 푹 쉬라고 했어. 태영이 몫은 내가 할게."

"아, 아니에요. 오빠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말아요. 저랑 같이 해요."

"그래. 그나저나 둘이서만 좀 벅차겠는데. 정란이는 언제 쯤 온데?"

"안 그래도 화장실에 통화했는데 무슨 급한일이 있나 보더라고요."

"아, 그래. 태영이 말론 정란이가 약속 장소를 착각해서 다른 곳에 가있다던 것 같더라."

"다른 장소요?"

"응. 후문 어딘가···. 그 별별다방."

"아아, 진짜요?"

"어차피 노트북이 이 상태라 아무것도 못 하는데 우리가 그냥 그쪽으로 이동할까?"

"네. 그게 좋겠어요."

정희는 도훈과 단둘이 스터디룸에 있는게 불편했으므로 자리를 옮기자는 의견에 곧바로 찬성했다. 하지만 도훈이 장소를 옮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첫째 도서관 스터디룸이 비록 불투명 유리로 막혀 밖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너무 공개적인 장소라는 점이었다. 뭔가 일을 벌이기엔 제약이 많았다.

둘째, 사태를 파악한 정란이 이쪽으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겨우 떼어놓은 혹덩이가 훼방꾼으로 돌변할지 모르니 최대한 그녀를 피해 달아나야 했다.

도훈이 말했다.

"짐 챙겨서 나가자. 후문 쪽이라고 했던 거 같아."

정란이 자리 잡은 곳은 유명 커피숍 체인이었다.

그것은 정문에도 있었고, 후문에도 있었다.

도훈은 일부러 정 반대방향을 언급했다.

< 832. 기말 시즌-32-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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