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849화 (817/2,000)

< 831. 기말 시즌-31- >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준비는 모두 끝났다.

태영이는 정란에 대한 적개심으로 나에게 적극 협조할 것이다. 당한 게 있으니만큼 그 반격은 무척 매서울 것이다.

정란은 정란대로 착각에 빠져 오락가락할 것이다.

태영을 자신의 편으로 굳이 믿고 있지만, 이미 그녀는 내 손위에서 놀아나는 셈이다.

정희는 정란의 질투로 더욱 불이 붙었다. 남자에게 관심도 없던 진성 건어물녀가 모처럼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모두가 내가 깔아 놓은 판 위에서 춤을 춘다.

나는 싸우기도 전에 이겼다.

[대단하십니다. 결과적으론 주인님만 어부지리인 셈이네요.]

‘어부리지라니?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이 판을 설계했는데. 손자병법에도 나오잖아. 싸워서 이기는 놈은 하수고, 싸우기도 전에 이겨야 고수라고.’

[그럼 싸워서 지는 사람은요?]

‘그건 병신이지.’

[후후. 진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안 하셨군요.]

‘물론. 순진한 여대생 자빠뜨리는 건, 나에게는 어린애 사탕 뺏기만큼 쉬운 일이라고.’

[하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명심하지.’

그날 밤은 두 다리 쭉 뻗고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

다음날.

아침부터 태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김태영 : 싸부, 일어 나셨어요?

-이도훈 : 학교도 안 갔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일이야?

-김태영 : 죄송해요. 아침부터 정란이한테 연락이 와서요. 싸부한테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이도훈 : 잠깐. 나 막 나가려던 참인데 차타면서 전화할 게.

-김태영 : 넵, 싸부.

-이도훈 : 그 싸부 소린 안 하면 안 되냐?

-김태영 : 예스, 마스터.

끝까지 극존칭을 구사하는 태영이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녀석을 불쌍히 여겨 제자로 받은 것이 살짝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아씨, 이 자식 괜히 입털까 봐 벌써 걱정이네.’

[오늘 만나자 마자 금제부터 거십시오. 괜히 학교에 소문 날까 걱정입니다.]

‘물론 그래야지.’

[헌테 정란양이 무슨 일로 태영에게 연락했을까요?]

‘대충 짐작은 가지만 전화로 물어보면 알겠지.’

등교 준비를 마친 나는 차에 올라 학교로 출발하면서 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영은 전화기만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예스, 마이 로드.

"그건 또 뭐야?"

-싸부라고 호명하지 말래서 이것저것 해보는 중이에요.

"야야, 닭살 돋으니까 그냥 형이라고 해. 알았어?"

-네, 형.

"정란이가 뭐라고 하던데?"

-이 썅년이 아침부터 저한테 수작을 걸더라고요.

"수작? 무슨 수작."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도훈이 형한테 조 모임장소를 바꿔서 알려 줄 수 있냐고.

"조 모임 장소를? 오늘 도서관 스터디룸에서 만나기로 한거 아니었어? 어제 못한 것까지 마저 한다고 수업 마치고 5시에."

-그러니까요. 근데 형한테 장소가 바뀌었다고 다른 곳이라고 말하라는 거에요. 그리곤 저한테는 시간 맞춰 나와서 정희를 붙잡아 놓으라고.

"뭐야? 그럼···."

-뻔하죠. 약속이 엇갈린 것처럼 꾸며 가지고 형하고 단둘이 보려는 거에요. 그러면서 저한테는 뭐라는 줄 아세요? 그렇게만 해주면 형이랑 어색함도 풀 수 있고, 나랑은 더 잘 지낼 수 있겠다나?

"그게 말이냐 방구냐? 뭔 얼토당토 않는 소리야?"

-제 말이요. 어제 형한테 말 안 들었으면 아, 이것이 NTR감성이구나하고 덥썩 수락했을 걸요?

"응? 그게 무슨···."

-아니에요. 암튼 어떻게 할까요, 싸부. 하는 짓이 영 괘씸한데.

정란이 조급함이 느껴졌다. 아마 둘만의 시간을 마련해 노골적으로 섹스어필을 하려는 속셈인 것 같다. 하지만 정희를 먹기 전까진 정란을 보류해야 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아직 안 했죠. 싸부님 말 듣고 하려고요.

"잘했어. 역시 생각이 깊구나 이중스파이."

-헤헷.

"일단 정란이가 말하는 대로 해준다고 해."

-말하는 대로요?

"물론 대답은 그렇게 해놓고 막상 정란이 혼자 새되게 하는 거지."

-아아! 정란이만 헛 걸음 시키게요?

"응. 나중에 씩씩거리면 그땐 내가 알아서 할 게. 장소가 바뀌었다는 연락을 너한테 받았었는데 깜빡하고 그대로 가버렸다. 갔더니 다른 애들이 다 있길래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었다고 하면 되니까."

-오오, 역시 싸부는 똑똑하시군요. 정말 정란이 혼자 헛물켜게 만들 수 있겠어요.

"그래. 암튼 난 전공 수업이니까 다 끝나면 오후에 만나자."

-네. 싸부. 혹시 변동사항 생기면 또 연락드릴게요.

"그래. 근데 그 싸부 소리 그만 좀 하래니까."

-넵 싸부, 아, 아니 형.

태영과 통화를 끝내고 계획을 정리했다.

정란의 계획을 역으로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차라리 잘됐어. 어쨌든 정란과 정희가 갈라진다는 뜻이잖아?’

[그렇죠.]

‘그럼 난 정희랑 단둘이 시간을 갖도록 태영이만 보내버리면 되겠다.’

[태영 군을요? 정란양 빼고 셋이 같이 만나기로 하신 거 아닙니까?]

‘물론 그랬지. 하지만 태영이 갑자기 배탈이 나게 되면 어떨까? 조모임 가기 직전에 급설사가 오는 것이지.’

[아니! 어떻게 태영군까지.]

‘원래 진정한 모략가는 자기 편까지 속이는 법이야. 태영이에겐 좀 미안하지만, 어차피 그 자리에 있어 봐야 도움 안 될 건 뻔하니까.’

[제자를 혹독하게 키우시는 군요.]

‘대신 이번 일만 끝나면 태영이 트레이닝을 확실하게 시켜 줘야지. 나도 미션이 걸렸으니 대충 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기대가 됩니다. 과연 태영군이 사람 구실 할 수 있을지요.]

‘어제 자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어렵지 않을 수도 있어. 전생의 이정우에 비하면 태영이 정도면 훨씬 가능성 높다고 봐야 하거든. 본인이 눈만 적당히 조절하면.’

[그게 쉽지 않으니 말이죠.]

***

기말시험이 2주 앞으로 다가오니 수업을 하는 교수들도 대부분 시험에 대한 예고를 하는 편이었다. 도훈은 여느 때보다 바짝 수업에 집중했다. 경험상 시험 직전에 교수가 언급하는 힌트가 가장 출제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집중하여 수업을 모두 마친 도훈은, 약속장소에 도착하기 10분 전 태영과 접선했다.

태영은 평소에도 인사성이 발랐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도훈을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형님!"

"얼씨구. 내가 오버 말랬지. 무슨 깍두기냐?"

"마음 같아선 사부님 앞에서 정식으로 스승의 예를 올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됐고. 정란이는 어떻게 됐어?"

"아, 정란이. 방금 전에도 연락왔길래 형한테 약속 장소 바뀌었다고 톡 보냈다고 했어요. 아마 형이 그쪽으로 간 줄 알거에요."

"거기가 어딘데?"

"정문 쪽에 있는 커피숍 체인요."

"정문? 멀리까지 갔네. 혼자 걸어오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그러게요. 크크. 나중에 저한테 화풀이 할지도 모르니까 형이 잘 둘러대 주세요."

"어. 폰 꺼져서 톡 못봤다고 해야겠다."

"나이쓰 하네요. 혹시 정란이가 둘이 짰다고 의심할지도 모르니까 제가 증거 남겨 놓을게요. 톡 보내면 확인하지 마세요."

도훈과 태영이 서로 알리바이를 맞추었다.

"어? 근데 그건 뭐예요?"

"아, 이거? 스터디할 때 마시려고 마실 것 좀 사왔어. 하나 마실래?"

"아! 싸부! 다음부터 이런 허드렛일은 저한테 시키세요."

"마. 그렇게 저자세로 안 나와도 알아서 잘 가르쳐 줄테니까 유난떨지 마."

"네. 전 형만 믿고 있다고요."

태영이 도훈을 향해 무한 신뢰를 보냈다.

도훈은 봉지에서 종이팩에 든 드링킹 요구르트를 꺼내더니 태영에게 건넸다.

"목마르지? 하나 마셔. 일부러 넉넉히 사왔어."

한여름이라 그런지 오후인데도 땀이 주륵주륵 흐르는 날씨였다. 태영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종이팩을 뜯어 벌컥벌컥 마셨다. 도훈이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미안하다 태영아. 당분간 배 좀 아플 거다.’

반응은 스터디룸에 도착한 직후에 바로 왔다.

먼저와서 기다리던 정희에게 두 사람이 인사하는 데 갑자기 사색이 된 태영이 배를 잡더니 화장실로 뛰어간 것이었다.

정희가 놀라서 도훈에게 물었다.

"태영이 왜 저래요?"

"글쎄? 방금 전까지 말짱했는데···. 점심을 잘 못 먹었나?"

"그나저나 정란이 애는 왜이렇게 늦지?"

스터디에 늦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는데도 정란은 오늘도 지각이었다. 사실은 정란은 늦은 게 아니라 혼자 다른 곳으로 간 것이지만.

"뭐, 알아서 오겠지."

그때 도훈의 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방금까지 스터디 룸에 있다가 화장실로 달려 간 태영이었다.

"어, 무슨 일이야?"

-싸, 싸부. 큰일 났어요.

"왜? 배가 많이 아파?"

-점심 때 먹은 게 탈이 났나 봐요. 갑자기 설사가···.

"엉?"

도훈이 몰래 넣은 아이템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도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다른 게 아니고, 너무 급작스러워서 살짝 지린 것 같아요.

도훈이 겨우 웃음을 참으며 정희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서 통화했다.

"야. 내가 아무 말 안 하고 알아서 둘러댈 테니까 후딱 집에 가서 바지부터 갈아입고 와."

-네, 형. 잘 좀 말해주세요. 죄송해요, 형.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택시 타고 다녀오면 1시간이면 될 거에요. 샤워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알았어. 얼른와라. 정란이도 없는데 너까지 없으면 오늘 진도 못 나간다."

-네, 형. 죄송해요.

통화를 마친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정희에게 말했다.

"태영이 잠시 일 생겨서 집에 다녀온다는데?"

"태영이도요? 무슨 일이래요?"

"모르겠어. 급한 일이라면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1시간 간격으로 복통이 오는 거 맞지?’

[네. 그렇습니다. 장 청소 알약은 1시간 단위로 총 3회씩 대장에 쌓인 숙변을 제거해 줍니다.]

‘태영이에겐 좀 미안하지만, 어쨌든 끝나고 나면 한동안 대장 내시경 받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만.’

커다란 스터디룸에 도훈과 단둘이 남게 되자 정희가 살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어젯밤 정란과 다툰 이후로 도훈에 대한 호감이 상당히 커진 상태였다. 도훈은 일부러 어색함을 풀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책을 펼쳤다.

"우선 우리끼리라도 하고 있을까? 정란이도 좀 있음 올거고, 태영이도 1시간 안에 돌아온다니까."

"그, 그럴까요?"

도훈은 일부러 정희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향수 냄새가 흘러나와 정희의 후각을 간지럽혔다.

‘아···. 오빠 냄새 좋다. 좋은 향수 쓰나보네.’

도훈이 뿌린 향수는 호감도를 끌어 올려주는 아이템이었다.

어젯밤 희주 친구들을 만날 때 뿌렸던 것을 알뜰하게 재탕했다.

‘아이템 제한이 없으니 이렇게 쉬울 수가 없구나.’

[그러게요. 방해자들을 떨궈내는 게 관건이었는데 멋지게 해내셨군요.]

‘이제 슬슬 순진한 정희를 꼬셔볼까나.’

"응? 왜 그렇게 땀을 흘려? 더워?"

도훈의 옆이라 긴장한 정희가 땀을 흘렸다.

"아, 아. 네. 도서관 에어컨이 좀 약하네요. 하하."

도서관에 딸린 스터디 룸은 중앙 통제되는 시스템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었다. 교육기관인 만큼 까페처럼 빵빵하게 틀어 놓지 않고, 겨우 덥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도훈이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좀 덥네. 옷 좀 벗고 할까?"

"네, 네? 오, 옷을 왜···."

정희가 깜짝 놀라 소리치는데 도훈이 반 팔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안에는 레이어드로 받쳐입은 흰 티가 있었다.

"뭘 그렇게 놀래? 셔츠만 벗는다는 건데."

"아, 아···. 네. 갑자기 벗는다고 하셔서···."

정희가 스스로 생각해도 민망했던지 뻘쭘해 하며 말했다.

얇은 반 팔만 입고 있자, 도훈의 근육질 팔뚝이 여실히 드러났다. 특히 반팔의 팔소매가 삼두 근육으로 터질것처럼 꽉 끼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정희는 처음 보는 근육질 남성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자꾸 시선이 끌렸다.

‘오빠는 체육과라 그런지 몸도 되게 크네···. 그러고 보니 정란이가 몸 좋은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했는데.’

두 사람은 쌍둥이다 보니 늘 같은 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까지도.

하루 24시간을 거의 늘상 붙어 있다 보니, 이성에 대한 얘기를 안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은 정란이 정희에게 남자 좀 만나보라고 하면서 자기가 사귀었던 남자들 이야기를 꺼냈다.

-창식이 자식이 진짜 몸 하나는 끝장났었는데.

-고등학교 때 사귄 그 양아치? 야. 너 그런 애들 만나지 좀 마. 무슨 학생이 건달처럼 팔에 몰래 문신까지 해가지고. 걔 결국 학교 폭력으로 정학 먹지 않았니? 나중에 자퇴하고.

-걔가 좀 오늘만 보고 살긴 했지. 그래서 나중에 손절했잖아. 근데 언니가 뭘 몰라서 그래. 남자는 말이야, 힘이야 힘.

-힘만 세면 뭐해? 무식하게 몸만 잔뜩 키운 게 뭐가 멋있다고.

-그 힘이 그 힘이겠어?

-그럼 무슨 힘?

-아이고 됐네요. 내가 수녀님을 상대로 별말을 다하네. 아무튼 언니도 나중에 남자 사귈 일 생기면 새겨들어. 팔뚝에 힘줄 보이는 애들 있지? 그런 애들이 진짜라고.

-뭔 소리야 대체?

갑자기 정란과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 정희가 무심결에 도훈의 드러난 팔뚝을 세심히 살폈다.

‘헉! 진짜네?’

놀랍게도 도훈의 근육질 팔에도 시퍼렇게 핏줄이 돋아나 있는 것이 아닌가? 정희는 자꾸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몰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희한하게도 도훈 앞에만 서면 이제껏 조금도 관심이 없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불쑥불쑥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몸 안에 내재된 뜨거운 본능이 도훈이라는 촉매제를 만나면서 조금씩 반응하는 것이었다.

< 831. 기말 시즌-31-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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