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0. 기말 시즌-30- >
-진짜로요?
태영의 목소리가 다소 떨려 나왔다. 하긴 녀석의 입장에선 조금 뜬금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왜 자신을 도우려는 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테니까.
"너 오늘 애쓰는 거 보니까 안쓰러워서 그래 인마."
-혀, 형···.
"여친 사귀고 싶은 거 맞지?"
-당연하죠. 제 소원이에요.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만 하면 돼. 내 말만 잘 들으면 옆구리 시리기 전까진 무조건 여친 사귀게 될 거야."
-형, 저 근데 외람된 말이지만···.
"또 뭐?"
-형도 지금 없지 않으세요?
태영이 정곡을 찔렀다.
너도 없는 주제에 대체 누굴 챙기냐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런 질문 정돈 충분히 예상했던 바다.
"너 내가 진짜로 못 사귀는 거라고 생각해?"
-무, 물론 아니죠!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귀실 수 있잖아요. 저희 과에만 형 좋다는 애들이 몇 명인데.
"그치? 솔직히 이 얘긴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너만 알고 있어."
-뭔데요?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는 결속력이 올라간다. ‘너만 알고 있어.’라는 말로 우린 ‘특별한’ 사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이다. 태영을 온전히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한 사탕발림이었다.
"내가 군대 가기 전에 과CC하다 차인 이야기 들었지?"
-네. ···아, 아니 일부러 들은 건 아니고요, 1,4 대면식에서 어떤 선배가 말 해줘가지고.
"괜찮아. 누구에게나 흑역사는 있는 법이니까. 그럼 내가 어떤 식으로 차였는지도 다 들었겠네?"
-네. 그래서 그때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과씨씨 절대 안 하시는 건 줄···. 죄송해요. 괜히 말했네요.
"아니야. 딱히 신경쓰고 있진 않으니까. 다만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얘기야."
-네? 반반요? 그게 무슨 소리세요?
"그 일 때문에 과씨씨를 안 하는 것은 맞지만,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더 있다는 뜻이지."
-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태영이 너한테만 들려주는 거야. 우리 과에선 아무도 몰라."
수화기 너머로 꼴깍 침을 넘기는 소리가 났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던 비밀을 들려준다니 바짝 긴장하는 것이었다. 거참, 이렇게 순진해서야.
[헌데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라뇨?]
‘당연히 아무도 모를 수밖에. 이건 내가 지금부터 지어낼 이야기니까.’
[지어내요? 즉흥적으로요?]
나는 과거를 회상하듯 기억을 더듬는 말투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때가 2년도 더 전의 일이구나. 사귀던 여자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것도 모자라 내 동기랑 바람이 나버렸단 말이지."
-형, 진짜 마음고생 심하셨겠어요. 하필 군대에 끌려가 있는 동안에···.
"힘들었지. 엄청 힘들었어.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고. 몇 날 며칠을 멍 때리는데 표정이 하도 심각하니까 선임들도 터치를 안 해. 우울증 걸려서 탈영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봐. 한번은 소대장이 어깨에 노란 견장을 달아주는데, 그게 나중에 알고보니 관
심병사 표식이더라고. 잘 지켜보란 뜻이었지. 작업이고 훈련이고 다 열외 시켜줬어."
-저런···.
"그렇게 곧 죽을 사람처럼 내무반에 멍 때리고 앉아있으니까 전역 2달 앞둔 왕고가 나를 따로 부르더라."
-왕고요?
"말년 병장 말이야. 너도 군대 가보면 알겠지만 그쯤되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할 정도로 몸을 사리게 되거든. 난 혹시나 내가 잘못 되서 자기한테 불똥 튀지기 말라는 경고하려고 부른 줄 알았어. 제발 자기 나갈 동안만이라도 사고 치지 말라고. 군대라는 곳이
사건사고 한 번 터지면 다같이 힘들어지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
-네? 그럼?
"그 선임이···, 그러니까 이름이 뭐였더라? 보검인가 보겸인가? 암튼 연예인 누구랑 똑같은 이름인데. 생긴에 되게 평범해. 평소엔 말수도 별로 없고 후임도 괴롭히지도 않는 착한 선임이었지."
-네.
"근데 그 양반이 나를 따로 부르더니 묻는 거야. 여자한테 차였냐고. 차여서 지금 그러는 거냐고."
-아···.
"그렇다고 했지. 진짜 죽고 싶다고. 살맛 안 난다고. 그러니까 피식 웃으면서 한마디 하는 거 있지."
-뭐라고요?
"세상에 반이 여자 다 이 새끼야, 라면서."
나는 살짝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리얼리티를 살렸다.
-아··· 아까 형이 저한테 해준 얘기랑 비슷하네요?
"맞아. 암튼 맨날 듣는 잔소리가 또 시작되는구나 싶었지. 다들 그랬거든. 여자가 걔밖에 없냐, 어차피 나가면 다른 여자 사귀면 그만이다. 세상에 널린 게 여잔데 뭘 집착하고 그러냐. 차이고 나니 동기고 선임이고 늘상 하던 게 그런 얘기있잖아. 그래서 무덤덤
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뒤로 한 마디를 덧붙이는 거야."
-뭐라고요?
"따먹을 여자가 지천에 널렸는데 지지리 궁상이라면서."
-진짜요?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어요?
"응, 진짜. 사실 나도 첨엔 어이가 없었어. 딱 보니까 여자친구 몇 명 못 사겨 봤을 면상이었거든. 근데 지가 무슨 천하의 카사노바나 되는 것처럼 말하더라니까? 한참 선임이었는데도 우습게 보이더라고. 갖잖아서."
-괜히 허세 한 번 부린 거 아닐까요?
"나도 그런 줄 알았어."
-어, 그럼 설마.
"맞아. 그 사람은 진짜였어."
-지, 진짜요?
"너 혹시 픽업 아티스트라는 말 들어봤냐?"
-픽업? 아, 인터넷에서 본 것 같아요.
"그게 뭔 줄은 알지?"
-네. 여자 꼬시는 헌팅 전문가. 아! 설마 그 사람이?
"맞어. 군대 오기 전에 책까지 출판한 진짜 픽업 아티스트였던 거야. 그냥 어중이떠중이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여성편력을 자랑하는."
-와! 기연을 만나셨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사실 그전까진 조금도 눈치도 못 챘어. 워낙에 조용하게 사는 사람인 데다 내가 전입 왔을 땐 이미 병장을 달고 있어서 누가 건드리지도 않더라고. 그냥 전역만 기다리는 조용한 말년 병장인 줄 알았지."
-세상에···. 근데 그런 고수가 군대에서 썩고 있었다니.
"원래 군대라는 곳이 별의별 놈 다 모여드는 곳이야. 소싯적에 좀 놀아본 녀석, 뼛속까지 양아치같은 새끼, 조직 비스무리하게 활동한 반달, 사기꾼 폰팔이에 차팔이, 호빠 출신 선수까지···. 너도 군대 가서 보면 느끼겠지만 평생 만나보지도 못할 사람 거기서
다 만난 거다."
-그렇구나. 암튼 그 픽업 아티스트랑은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데요?
태영이 부쩍 호기심을 드러냈다.
군대에 숨어있던 은거 고수와 강해질 이유가 있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니 당연히 구미가 당겼을 것이다. 이건 한마디로 무협지 클레셰다.
"갑자기 나한테 그러더라. 다음 주 주말에 외박 할건데 자기랑 같이 한 번 나가자고. 가르쳐 줄 게 있다면서."
-오오! 설마.
"맞아. 그리고 그 주 주말 픽업 아티스트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나한테 보여주더라고. 세상에, 머리 빡빡 밀고 군복을 입은 상태에서도 여자를 꼬시더라니까? 쌩판 처음 보는 아가씨들을."
-우아!
태영은 내가 지어낸 얘기에 완전히 경도되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처음보다 배는 커진 것 같았다.
이런 허무맹랑한 스토리가 통할 줄이야. 하지만 클리셰가 진부하긴 해도 먹히는 이유는 이미 수차례 검증된 이야기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요? 그럼 그 선임한테 기술을 배운 거에요? 여자 꼬시는 기술을?
"사실 정식으로 배웠다긴 보단 어깨너머로 익혔지. 그 선임은 하필 전역이 얼마 안 남아서 많은 시간을 같이하진 못했거든. 하지만 그 잠깐 한 달여 배운 것만으로도 세상이 확 달라진 게 느껴졌어."
-설마 그럼 도훈이 형도···.
"그래. 이미 눈치 챘겠지만, 나도 군대 있을 때는 많이 놀았다. 정기 휴가 때마다 시험해 봤거든. 진짜로 이게 통하는지."
-어떻게 됐는데요? 진짜로 통하던가요?
"당연히. 그것 때문에 군대 있을 때 만난 여자들이 입대하기 전보다 훨 많았잖아. 웃기지 않냐? 민간인일 땐 여자 몇 명 못 만났던 내가, 오히려 군인되고 나서 더 잘나갔던 게?"
-우아! 형 진짜 엄청나네요! 전 전혀 몰랐잖아요!
"모를 수밖에. 복학하고 나서는 임용에 올인하려고 일부러 공부만 했어. 너 내가 여자 만나는 거 거의 못 봤지?"
-네. 형은 도서관만 다니시잖아요. 배구도 하시고.
"그게 다 군대에서 실컷 즐겼기 때문에 그런 거야. 막상 여자 꼬시는 법을 익히고 나니까 그닥 절박하지가 않아. 무슨 기분인지 알겠어?"
-언제든 취할 수 있으니 절실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그렇지. 지금도 원하면 뭐···."
-형, 아니 형님. 진짜 제가 사부로 모실게요. 전 형만 믿으면 되는 거죠?
태영이 흥분해 소리쳤다.
이녀석은 이제 100%나를 신뢰한다.
"사부까진 좀 그렇고. 근데 이거 어디가서 절대 말하지 마라. 조용히 살고 싶은데 이런걸로 소문나면 나 학교 생활 힘들어져."
-절대 말 안 할게요. 제가 이거 소문내면 저는 정말 개새끼에요. 형이 저 패셔도 할 말 없어요.
"너 입 무거운 거야 잘 알지."
[태영군 이요? 입이 무겁다고요?]
‘물론 전혀 아니지. 저 촉새가 나중에 술 먹다 실수할 줄 어떻게 알고?’
[그럼 어째서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주인님이 픽업 아티스트라는 얘기는 또 뭐고요?]
‘녀석에게 신뢰를 줘야 했잖아. 여자 꼬시게 도와준다는 사람이 경력이 일천하면 내 말을 믿어나 주겠냐? 그렇다고 내 실체를 까발리지도 못하는 상황이고. 또 비밀 유지 같은 건 나중에 상식 개변으로 입단속 시키면 그만이야.’
[하-. 이제 정말 사기꾼 다 되셨네요. 전 진짜로 겪은 일인 줄 알았습니다.]
‘원래 구라도 치다 보면 느는 법이라고.’
-네, 형. 저 이거 무덤까지 안고 갈게요.
"오버 마 인마. 아무튼 내가 그래서 정란이 접으라고 말한 거야."
-아···. 이제야 형 뜻을 알겠어요.
"픽업 아티스트들이라고 무조건 성공하는 건 아니거든. 성공률을 높이는 법을 남보다 좀 더 알고 있을 뿐이랄까? 근데, 내 촉에 따르면 정란이는 거의 가망 없어. 그런 건 일찌감치 접는 게 나아. 쉽게 말해 손절이랄까?"
-그렇구나. 손절. 제 생각이 짧았어요. 아니, 정란이가 자꾸 시그널을 이상하게 보내니까 오해했다니까요?
"정란이 딱 보면 발랑 까졌잖아. 그런 애들은 특히 조심해야 돼. 남자를 가지고 노는 애들이거든. 니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고 할걸? 일부러 너 미련 가지도록 밀당했을 가능성도 있고."
-역시···. 저도 속으론 여우같은 년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쩐지 존나 아프게 때리더라니···.
"때려? 너 맞기도 했냐?"
-아, 아니요. 그냥 그건 넘어갈게요. 심각한 건 아니에요.
"암튼 중요한 건 가능성이 높은 상대를 탐색하는 거야. 그리고 목표를 잡으면 하이에나처럼 물어뜯는 거지."
-하이에나··· 메모···.
"메모하지 말고 머릿속에 저장해."
-넵, 사부!
"사부라고 부르지 말고."
-네, 형님.
"여하튼 내가 너 돕기로 했으니 끝까지 도울 건데, 일단 조모임에선 견적이 안 나올 것 같으니 모임에만 집중하자. 너도 나 괜히 굳이 밀어줄 생각 말고. 알아서 잘하니까."
-네, 형. 근데 아까 정란이랑 통화한 게 마음에 걸리네요.
"통화?"
-네. 정란이가 오빠랑 친해지고 싶다고 저한테 도와달라고 했거든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니까 짜증나네. 사람 가지고 놀아도 유분수지, 마음에도 없으면서.
"너 정란이 골탕 먹이고 싶어?"
-네. 진짜 맞은 거 두배로 돌려주고 싶어요. 아까 니킥 맞았을 때 진짜 고자 되는 줄 알았잖아요.
"니 킥도 맞았어?"
-어휴, 말도 마요. 어찌나 손버릇이 고약한지 형 안 볼 때마다 때리더라니까요.
"어휴, 등신아. 그걸 처맞고 있었냐."
-그땐 정란이가 애정 표현하는 줄 알았죠. 하하.
"거 애정표현 좀만 더 격하게 했다간 응급실 실려갈 판이네."
-이젠 안 그래요. 형 덕분에 썅년이라걸 알았으니까.
"그렇지. 썅년이지. 근데 후배가 그렇게 당했는 데 가만 놔둘 순 없겠는데."
-그럼 어떻게 복수할까요?
"네가 잘만 도와주면 내가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아."
-진짜요?
"응. 그런 양아치 같은 애들은 또 요리하는 법이 따로 있거든. 너 내 말대로 할 수 있겠어?"
-어떻게요? 형이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아니 사부님.
"그 사부 소리는 좀. 아무튼 정란이가 시키는 데로 하는 척 하되 뭐라고 지시했는지 나한테 먼저 다 알려주는 거야."
-오오, 이중스파이!
"그렇지 이중 스파이. 태영이 너 연기 잘하잖아. 연극과 에이스."
[네? 태영군이요?]
‘태영이는 단순해서 좀만 띄워주면 알아서 잘 할걸.’
-헤헷, 엄밀히 말하면 에이스까진 아니지만 연기는 좀 돼죠.
"캐스팅 좋네. 견적 나올거 같아. 그럼 작전명은 썅년 골탕 먹이기로 하자."
-네. 그럼 내일부터 작전 들어가는 거죠?
"응. 하여간 그런 애들은 크게 망신 한 번 당해봐야 돼."
-형. 진짜 전 형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일 줄 알았어요. 예전부터 그 생각했거든요. 이 형은 뭔가 다르다. 뭔가 특별하다.
"···있기는 또 뭐가 있어?"
-아, 암튼 형님 존경합니다.
"됐고. 잠이나 자. 나도 이제 집에 다 왔다."
-네, 형. 내일뵈요.
"그래."
통화를 마치자 어느새 집 앞이었다.
왠지 사기꾼이 된 느낌에 뒷골이 살짝 당겼다.
< 830. 기말 시즌-30-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