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847화 (815/2,000)

< 829. 기말 시즌-29- >

***

희주를 집에 바래다주고 집으로 차를 돌렸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가 한산했다. 교통신호가 노란불 깜빡이로 바뀐 곳도 있었다. 고요한 새벽을 차를 몰고 가로지르자 문득 옛 생각이 났다.

그땐 지금보다 훨씬 좋은 차를 몰았다.

어마어마한 부자까진 아니었지만, 금전적으로 별 어려움이 없던 시절이었다.

지방에서 열리는 세미나를 끝내고 새벽길을 달려올 때가 많았다. 아마도 그 순간에도 마누라는 다른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여 내 침대 위에서 그 짓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불유쾌한 상상이 떠오르자 화가 치밀었다.

과거의 이정우는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차를 몰았지만, 원룸에 살면서 중고차를 모는 이도훈의 삶보다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은 원인은 바로···.

"아씨, 신경 쓰여서 도저히 안 되겠네."

결국, 참다못한 나는 늦은 시간임에도 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신호가 몇 번 가더니 이윽고 태영이 전화를 받았다.

-어? 도훈이형? 형이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꼭 일이 있어야 전화하냐?"

-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냥 뭐하나 싶어서 연락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

-네 형. 잠깐 침대에 누웠다가 잠이 안 와서 다시 게임하고 있어요. 형 근데 어디에요? 밖인가보네요. 소리 들리는 거 같은데.

"어. 잠깐 차 몰고 밖에 나왔어."

-이 시간에요? 혹시 누구랑 드라이브하시는 거?

"드라이브는 무슨. 그건 됐고, 너 잘 돼 가고 있냐?"

-무슨 말씀이신지.

"정란이랑 말야."

-음···. 긴가민가해요.

"아까는 괜찮은 거 같다며?"

태영이 머쓱하며 대답했다.

-여자 마음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더라고요. 도통 무슨 마음인 줄 모르겠어요.

태영의 말이 정답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열 남자 마음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도 한 여자 마음은 끝내 알 수 없는 법이다.

나는 태영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를 보면 인기 없던 전생의 내가 떠올랐다. 여자한테 휘둘리고 호구처럼 당하고, 결국에는 인생까지 종친 못난 이정우 말이다.

"태영아. 내가 너보다 몇 살 더 살았다고 잔소리하려는 건 아닌데 한마디만 할게."

-네, 형. 말씀하세요.

"정란이는 좀 아닌 거 같아."

-···네?

"내가 오늘 일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란이랑 너랑 안 어울리는 거 같다고."

-형,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혹시 무슨 얘기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

-혹시 정란이랑 통화를 했다던가···.

태영이 말끝을 흐렸다.

세상에!

태영은 나와 정란의 관계를 의심하는 있었다. 그녀가 나를 사주해 그를 단념시키라고 지시한 것처럼 말이다.

‘말귀를 못 알아듣네! 김태영 이 자식.’

물론 질투심의 발로겠지만, 조언을 해주고자 연락한 나의 본의를 의심하니 나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좋은일 하려다 욕만 먹는 꼴이다.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십니까?]

‘뭐가?’

[가만히 놔두면 주인님을 노리는 쌍둥이 자매가 경쟁하듯 달려들 텐데요. 태영군이 정란양을 커버하는 동안 언니인 정희를 취할 기회도 더 많이 생길 테고요. 저는 지금 주인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맞는 소리였다.

사실 미션을 위해서라면 정란이 태영을 가지고 놀게 놔두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미션을 해결하고 나면 태영은 어떻게 될까?

상처받고 또다시 버려지면 그만인가? 과거의 이정우처럼 상간남에게 칼침 맞고 저수지에 버려지는 엔딩이어도 괜찮겠느냐는 말이다.

이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가만 놔두면 굿이나 보고 떡은 치겠지만, 정란에게 농락당한 태영은 또 한 번 상처받게 될 것이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면 녀석은 여자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길지도 모른다. 나의 묵인과 방관으로 인해.

그건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인마. 넌 대체 나를 뭘로 보고. 내가 그렇게 치졸한 놈으로 보이냐?"

살짝 언성을 높이자 태영도 아차 싶었는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가 말실수 했어요. 실은 정란이가 아까 전화해서 이상 얘길 해 가지고.

"전화를? 뭐라는데?"

태영이 구구절절 자신의 사연을 읊었다.

희주와의 카톡 대화에서 본 내용과 대부분 일치했다.

나는 곧바로 말했다.

"내가 볼 때 걔가 너한테 마음이 있으면 그런 식으로 안 해.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죠?

"태영아. 정란이는 지금이라도 접고 다른 여자 알아보자. 여자가 정란이 뿐이냐?"

나의 조언에 태영이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한테는 그게 쉽겠죠

"뭐?"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여자로 바로 갈아탈 수 있는 거요. 형은 인기 많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하잖아요.

"야, 넌 무슨 말을···."

-전 안돼요. 그게.

"태영아. 남자는 자신감이야.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 무슨 여자를 꼬셔?"

-전 형처럼 잘생기지도 않았잖아요. 솔직히 형은 저 같은 사람 마음 죽었다 깨나도 이해 못 할 걸요. 저라고 뭐 껄떡대는 게 좋아서 그렇겠어요?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그렇죠. 진짜로 열심히 해도 안 되더라고요.

무척이나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인생 다 산 것처럼 얘기하는 놈의 태도가 우습기도 하면서도, 과거의 이정우 시절이 떠올라 마음 한 켠이 울컥했다.

연애에서 가장 슬픈 건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지 못해서가 아니다. 나빼고 다른 놈들은 다 만난다는 게 가장 슬픈거다.

"아이고, 태영아···."

-충고 감사해요, 형. 저한테 신경 써주셔서. 근데 전 이렇게 밖에 안 되는 놈인가 봐요.

‘이 병신 새끼가 진짜.’

[그냥 놔두십시오. 소귀에 경 읽깁니다. 본인이 저렇게 자신감이 없는데 주인님 말이 귀에 들어 오겠습니까?]

‘그럼 침몰하는 걸 팔짱 끼고 수수방관하란 말이야?’

[왜 그렇게 오지랖이십니까? 주인님 일도 아닌데 말이죠.]

‘태영이도 이제 행복할 때가 됐잖아!’

[···네?]

‘태영이도 좀 여자도 만나고, 밤에 신나게 물도 빼고 그럴 때 됐잖아. 불쌍하잖아, 저 새끼.’

[아···, 주인님이 마침내 동정심을 익히셨군요.]

띠링-

그때였다.

갑자기 머릿속에 알림이 울린 것은.

<동정의 신이 당신의 동정심에 감동합니다.

‘뭐라?’

[주, 주인님. 천상의 메시지입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았기에 나는 태영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태영아 내가 다시 전화할게. 잠깐 끊어봐."

‘무슨 내용인지 읊어봐.’

[넵. 동정의 신이 당신이 보여준 아량과 친절에 감동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동정을 굽어살피는 동정의 신은 당신에게 특별한 부탁을 전합니다.]

‘부탁이라고? 이런 미션도 있나?’

[관찰자인 신들은 주인님을 늘 주시하고 있습니다. 아마 태영군에 대한 주인님의 호의가 동정의 신의 이목을 끈 것 같습니다.]

‘근데 저 동정의 신이 설마 그 동정이야 아님 그 동정이야?’

[신들의 아명은 알 길이 없습니다. 추측할 뿐이죠.]

‘아무래도 총각 말하는 거 같긴한데···.’

[태영군이 총각은 아니지 않나요? 저번에 얘기한 걸 들어보면요.]

‘모르지. 아다 새끼가 후다인 척 하고 다녔던 건지도.’

[아무튼, 미션 내용 계속 전하겠습니다. 동정의 신은 태영군을 불쌍히 여겨 당신이 그의 연을 맺어주길 원합니다.]

‘뭔 소리야? 나보고 중매라도 서라는 건가?’

[계속 보시죠. 그를 훈련 시켜 진정한 짝을 맺도록 도우십시오.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겐 온 우주가 돕는 법이니까요. 라는 군요.]

‘헐. 무슨 미션 내용이 이따위야? 그러니까 나보고 태영이를 제자로 삼으라는 거지? 여자 따먹을 수 있도록?’

[거친 표현이지만 얼추 그렇게 정리가 되는군요.]

‘하-. 잠깐 고민 좀 하고.’

느닷없는 미션이었다. 설마하니 여자를 따먹는 미션 외에 이런 것이 제공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돕는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어쩌면 태영이 전력으로 원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간절히 원한적이 없으니 말이다.

‘나 갈 길도 바쁜데 태영이를 어느 세월에 챙겨?’

[방금 전까지 태영군을 걱정하지 않으셨나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다른 것도 아니고 여자를 꼬시는 법을 가르치라는 소린데 그게 쉽냐?’

[주인님도 슬슬 제자를 거둘 시기가 됐죠. 그 나이에 주인님만한 성취를 보인 분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긴 틀린 말은 아니다.

이도훈의 몸으로 빙의한 뒤 대략 6개월여.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려 100여명 가까운 여자들을 따먹고 다녔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여자를 갈아치우며 먹고 다닌 셈이다. 심지어 몇 명과는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왔으니 섹스의 횟수는 그보다 많을 것이다.

하루라도 잦이를 가만히 놀린 날이 솝에 꼽을 정도이니, 정확히 몇 명의 여자와 잤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아마 50명은 넘고 100은 안 될 것 같다.

‘아니 그래도···. 태영이 저거 사람 만드는 게 쉬운 게 아닌데.’

문제는 태영이었다.

쓸데없이 눈만 높고, 여자에 대해 눈치라곤 전혀 없으며, 허구한 날 야한 생각으로 뇌까지 정액으로 가득차 태영이. 절대 쉬운 미션은 아니다.

[그럼 포기하시는 겁니까? 태영군을 이대로 버리시겠다고요?]

‘무슨 말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해. 버린다는 게 아니라 내가 자신이 없다는 소리잖아.’

[흐음, 보상을 보시면 생각이 바뀌시지 않을까요?]

‘보상이 뭔데?’

[미션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정남의 펜던트’]

‘펜던트? 목걸이 말이야?’

[참고로 ‘동정남의 펜던트’에 대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모든 마법사는 동정이다. 동정은 그 자체로 순수한 정기를 의미한다. 이 목걸이엔 수많은 동정남의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가 담겨있다. 목걸이를 착용하는 순간 스킬의 위력이 증대된다.]

‘가만, 마력 증폭 목걸이라고?’

[그렇습니다. 스킬의 위력을 한 단계씩 상승시켜주는 전설급 아이템입니다.]

‘오올!’

대박이다.

스킬을 하나씩 강화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건 모든 스킬을 +1강화하는 목걸이인 것이다.

태영이 하나만 구제하면 동정남의 펜던트를 얻을 수 있다.

갑자기 소유욕이 솟구쳤다.

‘하겠어!’

[역시 아이템을 보니 눈이 돌아가시죠?]

‘가만 근데 보상이 너무 큰데? 제약이 있는 거 아니야?’

[제약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영군과 맺게 되는 인연의 대상은 어떠한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새로운 인물이어야 합니다. 만약 주인님의 손을 미리 거치거나 금전, 약물 등으로 포섭할 경우 신들의 과제는 자동으로 종료되며 주인님의 대물은 동정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으잉? 다른 건 이해했어. 근데 동정 상태로 돌아간다니, 무슨 남자가 처녀막 재생 수술이라도 한다는 소리야?’

[대물의 강직도 민감도가 모두 동정 상태로 초기화된다는 뜻입니다.]

‘어엇, 그렇다는 말은···.’

[네. 무척이나 예민한 상태가 되겠죠. 마치 평생 섹스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남자처럼요.]

‘아아, 이건 좀 위험한데. 섹스마스터가 초급자로 강등된다는 뜻이네.’

[그렇게까지 격하되진 않겠지만 지금처럼 능수능란한 스킬을 발휘하긴 힘들게 될 겁니다. 마치 동정처럼요.]

‘으음.’

나는 고민했다.

이번 미션은 제약만 없었으면 아주 쉬울 뻔 했다.

알고 지낸 여자 중에서 아쉬울 거 없는 애들로 하나 방출해 주면 그만이니까. 세뇌를 걸고 태영이에게 몸을 바치라고 주는 것이다.

하지만 미션의 대상은 나의 손을 타지(?) 않는 여자여야 했다. 또 어떤 식으로든 상대를 미리 포섭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쩐지 아이템이 전설급이라더니.’

[신들의 도전과제가 쉬울 리가 없죠.]

‘혹시 미션 실행 기간도 명시되어 있나?’

[없습니다. 언제 착수하시던 그건 주인님의 자유입니다.]

‘으음. 그렇단 말이지.’

현재 나는 쌍둥이 미션 뿐 아니라 처녀보살 업적도 함께 진행중이다. 여기에 태영의 과제까지 더해진다면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다.

‘기간 제한이 없으면 일단 받아도 되겠는데.’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태영군이 주인님과 만난 여자랑 관곌 맺게 된다면 미션이 자동 실패한다는 사실을요.]

‘그건 걱정마. 저 지경으론 누구도 꼬시기 힘들 테니까.’

결심을 굳힌 나는 동정의 신의 과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아. 태영이 한 번 인간 만들어 보자.’

[무운을 빌겠습니다.]

상황 정리가 끝난 나는 전화를 끊었던 태영에게 다시 전화했다. 미션을 받아들인 이상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태영과 정란을 말릴 때였다.

-여보세요? 형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

"내가 다시 전화한다고 했잖아.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아아, 그래. 정란이. 걔는 좀 아니다."

-저도 힘들 거란 건 알아요. 정란이처럼 예쁜 애가 왜 저랑 만나겠어요? 그래도 제가 좋은 걸요.

"태영아. 그러지 말고 형 말 한 번만 듣자. 괜히 헛물 켤까봐 그래."

-저야 깨지는 건 익숙해요. 한 두 번 까인 것도 아니고. 고백하고 차인것만 5번도 넘을 걸요.

"내가 도와줄게."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너 도와준다고. 너 여자 꼬실 수 있게."

태영이 잠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런 걸로 도움을 받는 다니 창피했던 모양이다.

-괜찮아요 형.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말뿐이 아니라니까? 내가 진짜 너 여자 사귀게 도와준다고."

나는 한 번 더 또박또박 말했다.

< 829. 기말 시즌-29-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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