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6. 기말 시즌-26- >
문제는 옷을 너무 대충 입었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희주를 만나게 되면 옷을 입고 있는 시간보다 벗고(?) 있는 시간이 많을 것 같아서 아무거나 걸쳐 입고 나온 게 화근이었다.
패션의 완성이 아무리 얼굴이라곤 해도, 반대로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잘생긴 얼굴을 받쳐 줄 최신 트랜드의 패션이 필요했다.
‘로시, 혹시 포인트로 옷도 구매할 수 있나?’
[왜요? 옷도 갈아입으시게요?]
‘너무 대충 입고 나온 거 같아서 말이야. 명색이 남친 대행인데 성의가 없어 보일까 봐.’
[그런 거면 변장 아이템으로도 가능합니다.]
‘변장 아이템? 아, 저번에 은성이네 집 잠입할 때 썼던?’
[네. 원하는 컨셉을 알려주시면 최적화된 의상을 추천 해드릴겁니다.]
‘오케이. 그럼 이번엔 첫눈에 반할만한 남친룩으로.’
[너무 복잡한 요구군요. 아무튼 컨셉에 맞춰 변장 아이템을 전송하겠습니다. 비용은···.]
‘가만. 하나 더.’
[또요?]
‘처음 보는 이성을 홀리게 할 수 있는 아이템이 뭐가 있을까?’
[불특정 다수의 호감도를 높여주는 거라면 페로몬 향수가 최곱니다. 하지만 통상 매력 수치를 올려주는 아이템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상관없어. 어차피 따먹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첫눈에 호감을 느끼게 할 정도면 충분해. 보는 순간 설렐 정도로만.’
[알겠습니다. 한데 주인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뭐가 또?’
[솔직히 말해 양희주 양을 제일 무시한 건 주인님이셨잖습니까? 심지어 못생겼다고 얼굴에 비닐봉지까지 씌운 적도 있고요.]
‘그땐 진짜로 빻았으니까 그랬지. 이젠 과거형이지만.’
[아무튼, 그랬던 주인님이 이젠 희주양이 괄시를 받는다고 불필요한 포인트까지 투자해 자존심을 챙겨주려는 모습이 뭔가 아이러니하달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주인님이 생각해도 모순적이죠?]
‘아니.’
[아니라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희주를 무시한 건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내 여자를 무시하는 걸 허락한 적은 없거든.’
[그게 무슨···.]
‘내 여자는 나만 무시할 수 있는 거라고. 내 거를 내가 뭐라 평가하건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남들이 그러면 기분 나쁘지. 지들이 뭔데 함부로 내 여자를 평가해? 절대 용납 못 해 그건.’
[역시 주인님은 내로남불의 신이십니다.]
‘맞아. 내가 하면 무조건 로맨스여야 해. 무조건!’
나는 아이템을 수령하며 씩 웃었다.
***
"희주 너네 오빠 다 왔다지 않았니?"
"그러게? 도착한 지 한참 된 거 같은데 부끄러워 못 들어오는 건가?"
친구라는 것들이 더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우열이 생기기 마련.
내가 너보다 공부를 잘하느니, 우리 집이 너네 집보단 잘사느니 하는 것부터, 내 남친이 좀더 학벌이 좋니 더 잘생겼는니 하는 세세한 것까지 늘 비교하고 사는 게 인간이었다.
심지어 희주의 단짝인 세영과 경주는 둘 다 예뻤다.
셋이 함께 다니면 다들 희주를 두 사람의 시다바리쯤으로 생각했다. 물론 희주도 몸매가 뛰어났기 때문에 비교도 안 되게 꿀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사람을 볼 때 얼굴이 가장 먼저 보이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희주의 몸매가 빼어난 건 사실이지만, 세영과 경주 역시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즉 몸매의 격차보다 얼굴의 격차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오랜 기간 친하게 지내고 함께 유흥을 즐기는 사이긴 했지만, 이러한 부분 때문에 세영과 경주는 친구인 희주를 자기들보다 밑으로 봤다. 심지어 희주가 남자한테 인기가 많은 이유조차 몸을 쉽게 허락하기 때문이라며 평가 절하하고 있었다.
쉽게 대주는 여자가 남자한테 인기 많은 게 뭐가 그리 대단한 거냐면서.
그랬던 희주가 최근에 눈에 띄게 예뻐졌다.
방학 중이었다면 성형수술이라도 하고 왔거니 하겠지만, 학기 중에 예뻐지자 무언가 마술이라도 부린 느낌이었다. 어긋나 있던 이목구비가 제 자리를 찾아가자, 예전의 빻았던 모습과 비교해 정말 용됐다는 표현이 절로 나왔다.
세영과 경주는 그것이 배알 꼴렸다.
분명 자기들보다 밑으로 봤던 희주가 점점 맞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심술이 나 희주의 남친을 돌려깠다.
그녀가 남자랑 쉽게 사귀고 쉽게 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가볍게 만난 남자들이 예상대로 별볼일 없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네가 아무리 예뻐져봐야, 네 남친이 너의 수준을 말해 준다며.
실제로 세영은 현재 의대생 남친을 사귀고 있었고, 경주의 남친은 비록 군대에 가 있긴 했지만, 영국에서 대학을 다닌 유학파 출신이었다.
그런 두 사람에 비하면 희주 남친은 끽해야 같은 대학에서 만난 평범남일 뿐. 보나 마나 뻔했다.
"그러게. 키 크고 잘생기고, 차까지 모는 훈남 오빠가 어째서 아직까지 못 들어오고 있을까나?"
"희주 너 우리한테 괜히 꿀릴까 봐 없는 말 지어낸 건 아니지?"
"에이, 지어내다니? 경주 너 희주한테 농담 너무 심한 거 아니니? 설마 희주가 그런 거짓말을 했으려고."
두 사람은 서로 죽을 맞춰가며 희주를 놀렸다.
희주는 입술을 깨문 채 핸드폰만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 이렇게 늦지. 통화한 지 10분도 넘었는데···.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던 걸까? 하긴 오빠가 거절해도 할 말 없긴 하지. 나 같은 게 오빠한테 뭐라고···.’
실망한 희주가 마침내 친구들에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들통날 거,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그냥 솔직히 말하는 게 덜 창피할 거 같았다.
"애들아 사실은···."
"미안, 내가 좀 늦었지?"
그때였다.
거짓말처럼 도훈이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온 것은.
"어, 와!"
"혹시 희주 남자친구 분이세요?"
세영이 도훈을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뒤늦게 등장한 도훈이 너무나 잘생겼던 것.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넋이 빠질 정도로 눈에 확 띄는 외모였다.
도훈의 키는 테이블에 앉은 상태에서 고개를 한참 젖혀야 할 만큼 컸다. 다운 펌을 넣은 단정한 머리와 남친 룩이라 불리는 댄디한 스타일은 SNS에서 핫한 인플루엔서가 막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도훈은 경쾌하게 인사를 건네며 세영과 경주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희주 친구분이시구나. 희주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와, 오빠 너무 잘생기셨어요!"
"희주야! 넌 어쩜 이렇게 잘생긴 남친을 꽁꽁 숨겨놨니?"
다들 도훈의 화려한 외모에 놀랐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아닌 희주였다. 그녀가 아는 도훈은 잘생기고 몸 좋은 선배긴 했지만, 딱히 패션에 관심이 없는 훈남 오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같았다.
평소에 본 적도 없는 댄디한 룩에, 잔뜩 공을 들인 헤어스타일. 게다가 피부도 화장이라도 한 것처럼 맑아서 무슨 아이돌을 보는 기분이었다. 몸에서 은은하게 스며 나오는 향수 냄새는 심장을 덜컹 내려 앉힐 만큼 매력적이었다.
‘오, 오빠가 이렇게나 잘생겼었나?’
희주는 한껏 꾸미고 나온 도훈의 변신에 놀라는 동시에, 친구들 앞에서 잔뜩 기가 살았다.
"아이참 오빠. 늦어서 걱정했잖아."
"미안. 차를 주차할 데가 마땅치 않더라고."
"차?"
"응."
도훈이 일부러 키홀더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외제 차 엠블럼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급 키 홀더.
다들 내색은 안 했지만, 도훈이 모는 차가 독일제 외제차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도훈은 눈빛이 변하는 여자들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편의점 들러 키 홀더 사길 잘했네.’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 눈치네요.]
‘저렇게 발랑 까진 애들은 속물인 경우가 많거든.’
"오빠 차도 있으세요? 우아."
"세영이 너네 오빠도 차 있지 않아?"
"그거 아빠 차래."
"아···. 난 또."
"나도 속았지 뭐야. 한 번은 데이트 할 때 지하철 타고 오길래 왜 차 안 끌고 왔냐고 물으니까 이실직고 하더라고, 참나."
"흐응. 의대생이라면서 은근 개털이었네."
"내 말이. 사실 의사도 아닌 의대생이 무슨 돈이 있겠어."
다들 도훈을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도훈은 일부러 그녀들의 속물근성을 떠보려 한 것이었으므로 작전이 들어맞자 속으로 피식 웃었다.
‘뭐야. 겨우 저런 애들이 우리 희주를 괄시했던 거야? 진짜 어이가 없네.’
도훈은 일부러 희주의 등허리 뒤로 손을 넣더니 옆구리를 끌어 안고 친한 척을 했다.
"술은 많이 드셨어요?"
"아니요. 얼마 안 마셨어요."
"그냥 가볍게 맥주나 한 잔 하려고 들른 거라서요."
"오빠도 한 잔 하실래요? 아, 맞다 차 가지고 오셨지."
두 사람은 유난히 도훈에게 흥미를 드러냈다.
여자인 이상 지금의 도훈에게 호감을 갖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더욱이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다른 남자랑 얼마든지 원나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랑 까진 여자들이라면 더더욱.
도훈은 두 사람이 자신에게 부쩍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희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우리 희주랑 데이트하기로 해서요.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마셔요."
"근데 오빤 희주랑 어떻게 만났어요?"
"접때 무슨 운동 동아리에서 봤다지 않았나? 근데 몸 보니까 운동 많이 하신 거 같아요."
경주가 은근슬쩍 손바닥으로 도훈의 팔을 어루만졌다.
도훈은 절친 앞에서 은근슬쩍 끼를 부리는 경주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페레몬 향수가 넘 강력한가? 애들 왜 이렇게 질척대지?’
[그만큼 주인님이 매력적이라는 거겠죠.]
‘흥! 저딴 애들은 트럭으로 줘도 안 먹어. 희주 반도 못한 것들이 어디서 껄떡대?’
도훈은 경주의 터치에 곧바로 팔을 뒤로 빼며 말했다.
"아, 예 뭐. 운동했어요. PT."
"어쩐지. 몸 좋아 보이시더라."
"그럼 헬스장에서 만난 거예요?"
"희주 얘가 먼저 꼬셨죠?"
"당연하지. 희주가 원래···."
두 친구는 도훈이 탐이 난 나머지 다시 희주를 깎아 내렸다. 분명히 희주가 꼬리쳐서 도훈을 꼬셨다고 믿었다.
"아니요. 제가 먼저 고백했어요."
"네?"
"오빠가요?"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심지어 희주 역시 금시초문이라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도훈은 기왕 희주 기를 살려주기로 한 거 제대로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거짓말을 했다.
"네. 희주 얘가 몸매가 워낙에 좋잖아요."
"아이참, 오빠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왜 그래? 솔직히 맞잖아. 신내바. 신내바 알아요?"
"왜 그래 진짜 친구들 앞에서!"
희주가 민망한 듯 도훈의 가슴을 툭 쳤다.
하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친구들에게 질투심을 일으켰다.
‘아주 깨가 쏟아지네. 진짜.’
‘희주 저년이 어떻게 저런 킹카를 잡았지? 어디 하자 있는 거 아니야?’
"암튼, 런닝 머신을 타고 있는데 우연히 희주가 옆에서 운동을 시작하더라고요. 너무 예뻐서 굴러 떨어질뻔 했잖아요 진짜."
도훈은 일부러 호듭갑을 떨었다. 푼수처럼 보일지경이었지만, 이미 도훈에게 마음을 뺏긴 두 여자에겐 그마저도 귀엽게 느껴졌다.
‘하. 부럽다. 내 남친은 의대생인거만 빼면 진짜 볼 것도 없는데. 오죽하면 내가 바람피우고 다닐까.’
‘희주가 진짜 남자 복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나. 저런 남친이 있는데 대체 왜 우리랑 같이 클럽 가러 온 거지? 설마 남친이 밤일 시원찮아서?’
"근데 시간도 늦었는데 둘이 어디 가시려고요? 설마 좋은 데 가시는 거 아니죠?"
도훈의 정력(?)을 의심한 경주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드라이브 좀 하다 집에 바래다주려고요. 밤길에 혼자 보내면 위험하잖아요."
"어휴, 우리 남친 새끼는 뭐하나 몰라. 내가 늦게 들어가던 말던 신경도 안 쓰던데."
"에이, 정말 집으로 바로 가시는 거 맞아요?"
경주가 자꾸 도발해 오자 도훈이 받아쳤다.
"어쩔 수 없죠. 저흰 한 번 발동 걸리면 날을 새도 모자라서요."
"어, 어머 오빠 그런 얘길 왜 해?"
"왜? 틀린 말도 아닌데."
도훈이 은근슬쩍 정력까지 과시하자 둘 다 부러움에 죽을 지경이었다. 피지컬만 봐도 원체 힘이 좋게 생겼기 때문에, 도저히 거짓말로 보이지 않았다.
도훈은 충분히 희주의 기를 살려주었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잠시만요. 저 화장실 좀."
"네."
"다녀오세요."
도훈이 잠시 자릴 비우자 세영과 경주가 득달같이 희주에게 물었다.
"얘, 너 남친 진짜 괜찮다."
"세상에, 뻥인 줄 알았는데 듣던 것보다 훨씬 훈남이네. 어케 꼬셨어 이년아?"
"뭘 또 내가 꼬셔. 아까 못들었어? 오빠가 먼저 대쉬했다니까."
"와···. 진짜 부럽다."
"근데 너희 오빠 진짜 그거 잘해?"
"계집애 넌 뭘 그런걸 물어 보고 그래? 희주 민망하게."
"그냥 궁금해서 그렇지. 난 저렇게 몸 좋은 남자는 한 번도 못 만나봤단 말이야."
도훈의 내조덕에 어깨뽕이 과하게 들어간 희주가 말했다.
"저 오빤 진짜 짐승이야. 말도 마."
"와···. 역시."
"너 왜 저런 남친 두고 우리랑 놀러 온 거야, 그럼?"
"나 사실 오늘은 쪽수 맞춰 주려고 온 거야. 다들 남친 있어도 신경 안 쓰고 가줬잖아."
"하-. 암튼 부럽다."
"그러게. 희주 다 가졌네."
그때 도훈이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많이 안 드셨네요? 제가 술값은 계산해 놨어요."
"앗! 오빠. 안 그래도 되는데."
희주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했지만, 도훈은 마지막까지 희주 기를 살려주었다.
"그래도 친구분들 뵙는 거 처음인데 이 정도는 사야지. 그럼 저 이제 희주 데리고 갈게요. 다음에 또 뵈요."
"네. 안녕히 가세요."
"희주 아껴주세요."
"네."
도훈과 희주가 가게를 나가는 순간까지 두 친구는 부러움과 시샘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826. 기말 시즌-2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