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0. 기말 시즌-20- >
"역시 술이 낫지 않을까요?"
"술? 애들 많이 취한 것 같던데 더?"
"음, 아무래도 술이 들어가야 재밌을 것 같은데···."
태영은 쌍둥이를 좀 더 취하게 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정희의 극적인 변화가 인상 깊었다.
술은 사람을 개방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으니까.
그 개방성이 미지의 문을 열어 줄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정란이도 그렇지만 정희도 술 마시기 시작하니까 분위기가 확 살더라고요. 조용한 범생인 줄만 알았더니."
"그렇긴 한데···. 내일 수업도 있는데 계속 먹으려고 할까? 내일이 주말이면 모를까."
"그런가? 좀 무리려나?"
"너무 의도가 뻔히 보이지 않겠어? 빨리 친해지는 것도 좋지만 템포도 적당히 올려야지."
도훈은 태영과는 조금 다른 입장이었다.
만일 공략 대상이 한 명뿐이었더라면 도훈도 술을 더 마시자는 의견에 찬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쌍둥이라는 게 문제였다.
어쨌든 둘은 가족이고 결국 최종 목적지는 모텔이 아니라 집이 될 수밖에 없다. 애써 공들여 봐야 헛심만 쓰는 꼴이다.
‘나이트에서 원나잇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작업을 걸더라도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접근해야 한다. 두 사람은 하룻밤 만에 치울 대상이 아니다. 다음 주 조별 과제까지 두고두고 얼굴을 맞대야 하는 사이다. 괜히 모임 첫날부터 일을 벌였다간 조발표고 뭐고 흐지부지될 것을 우려했다.
서둘렀다가 괜히 낭패라도 보면 미션 전체가 어그러진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런가요? ···쩝."
도훈의 반대에 태영이 아쉬운 지 입 맛을 다셨다. 정란이 이미 반쯤 넘어왔다고 믿는 태영으로선, 잘하면 오늘 밤이라도 당장 진도를 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훈이 형은 가끔 과감함이 부족하단 말이야? 조금만 더 밀어불이면 고지가 저 앞인데.’
"정 헤어지기 아쉬우면 같이 산책이나 하던지."
"산책이요?"
"응. 좀 걷게. 술도 깰 겸. 얘기도 하면서 친해지고."
술자리에선 두 자매의 경쟁으로 인해 대화가 부족했다. 도훈은 차라리 좀 더 대화를 나누며 호감도를 높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여자는 남자와 달랐다. 마음이 먼저 열려야 몸이 열린다.
"형 생각이 그렇다면···. 전 형 밀어드리려고 그런 거죠."
태영이 애써 본심을 감췄다.
"너무 인위적으로 애쓰지 않아도 돼. 잘 될 사람이면 어련히 잘 되겠지."
"네."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나와 테이블로 복귀했을 땐 정란 혼자서 멀뚱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정희는 어디 갔어?"
"전화 받으러 잠깐 나갔어요."
"아···. 그나저나 생각보다 술을 너무 마셨나봐. 과제를 이어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도훈이 테이블 위에 쌓인 잔을 보고 말했다. 가볍게 반주로 시작했던 술자리는, 어쩌다 보니 저녁 식사가 안주가 되고 소주병까지 쌓인 본격적인 술판으로 번지고 말았다. 정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안 그래도 언니가 오늘은 여기서 접어야겠다면서."
"응?"
"방금 집에서 온 전화거든요. 아빠가 저녁에 제사 있으니까 일찍 들어오라고."
"제사라고?"
태영이 뜨악하며 물었다.
"요즘도 제사를 지내는 집이 있어?"
"우리 집이다. 그게 뭐?"
정란이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태영만 보면 전투력이 부쩍 상승하는 그녀였다. 그러잖아도 갑작스러운 호출에 짜증이 나던 차, 만만한 게 태영이었다.
"아, 아니 우리 집은 그런 거 안 지내거든."
"몰라. 나도 짜증 나. 아버지가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라 1년에 두세 번씩은 꼭 이렇다니까? 언니가 얘기해 보겠다고 나갔는데 아마 안 통할 거야. 울 아빠는 다른 건 몰라도 그런 건 엄격하거든. 고집 센 거 보면 언니가 아빠를 닮았나 봐."
정란은 그 새 뒤에서 정희 흉을 봤다.
두 사람이 곧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소식에 태영이 급격히 우울해졌다. 2차는커녕 당장 쫑 날 분위기.
태영이 도훈을 향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텃네요.
-그러게.
두 사람이 눈빛으로 사인을 교환하는데 통화를 마친 정희가 1층에서 올라왔다.
"죄송해요. 아빠랑 통화가 길어져서. 술 마시는 거 들키면 꾸중 듣거든요."
"지금 집에 가봐야 해?"
"네. 오늘 제사라고 늦지 말라고. 제가 사정 말씀드렸는데 너무 완고하시네요."
"하-. 남은 과제는 어쩌지?"
태영이 마음에도 없는 과제를 걸고넘어졌다.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은 그였지만,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마음에 지푸라기도 잡는 것이었다.
"미안. 내가 집에 가서 마무리해 놓을게."
"아니야. 뭘 또 혼자 다 책임지려고 그래.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도훈이 반대했다.
"그냥 내일 좀 일찍 만나서 다 같이 하면 되지."
"그럴까요? 아무튼 이제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엄마 혼자 음식 준비 힘드실 텐데."
"바로 들어오래?"
"바로까진 아닌데···. 어차피 더 마실 상황도 아니라서요."
"그럼 술 좀 깨고 가자."
"네?"
도훈이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아니. 어차피 취한 얼굴로 집에 가면 눈치 보일 거 아니야. 집까지 얼마나 걸리는데?"
"버스 타면 10분 안 걸려요. 왜요?"
"그럼 걸어서 30~40분 안에 도착하겠네. 가자. 바래다줄게."
"저희 집까지 걸어서요? 아니에요. 괜히 죄송스러워서."
"뭘? 어차피 술도 깰 겸 걷자는 건데. 나도 술 깨고 싶어서 그래. 저녁에 해야 할 일도 있고."
도훈의 의견에 미리 말을 맞춘 태영이 찬성했다.
"그래. 우리가 바래다줄게. 밤길에 여자를 혼자 보낼 순 없잖아."
"안 그래도 되는데···. 많이 늦은 시각도 아니고. 괜히 저희 때문에 고생하시는 거 아니에요?"
"우리 둘 다 체육인이야. 그쯤은 상관없어. 정란이는 걸어도 괜찮겠어?"
"난 상관없어요."
"정희는."
"어차피 술을 좀 깨야 하긴 하니까···. 그래요 그럼."
그렇게 네 사람은 모임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
네 남녀는 초저녁의 밤거리를 걸었다. 늦은 시간은 아니다 보니 길거리엔 인파들로 북적였다. 처음엔 두런두런 얘기하며 걷다가, 사람에 치여 밀려 자연스럽게 커플간의 간격이 벌어졌다. 태영은 정란과, 도훈은 정희와 함께였다. 도훈과 나란히 걷는 정희는 왠
지 부끄러운 표정이었다.
"···고마워요. 굳이 안 바래다주셔도 괜찮은데."
"아니야. 그냥 좀 걷고 싶었어. 술도 깰 겸. 많이는 안 마셨는데, 내가 좀 술이 약해서 말이야."
"아하."
"너랑 더 얘기하고 싶은 것도 있고."
"저랑요?"
정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아까 말하던 거 이어서."
"아···."
두 사람은 정란이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속마음을 나누었다. 서로의 호감을 확인했기에 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져 있었다.
"그럼 넌 남자친구 한 번도 사겨 본 적 한번도 없어?"
"네. 오빠는요?"
"난 뭐···."
"있구나. 괜찮아요. 당연히 있었겠죠."
도훈은 누가 봐도 훈남이었다. 길거리를 걷는데 그보다 큰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키도 훤칠하고 스타일까지 좋은 그를, 여자들이 가만 둘리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잘생긴 사람을 몰라 보는 건 아니었으니까.
정희는 도훈의 과거를 신경 쓰는 자신의 모습에 속으로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그나저나 내가 왜 이러지? 도훈 오빠가 여친이 있었다는 게 특별한 일도 아닌데 말이야.’
이제껏 연애와 담을 쌓고 살아온 정희로선, 자신이 이성의 과거사에 신경 쓴다는 게 낯설고 새로웠다. 질투라기엔 무겁고, 아쉬움이라기엔 부족함 감정이었다.
도훈이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군대 가기 전에 잠깐···."
"그럼 군대 가면서 헤어지신 거예요?"
"그렇다고 봐야지. 뭐, 사실 차였지만."
"오빠가 차였다고요?"
정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도훈처럼 괜찮은 남자를 걷어찬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의문 가득한 눈빛이었다.
"끝이 좀 안 좋았어."
"왜요?"
"과씨씨 였는데, 나랑 헤어지고 내 동기랑 만났거든."
"아···."
"여자도 잃고 친구까지 잃은 셈이지."
"혹시 지금도 그럼···."
"아니. 더 놀라운 건 걔도 얼마 못 가 차였다는 거야. 충격으로 자퇴해 버렸다던가?"
"세상에, 자퇴를요?"
"뭐 복합적이었겠지. 동기들 얼굴 보기 껄끄러운 것도 있을 테고, 수능을 다시 쳤다는 걸 봐선 처음부터 옮길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고. 참 전 여친은 이미 졸업했어."
"그렇구나. 많이 속상 하셨겠어요."
"이미 지난 일이야. 지금은 얼굴도 기억 안 나."
도훈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군대 가서 차인 것도 사실이고, 동기 이야기도 일정 부분 맞지만 결국 도훈은 전 여친이었던 송지희를 몇 달 전 다시 만났다.
전생의 이도훈이 받은 상처를 대리복수 하기 위해.
그리고 그녀의 후장을 뚫어버리며 복수에 성공했다.
"피. 거짓말 마요. 어떻게 사람 얼굴을 잊어버려요? 처음 사귄 분 아니에요?"
"응. 맞아
"원래 남자들은 첫사랑은 평생 못 잊는다던데···."
정희가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실제로 불혹을 넘긴 도훈으로서는 그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소리임을 알고 있었다.
첫사랑을 못 잊는 건 아직 살아온 기간이 몇 년 안 됐기 때문일 뿐이라면서. 스물여덟 살에 20대 초반의 강렬했던 기억을 잊기란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결혼하고, 애 낳고, 서른이 넘어 마흔쯤 되면 첫사랑 이름이 누구였는지도 가물가물해지는 순간이 온다. 첫사랑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젊은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일 뿐이다.
씨니컬한 감정에 빠지던 도훈이 화제를 돌렸다.
"정희 넌 아직 한 번도 안 사겨 봤니?"
"네."
"음,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제가요? 왜요?"
"아니 뭐···."
도훈이 쑥스럽게 말했다.
"예쁘니까."
"아니에요. 별로 인기 없어요. 정란이는 좀 많지만."
"너도 정란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그렇긴 한데···. 암튼 아니에요, 전."
"별로 생각이 없어서 그래?"
"음,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그렇게 남자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음,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혹시 독신주의···."
"아니요."
독신주의냐라는 물음에 정희가 단호히 의사를 밝혔다.
"평생 혼자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다만 기왕 남자를 만날거면 결혼할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기 보다."
난봉꾼 도훈으로선 죽었다 깨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게 그 혼전순결주의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저도 그렇게 들리는 군요.]
‘세상에. 독신주의자보다 더 희귀한데 이건.’
[그런가요?]
‘그렇지. 결혼은 할 건데 첫사랑과 결혼까지 가겠다. 뭐 이런 결심을 하기 쉬운 게 아니잖아.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완전 천연기념물이야.’
[아직 어리니까요.]
‘일단 저 생각부터 고치지 않으면 공략을 해도 부담이 되겠어. 자매덮밥은 꿈도 못 꾸고 말이야.’
[상식개변을 하실 생각입니까? 호감도가 충분히 올랐을까요?]
‘간당간당할 거 같아. 괜히 지금 봤다가 쿨타임 걸리면 확인 힘드니까 좀 더 끌어 올려보자.’
[어떻게 하시려고요?]
‘살짝 성욕을 자극해 보려고.’
[성욕을요? 저런 숫처녀에게 그게 통할까요?]
‘모르는 소리. 정란과 정희는 사실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어. 한 명이 그렇게 남자에 미쳐서 발랑 까졌는데, 한명이 지고지순 순박할 거 같아? 물론 사상은 그럴지 모르지. 모범생으로 평생 살아왔으니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키려 할테고.’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래도 몸뚱이 똑같아.’
[네?]
‘몸뚱이는 똑같다고. 정란이 야하면 정희도 속에 야한 본질이 있는 거야. 정란이 성욕이 강하면 정희도 분명 내제된 성욕이 잠재되어 있을 테고. 쉽게 말해 잠재되어 있을 뿐이야.’
[감추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축구로 치면 포텐이 높은 유망주라고 할 수 있지. 지금부턴 그 뚝을 천천히 무너뜨릴거야.’
도훈이 정희를 맛있는 먹잇감처럼 노려보았다.
***
"아씨. 왜 저렇게 걸음이 느려?"
정란이 한참 멀어진 쌍둥이 언니를 돌아보며 불평했다.
정란의 불만은 사실 점점 거리가 벌어지는 둘 사이의 거리보다, 그 옆에 달라붙은 도훈의 존재 때문이었다.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새 커플처럼 갈리고 말았다. 물론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지만, 동행자는 전혀 딴판이다. 자신의 옆에는 꼴도 보기 싫은 태영이가 있으니까.
"사람마다 걸음이 느릴수도 있지."
"뭐래? 너 일 똑바로 안 할 거야?"
"무슨 일?"
"나랑 도훈 오빠랑 엮어 준다면서. 이게 엮어주는 거야? 오히려 언니랑 잘되게 생겼는데?"
태영은 순간 의아한 감정에 휩싸였다.
지금껏 정란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그였기에, 그의 앞에서 도훈과 밀어달라는 정란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슬슬 본심을 밝혀도 되는거 아닌가?’
"진짜 도훈이형이랑 밀어달라고?"
"귀에 좆박았니? 안 들리세요?"
정란이 사납게 소리치자 태영은 순간 심장이 덜컹 거렸다.
이제는 조건반사처럼 그녀가 화만내도 발기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아아, 또···.’
발기와 동시에 멈춰버린 뇌는 또 다시 행복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그 말로만 듣던 NTR 감성이구나. 나한테 일부러 도훈이 형한테 마음이 있는 척 질투를 유발하는 거야. 아아, 내가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여전히 병신같은 결론을 내리는 태영이었다.
< 820. 기말 시즌-20-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