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8. 기말 시즌-18- >
***
"오빠. 나 어떻게 생각해?"
취했을까?
제법 흐트러진 자세였다. 쌍꺼풀진 두 눈은 살짝 풀리고, 아직 젖살이 남은 두 볼이 홍시처럼 빨갛게 익어 있었다. 약간의 술 냄새와 싱그러운 체취가 섞여 사내의 방심을 마구 흔들었다.
정희가 이렇게 대범한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당황해서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자 그녀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물었다.
"···나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그녀의 손이 꼼지락거리더니 부끄러운 듯 내 손등 위를 문질렀다. 명백한 유혹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조모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예상도 못 했는데요.]
‘원래 역사는 술로 이루어진다고 하잖아.’
[허어, 참. 그래도 이렇게 쉬워도 되는 것인지.]
하지만 돌다리로 두들겨 보고 건너는 게 나의 주의다.
나는 마음의 소리를 통해 그녀의 본심을 읽었다.
<란. 나보고 뺏어보라고 했지? 네가 하는 걸 나라고 못 할 줄 알았니?
정희의 속마음을 읽는 순간, 쌍둥이 자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간파되었다.
‘아하, 그렇게 된 거구나!’
[뭐가요?]
‘아까 기억나? 나랑 성수랑 맥주 시키고 올라왔을 때 엄청 어색했던 분위기.’
[네. 두 사람이 한바탕 싸운 것처럼 냉랭했던 것 말씀이시죠? 그 뒤로 막 경쟁하듯 술을 원샷 하고 그랬잖습니까?]
‘응. 아마 그게 나로 인해 벌어진 싸움이었나 봐.’
[주인님 때문에요?]
‘잘은 모르겠는데 나를 두고 두 사람이 누가 먼저 유혹하나 하는 그런 경쟁 말이야.’
[정란양은 그렇다 치고, 정희양은 또 왜요?]
‘그것까진 잘 모르지. 아무튼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상황은 아니야. 마치 동생에게 질 수 없다는 경쟁심의 발로랄까?’
정희의 진심을 깨닫자 대답이 망설여졌다.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남자는 누구에게나 그럴 수 있다고 여겨질 것이다. 특히 괜히 자매간 경쟁에 치여, 누군가를 돋보이게 할 트로피를 자처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쉬운 남자지만, 때론 쉽지 않다.
"많이 취했구나, 너."
"안 취했는데? 대답해줘. 듣고 싶어."
"취한 거 맞네. 오빠한테 반말이나 툭툭하고."
슬그머니 손을 뒤로 빼 거리를 벌렸다.
손등을 터치하던 정희를 뻘쭘하게 만들 의도였다.
"아, 아···. 죄, 죄송해요."
정희가 정신이 번쩍 드는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며 민망해했다. 술기운을 핑계로 찔러본 유혹이 문전박대당하자 약간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면 카사노바가 아니지.
한번은 밀고 한번은 당겨준다. 이른바, 밀당의 법칙.
"좋게 보고 있어."
"···네?"
완곡한 거절로 생각했던 내가 다시 당근을 건네자 정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좋게 본다고. 후배로서, 또 여자로서도."
"여자로서요?"
"왜? 그럼 너 남자야?"
"말 돌리지 말고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정희가 진지하게 물었다. 입술이 살짝 떨리는 게 긴장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침이 바짝 마르고 있을 테다.
"상대에게 듣고 싶은 대답이 있을 땐, 본인이 먼저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게 아닐까?"
"아···."
"그러는 넌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
"아, 저 그게···."
질문을 질문으로 받는다. 정희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허둥거렸다. 이제 그녀는 진지하게 나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기 시작할 것이다.
정말로 남자에 대한 호감인지.
아니면 술김에 괜한 호기인지.
그마저도 아니면, 동생인 정란과 경쟁하려는 질투심의 발로인지. 아마도 그것들이 모두 뒤섞여 있겠지만.
화장실로 간 태영은 무슨 일인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둘만의 시간이 계속된다는 의미였다.
나는 정희를 향해 물었다.
"대답해 줄 수 있어?"
"음···."
정희가 새초롬하게 긴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아마 저렇게 하면 본인이 예뻐 보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와, 조그만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감탄이 절로 나오는 미인이다. 그런 미인이 발그레 취해 있는 모습은 제아무리 목석같은 사내라도 애간장을 녹일 만큼 매혹적이었다.
존재만으로 빛이 나는 그녀는, 20살 숫처녀였다.
"지난 주말에 처음 봤을 땐···. 사실 별 생각 없었어요."
정희가 조모임을 핑계로 집 근처 까페에서 만났던 얘기를 꺼냈다.
"전 원래 남자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래?"
"네. 근데 어제도 보고 오늘도 계속 보니까 문득 그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생각?"
"되게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는. 과제도 열심히 하고, 사람들한테 친절하시고. 그냥 다 괜찮았어요."
"이건 칭찬으로 들어도 되지?"
"···네."
정희가 부끄러운 듯 손가락을 서로 부딪히며 꼼지락거렸다. 남자 경험이 없는 티가 났다. 감정을 드러낸 후 발가벗은 것처럼 초조해하고 있었다.
"괜찮게 생각하고 있어, 나도."
"네?"
"아까 물었잖아. 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론 아직까진 호감의 정도지만."
"아···."
정희가 기분이 좋아진 듯 희미하게 웃었다. 누구나 이성에게 호감이 있다는 소릴 들으면 기분이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다 그녀가 물었다.
"정란이랑 저 많이 닮았죠?"
"얼굴이?"
"네. 아무리 일란성이라도 이렇게까지 닮은 건 쉽지 않거든요. 다른 쌍둥이들 봐도 성인되고 나면 확실히 구분되던데···. 저흰 아직도 부모님께서 헛갈려 하세요. 아침에 화장 안 한 얼굴 보면 제가 정흰지 정란인지."
"그럴 만도 하겠네. 보통은 헤어스타일이라도 차이를 두는데."
"저흰 둘 다 긴 생머리를 좋아하거든요."
"응. 잘 어울려. 근데 정란이 얘기는 왜?"
"음···.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솔직하게 얘기할게요. 사실 정란이나 저나 생긴 건 똑같잖아요. 근데 왜···."
"어차피 똑같이 생겼는데 왜 너를 그렇게 생각하냐고?"
정희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란이도 괜찮아. 성격도 화통하고."
"아···."
정희는 살짝 실망한 눈치였다.
그러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근데 난 여자를 외모로만 판단하지 않거든. 어쩌면 두 사람이 다르게 생겼더라도 내 생각은 변함없었을 거야. 그냥, 네가 더 끌리더라고."
이번에는 좀 더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정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번엔 좀 더 활짝 웃었다.
역시 웃는 여자는 사랑스럽다. 예쁜 여자는 더 사랑스럽고. 정희가 다시 용기를 내 천천히 내 손등 위에 손을 포겠다.
***
"야, 너 괜찮아?"
화장실로 들어간 태영이 여자 화장실 칸막이 앞에서 정란을 찾았다. 지금은 남녀 화장실을 구분하게 되어 있지만, 아마도 시설물 관리법이 개정되기 이전에 지어진 건물인 듯 남녀가 함께 쓰는 공용화장실이었다.
"우에엑!"
칸막이 너머에서 토하는 소리가 들리자 태영이 급히 문을 두드렸다.
쾅쾅!
"너 설마 토하는 거야? 내가 등 좀 두들겨 줘?"
"···돼, 됐어. 꺼져!"
정란은 목소리를 듣더니 바로 막말을 던졌다. 하지만 정란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한 태영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계집애. 좋으면서 튕기기는?’
문이 잠기지 않았는지 노크를 하는 사이 문틈이 벌어졌다. 안에서 정란은 변기 뚜껑을 들어 올린 체 머리를 처박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로 토하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태영은 문을 활짝 열더니 정란의 뒤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정란의 등을 토닥였다.
정란은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깜짝 놀랐지만, 태영이 등을 두들기자 다시 구토감이 밀려오는지 변기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우욱, 우우욱!"
"그래. 그냥 토해버려. 그게 속은 더 편할 거야."
하지만 정란은 소리만 요란할 뿐 막상 토사물을 넘기진 않았다. 한참 헛구역질을 하던 정란은 입안 가득 고인 침만 퉤- 뱉어내더니 고개를 돌려 태영을 째려보았다.
"이게 씨, 꺼지라니까!"
"왜 그래? 난 네가 걱정되서 온 건데."
"누가 너 따위한테 걱정받고 싶데? 사양이거든?"
정란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러잖아도 정희 때문에 기분이 상해있던 정란은 태영의 얼굴을 보자 괜히 심술이 났다. 도훈은 안 오고 왜 하필 태영이 왔는지도 짜증이었다. 하지만 타고난 탱커인 태영은 묵묵히 정란의 짜증을 받아냈다. 아니, 그마저도 지금은 기쁨이었다.
"우린 이미 한배를 탄 팀이잖아. 안 그래?"
"팀? 팀 같은 소리하네."
"팀이 좀 그러면··· 음, 그러니까 일종의 가족같은?"
"가족? 가! 좆같은 소리말고! 면상 치워. 니 얼굴 보면 토 쏠리···. 우욱!"
정란은 정말로 구토감이 올라왔는지 이번엔 진짜로 토했다. 주량이 결코 약한 건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빨리 마신 술로 불편해진 속이 버텨내질 못한 것이다.
정희와의 차이라면, 정란은 지속된 음주로 간이 약해진 탓이었다.
"우으으으윽! 구에엑!"
저녁으로 먹었던 음식물이 위액과 함께 뿜어졌다. 반죽같은 액체가 주루룩 변기 안으로 쏟아졌다. 태영이 다시 그녀의 등을 두들겼다.
"그래. 그냥 토해라. 토하는 게 차라리 나아."
태영은 정란의 등을 두들기면서 브래지어의 감촉을 느꼈다.
‘아···. 이것이 정란이 속옷···.’
그 와중에도 여자 속옷을 생각하는 태영은 참으로 구제 불능이었다. 한바탕 게워낸 정란이 손을 뻗어 변기 물을 내리는 데, 태영이 빠르게 화장지를 풀어 정란에게 건넸다.
"이걸로. 입 닦아."
"······."
토하고 난 정란은 속은 불편했지만, 한순간에 술이 확 깬 느낌이었다. 그녀는 화장지로 입을 닦으며 태영에게 따졌다.
"미쳤냐? 여자 화장실은 니가 왜 들어와?"
"여기 공용이야. 뒤로 돌아가면 소변기도 있다고."
취한 상태로 화장실은 정란은 그제야 이곳이 공용화장실임을 깨달았다. 갑자기 변기에서 퀘퀘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정란이 벌떡 일어섰다.
"에이씨. 스타일 구기게. 너 나가서 나 토했다고 말하면 뒤진다 진짜?"
정란은 세면대로 가더니 손 바가지로 물을 떠 텁텁해진 입안을 헹궜다. 위액이 올라왔는지 입안에서 신물이 느껴졌다.
태영은 말없이 정란을 쳐다보았다.
‘와, 씨발. 엉덩이 라인 봐. 조또 꼴리네.’
허리를 숙인 채 입안을 헹구는 정란의 엉덩이가 뽕 튀어나와 있었다. 잘록한 허리와 대비되어 지나치게 발달한 힙이 태영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태영은 불쑥 아까 풋잡(?)을 받던 기억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입을 헹구던 정란은 거울을 통해 태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게슴츠레 변하는 눈빛에 순간 오싹하는 소름이 돋았다.
‘저 미친 변태 새끼가 지금 어딜 보는 거야?’
정란이 고개를 훽 돌리며 태영에게 소리쳤다.
"야! 씨발, 너 지금 어디 봐?"
"으, 응?"
"개새끼야, 방금 내 엉덩이 봤지?"
"무, 무슨 소리야. 안 봤어."
"구라까지 마. 거울로 다 보이거든?"
정란이 사납게 소리치는데 문득 태영의 바지가 살짝 부푼 게 보였다. 앞으로 튀어나온 그것은 누가 봐도 모양이 이상했다. 정란이 어이없어 물었다.
"뭐야···. 너 설마."
"응?"
"미친 새끼, 그새 꼴렸냐?"
욕을 먹는 사이 태영이 자기도 모르게 발기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공용화장실이란 이색적인 장소가 태영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아, 아니 이건···."
태영은 변명할 말을 둘러대다 거짓말을 했다.
"워, 원래 커서 그래."
"뭐?"
태영은 내친김에 마구 질렀다. 팬티를 내려 확인하기 전까지, 남자의 물건 사이즈는 최고의 뻥카다.
"내가 좀 대물이라고."
"개소리하고 있네. 니가?"
정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까 우연히 발로 밟았을 때(태영은 그것을 풋잡이라고 여겼지만, 정란의 입장에선 그저 짓밟은 수준이었다.) 그의 물건 사이즈를 가늠했다. 맨발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느꼈다.
"진짜야. 도훈이 형도 크지만 나도 만만치 않거든?"
"니가 미쳤구나 드디어? 아까 덜 맞았지?"
정란이 갑자기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태영은 움찔했지만, 정란이 자신을 겁박할수록 겉잡을 수 없이 성욕이 밀려왔다.
‘아아, 걸크러쉬! 강한 여자! 좆나게 쳐 맞고 싶다. 날 겁탈해줘!’
"때, 때릴거야?"
구토를 유발하는 목소리.
정란이 참지 못하고 태영의 턱주가리를 갈겼다.
퍽!
"윽!"
"씹새끼가 진짜!"
턱 끝을 맞은 태영이 일순 균형을 잃고 벽을 기대 허물어졌다. 본래 턱은 정통으로 맞으면 의식을 잃을 만큼 위협적인 급소. 덩치가 제법 있는 태영이 바닥으로 쓰러지자 정란도 당황했다.
"야, 뭐야. 괜찮아?"
"으, 으으!"
다행히 태영은 크게 다치진 않은 것으로 보였다. 턱에 가해진 충격으로 일시적으로 균형을 잃은 것이었다. 놀란 정란은 태영의 상태를 확인하고 안심하더니 다시 욕을 지껄였다.
"씨발, 존나 놀랬네. 무슨 남자 새끼가 맺집이 그렇게 없냐?"
"너 방금 나 걱정했지?"
"뭐?"
"방금 나 다친 줄 알고 걱정했잖아. 맞지? 때리면서도 막 걱정되는 거지? 너 나 좋아하냐?"
태영의 개소리를 들은 정란은 머릿속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일진으로 이름을 날리던 삼현여고 삼선 쓰레빠가 마침내 각성했다.
"이 변태 새끼, 부랄을 확 줘 뜯어 버릴라!"
흥분한 정란이 태영을 마구 짓밟았다.
< 818. 기말 시즌-1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