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5. 기말 시즌-15- >
두 볼을 감싸고 있는 태영을 본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너 왜 그러고 있어?"
"아, 형 그게···."
태영은 정란의 눈치를 봤다. 사실대로 말했다간, 그대로 담가버리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눈빛. 호되게 맞은 태영은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뭔데 그래? 봐봐."
도훈이 손을 치우자 태영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 볼 빨간 사춘기 소녀처럼 두 볼이 달아 올라있었다.
"오잉? 왜 이래 갑자기?"
"그, 그 제가 안면홍조증이···."
"겨울도 아니고 한 여름에?"
"아하핫! 이게 좀 시도 때도 없이 증세가 발발하는 편이라."
눈치가 빠른 도훈은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여겼다.
‘뭔가 있는데? 로시 마음의 소리.’
[방금 전 사용하셨기 때문에 현재 쿨타임중입니다.]
‘아차. 스킬을 너무 남발했구나.’
각종 아이템과 강화로 쿨타임이 많이 줄어들었다곤 해도, 스킬을 무한대로 쓸 순 없는 일이었다.
"암튼, 음식은 다 주문하고 왔어. 좀 있다 가져올 거야."
"그럼 잠시 쉴까요? 저희 쉬지도 않고 너무 열심히 달린 것 같아요."
바로 전까지 태영을 죽일 것처럼 두들겨 패던 정란은 도훈 앞에서 순식간에 태세가 돌변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그 모습을 본 순간 태영은 팔뚝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저런 미친. 도훈이 형 앞에서 순진한 척 연기하는 것 좀 봐. 이걸 밀어주는 게 진짜 맞는 건가?’
태영은 정란과 모종의 밀약을 맺었다.
정란이 도훈과 잘되도록 밀어주는 대신, 정란은 태영이 정희에게 수작 부리는 걸 눈감아 주는 조건이었다. 서로의 목적이 일치했기에 일시적인 동맹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란의 실체를 알면 알수록 둘을 밀어주는 게 옳은 일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얼굴은 예쁘긴 한데 무슨 여자가 저렇게 폭력적이람? 뭐랬더라? 여자한테 맞아본 적 없냐고? 남자 많이 때려봤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욕설은 기본.
걸핏하면 손찌검을 해대는 못된 손버릇까지.
지난 번 사건으로 도훈에게 마음의 빚을 진 태영으로서는, 저런 개차반 같은 여자를 도훈에게 붙여준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좋은 여자를 소개시켜줘 모자랄 판에 악녀중의 악녀를 이어주는 꼴이었다.
‘아···. 양심에 찔리는데. 확 도훈이형한테 다 까발려버려?’
고민하던 태영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니지. 내가 아무리 밀어준다고 한들 도훈이 형이 거부하면 그만인 거잖아? 나로선 할 만큼 했지만, 결국 선택은 형의 몫이니까. 그렇다면···.’
태영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도훈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최소한 정란의 본 모습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우리 쉬는 동안 잠시 얘기나 할까요?"
"무슨 얘기?"
"그냥 뭐 취미라던가···."
"뭐래? 무슨 소개팅 온 것도 아니고."
정란이 시큰둥하게 쏘아붙였지만 태영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정란이 넌 취미가 뭐야?"
"뭐야? 진짜로 묻는거야?"
정란은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도훈의 앞이므로 최대한 조신해 보이는 척 연기했다.
"음, 그냥 뭐···. 독서?"
"큽!"
잠자코 앉아있던 언니 정희가 갑자기 물을 마시다 켁켁 댔다.
"응? 왜그래? 정희 괜찮아?"
"아, 아니 갑자기 사래가···."
정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바로는 정란은 책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친동생이라 늘 같이 생활하기 때문에 잘 알았다. 그녀가 읽은 책이라곤 기껏해야 연예인 가십을 다룬 잡지라든가, 그도 아니면 패션이나 뷰티와 관계된 기사 뿐 이었다. 그것도 독서라면 독서겠지만.
‘정란이 쟤가 왜 저런담?’
"그럼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은 뭔데?"
"채, 책?"
"응. 재밌는 책 읽으면 추천 좀 해달라고."
태영이 자꾸 자길 궁지로 몰아가자 정란은 슬슬 그의 의도를 의심했다.
‘근데 이 자식이 도와준다더니 갑자기 왜 곤란한 질문을 묻고 지랄이야?’
물론 짚이는 바가 있었다. 도훈이 오기 전까지 죽일 듯 뺨을 후려쳤으니 억하심정이 생길만도 했다.
‘이 새끼 아직 덜 맞았구나. 넌 나중에 두고보자.’
"호호, 읽은 책이 너무 많아서 뭘 추천해 줘야 할지."
"에이, 그러지 말고. 그래도 하나쯤은 있을 거 아니야? 인생책 같은?"
"···음. 나루토?"
"크흡!"
질문을 던진 태영마저도 코웃음을 칠 대답이었다.
정란이 분위기를 보니 언니 정희는 갑자기 먼데를 보며 딴청을 피웠고, 도훈 역시 무안한 듯 헛기침을 했다. 정란은 기분이 확 나빠졌다.
"뭔데? 추천해 달래서 추천했더니만."
"아, 아니. 만화책도 책은 책이지."
태영은 마치 정란의 부아를 돋우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정란은 가까스로 자제심을 갖고 태영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넌 취미가 뭔데?"
"나? 나는 뭐··· 서핑이지."
"서핑?"
"오, 너 서핑도 할 줄 알어?"
의외의 답변에 도훈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목이 쏠리자 태영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정정했다.
"인터넷 서핑이요. 하하!"
"······."
"태영아 그건 좀."
"으음."
싸한 반응에 태영이 머쓱했다.
"그냥 시간나면 폰으로 커뮤니티 돌아다니는 게 취미에요. 이것저것 검색해보고."
"주로 무슨 검색을 하실까나? 설마 이상한 건 아니지?"
이번엔 정란이 역공했다. 태영이 담담하게 받았다.
"그냥 뭐 이것저것. 불건전한 건 절대 아니고."
"인증 가능?"
"인증이라니?"
정란은 뭔가 건수를 잡은 사람처럼 태영을 몰아세웠다. 방금 전의 복수였다.
"뭐 검색했는지 폰에 다 기록 남잖아. 보여 줄 수 있어?"
태영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아니 그건 프라이버시가."
"와! 설마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지도 못할 걸 검색해 대는 거야?"
"무, 무슨 소리야!"
태영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정란을 살살 긁어 본색을 드러나게 하려던 그의 시도는 오히려 완벽한 되치기를 맞고 말았다. 정란이 주춤하는 태영의 폰을 빠르게 빼앗았다.
"아니면 보여주면 되잖아? 암호 뭐야?"
"뭐, 뭐야. 이리 내!"
"왜? 진짜로 절대 보여주면 안 되는 거야? 그런 거야?"
"란아. 그만해. 장난이 심해."
"아니, 자기 입으로 불건전한 거 아니라는데 왜?"
"그래도 당사자가 저렇게 싫어하는데."
정란은 자기가 봐도 무리수라고 여겼던지 순순히 폰을 돌려줬다. 그러나 태영대신 도훈에게 였다.
"오빠가 대신 확인해 줘요."
"내가?"
"뭐, 남자끼리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태영은 이것마저 물러서면 진짜로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웠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도훈에게 폰을 대신 건넨 정란이 얄미웠다.
"알았어. 형이 보는 건 인정."
"그럼 내가 확인할게. 태영아 괜찮지?"
"네. 패턴 풀어줄게요."
태영이 핸드폰의 잠금을 풀자 바탕화면에 인터넷 검색창이 마침 떠 있었다. 도훈이 무심결에 검색창 히스토리를 누르자 최근 검색어가 시간 순으로 떠올랐다.
-여고딩 노출
-MILF
-ㅈㄱㄴ영상
-아이돌 sex동영상
도훈은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아니 씨발, 이게 뭐야?’
[이, 이건···.]
‘진짜로 변태였잖아?’
[태영군이 음험한 건 알고 있었지만···. 참으로 남다른 성욕의 소유자였군요.]
기록된 히스토리는 다들 최근의 것이었다. 날짜를 보니 불과 몇시간에 들여다 본것도 있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중에도 몰래 검색하고 었다는 의미였다.
도훈은 놀랐으나 다행히 티를 낼 정도로 눈치없지 않았다. 태영이 애처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과오를 덮어줄 것을 믿는 눈치였다.
도훈이 기대에 호응했다.
"뭐, 별거 없네."
"정말요?"
"응. 뭐 그냥. 스포츠 기사나 게임 공략같은 것 뿐인데?"
"어얼? 의외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태영이 도훈에게 폰을 건네받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봤지? 왜 공연히 사람을 의심하고 그래?"
"누가 의심했데? 그냥 한 번 보자는 거였지. 그럼 도훈 오빠는 취미가 어떻게 돼요?"
"나?"
이제 화제는 자연스레 도훈에게로 옮겨졌다.
사실 두 여자에게 태영은 뒷전이었다.
정란은 처음부터 도훈을 가장 궁금해 했고, 남자에게 별 관심이 없는 정희마저도 그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로 유독 신경이 쓰고 있었다.
도훈이 입을 열려는데 태영이 선수를 쳤다.
"형은 보나마나 공부겠지."
"공부?"
"응.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도훈이형 엄청 범생이거든. 매일 도서관 다니잖아."
"와! 정말이에요?"
"운동 좋아하신다지 않았던가?"
태영은 마치 자식자랑을 하는 부모처럼 도훈을 자랑했다. 그와 친하다는 사실이 마치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운동은 당연히 기본이지. 도훈이형은 정말 타고 났다니까? 근데 운동은 원래 잘하는 거고 아마 취미가 공부일 거야. 맞죠?"
"땡. 아닌데."
"엑.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다들 궁금한 눈빛으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도훈은 다른 누구보다 정희에게 잘 보일게 뭘 지 생각했다.
‘무슨 대답을 해야 정희가 좋아하려나?’
[보통 비슷한 취향을 좋아하지 않을까요? 끼리끼리 논다는 말 처럼요.]
‘아니야. 의외로 완전히 반대성향을 더 좋아할 수도 있거든. 지금은 마음의 소리 되나?’
[네. 막 쿨타임 돌아왔습니다.]
‘오케이. 정희 속마음 들려줘.’
<오빠 취미가 뭘까나? 의외로 막 집에서 뒹구는 거 아닐까? 원래 바빠 보이는 사람일수록 나름의 여유를 즐기는 편이니까 말이야.
‘집에서 뒹구는 거?’
[으음, 취미라기엔 저건 그냥 게으른 거 아닙니까?]
‘아무튼 정희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는 게 좋겠지?’
도훈은 내친김에 다른 사람의 속마음도 확인했다.
마음의 소리 스킬은 쿨타임 3분 동안 일정 거리내의 속마음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공부 맞을텐데, 분명. 맨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데 그게 취미가 아니면 뭐지? 설마 취미가 아니라 특기라는 건가?
태영은 예상대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패스.
도훈은 이번에 정란의 마음을 읽었다.
<···변태면 좋겠다.
?!
도훈은 흠칫 놀랐다.
‘취미가 변태라고, 이게 무슨···.’
저렇게 멀쩡해 보일수록 어딘가 망가져있는 모습이 더 인간적이란 말이지. 여고생 팬티 수집이라던가, 야동 품번 별로 정리하기 같은거. 크크크. 아, 웃겨.>
[정란양은 뭔가 이상합니다.]
‘확실히 제 정신은 아닌 거 같지? 내가 변태이길 바라는 희망사항이잖아 저건.’
도훈은 마음의 소리를 듣고 난후 말했다.
"난 그냥 집에서 가만히 쉬는 게 좋더라."
"네?"
"정말요?"
"완전 의외다."
"아니 그냥. 운동이나 공부 끝내면 더 이상 뭘 하기가 싫더라고. 난 그냥 집에서 쉴 때가 제일 행복하더라고. 그게 내 취미야."
도훈은 마음의 소리 스킬이 끝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더 정희의 속마음을 읽었다.
<헉! 설마 진짜였다니. 오빠가 은근히 나랑 취향이 비슷하구나.
도훈은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는 데 만족하며 정희에게 물었다.
"정희만 말 안했네? 정희 넌 취미가 뭐야?"
"네? 저요? 별거 없는데···."
"언니, 봉사활동 있잖아."
"그게 어떻게 취미니?"
"혹시 뜨개질 같은 거 좋아하지 않으세요?"
태영이 기대를 잔뜩 담아 물었다. 폭력적인 동생과 달리 훨씬 여성스럽고 우아한 취미가 있을 것 같았다. 정희가 속으로 난처해했다.
‘전혀 아닌데···. 내가 좀 그런 이미지였나?’
남자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정희는 자신이 어떤 이미지로 보이는 지에 대해서도 무던한 편이었다. 굳이 잘보일 필요도 없고, 없는 말을 지어낼 필요도 없었다.
"전 그냥 집에서 쉬면서 TV보는 거예요."
"TV? 드라마 같은거?"
"응. 뭐 그냥, 옛날 거 다시보기 할 때도 있고···."
"정희는 가만이 쉬는 걸 좋아하는 구나."
"네. 오빠랑 비슷해요."
정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도훈을 향해선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다.
도훈은 아까의 애꾸 코스프레 이후로 그녀가 자신에게 슬슬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느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눈치 빠른 태영이 슬쩍 조바심이 들었다.
‘아씨, 뭔가 임팩트가 부족했어. 차라리 게임이라고 할 걸. 게임하나는 자신있는데.’
사실 태영의 유일한 장기는 바로 게임이었다.
유행하는 게임은 모두 손을 댈 만큼 그 폭이 넓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금방 고수소리를 들을 만큼 순식간에 빠져드는 편이었다. 하지만 취미가 게임이라고 하면 한심해 보일까봐 차마 밝히지 못한 것이다.
‘안 되겠다. 지금이라도···.’
"나 사실···."
"어, 밥 왔다."
태영이 뭔가 어필을 해보려 했지만,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바람에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굳이 "밥 왔다."라는 말로 흐름을 끊은 정란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정란은 코웃음 치며 테이블 밑으로 발을 뻗어 태영의 발끝을 지긋히 밟을 뿐이었다.
"으윽!"
"왜 그래?"
"아, 아니에요."
정란은 태영을 보고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눈 깔어, 새끼야. 감히 어딜 쳐다봐?
태영이 밟힌 발을 뒤로 슬그머니 빼자 정란은 이번엔 그의 무릎을 걷어차기 위해 앞으로 뻗었다. 그런데 테이블 밑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녀의 킥이 하필이면 태영의 양 무릎 사이에 꼭 끼고 말았다.
태영은 우연히 무릎 사이에 들어온 발을 꽉 조이며 놓아주지 않았다. 풀어줬다간 또 다시 쪼인트를 까일것이 두려웠던 것.
발목을 붙잡힌 정란이 빼려고 발버둥을 치던 중 우연히 발끝이 태영의 거기를 꾹 눌렀다.
< 815. 기말 시즌-1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