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4. 기말 시즌-14- >
"음. 가격이 좀···."
메인이 술집이어서 그런지 음식값은 비싼 편이었다. 술안주라고 생각하면 적당하지만, 본격적인 식사를 하기엔 살짝 부담스러운 가격.
도훈은 메뉴판의 가격을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한 끼에 만원 정도면 먹을만한 거 아닌가?’
[그거야 주인님 생각이고요. 보통 대학생에겐 무척 큰 금액으로 느껴질 수 있죠.]
과연 로시의 말처럼 정희가 고개를 절래절래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여긴 너무 비싸요."
"응?"
"파스타 하나에 13,000원이나 하잖아요. 후문 근처에 국밥집 가면 한 그릇에 6,000원밖에 안 해요. 국밥 두 그릇을 먹고도 남을 금액으로 양도 얼마 안 되는 파스타를 시킬 순 없어요."
디테일한 정희의 설명에 도훈이 살짝 당황했다.
‘아니, 이게 무슨 국에 밥말어 먹는 소리야?’
[정희양이 국밥을 좋아하나 보죠.]
"여기도 봐요. 뉴욕 타워 버거. 하나에 2만원 씩이나 하잖아요. 무슨 햄버거가 2만원이나 해요?"
"아니··· 원래 햄버거 그 정도 하지 않나?"
"무슨 소리세요? 런치 할인 받으면 세트도 3,900원인데."
도훈은 생각보다 너무 짠돌이처럼 구는 정희의 모습에 새삼 놀랐다.
‘아 놔. 총무 잘 못 뽑았네. 돈 너무 아끼는데?’
[저게 당연한 겁니다. 용돈도 적은 대학생들이면 당연히 가성비 좋은걸로 먹어야죠. 게다가 혼자 내는 것도 아니고 각출해서 먹는 건데요. 주인님이야 지금 수중에 돈이 1억 가깝게 있으니 별 부담 없으시겠지만요.]
‘하-. 내가 실수했다. 그냥 내가 쏘는 것으로 할걸.’
"저희 그냥 다른 데 가요. 식사하기엔 너무 비싼 것 같아요."
정희가 도저히 안 되겠다며 돌아서는데 도훈이 설득했다.
"잠깐 정희야. 생각 좀 해보자."
"네?"
"여기가 비싼 이유는 자리도 제공해주는 까페 겸 식당이라 그런 게 아닐까?"
"무슨 소리에요?"
"생각해봐. 우리 아직 과제 안 끝났잖아."
"네."
"어차피 밥 먹고 나면 마무리하러 커피숍에 가야 할 거란 말이지. 그럼 한 사람당 음료 하나씩 또 시켜야 하니까 추가로 돈이 들 거고, 그러면 결국 여기서 밥값 좀 더 내는 거랑 차이가 없지 않나 싶어서."
일리 있는 지적에 정희가 잠시 주춤했다.
"아···. 그러니까 그냥 지금 끝내고 싶었는데."
"과제도 좋지만, 애들이 다들 배고파했잖아. 넌 배 안 고파?"
"그럭저럭요. 끝나고 집에 가서 밥 먹으려고 했죠."
‘캬-. 짠돌이 맞네.’
"어쨌든, 이래저래 돈 나가는 거면 그냥 여기서 주문하는 게 좋다고 봐."
"알겠어요. 그럼 제일 싼 메뉴로 고를게요. 어차피 배만 채우면 되잖아요. 이 중에서 고르면 될 것 같은데 오빤 뭐 드실래요?"
정희가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가르키자 도훈이 조심스레 뒤통수를 긁었다.
"아··· 뭔지 불러줄래?"
"네? 아니 여기 3개 중에서 고르시면 될 것 같은데···. 애들은 제가 톡으로 물어봤어요."
"아··· 그게."
[또 무슨 수작을 부리시려고요?]
‘가만 있어 봐. 동정심 유발해야지.’
도훈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실은 눈이 잘 안 보이거든."
"네?"
"눈이 잘 안 보인다고."
"혹시 안경 안 쓰시고 나온 거예요?"
"아니···. 그냥. 안 보여. 실명했어. 한쪽 눈."
"아아!"
정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도훈이 가슴 아픈 얘기를 너무 담담히 꺼내는 것에 충격을 먹은 것이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고. 그냥 살짝 불편할 뿐이니까."
"세상에! 진짜 전혀 몰랐어요. 티가 안 나셔서."
"응. 의안으론 아직 안 바꿨어. 의사가 아직 눈동자는 잘 따라 움직인다고 해서."
"그, 그럼···."
"어. 뭐 나중에 어색해지면 의사가 눈 바꿔야 된다고···."
"아니···."
정희는 무척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껏 볼 수 없는 동정 어린 눈빛이었다.
[미친!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왜? 동정심 유발하고 있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멀쩡하신 분이 실명했다는 거짓말을 해요?]
‘어떻게 그럼? 사지가 이렇게 튼튼한데. 티 안나는 걸로 속여야지.’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습니다만.]
‘공략을 위해서라면 더 한 거짓말도 할 수 있어.’
"어쩌다가···."
"내가 어려서부터 운동을 엄청 좋아했거든. 그래서 체육교육과 온 거고."
"아아···. 그럼 운동하시다."
"하루는 야구를 하는데 야구공에 세게 맞은거야. 그때 하필 각막이 손상 되버렸지."
"아아···."
"수술은 잘 된대신 시력이 안 돌아오더라고. 사실 완전한 실명까진 아니고 앞이 바늘구멍처럼 살짝 보이긴 해. 잘 안 보여서 그렇지."
"어떡해."
정희는 도훈의 불행을 마치 자기 일처럼 가슴아파 했다.
확실히 도훈의 추측대로 타인의 고통에 지나치게 공감을 잘하는 스타일이었다. 이제껏 내내 보면서 본 모습 중, 가장 적극적으로 도훈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다친 눈이 왼쪽 눈이에요, 오른쪽 눈이에요?"
"왼쪽."
"아···."
"정희야. 근데 이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 아직 학교에선 아무도 모르거든. 겉보기엔 멀쩡해서 굳이 알리지 않았어."
"그래도 불편하지 않으세요?"
"그냥. 딱히 배려받을 정돈 아니라서. 사실 한 쪽 눈으로도 운동은 잘 해 여전히. 들었지? 나 우리대학 배구부 선수라니까?"
도훈은 일부러 더 쾌활하게 말했다.
비극을 웃음으로 덮는 모습이, 더 안타까워 보인다는 걸 알기에.
"아아···."
"시력은 썩 좋진 않은데, 나름 쓸만하거든. 안경을 쓸까 하다가 눈 안 좋은 거 티날까봐 일부러 참고 있어."
"어뜩해···."
"그런 눈으로 안 봐도 돼. 나처럼 건강한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
"전 진짜 오빠 걱정하나 없는 사람 같았어요. 너무 건강해 보이셔서."
"누구나 약점은 있는 거지. 사실 왼쪽 눈이 약간 사시처럼 돌아갈 때가 있어. 그래서 되도록 대화할 때 오른 얼굴을 보여주는 편이야. 이렇게."
"아···."
도훈은 일부러 고개를 돌려 옆모습을 보여주었다.
코가 오뚝한 그의 실루엣은 오늘따라 유난히 멋있었다.
정희는 처음으로 그가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니, 진작부터 잘생긴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남모를 아픔을 숨기고 살았다는 데서 왠지 더 잘생겨 보였다.
‘대단한 사람이구나, 이 오빠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데도 저렇게나 꿋꿋하다니.’
정희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며 도훈이 쾌재를 불렀다.
‘역시! 이거였어. 어땠어 내 연기?’
[완전히 사기꾼 같았습니다.]
‘뭐 인마?’
[세상에 속일 게 없어서 순진한 처녀의 동정심을 이용하다니요.]
‘방법이 없잖아, 방법이. 그리고 내가 무슨 사기를 쳤다고 그래? 사기의 구성 요건이 뭔데?’
[왜 갑자기 저에게 그런 걸 물으십니까?]
‘상대를 고의로 기망하여 금전을 편취하거나, 착오에 빠지게 하는 위법행위를 말하잖아. 내가 외눈박이 코스프레를 함으로써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게 있나? 그냥 나 혼자 병신이라고 말한 것 뿐인데.’
[교묘한 말장난일 뿐이죠. 결국 의도가 뻔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동정심을 발휘하고 말고는 상대 자유지. 난 그걸 노렸을 뿐이고.’
[주인님을 정말 공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군요.]
‘오죽하면 이러겠냐. 좆병신이 되기 싫을 뿐이지.’
"오빠 다른 메뉴 고르실래요?"
"응?"
"생각해 봤는데, 제가 너무 짠돌이처럼 군 거 같아서요. 다 같이 처음 밥 먹은 건데 맛있는 거 먹어요."
"그래도 돼?"
"네, 얼마든지요."
하지만 정희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돈이 많이 나오면 내가 더 내버리면 되지. 사정을 듣고 나니까 싼 것을 시키라면 괜히 서운해 할 것 같아.’
마음의 소리를 이용해 정희를 생각을 읽어낸 도훈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정심 유발 작전이 통한 뒤로 정희가 점점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흐흐. 좋아. 조금만 더 약자 코스프레를 해보자.’
***
한편 2층에서 둘만 남게 된 정란은 도훈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자세가 풀어졌다.
다소곳이 앉아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늘씬한 다리를 쭉 뻗어 각선미를 뽐내고 있었다. 오늘은 특히 도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원피스를 입고 나왔는데 밑단이 짧아 꼬아 앉은 다리 사이로 허벅지가 깊이 드러났다.
"어디 보냐?"
"어? 뭐? 내가 뭘?"
넋을 놓고 다리를 훔쳐보던 태영이 뜨끔하는 마음에 딴청을 피웠다. 평소 같아선 욕설을 퍼부으며 정강이를 걷어찼을 정란이지만, 같이 협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괜히 미운정이 들어 함부로 대하기 껄끄러웠다.
"흥, 꼴에 사내새끼라고."
"뭐, 뭐야. 그래 봤다. 뭐. 다리 좀 본 것 가지고."
태영이 용기를 내 받아치는 모습에 정란도 의외라는 듯 다시 물었다.
"어쭈? 본인이 변태란 걸 뻔뻔하게 시인하는 거야?"
"변태라니! 니가 대놓고 보여줘 놓구선 나한테만 뭐라 그래."
"뭐? 이게 확!"
정란이 다시 손찌검을 하려고 하자 태영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두 팔의 가드를 올리고 바짝 쪼그라든 태영을 보자 정란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푸하. 쫄긴. 그러고도 니가 꼬추 달린 사내새끼야?"
갑자기 ‘꼬추’라는 단어가 나오자 태영의 얼굴이 새빨게졌다. 그는 평생 한번도 이렇게 일진스러운 여자를 만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었다.
‘뭐지? 설마 내 꼬추가 보고 싶다는 소린가?’
태영이 온갖 망상에 빠져 있는데 정란이 물었다.
"너 고딩 때 빵셔틀 했지?"
"아, 아니야."
"웃기고 있네. 딱 보니까 사이즈 나오는데 뭘."
"아니라니까? 나 체육교육과라고. 남자들 사이에서 운동 잘하면 얼마나 대접받는 줄 몰라서 그래?"
"웃기시네. 도훈 오빠한테 비비지도 못 할 거면서."
"그, 그 형은 원해 괴물이고. 원체 피지컬이 좋으니까."
정란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맞다. 너 오빠랑 친하댔지."
"응. 베프는 아니지만, 베후 정도는 되지."
"베후가 뭐야?"
"베스트 후배."
"없는 소리 지어내지 말고."
"암튼 친한 건 사실이야. 형이랑 교양수업 3개나 겹치거든."
"오호. 혹시 목욕탕도 같이 가봤어?"
"목욕탕? 아니···. 아아! 있다 있다. 목욕탕은 아니고 겨울 방학때 스키캠프 갔을 때 사우나 같이 간 적 있어. 근데 그건 왜?"
뻔뻔하던 정란도 부끄러운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저기 있지, 그냥 이건 궁금해서 묻는 건데···."
"뭐? 말해봐."
"키 크면 진짜 그것도 커?"
"그게 무슨··· 아, 아니 너 지금."
"뭐? 니가 도훈 오빠 피지컬 괴물같데서 그냥 묻는 거잖아!"
정란은 오히려 역정을 내며 태영을 밀어붙였다.
태영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불쑥 역제안을 제시했다.
"개인 프라이버시지만 동맹을 맺은 관계로서 대답해 줄 순 있어. 단."
"단?"
"나도 정희한테 궁금한 거 있는데 하나만 알려줘."
"언니?"
정란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별다른 비밀이 없는 정희의 일상을 떠올리며 그러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콜."
"약속했다?"
"알았다고."
"도훈이형은 진짜 괴물이야."
"무슨 대답이 그래?"
"아니. 그냥 내 말만 믿어. 그냥 괴물이야. 모든 게."
순간적으로 이해를 못 하던 정란은 태영이 두 손바닥을 합장하더니 옆으로 확 벌리는 것을 보고 말귀를 알아들었다.
"···괴물이라고."
"아!"
"이해했지?"
"응."
"진짜 별걸 다 궁금해하네 근데."
"뭐? 이게 확."
"아, 아니야."
"너도 물어봐. 울 언니한테 궁금한 게 뭔데. 내가 대답해 줄 수 없는 거면 노코멘트 할 거야."
태영이 겸연쩍게 웃었다.
"너도 대답해 줄 수 있는 거야."
"응? 아무리 쌍둥이라도 사생활 같은 건 공유 안 해. 그리고 보면 알겠지만 언니랑 나는 완전 성향이 딴판이고."
"그런거 아니고··· 음, 뭐라고 해야 되지."
태영이 뜸을 들이자 성미가 급한 정란이 버럭했다.
"그냥 쫌! 사내새끼가 질질···."
"가슴 사이즈 좀."
"······."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안 그래도 손님이 없는 2층에 한파가 온 것처럼 서늘해졌다. 태영은 살해의 위협을 느꼈으나 기왕 꺼낸 거 죽기야 하겠냐는 마음으로 계속 씨부렸다.
"아니 쌍둥이니까 사이즈가 비슷할 거 아니야."
그러면서 정란의 가슴께를 쓱 훑더니 다시 말했다.
"그니까 그 정도는···."
"야. 너 여자한테 안 맞아 봤지."
"아, 아니 아까 맞았는데···."
"아니 진짜로."
"그, 글쎄? 때, 때릴 거야?"
"너 오늘 좀 맞자."
정란이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었다.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라 태영은 그대로 정란의 손아귀에 턱을 붙들리고 말았다.
‘터, 턱을 왜 잡지?’
태영은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모른 채 턱을 붙들렸다. 정란이 살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빨 꽉 깨물어."
"으, 응?"
짝-!
볼때기 한방.
갑작스런 따귀에 태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짝짝-!
이번엔 손바닥과 손등으로 연이은 타격.
찰지게 맞아 나가는 동안에도 턱이 붙잡힌 태영은 도망칠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미, 미안 내가 괜한걸···."
"아직 안 끝났어."
짝짝짝!
이른바 턱 잡고 뺨치기.
태영은 생전 처음 여자에게 진짜 구타를 당해야 했다.
그는 속으로 무척이나 억울했다.
‘아니 씨발, 지는 남의 잦이 사이즈 물어봤으면서 가슴 좀 물어봤다고!’
그때 일 층에서 주문을 마치고 두 사람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정란이 후다닥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두 볼이 탱탱 부은 태영이 새빨간 볼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 814. 기말 시즌-1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