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3. 기말 시즌-13- >
‘쉬운 일이 없구나.’
도훈은 마침내 도전 과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공략의 가장 큰 난관은 첫 번째 대상이 무조건 쌍둥이 언니인 정희여야 한다는 점.
문제는 정희가 레즈비언이 아닐까 의심될 만큼 남자에게 티끌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반대로 동생인 정란은 대놓고 좋아하는 티를 내며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란을 먼저 취하게 되는 경우 공략 순서에 위배되어 미션은 엎어지고 만
다.
‘···그리고 난 쌍좆의 저주를 받겠지.’
더 큰 문제는 패널티.
일반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108개의 업적과 랜덤으로 생성되는 미션에는 패널티가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실패해도 그만인 셈.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게 아쉬울 순 있어도 중도 포기한다고 손해를 입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신들의 후원은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어떤 신은 내기를 걸기도 하고, 어떤 신은 저주를 건다.
보상은 무엇보다 달콤하지만, 그 뒤엔 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도훈은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제껏 승승장구하며 달려왔는데, 처음으로 거대한 암초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방법이 있을 겁니다, 주인님.]
‘그래. 조급해 말자.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니니 말이야.’
다행스럽게도 도전 과제의 첫 공략에는 시간제한이 없었다. 쌍둥이 동생까지 공략하고 나면 덮밥 완성까지 24시간이라는 제약이 주어지긴 하지만.
‘차분히 해보는 거야. 조급하게 서둘렀다간 진짜로 좆병신이 될지 모르니까.’
물론 쌍좆의 저주는 3개월짜리로 일시적인 것이다.
다만 늠름한 대물이 쌍두사처럼 쪼개지는 걸 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오빠, 여기 간식도 드셔보세요. 이건 제가 샀어요."
정란이 해맑게 웃으며 포크를 내밀었다. 커피는 태영이, 함께 곁들일 디저트는 정란이 샀다.
"후배들한테 얻어먹어도 되려나."
도훈이 머쓱해 하는 데 태영이 말했다.
"어젠 형이 다 쏘셨잖아요. 계속 신세만 지긴 죄송해서요."
"그래요. 앞으로 발표까지 자주 봐야 할 텐데 돌아가면서 사요."
도훈이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소리였다. 같은 대학생 신분에 나이 한 두살 더 먹었다고 항상 쏘는 것도 이상했고, 얻어먹는 사람도 또한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말에 조용히 교재를 요약하고 있던 정희가 의견을 냈다.
"차라리 총무를 정하는 게 어떨까?"
"총무?"
"그니까, 이렇게 돌아가면서 사면 서로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까 한 사람이 대표로 사고 나중에 1/N 하는 방식으로."
"난 돈 관리는 자신 없는데."
"카드가 있는 사람이 좋지 않을까?"
"체크카드도 상관없겠네."
여러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태영이 정희를 지목했다.
"그럼 정희 네가 해볼래?"
"내가?"
"응. 총무는 성격이 꼼꼼한 스타일이 잘 맞잖아. 여기서 정희 네가 제일 정리를 잘할 것 같아서."
태영은 그 근거로 빼곡히 필기 되어 있는 노트를 가리켰다. 실제로 그녀의 대학 노트엔 수업 내용이 토씨도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었다. 노트필기만 놓고 봐도 굉장한 모범생임을 알 수 있었다.
제안을 한 당사자였던 정희는 자신이 총무로 추천되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맡길 사람이 안 보이긴 했다. 친동생인 정란은 일 처리를 대충대충하는 습관이 있었고, 가장 연장자인 도훈은 선배 대접을 해줘야 했다. 남은 사람은 태영과 자신 둘뿐인데, 태영이 뒤로 물러서니 결국 남은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뭐, 그래. 내가 할게 총무."
"멋있다."
"그럼 이제 언니가 다 계산하는 거야?"
"응. 일단 이 시간 이후부터 혹시 간식 같은 걸 사게 되면 내가 다 계산할게. 영수증 단톡방에 올리고 나중에 정산할 때 1/N로 나누는 걸로 하자."
"오, 역시! 내가 사람 하난 잘 봤다니까?
"혹시 이런 일 자주 해봤어?"
도훈의 물음에 정희가 대답했다.
"자주는 아니고요. 봉사 활동 다닐 때 학생들끼리 그렇게 한 적이 있었거든요."
"아하."
"정희 너 봉사 활동도 다녀?"
"울 언니 완전 성녀잖아 성녀. 고등학교 때부터 주말마다 고아원이니 요양원 같은데 찾아다녔거든."
"란아, 괜히 또 쓸데없는 소릴."
정희가 민망한지 동생의 입을 막았다. 도훈은 정희의 이력이 하나둘씩 공개될 때마다 가슴속에 돌덩이가 얹히는 기분이었다.
‘하-. 가끔도 아니고 고등학생 때부터 매주? 모범생인 것도 모자라 보기 드물게 착한 학생이네.’
[왜요? 착하면 좋지 않습니까?]
‘착해도 적당히 착해야지. 너무 착해빠져도 문제야. 저러니 남자에게 관심이나 있겠어? 저런 성격이면 차라리 수녀같은 걸 했어야 하는 데 말이야.’
[성녀라 불릴만 하네요.]
‘쳇, 성녀인지 석녀인지 알게 뭐람.’
속으로 궁시렁거리던 도훈은 갑자기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만. 혹시 어쩌면···?’
[왜요? 뭔가 공략법을 찾아내셨습니까?]
‘이건 좀 사악한 생각이긴 한데, 정희의 성격을 이용하는 건 어떨까?’
[성격을요?]
‘생각해봐. 매주 거르지 않고 봉사 활동 다니는 걸 보면, 정희는 천성이 착한 거잖아.’
[그렇겠죠. 남을 돕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도 있으니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동정심이 무척 많은 게 아닐까?’
[동정심이요?]
‘그렇구나. 이제 알겠어.’
[뭘요?]
도훈이 뭔가를 깨달은 듯 흥분했다.
‘정희가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이유.’
[왜 그렇죠?]
‘정희같은 성격은 애초부터 잘난 인간에게 크게 흥미를 못 느끼는 거야.’
[지금 주인님이 잘났다는 말씀인 거죠? 겸손이라곤 찾아볼 수 없군요.]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말이야.’
[흐음. 사실 틀린 말은 아니죠. 공부면 공부, 얼굴이면 얼굴, 운동도 잘하고 심지어 밤일까지 절륜하시니.]
‘그렇지. 보통 여자들은 자기보다 잘난 남자에게 끌린단 말이지. 머리가 똑똑하건, 직업이 좋건, 아니면 하다못해 외모라도 월등하건.’
[대체로 그렇죠.]
‘정희는 그게 아닌 거야.’
[네?]
‘정희는 못난 사람에게 끌리는 거야. 약하고, 보살펴 줘야 하고, 동정심이 절로 일어나는 그런.’
[설마···.]
‘단정 지을 수는 없는데··· 뭐랄까, 일종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 같은 거지.’
[착한 아이 콤플렉스요?]
‘그러니까 본인이 선한 사람이다 라는 인식. 자기보다 못난 사람들을 챙기는 데서 도덕적 우월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거야. 반대로 너무 잘난 사람에겐 그러한 감정이 들지 않으니 별 흥미를 못 느끼는 거지.’
[오오. 그럴듯한 해석인데요? 그럼 해법은 무엇입니까?]
‘동정심 유발이지.’
[네? 주인님의 어느 부분이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을까요? 딱 봐도 너무 잘난 대학생인데요. 태영군이 이미 포장도 많이 해드렸고요.]
‘그렇구나. 지금보니 태영이가 걸림돌이었네. 이 자식이 괜히 쓸데없는 소릴 해서.’
[주인님도 그땐 은근 즐기시던데요?]
‘낸 들 알았냐? 정희가 저런 타입인 걸.’
도훈이 속으로 정희의 캐릭터를 분석하는 사이 정란은 아까 1층에서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면서 태영이 해준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
"대신 도훈이 형한테 약점이 하나 있어."
"약점?"
태영은 뭔가 대단한 비밀을 언급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목소리를 줄였다. 그리곤 정란이 귓가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도훈이 형은 말이지···."
"뚝배기 깨버리기 전에 치워라, 귀 간지럽게 진짜."
협력을 약속했다곤 하지만 여전히 정란은 앙칼졌다.
태영이 머쓱해하며 한 발 물러서더니 다시 얘기했다.
"그러니까 도훈이형은 술이 약점이야."
"술?"
"응. 술을 하나도 못 마셔."
"덩치를 봐선 전혀 안 그렇게 생겼던데?"
"그치? 나도 엄청 놀랬다니까? 술 엄청 잘 마시게 생겼잖아.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고. 근데 조금만 마셔도 막 인사불성 되어 버려."
"그게 정말이야?"
"학기 초 새터에서 사발주를 마셨거든. 뭔지 알지?"
"응. 대접에 소주 마는 거?"
"도훈이형이 의리 게임으로 마지막에 원샷하다 그대로 기절해 버렸잖아."
"헐. 근데 컨디션에 따라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 피곤하면 더 잘 취하기도 하고."
"아니야. 그 뒤로 과에서 남자모임 가끔 할 때 몇 번 같이 더 마셔봤는데, 그럴 때마다 술을 빼더라고. 못 마시는 게 확실해."
"오호. 그래서 계획이 뭐야?"
"뭐긴. 술로 보내버리라는 거지. 넌 잘 마시지 않아?"
태영의 말에 정란이 발끈했다.
"내가 무슨 술집여자 같다는 거야?"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잘 놀 거 같아서."
"흥. 뭐, 못 마시진 않아."
"주량이 어떻게 되는데?"
"소주 2병."
"그거면 충분해. 도훈이형은 한 병 비우기도 전에 쓰러질테니까."
태영의 조언을 듣던 정란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가만. 너 나보고 술 취해서 인사불성인 사람을···. 대체 나를 뭘로 보고!"
"아, 아니. 누가 그렇게까지 먹이래? 술이 약하니까 조금만 먹여도 취할 거 아니야?"
"그래서?"
"원래 남자들은 술을 마시면 자제력이 사라진단 말이야. 그럴 때 들이대면 금방 넘어오지 않을까?"
정란이 곰곰이 생각했다.
‘술을 먹여서 실수를 유도하란 소린가? 흐음, 왠지 이건 남자들이 주로 쓰는 수법 같은데···.’
정란은 남자들이 자신에게 술을 먹이려고 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이른바 골뱅이를 만들어 자빠뜨리는. 태영은 술이 약한 도훈에게 그런 방법을 제안하고 있었다.
"근데 무슨 수로 술을 마셔?"
"저기 봐."
"어디?"
"카운터 뒤에 와인병 안 보여?"
"와인? 어라?"
정란은 그제야 까페 인테리어가 색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여느 까페와 달리 카운터가 빠처럼 생기고 점원 뒤에 진열장엔 와인을 비롯한 양주들이 가득했다.
"여기 뭐야? 까페에서 술도 팔아?"
"낮에는 커피숍. 밤에는 술집으로 변하는 곳이야."
"진짜?"
"응. 여기서 계속 죽치고 조별과제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녁쯤 술집으로 바뀔거란 말이지."
"오호."
"그때 내가 배고프다면서 음식을 시킬 게."
"그리고 반주를 곁들이자?"
"그렇지. 이제야 좀 말귀가 통하네."
"···뭐라고?"
정란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느닷없이 태영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기습적으로 쪼인트를 까인 태영이 정강이를 잡고 낑낑대는데 정란이 으르렁거렸다.
"누굴 바보로 아나 진짜? 말조심해! 같이 어울린다고 기어오를 생각 말고."
"아, 알았어."
정강이를 걷어차인 태영은 눈물이 핑 돌았다.
‘진짜 성질머리하고는! 무슨 계집애가 저렇게 폭력적이야? 손버릇 한 번 고약하네.’
태영의 생각대로 정란은 예전부터 손버릇이 좋지 않았다.
전 남친과 헤어지면서 싸다구를 날린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던 것. 원체 성격이 드세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 일진을 했던 만큼 입도 걸걸하고 툭하면 남자를 때리는 습관이 있었다.
특히 태영처럼 평범하고, 허당 같은 성격은 그녀의 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손속에 사정을 두는 편이랄까?
"암튼 내가 사인 보내면 너가 호응해 줘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았어. 맡겨만 둬."
***
도훈을 위시한 조원들은 스스로에게 할당된 분량을 묵묵히 해치워 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정희는 원체 성실한 학생이었고, 모종의 거래를 마친 태영과 정란 역시 과제를 적당히 끝내야 뒤를 볼 수 있기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집중한 상태였다. 도훈 또한 정희를 공략할 방법을 찾느라 구상에 들어간 상태였으므로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렇게 까페에 모인지 2시간쯤 지났을 무렵.
오후부터 시작한 과제가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태영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태영이 배고파?"
"어, 점심을 대충 먹었더니. 아니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저희 밥 먹고 하면 안 될까요?"
"저녁?"
"네. 여기 보니까 식사도 되는 것 같은데."
정희가 뜬금없다는 듯 물었다.
"커피숍에서 식사도 돼?"
"응. 여기 낮에만 커피숍처럼 운영하는 곳이야. 밤에는 식사도 팔고."
"그렇구나. 잠시만. 얼마나 정리했는지 좀 보고."
정희는 요약한 내용을 훑어보더니 고민에 빠졌다.
"애매한데. 조금만 더 하면 오늘 분량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얼른 마무리 해버리자."
"언니. 나도 배고파."
"너도?"
정희는 되도록 시작한 일을 마무리를 하고 쉬자는 주의였으나 태영와 정란은 입을 맞춘것처럼 배고프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때 도훈도 가세했다.
"밥부터 먹고 합시다, 총무님."
"오빠도요? 흐음. 알겠어요. 어디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하는 거면."
"야호!"
"테이블부터 치우자."
태영과 정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테이블을 정리했다.
"주문은 어디서 하지?"
"벨이 없는데 직접 가서 해야 하나?"
"내가 다녀올게."
"도훈이 형이요?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
"아냐. 앉아 있어. 아까 커피도 가져다줬잖아. 자꾸 이러면 불편하다. 그리고 내가 사는 것도 아니고 회비로 할 건데 뭘. 정희도 같이 갈래? 주문하면서 계산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네. 그래요."
이번엔 도훈과 정희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둘만 남은 정란과 태영도 서로 머리를 맞대고 차후의 일을 상의했다.
1층에서 메뉴판을 보던 도훈이 말했다.
"정희 넌 뭐 먹을래?"
< 813. 기말 시즌-13-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