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2. 기말 시즌-12- >
인기가 없어 본 이들은 인기를 갈구하기 마련이다. 태영은 학창시절부터 늘 여자에게 인기가 없었다.
아니 없다기보단, 적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관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터무니 없이 눈이 높은 게 문제였다.
아무튼, 이래저래 인기가 없었던 태영은 유달리 타인의 호감을 캐치하는 속도가 빨랐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들이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빠르게 눈치채야 손절을 하건 훼방을 놓건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태영은 갑자기 싹 바뀐 정란의 태도에 주목했다.
‘은근슬쩍 눈 웃음 치는 거 보소? 내가 아는 평소 모습이 아닌데?’
정란은 첫 만남부터 개차반이었다. 그저 쳐다만 봤을 뿐인데 재수 없다는 식으로 그를 비난했다. 말 그대로 안하무인. 눈 앞에 있어도 투명인간 취급하는 태도에 예쁜 얼굴에도 불구하고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오늘만 해도 약속 장소에 누구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그에게 정란이 처음 물었던 질문은 "도훈 오빠는 어딨어?" 였다.
그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채던 태영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상해. 바로 전까지 성난 살쾡이 새끼마냥 으르렁 대던 정란이, 갑자기 순한 양처럼 변했단 말이지?’
결정적인 것은 어제보다 훨씬 공을 들인 화장과 패션.
수수하게 차려입은 쌍둥이 언니 정희와 달리, 정란은 보란 듯이 잔뜩 힘을 준 모양새였다.
‘확실해. 정란이 도훈이 형을 좋아하는 거야.’
순식간에 속마음을 꿰뚫은 태영은 갑자기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나는 정란이는 안중에도 없었단 말이지? 도훈이 형이랑 정란이를 엮어주면 어차피 정희만 혼자 남는 거잖아? 두 사람만 연결시키면 자연스럽게 위협적인 경쟁자인 도훈이 형과 꼴도 보기 싫은 정란을 세트로 보낼 수도 있겠는데?’
물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었다.
정란이 도훈과 엮인다고 해서, 홀로 남은 정희가 태영을 선택해야 한다는 법은 전혀 없었다. 무인도에서 2:2로 소개팅을 하는 상황도 아니고 말이다.
‘흐흐.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정란이를 도훈이 형에게 밀어줘야 겠다.’
결심을 굳힌 태영이 도훈에게 말했다.
"형. 음료 뭐 드실래요? 혹시 몰라서 형건 안시켰는데."
"아, 그래? 그럼 내가 주문하고 올게."
"아니에요. 뛰어오느라 땀도 많이 흘리신 거 같은데. 제가 다녀올게요. 뭐 드실거에요?"
"아니 굳이···."
"에이, 그래도 선배님인데."
도훈은 지나치게 깍듯한 태영의 태도가 수상했지만 알아서 배달을 해준다니 주문을 말했다.
"난 그냥 커피면 돼."
"네, 형."
태영이 주문을 받고 카운터로 향하는 길에 갑자기 정란을 붙들었다.
"너도 같이 가자."
"내가 왜?"
"혼자 가면 심심하단 말이야."
"아, 아니 무슨···."
팔목을 잡은 태영이 우악스럽게 힘을 주어 당기자 정란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그러나 도훈의 앞에서 성격을 드러낼 수 없었던 정란은 겨우 화를 참으며 그의 손에 이끌렸다. 그들은 2층에 자릴 잡았고, 카운터는 1층에 있었기에 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내려와야 했다.
마지못해 따라온 정란이 도훈에게서 멀어지자 곧바로 태영을 윽박질렀다.
"쳐맞고 싶냐? 어디서 남의 손목을 함부로 잡아?"
도훈이 안 보이는데서 곧바로 본색을 드러내는 정란의 모습에 태영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 그렇지. 하여간 살쾡이 같은 년. 제 언니랑 똑 닮았는데 성격은 정반대네.’
"잠깐. 너한테 할 말 있어."
"유언 같은 거야? 뒤지기 전에?"
정란은 곧바로 손목을 뿌리치며 태영에게 눈을 부라렸다.
"자, 잠깐. 내 말부터 들어보라고."
"뭔데? 별거 아니면 넌 오늘···."
"너 도훈이 형한테 관심있지."
의표를 찔린 정란이 태영을 때리려던 손을 거두었다.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는 정란을 보고 태영은 정곡을 찔렀음을 확신했다.
"무슨 소리야! 난데 없이!"
"맞네. 딱 보니까 알겠더라."
"이게 진짜 뒤지고 싶어서 환장···."
정란이 또 다시 손찌검을 하려고 하자 태영이 다급히 소리쳤다.
"내가 도와줄게!"
"···뭐?"
"내가 도와준다고. 너랑 도훈이형."
"니가?"
"그래. 아까도 말했지만 나 도훈이형이랑 엄청 친해. 후배 중에선 제일 자주 붙어 다닐걸?"
태영의 제안에 정란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곧바로 눈치를 챈 것에 놀라긴 했지만, 그보다는 왜 태영이 도와준다고 하는 지 잘 납득이 가질 않았다.
"가만. 근데 네가 왜 나를 도와."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상조? 난 보람상조 밖에 모르는데?"
‘뭔 소리야 이 무식한 년이.’
태영이 재차 말했다.
"아니 서로 돕자고."
"내가 널 왜 도와?"
"솔직히 말할게. 난 정희한테 관심있어."
"네가? 언니를?"
"그래."
정란도 그제야 태영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어때?"
정란은 잠시 솔깃했지만, 태영을 위아래로 훑더니 절래절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관둬. 너 따위한테 넘어갈 언니가 아니야. 너 우리 언니 잘 모르는 구나?"
"내가 뭘 몰라."
"아직까지 모솔이야. 남자를 사귀어 본적도 없다고. 아니 남자 자체에 관심도 없어. 그런데 누가 누굴 꼬신다고? 네가?"
정란이 신날하게 쏘아붙였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소리였다.
태영보다 훨씬 잘나고 잘생긴 남자들의 고백도 거절했던 정희였기에 그로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정란이 다시 말했다.
"난 널 도울 생각도 없지만, 돕는다고 해도 가능성이 없어."
"하지만 난 널 도울 수 있지."
"네가? 무슨 수로?"
"원래 커플은 주변에서 만들어 주는 몰라? 둘이 서로 좋다고 사귀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어? 옆에서 부추기고 밀어주니까 사귀는 거지."
태영의 말을 듣던 정란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 경험이 많았으니 만큼, 태영의 말이 진실에 근접한 것이라는 걸 파악한 것이다.
‘하긴 틀린 소리는 아니지.’
태영의 의견에 동조하긴 했지만 여전히 정란은 의문이 남았다.
"그야 그렇지만 어쨌든 난 널 도와주고 싶어도 못 한다니까?"
"상관없어."
"뭐?"
"너한테 밀어달라곤 안할게. 대신 훼방만 놓지마. 난 그거면 충분해."
"흠···."
정란이 곰곰이 듣고보니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태영은 자신이 도훈과 잘 되게끔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반면, 자신은 태영이 정희에게 수작을 부리는 걸 눈 감아 주기만 하는되는 일.
빠르게 주판을 두들긴 정란이 말했다.
"너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당연하지."
협상을 마친 태영은 카운터에 커피를 주문한 뒤 정란에게 말했다.
"커피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자."
"싫어. 너 나 기다려."
"아니 작전 회의좀 짜자고."
"작전 회의?"
"도훈이 형이 왜 지금까지 여자친구를 안 사귀었을 것 같아?"
도훈의 이름이 거론되자 정란이 귀를 쫑긋세웠다.
"왜? 혹시 눈이 많이 높아?"
어딜가서도 빠진다는 소린 못 들었지만, 정란은 괜히 불안했다. 원래 남자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누가봐도 미인인 정란이었지만, 도훈이 자신의 외모에 흥미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계속 품고 있었다. 그래서 화장도 평소보다 훨씬 빡세게 했던 것이고.
"아니. 그런건 아닌 것 같아."
"똑바로 말 해. 그럼 이유가 뭔데?"
"도훈이 형은 여자가 궁하지 않거든."
"궁하지 않아?"
"늘 인기가 많으니까. 솔직히 우리 체육교육과 안에서만 도훈이형 좋다는 애들이 한 둘인 줄 알아?"
"···뭐, 그거야 예상했어."
"과에서 행사같은 거 하잖아? 여자 애들이 다 도훈이 형만 봐. 형 우리학교 배구 선수거든? 연습경기 한 번 하면 피켓까지 준비해서 오는 애들이라고."
"와···. 그 정도야?"
"내가 말했잖아. 어딜 가나 인기가 많고, 여자들이 잘해주기 때문에 여자에게 크게 관심을 못 느껴. 내가 볼 땐 그래서 여자를 안 사귀는 거야."
태영은 자신이 내린 결론을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도훈이 인기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자를 안 사귄 이유는 섹스를 마음껏 하기 위해 한명에게 구속받기 싫어서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태영은 정란에게 계속 말했다.
"대신 도훈이 형한테 약점이 하나 있어."
"약점?"
***
도훈이 말했다.
"애들 좀 늦는 거 같은데?"
동그란 금속 태 안경을 쓰고 교재를 들춰보던 정희가 그제야 책에서 눈을 떼며 대답했다.
"그새 어디로 샜나 보네? 이게 진짜!"
"누구?"
"란이요. 제 동생이지만 정말 도움 하나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죄송해요. 제가 당장 잡아 올게요."
정희가 일어서려는 기색을 보이자, 도훈이 만류했다.
"놔둬.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있나 보지. 태영이도 같이 있는데 설마 어디 갔으려고."
도훈은 정희와 단둘이 남게 된 도훈은 이 행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목석같은 초식녀 정희와 친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만, 태영이가 잘하고 있구나.’
"근데 너 안경도 쓰니?"
"아, 이거요?"
정희는 책을 볼 때 안경을 쓰고 집중하는 편이었다. 도훈의 말에 무심코 안경을 벗는데 도훈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와, 벗은 게 훨 이쁘네."
"그래요? 전 잘 모르겠던데."
도훈이 아부를 떨어 보았지만, 정희는 그것이 수작인지도 모를 만큼 순진한 여자였다. 안경 렌즈를 닦아낸 정희는 다시 안경을 고쳐 썼다.
"암튼 전 책볼 때는 쓰는 게 더 좋더라고요."
"으, 응."
‘야, 이거 왜 저렇게 꿈쩍도 안 하지?’
[주인님의 외모에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인데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사람마다 취향은 제각각이니까요. 아니면 저번에 주인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얼굴에 전혀 흥미가 없는 것일수도 있구요.]
‘흐음. 안 되겠는데. 정보창 열어서 추천멘트라도 확인해 봐야겠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번 미션은 아이템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도훈은 마음껏 스킬을 활용할 생각이었다. 곧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로 정희의 정보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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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차정희 (처녀)
나이 : 20 #범생 #순수 #건망증
호감도 : 61/100
개방성 : E
성감대 : 아직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애무 포인트 : 알 수 없음.
성욕지수 : 매우 낮음 (임신확률 : 15%)
공략팁
*위 대상은 당신에게 별다른 호감이 없습니다.
-그녀는 남자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성실하게 학창시절을 보낸 평범한 학생입니다.
-약간은 고지식한 구석이 있으며 혼전순결주의자의 경향이 있습니다.
?추천멘트 : "정란이 때문에 골치 좀 아프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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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들여다 본 정보창이지만 정말로 기가 막힌 수준이었다. 공략 난이도로만 치면 이제껏 상대한 여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수준.
‘와, 저번에 첨 봤을 때 호감도 60이지 않았어?’
[맞습니다.]
‘그리고 어제 보고 오늘 또 보고 그렇게 봤는데 겨우 1 오른 거야?’
[그 점은 확실히 의외로군요. 주인님의 호감도는 각종 버프로 인해 연예인급 아우라를 뿜어대는 수준인데 말이죠.]
중수에 다다른 도훈이 여자를 쉽게 공략할 수 있었던 배경엔 다양한 버프로 매력도가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첫눈에 호감을 가질 만한 외모는 물론 이거니와, 이제껏 레벨업을 거치며 쌓인 ‘색기’가 어마어마 했기 때문에 여자들은 그를 보고 자기도 모르
게 가슴이 뛰곤 했던것이다.
하지만 이번 쌍둥이 미션의 공략 대상인 정희는 말 그대로 목석같은 여자였다. 이성에 대한 흥미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귀여운 강아지와, 잘생긴 남자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고민없이 강아지를 고를 수준이었다.
정보창의 추천 멘트만 봐도 그랬다.
늘 동생을 걱정하는 그녀에게 동조하는 물음을 던지면 호감도가 다소 상승하긴 하겠지만, 평소처럼 유의미한 증가를 보이긴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도훈은 정보창의 멘트를 집어 치우고 로시에게 물었다.
‘안 되겠는데. 비집고 들어갈 틈이 안보여.’
[동생과는 완전히 반대 성향이군요.]
‘무슨 벽을 보고 얘기하는 느낌이야. 상식 개변이라도 걸어야 하나?’
[잊고 계신 모양인데 상식 개변은 일정 호감도 이상의 상대에게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럼 세뇌는? 매저키스트의 밧줄로 묶어 버릴까?’
[그 역시 마찬가지고요.]
‘오빠 믿지 립스틱을 이용한 감언이설은?’
[역시 호감도가 낮은 상태에선 효과가 미미합니다. 주인님, 정희양은 아이템이나 스킬을 이용해 단기간에 공략가능한 대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아 놔. 진짜.’
도훈은 오랜만에 벽을 느꼈다.
그 벽은 매우 높고 견고해 보였다.
‘제기랄. 대체 무슨 수를 써야 저 석녀를 자극할 수 있을까?’
도훈이 고민에 빠져있는데 계단을 통해 태영과 정란이 올라왔다. 쟁반에 머그잔을 받쳐서 들고 오는 걸 보면, 주문한 커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처음 1층으로 내려갈 때와 달리 두 사람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따라가길 몹시 귀찮아하던 정란이 어느새 태영과 친해진 듯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 도훈은 위화감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킬과 아이템을 무제한 사용으로 다소 쉬어보였던 미션이, 살짝 어그러지는 기분들었다.
< 812. 기말 시즌-12-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