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827화 (795/2,000)

< 809. 기말 시즌-9- >

***

익숙한 녹색화면을 띄우고 검색창에 ‘지리산 선녀보살’을 쳤다. 검색내용은 주로 블로그에 국한되어 있었다. 가장 인상 깊은 제목인 <최근 가장 핫한 무속인 3인방>이란 제목을 클릭했다.

그것은 일종의 취재 블로그 형식으로, 점보러 다니길 좋아하는 운영자가 짧은 후기를 남겨놓은 것이었다. 카테고리 역시 타롯, 궁합, 사주 등 평소에도 관심있는 정보를 스크랩해서 게시하는 열혈 블로거였다.

<최근 가장 핫한 무속인 3인방

-안녕하세요. 간만에 글을 올립니다.

최근엔 바쁜 일이 많아 포스팅이 뜸했네요.

······.

초반부는 본인의 근황에 대한 쓸데없는 내용.

별 관심도 없었기에 휠을 돌려 빠르게 스킵 했다. 조금 넘기다 보니 가게의 사진과 함께 무속인이 하나씩 소개되었다.

1. 청담동 박수 무당, 박박사.

-박박사님 요새 굉장히 핫하죠. 하도 유명에서 제가 직접 다녀왔습니다. 이름이 왜 박사냐고요? 이분 정말로 박사학위가 있으신 분입니다. 가게에 들어가니 떡하니 박사 학위증이랑 졸업 사진도 걸어 놓으셨더라고요. 일단 업장 자체가 굉장히 세련되어 있더라

고요. 대기실에 가면 카운터에서 예쁘게 생긴 코디 분이 스케줄 잡아 주고···

주저리주저리.

대충 내용을 훑어보니 본인이 직접 발품을 팔아 찾아간 곳만 소개하는 듯했다. 박박산지 이박산지 별 관심 없는 사람이라 빠르게 넘겼다.

2. 장안동 무르팍 도사.

-이분도 엄청 유명하죠. 청계산에서 30년 도를 닦고 내려오셨다고 하는데, 상호가 엄청 웃깁니다. 가보면 진짜 제사상 같은 좌식 테이블 앞에 방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요, 손님이 누구든 무조건 무릎을 꿇으라고 합니다.

또 주저리주저리.

역시나 관심 없는 내용이었다. 블로거의 글 쓰는 스타일이 너무나 중구난방인데다 쓸데없는 잡설이 많아서 읽기가 매우 불편했다.

역시 스킵.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처녀 보살이 소개되었다.

3. 학수동 점집거리, 지리산 처녀보살.

-대박입니다. 제가 최근 들러본 곳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서두부터 심상치 않았다.

마침내 고대하던 정보를 찾은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턱을 바짝 당겨 내용을 정독했다.

-점집이 많기로 유명한 학수동에서도 단연 1티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사진에 보시는 것처럼 일반 가정집처럼 생겼어요.

그리고 올라온 사진엔 내가 일전에 들른 처녀보살 가게가 찍혀 있었다.

-하지만 입구에 딱 들어가면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데요, 아. 일단 보살님 얼굴이 진짜 예쁩니다. 저는 첨 딱 보고 무슨 연예인이 나온 줄 알았잖아요.

"웃기고 있네. 진짜 연예인 못 봤나."

처녀 보살의 실물이 예쁘긴 하지만, 연예인급까진 아니었다. 물론 뭐 사람에 따라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만.

-보살님은 지리산에 있는 조그만 암자에서 수련을 했다고 하네요. 원래는 집에선 비구니를 시키려고 절에 두었는데, 신내림을 받는 바람에 결국 불교의 뜻을 접고 본격 역술인이 되었다는···. (물론 주워들은 이야기라 100% 확실한 건 아닙니다.)

‘오, 비구니라.’

-이 보살님은 암튼 처음부터 딱 기선 제압하시더라고요. 다짜고짜 반말을 찍 하고 내뱉는데, 완전 걸크러쉬 쩔어염. 아, 그리고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이분은 무조건 사전 예약제입니다. 하루에 5명 이상 손님을 안 받는다고 해요. 최근에 유명해진 뒤로 요즘에

는 거의 한 달 가량 예약이 밀려있다고 하니 참고해 주세요. 저도 예약 한지 한 달이 되어서 겨우 찾아 뵙거든요. 그래서 포스팅이 많이 늦어진 것도 있습니다.

‘가만 예약제라고?’

[이거 난처해졌는데요?]

‘그러게. 한 달이면···. 미션 종료 시한이랑 맞물리는 거 아냐?’

큰일이었다.

이번 ‘처녀보살을 공략하라.’ 미션은 제한 시간이 딱 한 달. 그런데 지금 예약해도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자칫 만나보지도 못하고 미션이 종료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당황한 나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블로그에 기재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주인님. 저녁 9시가 넘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일단 걸어는 봐야지.’

하지만 예상대로 전화는 받지 않았다.

슬슬 초조함이 밀려왔다.

‘거참, 내일 당장이라도 예약부터 하는 게 급선무겠다.’

[그래야겠습니다.]

‘일단 내용부터 계속 보자.’

-제가 또 누굽니까? 궁금한 건 못 참잖아요.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보살님 뵐 때 물었거든요. 왜 하루에 5명만 받는 것이냐, 많이 받으면 복채도 많이 받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것 아니냐고요. 그러니까 보살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자긴 하루 5명이 넘어가면 점

궤가 잘 안 맞는다고. 안 맞는 점궤로 복채를 받는 것은 사기라고 생각한다면서.

‘아무래도 이 부분은 의심스러운데?’

[왜요?]

‘정말 보살이 플레이어라면 스킬의 쿨타임 같은 이유로 횟수의 제한이 있을 수 있다는 거잖아’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약간은 짜 맞추기식 결론이 아닐까요?]

‘짜맞추기라니?’

[그 보살이 플레이어이길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믿고 싶은 거잖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네. 일단 계속 읽어보자.’

-그래서 생각했죠. 아, 5명만 받는 대신에 복채를 무지 받겠구나하구요. 한마디로 소수 정예로 가는 뭐 그런 덴 줄 알고요. 하지만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 지리산 처녀보살님은 복채를 사람에 따라서 가려 받습니다.

‘이건 그때 택시기사가 했던 그 이야기지?’

[네. 부자에겐 많이 가난한 사람에겐 적게 말이죠?]

‘난 사실 이 부분도 살짝 의심스러워.’

[어떤 점에서요?]

‘솔직히, 내가 이런 무속인들 안 믿는 이유가 대부분 돈벌이를 노리고 하는 거란 말이야.’

[경제활동을 하는 것을 비난할 순 없죠.]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너무 세속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것 같지 않냐는 거지.’

[살짝 그런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유명세도 있고 하루에 5명만 손님을 받을 정도면 얼마든지 돈 많은 사람 위주로만 받아도 될 테니까요. 일전이 최마담같은.]

‘그치? 근데 사실 플레이어가 되고 나면 돈 욕심이 없어지거든.’

[아!]

‘내가 해보니까 그래. 돈보다는 포인트가 먼저. 사실 돈은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벌 수 있거든. 능력을 활용하기에 따라서 말이야. 막말로 내가 호빠로 진출하면 한 달에 몇천씩은 우습게 쓸어 담지 않겠어?’

[충분히 그럴 것 같습니다.]

‘언제든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돈에 연연하지 않게 된단 말이야. 그리고 플레이어로서 성장이 더 먼저기 때문에 신경 안 쓰는 부분도 있고.’

[정말로 처녀 보살이 플레이어일까요?]

‘난 점점 강한 의심이 든다.’

[난감하군요. 진짜 플레이어라면 공략도 어려워질 텐데요.]

‘뭐,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지. 내가 어디 실패하는 거 본 적 있어?’

[오늘 빤스런···.]

‘인마. 그건 미션도 업적도 아닌 어장관리였다고.’

[어쨌든 빤스런···.]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 정확하게 노빤스 런이었어.’

[아, 예.]

블로그에 적힌 글은 그 뒤로 시시콜콜한 이야기 뿐이라 창을 껐다. 그보다는 갑자기 수지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지금 망부석 어플이 누구누구 관리하고 있지?’

‘망부석이 되지 마오’는 지정된 상대에게 자동으로 안부 연락을 취해 친밀도를 관리해주는 장치이다. 최대 5명까지 지정할 수 있으며, 지정된 상대는 자동으로 호감도가 유지된다.

[일전에 지정하신 인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육정음, 강민주, 송미나, 나예림, 오수정입니다.]

‘어랍쇼. 내가 송미나랑 나예림도 지정했다고?’

[네. 까먹으셨습니까?]

‘여자가 한 둘이어야지. 아마 생각나는 데로 대충 지정했었나 보네.’

[관리대상은 언제든 변경 가능합니다.]

‘가만있자, 그러면 이번에는···.’

일단 육정음은 이제 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의 호감도는 이미 100을 돌파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다. 다만 강민주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 학교에서 늘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주 연락을 취해주지 않으면 욕구 불만으로 덤빌 것이 우려되었다.

하나씩 이유를 들어 정리하다 보니 새로운 VIP명단이 작성되었다.

‘강민주, 나예림, 송미나는 그대로 두고 새롭게 설수지랑 박하린 추가시켜.’

[수지양이랑 하린양을요?]

‘수지는 썸타는 사이니까 좀 더 묵혀둬야 할 것 같고, 하린이는 방학 때 보기로 했으니까 일단 연락을 유지해 놔야지.’

[알겠습니다. 명단을 새롭게 수정하겠습니다. 다만 육정음양이야 변치 않겠지만 오수정양은 서서히 관심도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임용 공부가 더 중요한 시기니까. 남자랑 시시콜콜 연락해서 좋을 게 뭐 있겠어.’

[알겠습니다.]

관리 명단까지 모두 정리한 나는 잠을 청했다. 내일부턴 정희, 정란 쌍둥이 자매 공략과 처녀 보살에 대한 사전작업으로 바빠질 예정이었다.

***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된 도훈은 어제 확보한 처녀보살의 점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지리산 처녀보살입니다.

일전에 들렀을 때 느꼈지만, 따로 보조가 없는지 전화를 직접 받았다.

"혹시 예약 가능할까요?"

-지금은 예약이 많이 밀려있습니다. 다음 달에나 가능한데 괜찮으세요?

예상대로였다. 도훈은 난처함을 느끼며 사정했다.

"저기, 최대한 빨리 안될까요? 정말 급해서 그런데."

-안됩니다.

"복채를 더 드리면···."

-아니요. 예약 안 하실 거면 이만 끊을게요.

생각보다 쌀쌀맞은 태도였다.

도훈이 급하게 태도를 바꿨다.

"아, 아뇨. 끊지 마시고요. 그럼 다음 달 언제쯤이 가능한가요?"

-빨라야 5주 뒤겠네요. 예약이 가득 차서.

"아··· 너무 늦는데. 혹시 중간에 예약이 비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순번이 당겨지기도 하나요?"

-부득불 예약이 취소되면 별도로 손님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아, 네. 그럼 예약 좀 부탁드릴게요."

-네, 성함이?

도훈은 가명으로 예약을 맞춘 후 전화를 끊었다.

[미션에 차질이 생긴 거 아닙니까?]

‘아니. 오히려 가능해진 것 같은데?’

[어떻게요?]

‘통화 내용 들었지? 중간에 노쇼가 생기면 그냥 그 시간은 장사 접는 데잖아.’

[그렇죠.]

‘그럼 노쇼를 일부러 만들면 된다는 소리 아냐?’

[아! 그런 방법이!]

‘그리고 내가 대타로 들어가는 거지. 이번 주말에 시간 내서 한 번 찾아봐야겠어.’

[건투를 빕니다.]

통화를 마친 도훈은 태영과 함께 오후 수업에 들어갔다.

오후 수업은 손은주 교수의 수업이었다.

먼저 도착한 정음과 서현이 도훈을 보더니 밝게 인사했다.

"오셨어요. 선배."

"도훈 오빠 안녕하세요."

"야, 나는 뭐 투명인간이냐? 이것들이 동기는 아는 체도 안하고."

"안녕 태영아."

"태영아 안녕."

두 사람이 뒤이어 인사했지만 태영은 이미 똥씹은 표정이었다.

"어이구, 그래 엎드려 절 받기지 뭐."

"왜 또 그래? 선배한테 먼저 인사하는 게 당연하지."

"맞아. 질투할 걸 질투해라."

"내가 무슨 질투?"

그때 손은주 교수가 들어왔으므로 도훈이 태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단 앉자."

"네."

태영과 도훈은 뒷자리, 정음과 서현은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출석을 부르던 손 교수는 도훈의 이름을 부르며 한마디 했다.

"참, 이도훈 학생. 지난 중간시험 관련해서 얘기할 게 있으니 수업 끝나면 저 좀 만나고 가세요."

"시험이요?"

"네."

손 교수는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출석을 마치더니 수업을 진행했다. 호명된 도훈이 난처해 하는 데 태영이 물었다.

"무슨 일일까요?"

"모르겠어. 성적 정정 기간 이미 끝나지 않았나?"

"그러게요. 왜 부르실까나."

도훈은 대충 뜻을 짐작했으나, 별일 아닐거라며 둘러댔다.

태영이 말했다.

"오후 수업 끝나는 데로 조모임하기로 했는데···. 제가 같이 따라갈까요?"

"아니야. 그러면 조원들이 괜히 기다릴 수 있으니까 먼저 가 있어. 용무 마치는 대로 뒤따라 갈게. 장소가 어디라고?"

"제가 단톡방에 주소 띄워놨어요."

"도훈 선배, 오늘 조모임 있으세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음이 고개를 돌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정음아."

태영이 대신 대답했다.

"우리 기말 과제가 조발표로 대체 됐거든. 그래서 이번주 내내 모여서 발표 준비해야 할 것 같아."

"아···. 바쁘시겠구나."

"그러게 말이야. 다른 과목 공부도 해야 하는데."

도훈은 정음이 아쉬워하는 눈치를 보이자 몰래 개인톡을 남겼다.

-도훈 : 미안. 자주 보고 싶은데 이번 주는 좀 바쁘네.

-정음 : 괜찮아요, 오빠. 공부가 먼저죠. 어차피 저도 오후에 도장 알바 가야 하니까.

-도훈 : 다음에 일찍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 같이 영화라도 볼래?

-정음 : 좋아요!

아쉬워하는 정음을 달랜 도훈은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서현은 폰을 쥐고 문자를 주고받는 도훈과 정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가로 저었다.

수업을 마친 도훈은 후배들과 헤어졌다.

"난 그럼 먼저 가볼게."

"네."

"형, 조모임 장소로 바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선배."

도훈이 손교수의 학과 사무실 건물로 향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도훈을 불렀다.

"오빠."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 인사를 마치고 헤어진 서현이었다.

한때 그를 스토킹했다가 상식개변을 통해 섹파로 거듭난 후배.

그녀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물었다.

"오빠. 혹시 손교수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세요?"

< 809. 기말 시즌-9-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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