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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822화 (790/2,000)

< 804. 기말 시즌-4- >

정희는 체면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못난 동생이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 대화 내용이란 게 헤어진 전 남친이 마지막으로 ‘보보가’를 외치는 상황이라니.

혹시라도 남들이 들으면 고개를 못 들 만큼 창피한 일이었다. 그녀는 동생과 나누던 대화를 급히 중단하고 화제를 돌렸다.

"오, 오셨어요? 그럼 과제 나누는 거 마저 얘기해 볼까요?"

정희가 민망함에 곧바로 본론으로 들었다. 도훈이 그녀가 살짝 허둥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별 말 없이 미리 생각하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나누지 말고 그냥 제가 맡을까 생각 중이에요."

"네? 오빠 혼자 다요?"

"형이 왜요?"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어차피 저는 발표를 맡기로 했잖아요. 정희씨는 PPT랑 보고서 정리하고. 남은 사람들이 자료 수집하고."

"네."

"근데 당일에 발표만 하는 거라면 딱히 부담스러울 게 없을 것 같아서요."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형이 총대매는 거예요?"

태영도 의외라는 듯 물었다.

5명이 나눌 일은 4명이서 다시 할당하게 되어 다들 약간은 부담을 느끼던 차였다. 자진해서 누군가 맡아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지만, 혼자서 두 명분을 감당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 희생의 댓가로 학점을 더 받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걸 도훈이 자청한 것이었다.

"괜찮아. 그렇다고 내 발표를 나눌 수도 없는 거잖아."

"아···."

"형, 제가 좀 무대 울렁증이 있어서. 그, 연극 할 땐 아무렇지 않은데 희한하게 발표할 때 만 말이 꼬이더라고요."

"죄송해요. 저도 발표엔 자신이 없어서."

발표 얘기가 나오자 다들 주춤거리며 한 발씩 물러섰다.

많은 학생 앞에서 자신있게 발표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도훈이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어차피 제 일은 누군가랑 쪼갤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은 각각 맡은 부분이 있으니까. 암튼 그렇게 하는게 최선인 것 같아요."

"역시 도훈이 형!"

"그래도 너무 죄송스러운데···."

"아니에요. 대신 정희씨가 최대한 빨리 PPT자료를 취합해 주셔야 해요. 대본이 나와야 리딩 연습을 많이 해볼 수 있으니까. 그걸 위해선 태영이나 정란씨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줘야 하고."

"물론이죠, 형. 우리 이럴 게 아니라, 내일도 다시 모이는게 어때요?"

"내일?"

과제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정란은, 모임을 한다는 얘기에 부쩍 관심을 보였다.

"응. 내일까지 분량 딱 정해놓고 정리해 와서 서로 의견 교환하면서 점검해 보는 거야. 혼자 하는 것보단 모여서 해야 더 아이디어가 잘 나올 테니."

"괜찮네. 난 찬성."

"저도 시간 될 것 같아요."

"형은요? 내일 오후 수업 마치고 괜찮으세요?"

도훈은 태영과 미리 말을 맞춘 게 있었으므로 곧바로 호응했다.

"응. 상관없어. 근데 어디서 보지? 세미나실처럼 독립된 공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도훈의 의도된 리시브를 태영이 받았다.

"제가 공대 후문 근처 괜찮은 까페를 알거든요? 거기 독립된 방이 많아서 좋을 것 같아요."

"그럼 내일 수업 마치고 5시에 거기서 보는 걸로 할까요?"

"네."

"좋아요."

"위치는 제가 단톡방에 공지해 놓을게요."

과제를 나눈 일행은 인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정란은 헤어지는 순간까지 도훈을 쳐다보며 눈길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당장은 언니인 정희가 꼭 붙어 있으니, 뭔가 수작을 부릴 시도를 못 하고 입만만 다셔야 했다.

‘아쉽지만 내일 다시 보기로 했으니 그때를 노리는 수밖에.’

도훈 역시 속으로 꿍꿍이가 있었다.

[어째서 과제를 자청하신 겁니까?]

‘생각해 보니, 이편이 정희랑 단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가 생기겠더라고.’

[무슨 말이죠?]

‘정희는 남자엔 전혀 관심이 없는 건어물녀 스타일이야. 정확히 말하면 이성에 흥미가 동하지 않는달까?’

[동생 정란과는 달리 모범생으로 보이더군요. 그게 왜요?]

‘모범생들은 대체로 같은 범생이에게 호감을 보이기 마련이거든. 아무래도 동류니까. 유유상종이랄까?’

[그래서 남의 과제까지 떠맡는, 책임감 있는 범생이 코스프레를 하신거라고요?]

‘물론 그것도 있는데, 발표를 맡은 사람은 부득불 PPT작성자와 호흡을 맞출 수밖에 없거든. 그러니 그걸 놓을 수 없는거지.’

[아!]

‘정희 공략은 쉽지 않을 거 같아. 꽉 막힌 성격에 남자에게 별 관심도 없잖아. 게다가 처녀고. 아마 내가 지금보다 더 잘생겼더라도 신경도 쓰지 않았을걸.’

[확실히 외모에 대한 편견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태영군에게나 주인님께 하는 태도가 일관적이더군요.]

‘내 말이. 그러니까 최대한 자주 보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져서 천천히 공략해야 한단 말이지. 호감도만 일정 수준으로 끌어 올리면 스킬이든 아이템을 퍼부어 버리면 그만이니.’

[훌륭한 작전입니다. 그럼 이제 뭐하십니까?]

"형은 이제 집에 가세요?"

마침 로시가 하던 질문을 태영이 똑같이 되물었다.

"아니. 도서관 들러 공부 좀 하다가려고. 기말고사 2주 전이잖아."

"와! 진짜요? 형 설마 학교랑 집 도서관만 다니시는 거예요?"

‘중간중간 여자도 따먹고.’

"···거의 그렇지?"

"형 진짜 대단하시네요. 제가 형 정도 얼굴이면 대학교 다니는 여자들 다 꼬실 텐데."

‘안 그래도 잘 먹고 다닌다. 대학교 밖에서도.’

"너 허구한 날 그 생각이냐. 적당히 좀 해라. 여자 사귀는 것만큼 공부도 중요한 거야."

"이제 1학년이잖아요. 헤헷. 군대 가기 전까진 놀아야죠."

"넌 그럼 이제 동아리 가는 거야?"

연극부 이야기가 나오자 태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동아린 요새 잘 안 나가고 있어요. 사정이 있어서."

"그래?"

도훈은 이유를 알았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할 일 없으면 나랑 도서관 가던가?"

태영이 극렬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사, 사양하겠습니다. 전 벼락치기 스타일이라. 하하. 암튼 형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뭘, 어차피 과제도 해야 하는데."

"저 진짜 정희랑 잘되면 형 집까지 도보로 삼보일배할 거에요."

"그래. 기왕 하는 거 잘 됐음 좋겠네."

"네, 그럼 형 저 먼저 가볼게요. 오늘 커피 잘 얻어먹었어요."

"아니야."

태영과 헤어진 도훈은 사범대 도서관으로 향했다.

***

한편 조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던 정란이 언니 정희에게 물었다.

"언니, 괜찮지 않았어?"

"뭐가?"

"도훈 오빠 말이야."

"도훈 오빠?"

"응. 잘생기지 않았어?"

"너 진짜 관심 있어서 그래?"

"왜? 어차피 나 지금 솔론데."

"헤어진 지 하루 지난 솔로지."

"그게 뭔 상관? 바람피우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조금은 자숙이란 걸 해야 하지 않을까? 남자 없인 하루도 못참는 것처럼 보이잖아."

정희의 조언에 정란이 콧방귀를 꼈다.

"흥. 언닌 그게 문제야.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왜 남의 눈치를 봐? 왜?"

"너무 안 봐도 문제지. 맨날 옆에 남자친구가 바뀌면 다른 사람들이 널 어떻게 보겠어?"

"난 신경 안 써."

"뭐?"

"난 남의 눈치 일도 신경 안 쓴다고. 내가 연애하는 데 지들이 보태준 게 뭐라고. 그것도 다 오지랖이야."

"에휴. 그래 니 자유지."

"암튼 언니는 진짜 오빠한테 관심 없는 거지?"

"응."

정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녀는 도훈이 아니라 누구였더라도 별 관심 없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학과 공부와, 봉사 활동, 그리고 몇가지 소소한 취미 생활뿐이었다.

고등학교 때 다닐때에도 친구들 사이에 수녀님이란 별명으로 까지 통했던 그녀는, 이제껏 살면서 남자에게 딱히 애틋한 감정을 가져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동생인 정란이 그녀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언니, 혹시 레즈비언은 아니지?

물론 그 질문을 한 정란은 정희에게 하루 종일 귀가 따갑도록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정희는 그때 확실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이성애자야. 단지 연애는 결혼할 사람이랑 하고 싶을 뿐이라고.

그녀는 요새 보기 드문 혼전 순결주의자였다.

이성에 대한 관심도도 낮았고, 주변에서 괜찮은 남자가 들이대는 것도 귀찮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언젠간 정말 이상형의 남자를 만나면 모를까, 그 전까진 자기 발전에 집중하고 싶었다.

언니의 마음을 확인한 정란이 웃으며 말했다.

"언니. 나 그럼 이번에 나 한 번만 도와주라."

"도와달라고?"

"난 도훈 오빠 맘에 들거든. 꼬시고 싶어."

"아니 넌 대체···."

정희는 자신과 정반대인 정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못 생기거나 키 작은 남자는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안하무인.

하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는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마는 지독한 욕심쟁이.

어떻게 한 배에서 몇 분 간격으로 태어난 두 자매가 이리도 다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두 사람이 나눠 가졌어야 할 성욕을 한 사람에게 몰아준 느낌이랄까?

정희는 정란의 문람함과 바람기를 전혀 이해 못했고, 정란은 반대로 목석같은 벽창호 언니를 답답해했다. 하지만 어쨌든 둘은 쌍둥이였으므로 서로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애쓰는 편이었다. 어쨌든 가족이니까.

‘란이가 도훈 오빠가 무척 맘에 들었나 보네. 평소 안 하던 부탁까지 다 하고.’

사실 다른 것은 공유해도 서로의 연애 문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던 두 사람이었기에 정란의 이번 부탁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것이었다. 두 사람의 생활 반경에서 한 남자를 두고 이번처럼 동선이 겹치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정희는 방금 전 헤어진 도훈을 떠올렸다.

‘···하긴. 대학교 와서 만난 다른 쌩양아치 같은 애보다야 훨씬 멀쩡한 사람 같긴 하더라만.’

도훈은 이성에 별 관심이 없는 자신에게도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키 크고 잘 생긴 것도 모자라 태영의 말로 학점도 과탑 수준에 조원들을 위한 희생정신까지 갖추었다.

‘흠. 나름 건실한 사람 같으니 정란이랑 잘되면 정란이도 정신 차릴지도 모르지. 쟤도 이제 남친 조금 그만 바꾸고 정착을 해야 하니까.’

마음을 굳힌 정희가 동생 정란에게 물었다.

"좋아, 그럼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언니가 오빠한테 소개팅 한 번 시켜준다고 해."

"소개팅을? 내가 누굴···. 설마."

"응. 적당히 친해지면 살짝 찔러보란 말이지. 내 동생이랑 정식으로 만나볼 생각 있냐면서."

"그게 무슨 말이야? 조모임때 계속 보는 데 난데없이 소개팅이라니?"

정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전혀 느낌이 다르지. 조모임은 과제 때문에 모이는 거잖아. 거기선 얌전히 있을 거란 말이야."

"근데?"

"언니는 딱 봐도 모범생이잖아. 그런 언니가 직접 친동생을 정식으로 소개시켜 준다고 해봐. 그럼 도훈 오빠도 신뢰감을 느끼지 않을까? 보통 자기 가족을 소개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 진짜 괜찮은 사람 아니면."

"아···. 그런 의미로?"

"응. 그러니까 언니가 먼저 도훈오빠랑 친해지란 말이지."

정희가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오랜만에 들른 사범대 도서관은 만석이었다.

임용이 몇 달 안 남은 4학년 및 N수생들은 잠을 쫓아가며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정이가 여기 어디 있으려나?’

체육교육과 4학년 수정이랑은 교생 실습 이후로 거의 보지 못했다. 나는 수정이 평소 앉는 자리로 이동했다. 예상대로 구석 자리에서 츄리닝을 입은 수정이 머리를 한데 묶고 인강을 듣고 있는게 보였다.

이어폰을 끼운 체 집중하는 모습에 말을 걸려다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아는 체했다가 방해 되려나?’

수업시간에 듣기론 현재의 임용제도는 2차에 걸쳐 이뤄진다. 1차로 필기시험을 본 뒤, 2차에 수업 시연 등의 실기 그리고 면접을 거치는 길고 긴 과정이다.

11월에 1차 시험을 보니 앞으로 남은 시간은 5개월 남짓. 당사자 입장에선 1년에 한 번뿐인 기회다 보니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고난의 행군일 수밖에 없다. 매일매일이 기말고사인 것이다.

‘에이 관두고. 괜히 열심히 하는 애한테 말 걸 필욘 없지. 나랑 말섞고 나면 집중력 흐트러 질 테니까.’

나는 그대로 사범대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열심히 공부하는 수정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혹시나 마주치게 될 학과 선후배들도 부담스러웠다.

‘아무래도 사범대 도서관은 피하는 게 좋겠다.’

나는 종합 도서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공에 상관없이 아무나 들르는 곳이라 아는 사람을 마주칠 확률이 낮았다. 칸막이 책상에 자리를 잡은 나는 오랜만에 정신을 집중하며 기말고사 대비 계획을 수립했다.

시험을 보는 과목 위주로 교수가 알려준 진도와 내용을 정리하고 앞으로 2주간의 스케쥴을 기획했다. 예전 같으면 20분이면 끝났을 일을 2시간을 낑낑대고서야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공부하려니까 머리가 완전히 굳어 버린 느낌이야.’

[그건 주인님이 환생하면서 빡 대가리의 저주를···.]

‘닥쳐. 속도가 느릴 뿐 지능엔 큰 문제없다고.’

[아니면 포인트를 구매해 지능을 올려시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포인트를?’

[예전에 말씀드린 똑똑해져라머리머리 열매가 있잖습니까? 2,000포인트를 투자하시면 지능을 10씩 올려주는.]

‘호오.’

로시의 제안에 구미가 당겼다.

< 804. 기말 시즌-4-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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