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3. 기말 시즌-3- >
***
"오빠, 근데 어디서 저 본 것 같지 않으세요?"
정란은 도훈이 자신의 실체를 눈치챘는지 한번 떠보았다.
"음, 언니 분이랑은 주말에 한 번 만났는데."
"정희 언니요?"
"네. 두 분이 똑같이 생기셔서 왠지 익숙하네요. 구면처럼."
도훈은 일단 정란의 의도대로 속아주기로 했다.
사실 이번 미션은 공략 순서가 핵심.
언니 먼저 동생 나중.
그리고 이어지는 쌍둥이 자매 덮밥까지.
순서를 바꿔서도 안 되고, 한 명을 공략하느라 나머지 한 명의 호감도를 떨어뜨려서도 안 된다.
‘가장 문제는 현재 정희보다 정란이 나한테 훨씬 호감을 보인다는 사실인데···.’
정란은 후순위 공략 대상이지만, 현재로선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었다. 도훈은 어떻게하면 정란의 유혹을 쳐내며, 정희의 호감을 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일단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선 쉽게 호감을 드러내선 안 돼. 차라리 기회를 엿보면서 각개격파하는 수밖에.’
다행히 이번 미션은 스킬과 아이템 제한이 없었다. 그 말은 적당한 타이밍만 나오면 얼마든지 자빠뜨릴 수 있다는 소리.
‘조별 과제를 핑계로 정희에게 먼저 따로 접근해야겠어. 정란이 몰래 말이지.’
도훈이 계획을 세우는 데 태영과 정희가 쟁반에 커피와 빵을 들고 왔다.
"와, 디저트까지 주문하셨네요? 오빠 센스 있다."
정란이 주문되어 나온 디저트를 보고 도훈에게 아부를 떨었다.
"커피만 먹으면 입이 심심할 것 같아서. 일단 다들 모였으니 조별 과제를 어떻게 나눌지부터 정해보죠."
도훈은 지난 주말 정희와 상의한 대로 각각의 역할을 분담했다. 하지만 문제는 갑자기 이탈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남게 된 부분을 어떻게 재할당하느냐의 문제였다.
정희가 총대를 멨다.
"이건 제가 할게요."
"이걸 혼자서 다?"
"에이, 그건 말이 안 되지. 다 같이 공평하게 나누면 모를까."
어느새 자연스레 말을 놓은 태영이 말했다. 다들 20살 새내기다 보니 금방 친해진 상황이었다.
"근데 과제 성격상 한사람이 다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서. 이걸 쪼개면 다시 합치는 게 더 어려울걸?"
"그런가?"
"그래도 한 명에게 다 부담시킬 순 없지.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떻게요, 오빠?"
잠자코 듣고 있던 도훈이 의견을 내놓았다.
"그 이름은 모르겠는데, 군대 입영하는 걔가 맡은 부분이 문제가 되는 거잖아. 쪼개기가 애매해서."
"그죠."
"그러니까 이걸 나누지 말고, 나눌 수 있는 성격의 과제를 다시 분배하고 그걸 한 사람이 통째로 맡는 거지."
"아!"
"과제를 바꾸자는 거죠?"
"응."
"역시 도훈이 형 똑똑하다니까?"
"오빠 똑똑해?"
정란이 호기심을 드러내자 태영이 푼수처럼 도훈을 추어올렸다.
"응, 우리과 성적 탑일걸 아마?"
"진짜?"
"와!"
"왜 그래, 갑자기. 아직 학기 끝나지도 않았구만."
"중간고사까지는 거의 탑 맞잖아요. 이 형 공부도 엄청 잘해."
태영은 평소 도훈을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여자들 앞에서 과도하게 그를 띄웠다.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고 운동도 짱이야. 울 학교 배구팀 선수기도 하고."
"아이고, 왜 그러냐 태영아. 형 후보다."
"솔직히 실력이 후보는 아니잖아요. 학년이 밀려서 그렇지. 배구부 주전들은 다들 3,4학년이거든."
"완전 엄친아네, 엄친아.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정말 대단하세요."
‘아, 또 저 자식 왜 쓸데없는 말을.’
[왜요? 주인님을 진심으로 존경해서 하는 말 같은데요.]
‘그렇긴 한데 너무 난데없잖아. 가만, 표정이 왜 저렇지?’
도훈이 가만 보니 태영이 뭔가를 요구하는 듯 몰래 윙크를 건네고 있었다. 마치 할 말이 있는데 주변 눈치를 보는 표정.
‘태영이 나한테 할 말이 있나 본데? 속마음을 읽어볼까?’
[마음의 소리 들려드릴까요?]
‘응. 속마음 들려줘.’
<아, 진짜 도훈이형 눈치도 없네. 이 정도의 띄워 줬으면 나한테도 답장을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아아! 기브엔 테이크구나.’
속마음으로 태영의 마음을 파악한 도훈은 내친김에 정희의 속마음도 읽었다. 마음의 소리는 활성화되어있는 3분 동안 반경 30m내의 사람들의 속마음을 청취하는 게 가능했다.
<도훈 오빠가 공부를 되게 잘하는 모양이구나. 잘 됐다. 조 발표 점수 받기 유리하겠어.
아쉽게도 정희의 감상은 딱 그것뿐이었다.
여전히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없었다.
이어서 도훈은 정란의 속마음도 읽었다.
<이얼, 얼굴도 잘생겼는데 공부까지 잘한다고? 의외로 범생이 같은 타입이네? 여자 경험 별로없는 쑥맥일지도?
3인 3색의 생각을 모두 읽은 도훈은 태영의 의도대로 답정너를 해주었다.
"왜 이러실까나, 우리 학교 연극부 차세대 간판 배우께서."
"누가요?"
"태영이가요?"
도훈이 너스레를 떨자 다들 호기심을 드러냈다. 태영은 지나친 띄워주기에 뻘쭘했지만, 어차피 확인도 안 될 거란 사실에 마구 질러댔다.
"에이, 아직은 조연이에요. 연극부 서열이 빡빡해서 2학년은 되야 주연 준다더라고요."
동방 딸잡이란 소문 덕에 최근 연극 동아리 근처론 얼씬도 안 하는 태영이었지만, 뻔뻔하게 도훈의 말을 받아쳤다.
"오, 연극 하나 보구나. 멋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띄워주기를 거듭하던 태영은 살짝 민망했던지 화제를 바꾸었다.
"두 사람은 뭐 동아리 같은 거 하는 거 없어?"
정란은 놀기에 바빴으므로 학교생활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정반대 성향인 정희는 관심을 보이며 대답했다.
"난 봉사동아리."
"봉사 동아리?"
"응. 주말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 같은 데서···."
"와, 정희 엄청 착하구나."
"아니야. 그냥···. 고등학교 때부터 쭉 해오던 거라."
태영은 이어 정란에게 물었다.
"너도 봉사동아리야?"
"안 하는데? 그거 꼭 해야 해?"
"아, 아니 그냥. 혹시나 쌍둥이니까 같은 취향인가 싶어서."
정란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나 바빠서 동아리 할 시간이 없네."
"아아, 남친 사귄다 그랬나?"
"내가? 내가 언제?"
도훈을 의식한 정란이 정색하며 따졌다.
태영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아니. 저번 주 수업할 때 남친 만나러 간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거 같아서."
정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니가 잘못 들었겠지. 나 남친 없어."
"아, 아니 분명히···."
"아,아, 썸남 말이야?"
"썸남?"
"어. 잠깐 썸 타던 남자 있었는데, 그냥 안 만나기로 했어. 약속을 잘 안 지키더라고."
정란의 대답을 들은 태영이 생각했다.
‘이상하다. 분명히 그때 남친 만나러 간다고 조모임이 일찍 빠져나갔던 거 같은데, 그게 썸남이었다고?’
반면 대답을 둘러댄 정란 역시 속으로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에이씨, 오징어처럼 생긴 찐따 새끼가 하필 도훈 오빠 앞에서 전 남친 얘기를 꺼내고 지랄이야. 어제 다 끝난 일을.’
정란은 자신의 화려한 남성 편력이 밝혀지는 게 창피했다. 그 때문에 조모임을 가기 전부터 언니인 정희에게 남친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태영이 느닷없이 전 남친 얘기를 꺼내자 똥씹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입단속이 실패한 것
이다.
‘하여간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새끼네, 아오! 도훈 오빠 후배만 아니었으면 말도 섞기 싫게 생겼구만.’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도훈이 잠시 휴식을 요청했다.
"미안한데, 나 잠시 담배 좀 피우고 와도 될까?"
"그러세요."
"형, 저도 같이."
도훈은 태영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까페 내부에 흡연실이 없어 바깥에 나가서 피워야 하는 구조였다.
"넌 담배도 안 피우면서 왜 따라 왔냐?"
도훈이 넌지시 묻자 태영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같이 있다간 한 대 맞을 것 같더라고요."
"응? 누가 널 때리는데?"
"그 동생 눈빛 못 봤어요? 왜, 치마 입고 온 애."
"정란이, 왜?"
"아니 분명 지입으로 접때 남친이라고 말했거든요. 근데 갑자기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네요. 거짓말쟁이 같으니."
"헤어지고 나니 괜히 민망해서 그런 거겠지."
"그런가요?"
"왜 그럴 때 있잖아. 좋아서 잠깐 사귀었는데, 한 두 달도 못가서 헤어지는 상황. 괜히 사귀었다고 하면 창피하니까 썸탔다고 우기는 거겠지."
태영이 그제야 말귀를 알아먹었다.
"아하! 제가 그럼 정란이를 곤란하게 한 거 군요."
"뭐, 어쨌든 당사자에겐 찝찝한 기억일 테니 들추지 않는 게 낫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 줘."
"아, 근데 형 간판 배우는 또 뭐예요?"
"왜? 그런 거 바란 거 아니었어?"
"너무 과장 같잖아요. 형은 진짠데."
"뭔 상관? 어차피 확인해 볼 것도 아니고."
"암튼 형. 온 김에 작전이나 세우죠."
"무슨 작전?"
도훈은 이중스파이가 된 기분으로 태영의 작전을 경청했다. 태영은 도훈이 라이벌이란 사실도 모른 체 입을 열었다.
"형도 눈치채셨겠지만, 솔직히 정란이보다 정희가 훨씬 괜찮잖아요. 저한테 반응도 좋고."
[대체 무슨 반응을 말하는 걸까요?]
‘글쎄, 혹시 태영이가 정희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희양은 주인님에게조차 흥미를 보이지 않는 목석같은 사람인데도요?]
‘그러니까 눈치가 없다는 거야. 그냥 맞장구 좀 쳐주고 고분고분 대답해 준다고 자기한테 관심 있는 줄 알잖아. 자뻑기가 좀 있네.’
[아하, 저래서 지금까지···.]
"왜? 난 둘 다 똑같이 생겨서 별 차이를 모르겠던데?"
"아니에요. 형은 잘 모르시겠지만, 정란이 걔 완전 싸가지 밥 말어 먹은 애에요. 지금은 형 눈치 보는 것 같은데, 저번에 수업 때 저한테 하는 태도 보셨으면 진짜 기가 막힐걸요?"
"그래?"
"암튼 저 정희랑 잘되게 밀어주세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밀어주곤 싶은데 그럴 타이밍이 나와야 말이지."
"음,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뭘?"
"일단 제 생각에 적당히 술이 좀 들어가야 더 친해질 것 같단 말이죠."
"술이라고?"
"네. 이렇게 대낮에 까페에서 커피만 마셔가지곤 빠르게 친해지기 힘들 것 같아요. 정희가 너무 순진한 편이라."
"흐음. 조모임 하는데 어떻게 술을 마신다?"
"제가 아는 까페가 하나 있어요. 낮에는 커피를 팔고 저녁에는 술도 파는."
"그런데도 있어?"
"네. 퓨전같은 거죠. 사실 술장사가 주력인데, 낮에 술 손님이 없으니까 커피도 파는."
"그래서?"
"일단 오늘 적당히 과제 나눠서 헤어지고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는 거예요. 오후 쯤."
"그 까페에서?"
"네. 그러다가 출출하니 저녁 먹는 셈 치고 반주 좀 걸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술 먹는 분위기로 가지 않을까요?"
"술을 먹여서 꼬셔 보겠다?"
"형이 도와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도훈은 곰곰이 생각했다.
‘이건 죽쒀서 나한테 몰아주는 걸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어쨌든 자신도 좆병신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선 도리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 유도해 보자."
"고마워요 형."
"아니야. 그리고 잘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고."
"아니에요. 저 느낌 왔어요."
"무슨 느낌?"
"정희 걔, 저한테 관심있는 거 같더라고요."
"······."
"왜, 아까 주문했던 커피 들고 오는데 막 자기가 대신 들겠다고 그러는 거에요."
"···그랬어?"
"네. 관심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닐까요?"
도훈은 태영의 천진한 모습을 보며 속을 끌끌 혀를 찼다.
‘허이구, 진짜. 저러니 여친을 못 사귀지.’
[그러니까요.]
‘눈은 쓸데없는 높은 게, 눈치는 지지리도 없으니. 주말마다 봉사 활동 자청할 정도로 착한 정희가 단순히 호의를 발휘한 걸 가지고 그렇게 해석하나?’
[저도 할 말이 없네요.]
두 사람이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 안에서 정란과 정희가 과제를 두고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란아. 이번엔 꼭 네 몫은 네가 다 하는 거다? 우리 한 사람 빠져가지고 내가 너꺼 봐줄 시간 없어."
"알았어. 하면 되지."
"말만 그렇게 하고 또 저번처럼 발표 전날까지 미루지 말고. 그때도 내가 날새서 도와줬잖아."
"알았다니까. 진짜 생색은."
"뭐?"
동생에게 엄격한 정희가 눈을 부라리자 정란이 대번에 꼬리를 내렸다.
"아니야. 열심히 할게."
"그래. 근데 두 사람은 담배를 왜 저렇게 오래 피운데?"
"작당 모의라도 하나보지."
"작당 모의?"
"눈치 못 챘어? 태영이라는 애 언니한테 엄청 잘 보이려 애쓰잖아."
"태영이가?"
"하-. 진짜. 무슨 연애를 해봤어야···. 딱 봐도 뻔히 보이더만."
"무슨 소리야. 그냥 누구에게나 친절한 거겠지."
"혹시 언니는 도훈 오빠한테 관심 있어?"
"내가? 왜?"
정란은 정희가 혹시 라이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 번더 확인했다.
"아니, 그냥 잘생겼잖아. 공부도 잘한다고 그러고. 저런 남자 흔치 않은데."
"난 남자는 별로···. 너 설마."
"내가 뭐?"
"남친이랑 어제 헤어져 놓고 금세 다른 남자 찾는 거야?"
"걔 얘긴 꺼내지도 마. 완전 개싸가지니까."
"왜? 잘 끝난 거 아니었어?"
"완전 개새끼야. 내가 더러워서 말 안하려고 했는데 나보고 뭐라는 줄 알아?"
"뭐?"
"어젯밤에 놀이터로 불러놓고 그러더라? 헤어져 줄 순 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자주면 안 되겠냐고."
"무, 무슨 소리야 그게!"
순진한 정희가 충격을 먹을 듯 얼굴이 새빨게 졌다.
"그, 그래서? 설마 너."
"내가 미쳤어? 확 뺨을 후려 갈겼지. 하여간 쓰레기 같은 새끼였어."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중 담배를 도훈과 태영이 담배를 태우고 돌아왔다.
< 803. 기말 시즌-3-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