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2. 기말 시즌-2- >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하다니까요? 누군 좆빠지게 과제 준비하는데, 여친이랑 놀러나 가고."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어차피 학점도 이미 결정된 모양이더만."
"부러우니까 글쵸."
태영이 볼멘소리를 했다.
녀석에겐 예쁜 여친이 부럽기 짝이 없었나 보다.
‘쯧쯧 불쌍한 놈 같으니. 연애를 못하니 쾌활하던 성격도 점점 편협해져 가는 것 같아서 안쓰럽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 그러십니까?]
‘내가 뭘?’
[솔직히 태영군이 점찍은 여자들마다 주인님이 낼름 가로채는 바람에···.]
‘말은 똑바로 해야지. 누가 들음 내가 태영이 여친이라도 뺏은 줄 알겠네. 나와 태영이는 정당한 경쟁을 한 거야. 태영이가 그냥 선택을 못 받은 거고. 그리고 막말로, 내가 아니었더라도 그 여자들이 태영이를 골랐을 거란 보장도 없잖아?’
[음···. 그래도 태영군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대학교 한 학기가 다 끝나가는데 아직까지 솔로라니요. 그뿐입니까? 동방 딸잡이라는 수치스러운 꼬리표까지 붙었죠.]
그 말은 들으니 살짝 연민이 느껴졌다. 뭐랄까, 이정우로 살았을 때 대학 내내 여자랑 말도 못 섞고 지나쳐버린 전생의 대학 시절이 오버랩 되었달까?
‘듣고 보니 불쌍하긴 하네. 태영이가 그렇게 나쁜 아이도 아닌데 말이야. 과거의 이정우보다는 훨씬 생김새도 낫고.’
사실 태영의 문제는 명확하다.
바로 눈이 너무 높다는 것.
녀석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였던 여자들의 면면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처음 새터에 가선 정음을 노렸다. 어림없는 수작이었다.
다음엔 일본인 교환 학생을 꼬시겠다며 로쿄에게 찍쩝댔다. 반 스토킹처럼 달라붙었으나 결국 료코는 내가 먼저 자빠뜨렸다. 비교적 최근엔 법대생 설수지와 엮어 보려다 동방 딸잡이의 전설만 남기고 물을 먹었다.
나열한 사람들만 봐도 얼추 녀석의 취향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미인을 너무 밝힌다. 그게 실패의 원인이다.
"너도 여친 사귀지 그래? 학기도 끝나가는데."
"제가 형 얼굴이었으면 진즉 꼬셨죠."
"인마. 여자를 얼굴로만 꼬시냐?"
"형은 몸매도 좋잖아요."
"체육과 평균이지."
"에이, 겸손하시긴. 제가 샤워할 때 다 봤는데. 그리고 공부까지 잘하시고."
"왜케 띄우냐. 부담스럽게."
"완전 엄친아네 도훈이 형. 얼굴 잘생겨, 몸도 좋아, 운동 잘해. 공부까지. 와···. 제가 여자래도 반할만 하네요."
태영이 진심 어린 눈으로 찬사를 보내자 괜히 머쓱했다.
"뭐야. 난 남자는 안 받아."
"저도 여자 좋아하거든요."
"이런건 어때?"
내가 제안했다.
"어떤거요?"
"물론 니가 좋아하는 여자를 꼬시는 게 베스트긴 한데, 아니면 너를 좋아해주는 여자를 먼저 만나보는 거지."
"저를 좋아해주는 여자요?"
주제에 맞게 눈을 낮추라는 얘기를 빙빙 돌려 말했다.
"그래. 그럼 훨씬 사귀기 쉬울 거 아냐."
"태어나긴 했을까요?"
"응?"
"제 여친될 사람이요."
"아니 무슨···."
"없어요, 진짜. 1학년끼리 술 먹을 때 인기투표 비스무리하게 했는데 저 한표도 못 받았아요."
"······."
안습이다.
눈가가 따가운 건, 먼지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불쌍한 녀석 같으니.
갑자기 태영이 화제를 돌렸다.
"과에서 인기 없다고 여친 못 사귀는 거 아니잖아요."
"그치?"
"형. 저희 조 쌍둥이 말이에요."
"응."
"걔네들 예쁘지 않아요? 저번에 조모임 때문에 만나보셨다면서요. 어땠어요?"
"예쁘긴 하더라. 근데 걔들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지 않았냐? 막 싸가지 없다면서."
"그건 동생이죠. 정란인가 명란젓인가 하는."
"명란젓은 너무 했네."
"암튼 정흰가 하는 애도 특이하긴 한데, 동생보단 훨 착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형이 좀 도와주시면 안돼요?"
"내가? 어떻게?"
"원래 스터디하다가 섹터디한다고 모여서 발표 준비하고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썸이 생길 거 아니에요."
태영은 뭔가 큰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눈빛이 몽롱해졌다.
장담컨데, 녀석은 이미 정희와 폭풍섹스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형이 밀어주기만 하면 없던 감정도 생기지 않을까요? 원래 자주 보면 정들고, 정들면 사귀고 막 그런 거잖아요."
"태영아···."
‘넌 왜 골라도 내가 공략할 대상만 고르는 거냐. 어휴, 이 안타까운 놈.’
"저 한번만 도와주심 안돼요?"
"도와야 줄 수 있는데 어떻게···."
"과제 핑계로 계속 보자고 할게요. 어차피 해병대 그 새끼도 나갔겠다 형만 동의하면 과반수 잖아요."
"너 과반수가 뭔 줄 모르냐? 절반이 넘어야 과반수지."
"어쨌든 오대 오잖아요. 학점 잘 받자고 자주 보자고 하는데 싫어할 사람 있겠어요? 어차피 서로 좋자고 하는 건데."
‘음···. 이러면 또 태영이만 중간에 새 될텐데.’
예전 같으면 알아서 밑밥을 깔아준다니 옳거니 하고 받았겠지만, 왠지 결과가 뻔히 보이는 상황이라 한번 쯤 만류했다.
"그래도 일주일 조모임 하면서 보는 것 가지고 막 사귀긴 쉽지 않을 텐데···. 차라리 동기들 노려봐."
"동기 누구요?"
"음···."
태영의 동기는 하필 체육교육과 1학년.
8선녀라 불리는 미녀군단을 보유한 사범대 최강의 꽃밭이다.
‘음. 예쁜이들은 좀 어려울 것 같고···. 제일 못 생긴애를 추천해볼까?’
"걔도 괜찮지 않냐? 희주."
"희주요? 양희주?"
태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자 내가 설득했다.
"아니 얼굴은 좀 평범해도···."
‘사실 빻았지만.’
"그럭저럭 봐줄만 하지 않아? 성격은 진짜 화통하고."
태영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형 모르시는 구나."
"내가 뭘?"
"혹시 최근에 희주 본 적 있으세요?"
최근?
언제였더라?
"얼마 안 됐을 건데···. 그건 왜?"
"희주 걔 요새 완전 용됐잖아요."
"뭐?"
갑자기 헤머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요새 완전 미모가 물이 올랐다고요. 성형이라도 했는지 얼굴 엄청 예뻐졌잖아요."
"뭐라고? 그 빻···."
나도 모르게 빻녀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하다가 후배 앞에서 동기를 까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급하게 말을 돌렸다.
"빵 먹을래?"
"예?"
"아니 배고파서."
"방금 점심···."
"디저트로 커피랑 빵이랑 해서 좀 먹게. 내가 사줄게."
"아이고, 맨날 형이 사주면 저야 감사히 먹겠습니다. 제가 주문하고 올게요."
"그래. 잠깐, 그냥 시키는 김에 쌍둥이 것도 같이 시키자. 근데 애들 왜 이렇게 안 와?"
"단톡방 보니까 점심 방금 먹고 오는 중이래요."
계산을 해주려는데 주머니에 지갑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차! 차에 놓고 와 버렸네.’
그러나 방금 쏜다고 해놓고 지갑 핑계를 대려니 너무 창피했다. 어쩔 수 없이 뒷주머니에 들어있던 신용카드를 꺼냈다.
"이걸로 계산해."
"역시 하늘 같은 선배님 이십니다!"
태영이 벌떡 일어나더니 90도로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이럴때만 선배지."
"아, 아니에요. 제가 형을 얼마나 존경하는데요."
"알았으니까 주문이나 하고 와."
"넵!"
[설마 그 카드···.]
‘어. 어제 최마담에게 받은 거. 하필 지갑을 차에 두고 왔네.’
[책 잡히기 싫다고 안 쓰신다지 않았습니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뭐하면 그냥 갚아줘 버리면 그만이야. 큰돈도 아니고.’
[하긴.]
‘그나저나 희주가 용 됐다니, 정말일까?’
[어쩌면 마법의 정액 때문이 아닐까요?]
‘나도 그생각 했어. 저번에 한 번 발라준 것 같긴 한데···.’
나는 태영이 카운터에서 주문하는 동안 폰을 꺼냈다.
깨톡 프로필을 뒤지면 최근 근황이 나올 것 같았다.
‘양희주, 양희주··· 어. 찾았다.’
다행이 프로필에 최근에 찍어 올린 사진이 보였다.
[오!]
‘우아, 진짜 예뻐졌구나?’
보정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희주가 달라졌다.
물론 태영이 말한 것처럼 용된 수준은 아니었지만, 빻녀에서 흔녀 정도로 진화한 느낌이었다. 다만 태영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던 건, 과거와의 간극이 그만큼 깊었던 탓이리라.
‘이야, 희주 이제 무시하면 안 되겠는데?’
[마법의 정액이 정말 마법같은 효과를 발휘했군요.]
그사이 주문을 마친 태영이 주문벨을 들고 왔다.
"형, 잘 먹을게요."
"그래."
"근데 아까 뭔 얘기하다 말았죠?"
"희주?"
"아 맞다. 희주 걔 완전 예뻐졌잖아요."
"그 정도로?"
"말도 마요. 요새 완전 어깨 뽕이 턱 밑까지 올라갔잖아요. 사실 희주가 은근 몸매가 좋은 편이잖아요. 옷빨도 잘 받고."
‘난 벗겨봤으니까, 잘 알지.’
"근데 얼굴까지 예뻐지니까 저희 동기들 사이에서 엄청 화제에요. 고친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죠."
"성형 말이야?"
"근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성형했음 학교를 휴학하거나 안 나왔겠죠. 하루 이틀만에 부기가 빠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화장이 좀 달라진 것 같더라고요. 원래 여자들은 조금만 꾸며도 예뻐보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진실을 알면서도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갔다. 또 동기들이 희주의 달라진 생김새로 왈가왈부 하는 거 보니 너무 빨리 얼굴을 바꿔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능력을 너무 남발해도 곤란한 일이 생기겠군.’
[그렇겠네요. 성형설까지 도는 걸 보니.]
‘아니다. 차라리 그게 더 그럴 듯 하네.’
[뭐요? 성형이요?]
‘그래. 갑자기 사람 얼굴이 바뀌어 버리는데 그게 제일 설득력 있지. 봐서 방학 즈음해서 몇 번 더 작업을 해주면 나중에 2학기 개학할 때 성형받고 왔다고 알아서 넘어가지 않을까?’
[듣고 보니 그편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암튼 도훈이형 이번에 저 한번만 꼭 밀어주세요. 형이 조금만 양념 쳐주면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그래. 뭐 도와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어휴, 이 불쌍한 놈···. 골라도 하필 쌍둥이를.’
"어, 양반은 아닌가 봐요. 지금 왔네요, 쌍둥이."
출입문 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던 태영이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여기요."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아보자 눈에 확 띄는 여대생 두명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입은 차림새로 보아 흰 반 팔에 몸에 붙은 청바지를 입은 쪽이 정숙한 정희, 그리고 짧은 핫팬트에 요란한 프린트의 나시티를 걸친 여자가 요망한 정란인 듯 했다.
"다들 와 있었네."
"죄송해요.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와서. 일찍 오셨네요."
정희로 보이는 단정한 차림의 여자가 꾸벅 사과했다.
그에 반해 정란은 껌을 씹으며 나를 향해 살짝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하여간 저 싸가지. 늦은 주제에 껌이나 짝짝 씹고.’
그때 일어서서 반기던 태영이 갑자기 의자를 뒤로 빼주며 매너를 발휘했다.
"앉으세요."
"앗, 감사합니다."
"됐어요. 내가 할게요."
두 사람의 반응은 극명히 달랐는데, 정희는 태영이 빼준 의자에 감사를 표하며 앉은 반면 정란은 자기 차례가 되자 귀찮다는 듯 스스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호의를 거절당한 태영이 머쓱해 하며 말했다.
"저희 조원 다 왔네요."
"한 분 안 오시지 않았나요? 그 경영학과 남자분."
"아···. 실은 그게."
태영이 앞서 왔다 간 남학생의 사정을 요약해 전달했다.
"암튼 그래서 저희 조는 네명 뿐이에요."
"이런···. 어쩔 수 없네요."
"오빠,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보네요?"
태영과 정희가 얘기를 나누는데 불쑥 정란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조모임보단 잿밥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아, 네. 체육과 이도훈입니다. 조편성 할때는 사정이 있어서 결석했어요."
"말 편하게 하세요. 듣기론 저희보다 두 학번 위 시라던데."
정란은 지난 주말에 한 번 봤으면서도 처음 보는 것처럼 연기했다. 내가 자신을 정희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될까요?"
나는 일부러 정희를 보며 허락을 구했다.
정희도 나와 구면인 상태였으므로 흔쾌히 대답했다.
"네, 그러세요."
"참, 도훈이 형이 미리 커피 시켜놨어요. 둘다 아아 괜찮죠?"
"어머. 저희건 저희가 사도 되는데···. 감사해요."
"오빠 돈 많나 보네?"
정란은 여전히 껄렁껄렁한 태도였다. 보다못한 언니 정희가 주의를 주었다.
"란아. 말 좀 예쁘게."
"알았어."
그래도 언니라고 정희의 지적에는 꼼짝 못 하는 모습이었다.
"비싼 것 아니니까 부담갖지 말고 드세요."
"그래도 이러면 만날 때마다 죄송할 것 같아요. 다음엔 더치페이로 해요. 회비를 걷던지."
태영이 곧바로 동의했다.
"좋은 생각이네요. 앞으로 볼일도 많을 것 같은데. 그죠, 도훈이 형?"
태영이 시그널을 보냈다.
간절한 녀석이 부탁이 떠올라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다른 조에 비해서 숫자도 적으니 나눌 분량도 많을 거고."
태영이 몰래 엄지를 척 올리는데 진동벨이 울렸다.
주문한 음식이 나온 것이다.
"아, 제가 다녀올게요. 잠시만요."
이번 컨셉을 매너남으로 잡았는지 쏜살같이 일어났다. 처음 볼 때 의자를 빼주는 모습 역시 계산된 플레이 같았다.
‘하아. 저렇게 열심히면 내가 너무 미안해지는데.’
"같이 가요."
정희가 가만있지 못하고 태영을 뒤따라 움직였다. 갑자기 둘만 남게 되자 아까부터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던 정란이 말을 걸어왔다.
"오빠, 근데 어디서 저 본 것 같지 않으세요?"
< 802. 기말 시즌-2-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