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807화 (775/2,000)

< 789.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39- >

"맥주?"

"이 상황에?"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다들 도훈의 제안이 솔깃하긴 했지만, 대체로 뜨악 하는 반응이었다. 아무리 막장 인생이라도 직장 동료가 응급실에 실려 나간 마당에 즐기고 노는 것은 도의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단둘이 따로 보자고 제안을 했다면 모를까, 막상 다른 동료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라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훈이 이들의 부담을 눈치채고 계속 꼬드겼다.

"아, 이거 영업 아니구요. 그래도 오늘 놀자고 나오셨는데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보내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에이, 그래도 사람이 쓰러졌는데."

"난 좀 그래."

다소 누그러들긴 했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기엔 오늘 밤 걸린 미션이 너무나 아쉬운 도훈이었다.

‘어쩔 수 없다. 내 장기를 써야지.’

[장기요?]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뭐냐?’

[섹스?]

‘아니. 거짓말.’

"실은 동탁이형 부탁이에요."

"동탁 오빠가?"

"오빠가 살아있어?"

"야, 무슨 졸도 한 번 했다고 사람이 죽냐?"

"그런가?"

"탁이 형이 최근 무리를 했나 보더라고요. 술도 많이 마시고 잠도 몇 시간 못 자고. 아시잖아요, 한방에 확 몰려올 때."

다들 술 마시고 날 새는 게 직업이다 보니 도훈의 말을 곧바로 수긍했다.

"그렇지."

"꼭 단골들은 한 번에 오더라니까?"

"그래서 동탁 오빠는 깨어났데?"

"네. 피로 누적으로 잠깐 쓰러진 건데, 발견한 웨이터가 큰 일 난 줄 알고 119에 신고했다잖아요. 그래도 형은 진짜 프로에요. 구급차에서 눈 뜨자마자 저한테 전화해서 누님들 좀 챙겨달라고 부탁하더라니까요?"

"오빠가 그랬어?"

"미안하긴 했나보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였어요. 오해는 마시고요. 설마 제가 동료가 쓰러졌는데 작업이나 치는 양심 없는 놈이겠어요? 술도 제가 쏠게요. 탁이 형이 나중에 계산해 준다고 저보고 사래요. 그래도 자기 얼굴보고 찾아주신 손님들인데 그냥 보내면 안된다면서."

도훈이 청산유수로 내뱉는 말에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일단 그들은 동탁과 도훈이 어떤 사인지 정확히 몰랐다. 또한 도훈이 밖으로 나갔다가 통화한 것처럼 꾸몄으므로, 실제로 연결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유일하게 동탁과 연락이 되는 장미마저 지금은 도훈의 편.

도훈은 절대 들킬 수 없는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음, 그렇게까지 부탁을 했다면야···."

"사실 나도 좀 아쉽긴 했어요. 술은 안마신 것도 아니고 먹다 말고 갑자기 쫑나버리니까."

"그럼 가볍게 한 잔 더 할까?"

동탁의 이름을 팔아 선동에 성공한 도훈이 속으로 씩 웃었다.

‘기절한 동탁도 이럴 땐 쓸모가 있구나.’

[양심 어디?]

‘뭐 인마. 그래도 립밤도 안 바르고 멋지게 속이지 않았어?’

[정말 주인님은 타고난 사기꾼입니다.]

‘사기도 머리가 좋아야 치는 거지.’

차키를 든 윤솔이 말했다.

"근데 어디로 가지? 이 시간에도 문 연 대가 있나?"

시각은 새벽 1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2차 입성이라도 많이 늦은 시간. 대부분 호프집은 문을 닫았을 것이다. 늦게까지 여는 곳이라도 마감으로 얼마 못가 쫓겨날 판이었다.

"그러게. 호프집은 그리 오래 안 할 텐데."

"혹시 늦게까지 여는데가 있을까?"

다들 고민하는데 여름이 제안했다.

"우리 그냥 모텔 가서 먹을까요?"

"모텔을?"

"시간도 애매하고, 어차피 맥주 마실거면 편의점에서 대충 사가도 되잖아요. 피곤하면 누울수도 있고."

"그건 그런데···. 남자 하나에 여자 셋이라."

"방이야 두 개 잡으면 되죠."

갑자기 호프집에서 모텔로 장소가 바뀌자 도훈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이쓰다.’

[좋은 겁니까?]

‘당연하지. 어차피 호프집은 술 취하게 만들기 위한 전초전이었단 말이야. 기회 봐서 입성하려고 했는데 시작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는 셈이랄까?’

[과연 기회가 있을까요?]

‘어떻게든 만들어야지.’

"정우 괜찮겠어?"

"네, 뭐. 설마 셋이서 저 잡아 먹을 건 아니잖아요."

"풉! 우리가 무슨 식인종이야?"

여름이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녀가 모텔을 제안한 것은 나름의 속셈이 있어서였다.

‘네가 날 깠다 이거지? 내가 언니 보다 훨씬 매력있는 여자라는 걸 보여주고 말겠어.’

"장미 언니는요?"

윤솔이 이번엔 장미의 의사를 물었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다 보니 그녀의 결정도 중요했다.

하지만 장미는 이미 도훈의 실체를 알고 있는 상황.

그녀 역시 속으로 딴 생각을 품었다.

‘방을 두 개 잡으면, 적당히 취하게 만든 다음에 도훈이랑 둘이 만날 수 있겠다. 어린 것들 술로 보내는 건 내 전공이지.’

장미는 관록에 맞게 술이 센 편이었다.

업소를 전전한 여자 중에 말술이 없진 않지만, 그중에서도 알아주는 주당. 함께 일한 동료들인 만큼 두 사람의 주량은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여름인 술이 쎈 편이지만, 페이스 조절을 못 해. 특히 잔기술이 없어서 주는 데로 홀딱홀딱 마시다 보니 금방 취해버지지.’

장미는 이번엔 윤솔을 응시했다.

‘솔이는 뭐. 크크, 말할 것도 없지. 난 쟤가 왜 술 잘 안마시는 줄 알거든.’

윤솔은 타고나길 술이 약했다. 오죽하면 소주를 반병만 넘겨도 실신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유흥업계에서 버틸 수 있었던건 그녀에게 술을 먹이기가 쉬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도도한지 손님들이 애원하고 사정을 해도 입만 축이고 절대 잔을 비우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도도함 마저 자신의 컨셉으로 활용했기에, 나중에는 다들 포기하는 수준이었다.

‘모텔 방 같은 데선 아무리 빼려고 해도 먹을 수 밖에 없을 걸? 어차피 장사하러 온 것도 아니고, 취하면 쓰러져 잘 침대도 있으니까 말이야.’

장미마저 수긍하자 윤솔도 승낙했다.

"좋아. 그럼 차에 타. 가까운 모텔 찾아보자."

다들 마찬가지만, 윤솔도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도훈과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중단된 게 아쉬웠던 것이다.

‘흥미로운 아이야. 좀 더 지켜봐야겠어. 정말 마음에 들면 뭐, 하룻밤 놀아 줄 수도 있지.’

사실 오늘 밤 출정에서 가장 질펀하게 놀고 싶었던 사람은 다름아닌 윤솔이었다. 일 때문에 마음에도 안 드는 남자들과 밤새 술자리에 앉아, 치근덕거리는 작업을 매번 쳐내는 것은 고강도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모처럼 맘먹고 놀러 온 날, 시원하게 풀고 싶었다.

다들 마음속에 음흉한 계획을 품고 모텔로 향했다. 도훈은 이동 중에 현성에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

-정우 : 형, 죄송한데 내일 일이 있어서 먼저 퇴근해 볼게요.

-현성 : 그러냐? 나도 오늘은 일찍 접을란다. 탁이형 쓰러졌다니까 영 기분이 그렇네.

-정우 : 사장님한텐 적당히 잘 둘러대 주세요.

-현성 : 알았어. 그리고 최마담한테는 그렇게 눈치 볼 거 없어. 어차피 너 다음주 출근할 땐 없을 테니까.

-정우 : 그렇겠네요. 암튼, 형 쉬세요. 인사 못드려서 죄송해요.

-현성 : 어 그래. 너도 많이 놀랐겠다. 쉬어.

‘놀라긴 개뿔.’

도훈이 폰을 접는데 옆에 앉은 여름이 폰을 힐끔 거리더니 물었다.

"누구야, 이 시간에 여친?"

여친이라는 말에 운전을 하던 윤솔과 보조석에 앉은 장미도 귀를 쫑긋했다.

"여친 아닌데."

"거짓말하긴. 한참 주고받는 거 다 봤는데. 왜, 있을 수도 있지. 이런 일 하면 애인 사귀면 안 되나?"

"진짜 애인이야?"

장미도 호기심을 보였다.

"진짜 아니에요. 현성이 형한테 먼저 간다고 연락한 거에요."

"현성이? 아까 그 귀엽게 생긴애?"

"네."

"아, 걔도 같이 갈 걸 그랬나?"

"그러게."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굳이 차를 돌리자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에게 호감이 있던 여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저기 가보자. 시설 좋아보이네."

마침 모텔에 도착한 일행이 주차장으로 차를 넣으려고 할 때였다. 도훈과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던 여름이 말했다.

"참, 우리 술 사가야 되잖아. 나랑 정우랑 여기서 내려줘. 근처 편의점 다녀올게."

"그래?"

윤솔은 운전 중이었고, 맥주와 안주를 사는데 굳이 셋이 이동할 필요까진 없었기 때문에 장미도 나설 수 없었다. 다만 둘 다 속으로 여름의 꿍꿍이를 의심할 뿐이었다.

‘저년 저거 노렸네. 아까부터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더니.’

‘설마 기둥이가 여름이한테 넘어가진 않겠지?’

둘 다 속으로 불안해하면서도 초조한 기색을 내보이진 않았다. 한 남자를 두고 텐프로 씩이나 되는 여자들이 질투를 보인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 그럼 내려서 사와. 톡으로 방 번호 알려줄게."

"아니야. 하나만 잡아. 우리가 커플처럼 들어갈 테니까. 모텔은 혼숙 금지잖아."

‘이 년이 진짜?’

‘하, 여름이 속 다 보이네.’

둘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선수를 친 여름에게 주도권을 뺏기고 말았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을 향해 장미가 당부했다.

"딴 데 세지 말고 얼른 와."

"알았어요."

"아, 그리고 이거 받아가."

장미가 차량 윈도우 너머로 카드를 하나 건넸다.

"마시던 술도 계산 안했는데 괜히 정우 돈 쓰게 하지 말고 내 카드로 사."

장미가 선심을 썼으나 여름은 단박에 거절했다.

"괜찮아요. 저도 돈 잘 버니까. 제가 낼게요."

‘어디서 멋진 척이야? 가게에서 매상 젤 높은 게 난데.’

"굳이 그러겠다면 뭐."

뻘쭘해하는 장미를 두고 여름과 도훈이 편의점으로 이동했다. 여름은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도훈에게 쫑알댔다.

"참, 나 우리 가게 에이스야."

"에이스?"

"응. 장미 언니가 연장자라서 내려고 했나본데, 사실 내가 제일 잘나가거든."

"아, 그렇구나."

도훈이 속으로 생각했다.

‘뭐지? 자기과시하는 건가?’

[왠지 주인님께 매력 어필을 하는 것 같은데요?]

‘확실히 자존심을 한 번 건드려 놓으니까 알아서 달라붙는구나.’

"아까 그거 어떻게 생각해?"

뜬금없는 질문에 도훈이 당황하자 여름이 부연했다.

"아니, 이런 일 하면서 애인 사귀는 거 말이야."

"아···. 글쎄. 아직 그런 생각은 아직 안해봤는데."

"난 사귈 수도 있다고 봐."

"그래?"

"응. 다른 언니들 보면 쉬는 날 따로 애인 만나서 놀더라고. 솔직히 애인 있으면 호빠 같은 데 찾아갈 필요도 없잖아."

"그렇긴 하지."

"왜? 넌 업소 여자는 별로?"

"무슨 일을 하건 열심히 사는 사람이면 상관없어."

도훈은 일부러 여름의 비위를 맞추었다.

대학생 신분의 그로서는, 굳이 사귄다면 업소 여자를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속마음을 말해선 안될 것 같았다.

"그치? 나도 그런 생각해. 막말로 돈만 잘 벌면 더한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술마시고 몸파는 일보다 더한 일이 대체 뭘까?’

[여름양은 참 독특한 것 같습니다.]

‘얼굴이 예쁘니까 주위 눈치를 안 보는 거지. 화법이 독특하긴 하네. 뜬금없이 치고 들어오질 않나.’

[정황상 주인님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요?]

‘모르겠어. 진심으로 저러는 건지, 아니면 아까 윤솔한테 밀려서 까인 게 자존심이 상해 저러는 건지.’

"너도 솔직히 돈 벌려고 하는 일이잖아."

"그치."

"돈은 잘 벌려?"

"아니 뭐. 아직까진. 탁이 형만큼 잘나가는 것도 아니니까."

"난 애인 생기면 잘 챙겨줄 자신 있는데."

"챙겨주다니?"

"왜, 아는 언니가 선수랑 사귀거든. 그 언니가 저번에 남친 기죽지 말라고 차도 하나 해주더라고."

"차를 사줘?"

"못 사줄 건 뭐야? 한 두달 바짝 벌면 되는데. 나도 그정도 능력은 돼."

여름이 끊임없이 자신의 인기와 재력을 어필했다.

도훈은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여워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풉-."

"뭐야? 왜 웃어? 못 믿어?"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여자를 사겨도 그런 건 못 받을 것 같아."

"부담스러워?"

"내 능력으로 벌어야지."

"응?"

"내 차는 내 돈으로 사고 싶다고. 난 누군가한테 빌붙는 거 질색이거든."

"뭐? 푸하하. 야, 너 선수잖아."

"선수가 뭐?"

"선수는 여자 등쳐먹는 거 전문아냐? 너 그런 마인드로 어떻게 돈 벌려고 그래?"

"몰라. 난 아무튼 그런건 별로야."

"풉-. 재밌네. 웃겨 아주."

"재밌는 거 이제 알았어?"

"너 이제 보니까 일부러 솔이 언니 골랐구나?"

"무슨 소리야?"

"나 약올리려고."

"아니거든."

"거짓말 마. 나랑 자고 싶잖아. 맞지?"

여름의 유혹이 계속 정도를 더해갔다.

그녀는 쉽게 말해 자뻑이 심한 편이었고, 세상을 자신의 위주로 해석했다.

여름의 노골적인 작업에 도훈도 슬슬 마음이 흔들렸다.

‘가만. 여기서 콜 때리면 미션 하나는 무조건 달성각 아냐?’

[그렇죠.]

‘하-. 이것 참.’

도훈이 머뭇거리자 여름이 계속 부추겼다.

"내가 그랬잖아. 신고식할 때. 오늘 한 번 준다고. 그거 진심이었어."

"아니 그래도 맥주 산다고 둘이 나왔는데."

"왜? 언니들이 그것도 이해 못 할 것 같아? 눈 맞아서 둘이 따로 나갔나 보다 하겠지. 그 언니들 그런 거 신경 하나도 안 쓰는 사람들이야."

도훈이 망설였다.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몰랐기 때문에 당황한 것도 있었고, 확실한 한 명이냐, 애매한 두 명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하,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모르죠. 하지만 진심이라면 미션 하나는 확실히 클리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명을 동시에 공략하는 건 물거품이 되겠지.’

[그건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약 여름이 나를 떠본 거라면 둘 다 나가리가 될지 모르고.’

[떠보다뇨?]

‘하. 스킬만 있으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할 텐데, 이렇게 답답할 때가.’

도훈이 계속 고민하자 여름이 재촉했다.

"어쩔래? 지금 그냥 따로 방 잡을까?"

< 789.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39-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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