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8.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28- >
정란은 현재 쌍둥이 언니 정희를 연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인 정희는 자신과 달리 20년째 모쏠 인생. 그렇다면 자신도 모쏠이라고 대답해야 맞았다.
"그, 그렇죠. 남친은 없는데, 그건 왜요?"
"그럼 굳이 동생을 소개시켜 줄 것 없이 정희 너랑 바로 소개팅을 하면 간단하지 않아?"
나는 정란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정란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이었다.
"어, 저는 그러니까···."
"왜 친동생도 소개시켜 줄 수 있다며? 너도 날 괜찮게 본 거 아니야?"
"음, 저는 아직 연애 생각이 없어서요."
"그래? 난 네 쪽이 더 마음에 드는데."
"진짜?"
"응. 난 사실 남자 많이 만나 본 사람보다 경험 없는 쪽이 좋거든. 네 동생은 남자 많이 사귀어 봤다며."
내 말에 정란이 발끈했다.
"남자한테 인기 많은 게 정란이 잘못은 아니지 않아요? 남자들이 알아서 들이댄 건데."
"물론 아니지. 하지만 네 말대로 얼굴도 똑같도 뭐, 쫀득한 것도 똑같지 않을까?"
"아니거든요? 그게 뭐 하루아침에 되는 건 줄···."
"응?"
정란이 또 다시 실언을 했다.
아무리 쌍둥이라도 타인을 연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본인이 공격당하는 입장이라면 발끈하는 게 당연. 나는 정란이 실수를 할 때마다 그녀를 당혹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녀 역시 공략 대상에 있지만, 어떻게든 언니 다음으
로 순서를 미루기 위해서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남자 만나본 적도 없다면서."
"아, 아니 그러니까 그건."
정란이 당황해하는데 마침 폰이 부르르 울렸다.
정란은 핸드폰의 번호를 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전화 오는 거 아냐?"
"아니, 모르는 번호라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받아봐."
"네."
정란이 통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성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피커 밖으로 소리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야! 최정란! 너 지금 어디야? 왜 내 전화 씹는데?
통화를 받은 정란이 벌떡 일어섰다.
"오빠, 저 잠시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응, 그래."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느긋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란은 급하게 자리를 옮기더니 구석에서 통화를 이어갔다.
‘로시, 저 통화 감청할 수 있지?’
[휴대용 증폭기라면 가능합니다.]
‘한 번 들어보자.’
아이템을 구매해 통화 내용을 엿듣자 대번에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번호는 뭔데?"
-니가 내 전화 계속 씹으니까 친구한테 빌려서 전화하는 거 잖아!
"근데 왜 짜증이야? 통화 안 될 수도 있지. 그렇다고 다른 사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스토커도 아니고."
전화를 건 사람은 정란의 남자친구로 보였다. 내용을 들어보니 정란이 수신 거부를 해놓아 다른 사람 전화로 대신 걸었다는 것 같은데, 따지는 남친을 향해 정란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굴었다.
-뭐라고? 스토커? 그럼 네가 잘했다는 거야?
"누가 뭐래? 왜 전화하자마자 짜증이냐고. 먼저 약속 깬 사람이 누군데?"
-설마 그것 때문이었어? 내가 설명했잖아. 갑자기 가족여행이 잡혔다고.
"네네, 그럼 가족여행 즐겁게 하시고요. 나 바쁘니까 끊어."
-야. 너 지금 남자 만나지?
"뭐래? 내가 넌 줄 아니?"
-내가 뭐?
"너 저번에 사귄 년이랑 요즘도 연락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너 내 폰 뒤졌냐?
"됐고, 앞으로 그냥 연락하지 마. 짜증나니까."
-야. 최정란! 야! 너 지금 뭐하는 건데? 약속 한 번 깼다고 진짜로 헤어지자는 거야?
"약속만 깼으면 안 그러지. 전 여친이랑 몰래 연락하는 게 더 짜증 나. 그년이랑 몰래 놀러갔을 지 내가 알 게 뭐야?"
-아니라니까 그런 거? 걔가 그냥 술 먹고 취해서 연락한 것뿐이야. 너도 봤으면 별 내용 없다는 거 다 알잖아.
"됐거든? 나중에 통화로 무슨 얘길 했을지 어떻게 알고? 난 더 이상 너 못 믿겠으니가 그냥 때려쳐."
-정란아, 야, 야! 이러는 법이 어딨어? 그것도 전화로. 만나서 얘기하자.
"사귀는 것도 내 맘이고 헤어지는 것도 내 맘이야. 나 그리고 솔직히 너 별로거든? 토끼 같은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뭐, 뭐라고? 야 씨발, 너 지금 어디야!
"뭐 씨발? 너 방금 씨발이랬니?"
-아니 네가 먼저 욕하구선.
"좆같은 새끼가 같이 좀 놀아주니까 어디서 개같은 소리야? 확 부랄을 뜯어 버릴라, 씹새끼가! 끊어 씨발새끼야!"
뚝-
멀리서 감청한 전화 내용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정란의 과격한 말투는 도저히 곱상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와, 성격 어마어마하네. 실화냐.’
[생각보다 과격한 여성이군요. 학창시절에 일진을 했다는 설명이 사실인가 봅니다. 저런 여성, 감당하시겠습니까?]
‘그래 봤자 여자지. 설마 내가 누구한테 맞고 다닐까 봐?’
[그래도 장난 아닌 거 같은데.]
멀리서 통화를 마친 정란은 표정을 싹 바꾸더니 방긋 웃는 표정으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방금 전 욕설을 퍼부으며 통화를 한 사람치고는 너무도 해맑은 표정이라 살짝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미안요. 갑자기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친구? 친구데 저장도 안 해놨어?"
"최근 번호가 바뀌었다지 뭐에요."
"목소리가 남자 같던데?"
"맞아요. 고등학교 동창. 저 남녀공학 나왔거든요."
"아."
"곧 군대 간다나? 잘 다녀오라고 안부 인사 좀 했어요."
‘요샌 안부 인사를 부랄을 뜯어 버린다고 하는구나, 얘도 참.’
[근데 너무 신의 없는 타입 아닙니까? 딱 보니 주인님한테 마음이 생겨서 괜히 꼬투리 잡아서 남친하고 헤어진 느낌인데요.]
‘저렇게 쉽게 헤어질 정도면 어차피 깊은 사이도 아니었겠지. 암튼 성격 진짜 지랄맞다. 어쩜 저렇게 언니랑은 딴판이람.’
"근데 오빠,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어, 소개팅. 네가 별로 내키지 않으면 그냥 동생 소개시켜 줘도 돼."
"후후. 근데 오빠는 제가 마음에 더 드셨나 봐요?"
"뭐, 그냥. 쌍둥이라고 하니까 생긴 건 똑같을 것 같아서."
"동생이 훨씬 괜찮아요. 그리고 걔 남친이랑은 확실히 정리 된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참, 오빠 혹시 나중에 조모임 때 같이 보더라도 저한테 아는 척 하지 마세요."
"왜?"
"음, 원래 전 남자들이랑 잘 말 안 하거든요. 동생이 나중에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3자대면을 우려한 정란이 미리 약을 쳤다.
나중에 내가 진짜 정희와 함께 오늘 나눈 이야기에 대해 떠들면 곤란한 일이 생기리라 걱정한 것이다.
"그래? 근데 소개팅까지 시켜주는 사인데 말 해야되는 거 아닌가?"
"소개팅 때문에 더 그렇죠."
"더 그렇다니?"
"제 생각엔 자연스럽게 만나서 단둘이 따로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괜히 거창하게 소개팅이니 뭐니 하면 될 것도 더 안되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가 오늘 말한 이야기는 없던 일로 하자?"
"네, 대신에 제가 정란이 한 번 찔러 볼게요. 도훈 오빠 괜찮지 않느냐고. 한 번 만나보라면서. 은근히 옆에서 부추기는 게 잘 될 확률이 높거든요."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정란이가 분명 좋아할 거에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글쎄요. 후훗? 자매의 직감?"
"암튼 알겠어. 어차피 다음 주에 모임 한 번 하기로 했으니까 그때 봐서 밀어주든가 해."
"네."
대충 이야기가 정리된 나는 커피숍을 나가며 정란에게 다시 물었다.
"근데 정희야."
"네?"
"정란이가 나 별로라고 하면 너가 책임지는 거지?"
"하하, 걱정말라니까요. 분명 정란이는 오빠 좋아할 거니까."
"난 아직도 네가 더 괜찮은 것 같은데."
"정란이 직접 보면 또 다를 거예요. 오빠, 전 그냥 따로 택시 타고 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집에 안 바래다줘도 돼?"
"네, 잠깐 만날 친구도 있고."
"아까 군대 간다던 그 친구 보나보네."
"아니 뭐···. 네."
"알았어. 나도 슬슬 알바가야 되니까. 그럼 다음 주에 보자."
"알바 다니세요?"
"주말에만 잠깐."
"네, 암튼 전 가볼게요."
"그래. 조심히 가."
정란을 떠나보내고, 그녀의 몸에 몰래 부착시켰던 음향증폭기를 켰다. 그러자 스마트 워치에서 골전도를 통해 이어폰처럼 음성을 전달해왔다.
"야, 씨발 새끼야 내가 두 번 다신 전화하지 말랬지. 왜 자꾸 성가시게 하는데?"
-정란아, 내가 잘못했어. 우리 이러지 말고 한 번만 만나자. 응? 만나서 얼굴보고 이야기해.
"꺼져. 새끼야, 나 이제 너 다신 안 봐. 너보다 훨씬 좋은 남자 생겼거든. 그리니까 연락 마라."
예상대로 정란은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 나와 헤어진 것이었다. 슬슬 시간이 돼서 가게로 출근하는 내내 그녀의 찰진(?)욕설을 들어야 했다.
***
도훈이 초저녁부터 출근했다.
하루 지났다고 벌써 소문이 쫙 퍼졌는지 대기실에 있던 다른 선수들이 하나 줄 도훈에게로 몰려왔다.
"이얼, 신참. 어제 첫픽에 꽂혔다며?"
"적응 잘하네. 난 일 시작하고 일주일간 뺑이만 쳤는데."
"너 도박도 좀 하냐?"
동시다발적으로 물어오는 질문들을 도훈이 하나씩 쳐냈다.
"현성이 형이 많이 밀어줘서요."
"운이 좋았죠."
"도박은 못 합니다."
도훈이 한명 한명 말을 받아주며 노닥거리는 데 선수 대기실 문이 열리며 현성이 들어왔다. 현성은 자기보다 일찍 출근한 도훈을 보며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집에 있는데 할 일이 없어서요. 형은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난 원래 일찍 출근해. 홀도 한 번 봐주고, 나중에 머리하러 가야 되거든. 참, 너도 오늘 머리 좀 만질래?"
"머리요?"
"어. 스타일 좀 꾸미면 훨 괜찮겠는데."
도훈은 이미 빻은 얼굴로 페이스 오프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리 머리를 만져도 호박에 줄긋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손님도 안 오는 가게에 있어 봐야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현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요."
도훈은 현성을 따라 미용실에 들렀다.
드라이를 받던 현성은 디자니어에게 이것저것 세심하게 요구했다.
"오늘 되게 힘 많이 주시네요? 중요한 손님 있으신가봐요?"
"손님은 늘 중요하죠. 제 머리 끝나면 저 친구도 한 번 잡아주세요."
앞치마에 가위주머니를 찬 미용사가 힐끔 도훈을 쳐다보더니 현성에게 속삭였다.
"근데 누구."
"아, 이번에 새로온 동생이에요."
"아항. 성격 되게 좋아 보이네요."
현성과 친한 디자이너는 차마 그의 지인에게 못생겼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의례적인 칭찬을 건넸다. 듣고 있던 도훈 역시 그의 본심을 깨닫고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참나. 내가 본 얼굴로 왔으면 좋다고 꼬셨을 것 같은데.’
원판 상태인 도훈은 어딜가나 인기가 좋았다.
마사지를 받으러 가거나, 미용실을 들르거나, 심지어 편의점에서 담배를 살 때도 여자 알바들은 그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게다가 훈훈하고 잘생긴 외모까지. 원판일 때는 늘 왕같은 대접을 받다가 얼굴 좀 빻았다고 이런 무시를 받다니. 잘생겼다는 메리트가 얼마나 큰지 새삼 느껴지는 도훈이었다.
"오늘 신경 좀 써주세요. 지명 손님이 워낙에 깐깐한 분들이라."
"현성이 형 그 손님들 알아요?"
머리를 하러 앉아있던 현성이 대답했다.
"탁이형 지명 말이지? 내가 궁금해서 물어봤거든. 오늘 누구 오는 거냐고. 그러니까 텐프로 아가씨들이래."
"텐프로요? 진짜 텐프로요?"
"응. 쩜오 이런거 아니고 진짜 텐프로. 근데 그때 한번 놀고 간 애들이 맞다면 완전 진상들이야."
"어느 정돈데요?"
"말도 마. 아주 작정하고 사람 갈구로 온 손님처럼 애들 자존심 슬슬 긁으면서 뺀찌 먹이는데, 나도 듣기만 했는데 좀 심하더라."
"왜 그러는 건데요?"
"그냥 지들 당한 거 푸는 거지. 걔네들도 손님들 술시중 들때는 엄청 또 싹싹하거든. 자존심 다 내던지고 몸파는 애들인데 오죽하겠냐. 그걸 자기보다 약자인 선수들한테 다 푸는 거야."
"그래도 동종업계 종사자인데 너무하네요."
"원래 이게 다 먹이사슬이야. 특히 다른 곳에서 철저한 을이였던 애들이 갑의 위치에 오르면 자기들이 당한 것 배 이상으로 갑질을 해대거든. 너도 오늘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아."
"근데 탁이 형님이 왜 그런 손님들 오는데 저희를 지명했을까요?"
"그래서 나도 물었지. 나는 그렇다 쳐도 정우는 이제 처음인데 괜찮겠냐고."
"근데요?"
"탁이 형 말이 그래. 원래 크게 되려면 강하게 커야 한다면서."
"강하게요?"
"너무 걱정마. 나랑 탁이형이 적당히 커버 쳐 줄게. 초이스로 앉혔음 모를까 지명으로 꽂아놓고 심하겐 안하겠지. 어쨌든 개들도 여자야. 마음에 드는 남자한텐 함부로 못 하거든."
"네. 알려줘서 고마워요."
대기 소파에 앉아있던 도훈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동탁은 무슨 의도로 자신과 현성을 부른 것일까?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결코 좋은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중에 동탁을 보면 속 마음을 한 번 열어봐야겠는데.’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드라이를 끝낸 현성이 도훈을 불렀다.
"나 다 끝났다. 디자이너 님, 제 동생 신경 좀 써주세요."
"네네."
디자이너가 성의없는 목소리로 도훈을 불렀다.
"이쪽에 앉으세요, 손님."
안 그래도 처음 볼때부터 무시를 받는 느낌이라 도훈은 살짝 빈정 상한 상태로 의자에 앉았다.
< 778.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2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