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4.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24- >
***
"네? 드라마요? 아니 잠."
뚝-
도훈은 불쑥 끊긴 통화에 어안이 벙벙한지 몇차례나 스마트폰을 재확인했다.
"진짜로 끊었네?"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안면이 없다곤 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도훈은 잠시 열을 식히기 위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더웠다. 땡볕에서 담배를 피우자니 가만 있어도 땀이 주륵주륵 날 것 같았다.
'이럴게 아니라 어디 커피숍이라도 들어가야 겠네.'
근방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긴 도훈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켜놓고 흡연실로 들어갔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방금 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정희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뭐야? 자기가 먼저 끊고서는.'
전화를 받은 도훈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아, 죄송해요. 폰 빠때리가 다 되서 갑자기 끊어져 버렸네요.
"드라마 보신다지 않았어요?"
-당연히 농담이죠, 오빠. 참, 오빠 맞죠? 그때 태영이라는 분 말씀으로는 저희보다 선배라고 하던데.
정희의 목소리 톤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툭툭 쏘는 듯한 말투에서 살짝 애교가 들어간 비음이 섞여 나왔다.
'이게 대체 뭐하자는 시츄람?'
[정말로 베터리가 다 됐었나 보죠.]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왜 이렇게 말투가 나긋나긋해 진건데? 살살 꼬리치는 사람처럼.'
"네, 두 학번 위요."
-그러시구나. 근데 하려던 말씀이 뭐였어요?
"태영이 말론 정희씨가 다같이 모여서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더라고요. 근데 제 생각에는 당장 시간이 촉박하니까 이번 주말부터라도 일단 시작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도 한 번은 직접 뵈야 하지 않을 까요?
'이래서 태영이 벽창호같다고 했구나. 전혀 말귀가 안 통하네.'
도훈이 한숨을 내쉬더니 차분히 설득했다.
"물론 만나서 얘기하면 더 좋죠. 근데 주말이다 보니 선약이 있을수도 있고, 또 연락이 안 닿는 사람도 있고."
-그쪽은요?
"네?"
-오빠도 선약있어요?
통화를 하던 도훈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갑자기 약속이 있는지는 왜 물어 보는 걸까?
"아뇨. 지금은 딱히."
-그럼 봐요.
"네?"
-안 바쁘시면 보자고요. 우리 만나서 얘기해요.
"둘이서요?
-네. 왜요? 별로 안내켜요?
'아니 이게 뭐하자는 거지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데요?
'대관절 무슨 꿍꿍인 줄 모르겠네.'
도훈은 정희의 의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둘이 만나서라도 교통정리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둘이 쌍둥이라고 했으니, 어차피 한명은 결정을 따를 것이고 태영이는 내가 설득하면 되니까. 나머지 한명은 연락도 안하고 잠수 탄 마당에 설마 딴지 걸진 않겠지.'
결정을 마친 도훈이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저 나와있는데 이쪽으로 오실래요?"
-오빠 혹시 차 있어요?
"네?"
-아니, 그냥 지금 준비하면 시간 걸리니까 혹시 데리러 오실 수 있나 해서요.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도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초면에 차가 있는지 묻는 연유도 이상했지만, 차가 있으면 자길 데리러 오라는 요구도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부탁이었다. 다소 무례하기까지한 요구에 도훈이 생각했다.
'미친년인가?'
도훈은 상대의 요구가 도가 넘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초면에 함부로 말할 순 없었다.
더구나 학점이 절박한 그로서는 어떻게든 조원을 어르고 달래 이끌고 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쉬운쪽은 어쨌건 자신.
"음, 차가 있긴한데..."
-그럼 저 좀 데리러 와주실 수 있나요? 갑자기 연락하셔서 씻고 준비해서 지하철타고 가면 얼마나 걸릴 지 몰라서요, 오빠.
정희의 말투엔 애교가 듬뿍 담겨 있었다.
처음 전화를 끊을 때의 냉랭함과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라 도훈은 무슨 이중 인격자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허, 약간 여우같은 구석이 있네.'
특히 말 끝마다 오빠를 붙이는 버릇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평소에도 이런식으로 주변 남자들을 이용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오늘은 민주가 데리러 오는 날이 아니니 지금 집에가서 차를 가져오는 편이 좋을지도. 짜증나지만 희생 좀 해줘야지. 그래야 협조를 잘 해줄테니.'
"알겠어요. 집이 어디쪽이신데요?"
-공릉동요.
"잠깐 어디 들렀다 가야하는 데 30분 쯤 걸리겠네요. 괜찮으세요?"
-30분이요? 네. 최대한 준비해 볼게요. 그럼 도착해서 다시 전화 주세요.
통화를 마친 도훈은 참 희한한 여자애라고 생각하며 주문을 변경했다.
"저 죄송한데 테이크 아웃으로 바꿀수 있나요?"
***
'흐흐, 이런 훈남이 같은 조일 줄이야.'
도훈과 통화를 마친 정란은 깨톡을 다시 들어가 도훈의 사진첩을 둘러 보았다. 올려진 사진은 도훈이 혼자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찍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대체로 셀카 인것으로 보아 여자친구는 없어 보였다.
'지금 남친보다 휠씬 잘생겼네. 키도 엄청 큰 거 같고.'
외모를 심하게 따지는 정란은 남자의 얼굴과 키로 등급을 나누는 편이었다.
키만 큰 사람은 B.
얼굴만 잘생긴 사람은 B+.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긴 사람은 A 인 식이다.
'거기에 밤일도 잘하면 A+이고.'
남친과 사이가 틀어진 정란은 잘생긴 도훈에게 호감이 생겼다.
현 남친보다 얼굴도 더 잘생기고 키도 큰 데다 심지어 차까지 모는 대학생이라니.
갈아탈 수 있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남친하고 헤어질 용의가 있었다. 아니면 적당히 양다리 걸치다 최대한 뽕 뽑아먹고 넘어가도 좋고.
그녀의 도덕성이란 딱 그정도.
가끔 얼굴이 별로여도 만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남자들은 다들 재력이 월등히 좋았다. 소위 금수저 물고 태어난 부잣집 자식들을 적당히 어르고 구슬려 최대한 선물을 받아내고 손절하는 식이다.
한마디로 그녀에게 남자친구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악세사리, 혹은 필요할때 물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현금지급기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면서도 늘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언니인 정희와 달리 무척 영악한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도훈의 사진을 보고 순식간에 태세전환을 한것만 봐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계산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
정란은 급히 코스튬 옷을 갈아입고 최대한 예쁜 옷을 골랐다. 가슴이 깊이 파이고, 팔을 들면 허리가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옷이었다.
바지는 허벅지가 훤히 비치는 데님팬츠로, 어찌나 짧은 지 바지 주머니가 옷 밖으로 삐져 나와 메롱 혓바닥을 내밀 정도였다.
옷을 다 고른 정란이 거울을 보고 화장을 고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뭐야. 벌써 왔다고? 아직 30분 안됐는데.'
예정된 시간보다 빨랐기 떄문에 정란이 당황하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이준형-
"뭐야, 남친 새끼잖아?"
도훈인 줄 알고 설레던 정란이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뒤집었다. 화장대 위에서 폰이 요란한 진동을 일으켰다. 정란은 통화가 끊어지길 기다리면 조그맣게 중얼댔다.
"개새끼, 실컷 바람 피우다 쫄리니까 이제야 전화 하는 것 봐. 내가 받을줄알고?"
정란은 남친의 전화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화장을 계속했다.
어려서부터 많이 놀아 본 정란은 이제 겨우 스무살인데도 화장이 매우 능숙한 편이었다.
화장을 지우면 언니 정희처럼 수수하고 청초한 이미지지만, 색조화장을 통해 실제보다 성숙한 느낌을 주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일부러 섹시한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붉은 계열의 립스틱과 볼터치도 과하게 넣는 편이었다.
화장을 마친 정란은 깨물고 싶은 잘익은 복숭아 느낌이 났다. 어리면서도 알 것 다아는 여자라는 분위기가 물씬 뿜어나왔다.
특유의 도도한 눈매를 그리며 화장을 마무리한 정란은 자기가 생각해도 오늘 화장이 잘먹었다고 여겼는지 만족스럽게 웃었다.
'후후. 이정도면 첫눈에 뻑가겠지?'
늘 품행이 단정한 모범생 정희와 비교되던 정란은 이런식으로라도 존재감을 내뿜고 싶었다. 비록 주변에서는 정희를 더 인정하지만 결국 시집 잘갈 사람은 자신일거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화장을 마친 정란은 남친 전화를 아예 수신차단했다.
'도훈 오빠 만날 때 혹시나 연락오면 귀찮으니까.'
그녀는 번호를 차단하다 문득 언니의 폰이 옆에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가만. 어차피 정희 폰 들고 나가면 되는거 아냐?'
정란이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몇 시간 차이 쌍둥이 언니라도 언니는 언니. 망나니같이 구는 정란이라도 정희가 진지하게 화를 내면 무서워했다. 만에 하나 몰래 폰을 들여다 본 사실을 들키게 되면 진심으로 화를 낼 것 같았다.
'깜빡하고 바꿔 나갔다고 해야지. 예전에 내가 쓰던 폰하고 똑같아서 착각하고 말았다고.'
정희가 현재 쓰는 폰은 한때 정란도 함께 쓰던 기종. 정확히 말하면 변덕이 심한 정란은 신제품만 나오면 반년도 지나지 않아 새폰으로 갈아 치우는 일이 잦았다.
'내 폰을 놔두고 가면 진짜로 착각한 줄 알겠지?'
정란은 자신의 꾀에 심히 만족하며 도훈의 도착을 기다렸다.
***
도훈은 정란이 알려준 주소지에 도착했다.
비교적 한산한 동네였다. 정란이 집주소를 정확히 찍어 주었기 때문에 도훈은 아담한 단독주택 앞에 주차를 한 뒤 전화를 걸려고 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한 여대생 한명이 대문앞에 서는 것이 보였다.
'어라? 설마 저 사람인가?'
도훈이 차 안에서 클락션을 울렸다.
빵-!
깜짝 놀란 여대생이 뒤를 돌아보더니 도훈을 보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 도훈이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혹시 정희씨 아니세요?"
도훈이 이름을 묻자 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데요? 제 이름은 어떻게 아세요?"
정희는 살짝 겁을 먹은 듯 경계하는 태도였다. 언제든 집으로 뛰어들갈 수 있도록 열쇠를 손에 꼭 쥐며 좌물쇠의 위치를 확인했다.
도훈이 그 모습을 의아해 하며 물었다.
"차정희씨 맞죠?"
"네. 제가 차정흰데요."
"아, 이도훈입니다."
"네? 누구시라고요?"
'뭐지? 왜 저런 반응인데?'
도훈은 데리러 오랄땐 언제고 쌩판 모른 척을 하자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그 조발표 조원요. 그땐 일이 생겨서 수업을 못 들어갔던."
정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도훈을 쳐다보더니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누군지 알 것 같아요. 근데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네? 저보고 직접 와달라면서요?"
"제가요?"
봉사활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정희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집 앞에서 차를 데고 기다린 것도 수상한데,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서는 이름을 대며 아는 척을 하자 부쩍 의심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발표 때문에 만나기로 했잖아요. 만나서 협의한다고."
"아..."
정란은 그제야 어제 태영과 통화 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태영이 대충 단톡방에서 정하자니까 얼굴보고 얘기하자고 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직접 집까지 찾아올 건 또 뭐람? 그것도 통화한 사람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찾아 오신거예요? 집까지?"
"예?"
도훈 역시 오해와 오해가 겹치며 벌어진 일에 당혹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씨, 무슨 사람 똥개 훈련시키나. 데리러 오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딴 소리야?'
열이 받은 도훈이 결국 한 마디 했다.
"저기요, 이런식으로 나오시면 곤란하죠. 그쪽이야 학점 어떻게 받아도 상관없나 본데, 저는 나름 계획이 있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그러니까 일부러 대충 하려고 한 단 뜻이에요?"
"지금 태도가 그렇잖아요. 단톡방에서 얘기하자니까 얼굴보고 만나서 하자면서요. 그래서 만나러 오니까 이제는 나몰라라 하시고."
"아니 무슨."
정희 역시 도훈의 비난에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됐고, 기왕 왔으니까 그럼 조발표 어떻게 할 건지만 정리하고 갈게요."
"여기서요?"
정희는 오전내내 봉사활동을 다녀오느라 온 몸이 땀이 쩔어 있었다. 집에 가서 씻고 쉴 생각만 하다가 도훈이 붙잡는 통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강경하게 나오는 통에 마음 약한 정희로서도 무척이나 난감했다.
"잠시만요. 그럼 집에 잠시. 아니다, 알겠어요. 그럼 얘기해요."
도훈은 서서 대화를 하기엔 날씨가 너무 덥다고 생각했다. 특히 정희가 땀에 쩔어 있는 것이 보기 불편했다.
'나갈 채비한다더니 그 새 어딜 헐레벌떡 다녀 온 거야? 나참.'
"여기선 좀 그러니 장소 옮길까요? 혹시 근처에 아는 커피숍 있어요?"
"커피숍요? 아, 저 모퉁이에 까페가 하나 있어요. 거기로 가실래요?"
도훈은 어떻게든 오늘 중으로 조별과제에 대한 역할 분담을 마무리하고 싶었기 떄문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디라고요?"
"얼마 안 멀어요. 걸어가셔도 돼요."
도훈은 차를 잠그고 정희의 뒤를 따랐다. 처음엔 워낙에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보면 볼수록 매력있는 여자였다.
청순한듯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가가기 힘든 벽이 느껴졌다. 모험심이 강한 남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태영이가 사람 보는 눈이 제법이구나. 걔는 치마만 두르면 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태영군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걔가 워낙 자주 여자들한테 껄떡거려야 말이지. 처음 새터때는 정음이한테, 나중에는 일본인 교환학생 그 누구지, 료코. 그리고 최근에 설수지까지. 태영이가 작업했던 여자들 보면 다들 예쁘잖아.'
[그리고 모두 주인님에게 뺏기고 말았고요. 태영군 입장에선 주인님이 참으로 밉겠네요.]
'아니, 뺏기다니 무슨 말을 해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는데 정희가 물었다.
"참, 근데 제가 어제 통화했던 분이랑은 어떤 사이세요?"
< 774.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2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