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791화 (759/2,000)

< 773.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23- >

***

도훈이 민주의 오피스텔에서 나온 시각은 오후가 한참 넘어서였다. 그곳에 계속 있다간 하루종일 섹스만 할 분위기라 정력 고갈을 우려한 도훈으로서는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게 최선이었다.

눈 뜨자마자 모닝섹을 시작으로, 아침 먹기 전에 한 번, 점심은 짜장면을 시켜 먹다가 밥 먹는 중에 밥상을 뒤엎고 또 한 번.

하루 종일 발기가 풀리기도 전에 다시 세우길 반복, 모든 섹스를 질싸로 마무리한 도훈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따라 민주가 작정한 느낌이었어.'

[임신공격 말씀 이시죠?]

'배란기에 연거푸 질싸를 해댔으니 한번 쯤 얻어걸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모르지 또, 지금도 씻지도 않고 물구나무 서고 있을지도.'

'주인님이 반 고자라는 걸 모르니 벌어진 일이군요. 한데 대학 조교가 학부생을 임신 공격 했다간 도덕적으로 지탄받지 않을까요?]

'물론 그럴수도 있는데, 납득하지 못할 정돈 아니지. 말이 조교지 사실 3년 위 선배나 마찬가진데. 연상 연하로는 적절한 나이잖아.'

[아무튼 주인님을 옭아매려 한 점은 살짝 괘씸합니다.]

'한동안 임태기 두 줄 그어질 생각에 두근두근하겠지. 결국엔 실망하겠지만. 그게 내가 주는 벌이야.'

[크크. 나름의 복수로군요.]

'어휴, 어쨌건 이제라도 탈출해서 다행이다. 까딱하면 오늘 밤 출근도 못 할 뻔?'

[근데 아직 출근하기엔 이른데 오후 남는 시간엔 뭘 하실 예정입니까? 설마 또 다른 여자를 만나실 계획인가요?]

'아니. 하루 종일 떡만 쳤더니 당분간 여자는 쳐다보기도 싫다. 내가 무슨 섹스 머신도 아니고.'

저녁 출근까지 남는 시간을 뭐하며 보낼까 고민하던 도훈은 문득 태영이 일러준 조별과제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건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단톡방에서도 별 얘기 없던데. 다음 주 바로 제출 아닌가?’

1학기 전장을 노리는 있는 도훈으로서는 학점이 결정되는 과제를 소홀하고 싶지 않았다.

'미션은 미션이고, 어쨌든 내 본분은 대학생. 귀찮아도 할 건 해야지.'

그는 마음먹은 바를 어떻게든 관철시키는 주의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학 성적 관리였는데, 학기가 시작하고서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를 만나면서도 꾸준히 성적관리를 해오고 있었다. 전 장학금을 달성하는 것은 그가 이도훈이 아닌, 이정우의 환생이라는 증

거나 마찬가지니까.

도훈이 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형? 주말에 웬일이세요?

태영이 자다 깼는지 나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점심이 훌쩍 넘은 시간에 일어난 걸 보면, 새벽까지 게임을 하다 새벽까지 하얗게 불태웠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다른건 아니고 저번에 네가 말한 조별과제 말이야.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싶어서."

태영은 조별과제 얘기가 나오자 잠이 확 깨는지 갑자기 목소리 톤을 높이며 불만을 늘어놓았다.

-어휴, 형. 말도 마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어제 계속 연락했는데, 완전 트롤들 이에요."

"트롤?"

-그 왜 게임 할 때 고의로 자기 팀을 망치는 짓을 트롤링이라고 하거든요. 그 뇌가 없는 몬스터처럼.

"근데 누가 그렇게 비협조적인데?"

-둘 다요.

"둘 다라고?"

-걔들 쌍둥이라고 제가 말했었죠?

"어. 그랬던 것 같아. 일란성이랬지?"

-맞아요. 사실 첨엔 동생만 날라린 줄 알았거든요? 왜 완전 발랑 까져가지고 첨 보자마자 막말하고.

"근데?"

-그나마 언니라는 애는 좀 괜찮은지 알았는데 완전 고지식하고 꽉 막힌 사람이더라고요. 제가 대충 깨톡으로 과제 나누자니까 저보고 뭐라는 줄 알아요?

"뭐라는데?"

-자긴 온라인으로 정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며 무조건 오프라인에서 만나서 해야 한다는 거예요.

"대충 나눌 것 나눈 다음에 한 사람이 합치는 게 낫지 않아? 그게 제일 빠를 것 같은데."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래서 저도 그랬죠. 도훈이 형도 저번에 결석하고, 너네 동생은 얘기 좀 하자니까 남친 보러 간다고 튀지 않았냐고. 그러니까 일단 둘이서 대충 정리해서 온라인으로 일을 나눈 다음, 다시 보는 게 낫지 않겠냐고. 그러니까 자긴 그래도

당사자 의견을 직접 듣고 얘기 하는 게 맞다면서 끝까지 버티는 거 있죠? 무슨 여자애 고집이 고래 심줄보다 더 질겨요. 말이 안 통해요. 벽창호도 아니고.

"거참. 피곤하게 구네. 가만, 태영아 이 과제 기말 대체라고 했지?"

-네. 교수님이 확실히 말씀하셨어요. 이 과목은 이제 시험 안 본다고. 이게 기말 시험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야. 나 학점 잘 받아야 돼. 여태껏 관리 잘 해왔는데 그 쌍둥이 때문에 마지막을 망칠 순 없다고."

-그러니까요. 저도 알죠. 그래서 제가 중간에서 어떻게든 조율해 보려 했는데, 동생이라는 애는 학점이 걸리건 말건 1도 신경도 안 쓰는 분위기고, 언니라는 애는 아예 꽉 막힌 사람이고. 아, 그리고 남자애 한 명 더 있는데 무슨 일인지 걔는 전화도 안 받고 잠

수탄 거 있죠? 하여간 답답해 죽겠어요, 진짜. 이러다 주말 흐지부지 넘어가면 다음주 부턴 진짜 똥줄 탈 것 같은데···.

태영의 애로사항을 전달받은 도훈은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에 태영에게 물었다.

"태영아. 너 언니라는 사람 번호 좀 줘봐."

-왜요? 형이 직접 얘기하시게요?

"설득은 한 번 해 봐야지. 이대로 아무것도 못 정하고 흘려보내면, 다음 주까지 절대 못 끝내. 누군가 한 명이 제대로 덤터기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아마도 학점이 절박한 내가 될 가능성이 크고. 근데 난 그럴 생각 없거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무임승찬 거 알

지?'

-하, 그건 아니죠. 배 째는 게 벼슬도 아니고. 제가 번호 알려드릴게요. 잠시만요.

태영에게서 번호를 전달받은 도훈은 통화를 마치자 마자 곧바로 쌍둥이 정희의 폰에 전화를 걸었다.

***

차정희, 차정란.

일란성 쌍둥이인 두 사람은 학창 시절부터 축복받은 유전자로 유명했다. 자매 중 한명만 예뻐도 감사한 일인데, 쌍둥이가 모두 미인이다 보니 늘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껍데기만 같지 두 사람의 성격은 완전히 천양지차였다.

쌍둥이 언니 정희는 몇 분 먼저 태어났다고 언니로서의 책임감이 무척 강한 타입이었다. 늘 모범생 소리를 듣고 자랐고, 주말마다 봉사 활동을 하러 다니는 등 성실하고 심성이 고와 주변의 평판이 좋았다.

반면 동생인 정란은 언니와 180도 달랐다.

어려서부터 말괄량이로 유명했고, 고등학교 때는 일진 소리를 들을 만큼 발랑 까진 학생이었다. 그렇게 놀았는데도 타고난 머리가 좋아 대학진학까진 무리가 없었지만, 막상 대학에 오고 나서는 더욱 망나니처럼 지냈다.

토요일인 오늘도 정희는 인근 요양원으로 봉사 활동을 나간 참이었다. 한편 밤새 게임에 빠져 날을 샌 정란은 느지막한 시간에 집에서 일어났다. 밥 먹으라며 등쌀을 부리던 엄마와 아빠는 부부동반 모임을 나간다며 집을 나섰다.

홀로 집에 남겨진 정란은 일체형 애니 캐릭터를 흉내낸 옷을 입고 집안을 어슬렁거렸다. 모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따라 만든 옷은, 평소 외출할 때 정란의 세련된 패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디자인이었다.

대부분 모르는 사실이지만, 정란은 약간 오덕같은 특성도 있어서 보유한 물건마다 특정 애니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후두를 푹 눌러쓴 정란이 말했다.

"아 씨바, 졸라 심심하네 씨불탱."

주말에 보기로 했던 남친은 갑자기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다며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해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뜬금포 통보였기 때문에 열받은 정란은 슬슬 손절 각을 고려 중이었다.

"씹새끼. 아무리 생각해도 딴 년 생긴 것 같은데···."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조신한 정희와 달리 중딩 때부터 일찍이 남자를 안 정란은 남친이 바람을 피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가끔 사귀는 중에도 자주 몰래 바람을 펴왔으니 그런 의심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제 눈에 안경이랄까?

'하긴 뭐, 10번 넘게 했으니 갈아탈 때가 되긴 했을지도.'

정란은 늘 주변에 남자가 많았다. 드센 성격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원체 예뻤기 때문에 그녀와 사귀자고 작업을 거는 남자들이 줄을 서 기다렸다. 정란 역시 남자에게 쉽게 질리고, 또 남성 편력이 있는 편이기 때문에 적당히 한 두 달 만나다 갈아타길 일 수.

항간에는 정란과 사귄 남자들로 팀을 꾸리면 축구팀을 차릴 수 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하지만 그 소문은 즉각 반박되었다. 사실은 미식축구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때문에 밤새 게임을 달리다 오후 늦게 깨어난 정란은, 홀로 소파에 앉아 삶은 달걀을 먹으며 허기를 채우고 있었다. 귀로는 시덥 잖은 티비를 들으며, 한 손엔 폰을 들고 연락할 남자가 없는지 깨톡 창을 뒤적였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껄떡대는 새끼들뿐이네. 얼굴도 못 생긴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정란은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를 눈으로 훑으며 괜찮은 남자를 체크했다. 어차피 현 남친과도 깊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친을 사귀는 와중에도 마음에 드는 남자가 보이면 늘 여지를 남겨 놓는 편이었다. 특유의 바람기와 흘리는 특성 때문에 남

자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저번에 같이 술 마신 상현 오빠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아니면 대학 와서 용 되었다는 장현이도 나쁘지 않고."

깨톡과 SNS를 넘나들며 남자를 뒤지던 정란은 문득 소파 귀퉁이에서 부르르 떨리는 소리를 들었다. 폰을 손에 들고 있던 정란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소파 틈에 낀 핸드폰을 발견했다. 기종을 보니 언니 정희의 폰이었다.

'어랍쇼? 이 칠칠이 또 폰 놔두고 나갔구나?'

정희는 침착한 성격에 비해 의외로 건망증이 심한 편이었다.  우산을 들고 나갔다하면 빈손으로 돌아오길 일 수, 아예 지갑을 안 들고 나가거나 지금처럼 폰을 깜빡 놓고 간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마 봉사 활동을 나가는 중에 폰을 놔두고 외출한 모양이었다. 언니에게 걸려온 통화를 무시하려던 정란은 처음 보는 번호를 보고 중요한 전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다툼이 잦다고 한들 두 사람은 자매. 만에 하나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겨 걸려온 전화라면, 안 받았다간 찝찝해질 것 같았다.

정란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차정란씨 핸드폰 맞나요?"

정란은 젊은 사내의 굵은 목소리에 당황하며 폰번호를 재차 확인했다. 특별히 저장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평소 언니가 아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누굴까? 그 수녀님한테 남자가 전화를 다 걸고?'

정란와 정희는 외모만 똑같을 뿐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특히 연애에 있어 서로 성향이 전혀 달랐는데, 심심하면 남자를 갈아치우는 정란에 비해, 언니인 정희는 여태껏 모쏠이었다. 그것은 쌍둥이로서 100% 장담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정란은 맨날 언니를 수녀님이라고 놀렸다. 머리를 밀면 비구니라고 불러주겠다

면서.

정체불명의 사내에 흥미가 동한 정란은 불쑥 장난기가 일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차분하게 깔고, 정란의 흉내를 냈다.

"네,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 시죠?"

-아, 네. 지난번 조 발표 때 같은 조가 된 이도훈이라고 합니다. 그날은 몸이 좀 안좋아서 결석했었구요.

‘조 발표? 그게 뭐더라?’

정희와 정란은 전공이 같고 수업도 늘 같이 들었다. 그러나 수업을 너무 대충하다 보니 정란은 조별과제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먹은 상황이었다. 어차피 본인이 안해도 언니가 자기 몫까지 같이 해줄 거라고 믿는 것이었다.

"으음, 그러셨구나. 조발표. 네. 근데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란이 대충 둘러댔다.

-저희 과 후배도 같은 조에 있거든요. 태영이라고, 아시죠? 통화도 했다는데.

"···네. 한 것도 같네요."

-다음 주 발표인데 주말 동안 어느 정도 파트를 나눠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나누면 되잖아요."

-네?

정란이 생각없이 말했다.

"나누시라고요. 그쪽이. 보니까 조장 맡으시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세요. 전 그런 거 관심없으니까."

아무리 정희를 따라하려 했지만, 무심결에 평소의 말투가 툭 튀어나와 버렸다. 정란은 애초에 공부와는 담을 쌓은 인물이었고, 뭘 이런 걸로 전화까지 하느냐는 생각에 갑자기 귀찮아진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용무 끝났죠? 끊을게요. 저 드라마 재방봐야 되거든요."

-네? 드라마요? 아니 잠···.

툭-.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정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씨뎅, 꼴에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괜히 껄떡대고 싶으니까 궁색한 핑계로 전화 거는 것 봐."

정란은 도훈의 전화를 다른 의도를 가진 것으로 오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란은 남녀 관계에 대해선 너무 미숙했기 때문에 정란과 다른 의미로 남자들의 연락을 받는 편이었다.

정란은 여지가 있을 만한 남자들에게만 연락처를 주는 반면, 정희는 수업을 같이 듣는 사람이 구실을 만들어 물어보면 흔쾌히 연락처를 알려주는 것이다.

조별과제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수업 때 언니의 번호를 딴 모양인데, 토요일에 불쑥 전화해서 구질구질 구는 모습이 너무 구차하게 느껴졌다.

‘꼴에 예쁜 건 알아가지고. 이제 기억나네. 태영이라는 애가 몰래 다리 훔쳐보던 새끼였지?’

정란은 어이없어하면서도 문득 통화한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전화 목소리 상으론 상당히 굵직한 매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가만. 번호 저장하면 깨톡에 사진 뜨지 않나?’

이에 생각이 미친 정란은 언니 정희의 폰을 들고 얼굴을 내밀었다. 얼굴 인식이 가능한 핸드폰은 쌍둥이인 정란과 정희를 구분못하고 잠금이 해제되었다.

‘요시! 얼굴 인식 짱짱맨요!’

언니의 깨톡을 들어간 정란은 별다른 내용이 없는 데 실망하며 도훈의 번호를 저장했다. 잠시 후 친구목록을 갱신하자 깨톡에 새롭게 추가된 친구 목록에 도훈의 프로필 사진이 떠올랐다.

"···어라?"

정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773.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2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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