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4.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4- >
룸 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스트레이트 잔 위에 둥둥 뜬 필터.
담배 재가루가 퍼져 혼탁해진 액체가 내 앞으로 내밀어진다.
"···못 들었니? 정우, 네가 마시라고."
순간 다른 선수들도 말문을 잃고 사방으로 눈알을 굴려댔다.
수많은 경험을 했을 그들의 반응만으로도, 이게 보통 상황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여자들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와 미숙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미리 짰구나!’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 이상 이런 미친 짓을 함부로 시키진 못할 것이다. 아마도 사전에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을 것이고, 미숙이 먼저 총대를 멘 것 같았다.
"저기 누님, 장난이 지나치신···."
현성이 보다 못해 끼어들자 미숙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파트너랑 단둘이 얘기하는 데 어디서 껴드니? 건방지게. 네 파트너나 챙겨."
"큭."
추상같은 호령에 현성이 주춤하고 입을 닫았다.
너까지 쫓겨나기 싫으면 닥치고 있으라는 경고였다.
살벌한 기세에 다들 말문을 잃고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젠장, 이건 대체 무슨 꿍꿍이야?’
[주인님···. 아무리 자존심을 내다 버린다 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카사노바 플레이어에게 어찌.]
나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저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는 것이 어쩌면 시험은 아닐까하고 말이다.
‘지금 저 미숙이라는 여자 속마음을 읽을 수 있나?’
[가능은 합니다만, 제한 조건에 위배 됩니다. 공략 대상을 상대로 스킬이나 아이템을 쓸수는 없습니다.]
‘하아-. 진퇴양난이네. ···가만, 뭐라고? 공략 대상을 상대로?’
[네. 공략할 대상에게는 스킬이나 아이템을 쓸 수 없습니다.]
‘그 말인즉슨 공략할 필요가 없는 상대에겐 사용해도 무방하단 소리지?’
[그렇게 되나요?]
나이쓰.
한 가지 요령을 깨우쳤다.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 미션의 달성 조건은 와꾸가 빻은 상태로 다섯명의 여자를 공략하는 것이다. 단, 공략할 대상에겐 일체의 스킬과 아이템 사용금지. 그렇다면 공략하지 않을 사람에게 얼마든지 스킬과 아이템을 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타겟을 바꿨다.
바로 현성의 옆에 앉은 씹돼지였다.
‘저 돼지의 마음을 읽는 것은 그럼 상관없겠네?’
[공략할 대상이 아니라면요.]
‘물론이지만, 내쪽에서도 사양이거든. 로시 마음의 소리 준비해.’
[알겠습니다.]
스킬을 발휘하자 가운데 앉은 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숙이 저년 보소? 진상한번 부려 보자더니 시작부터 세게 나가는데? 크크크. 설마 저걸 먹일 리는 없을 테니 다음 벌주가 더 기대되는 군.}
짧은 내용이지만 많은 것을 파악했다.
일단 이들이 막장으로 놀기로 결심했다는 내용.
아까 현성에게 대충 듣긴 했지만 술 진상이나 몸 진상 같은 질펀하고 난잡한 스타일로 가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이어지는 내용은 더 의미심장했다.
‘먹을 리 없을 거라고? 다음 벌주?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가 이걸 먹는 건 전혀 기대 안 했다는 소린데.’
예상대로 함정이었다.
거부할 수밖에 없는 과제를 던져주고 나의 의지를 테스트 하려는 수작이다. 만약 그것을 거부하면 다른 것으로 다시 골리겠다는 심산.
아무튼 이들의 작당을 파악한 이상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누님께서 주신 술이니 그럼!"
나는 미숙에게서 잔을 빼앗아 곧바로 입술로 가져갔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다들 아연실색하며 소리를 질렀다.
"어어!"
"아니 저걸?"
"야, 너 뭐 하는 거야?"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파트너 미숙이었다.
술잔이 뒤로 꺾어지기 직전 그녀가 소스라치며 놀라며 내 손을 쳐냈다. 스트레이트 잔에 담긴 술이 옆으로 와락 쏟아졌다.
"미쳤니? 그걸 왜 마셔, 더럽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님이 마시라고 하셨으니까요."
"아니 그렇다고 이 더러운 걸···."
미숙은 정말로 놀란 듯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어 있었다. 방금 전의 표독스러웠던 눈빛은 전혀 없이, 미안함과 동정심에 가득 찬 그렁그렁한 눈빛이었다.
‘정말 마실까봐 쫄았나 보네. 독하지도 못한 게 어디서 사람을 시험해?’
[정말이었군요. 주인님이 당연히 거부 할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지 말라면 더 해버려야지. 상대가 진상이면 나도 진상스럽게.’
"진짜 너 뭐니? 바보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까요."
"참나···. 순진한 건지 미련한 거지."
미숙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용기는 가상하다. 받어. 이번엔 제대로 줄 테니."
"넵!"
담겨있던 잔술을 깔끔히 털어버리고 두 손 받쳐 공손이 잔을 내밀었다. 미숙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다시 양주를 따라 주었다. 듣기론 병당 20만원 하는 양주다.
‘저런 게 2병이나 까져있다니. 올 초이스 하려고 술값만 40을 썼단 말이야?’
술을 받으며 사이즈를 살폈다.
안주는 서비스니까 주대만 40.
게다가 처음부터 날개요청으로 테이블이 아닌 선수 두당으로 계산되는 TC까지. 언뜻 봐도 하룻밤 돈백 이상은 작살낼 사이즈다.
‘그러니까 돈으로 사람을 가지고 노는 맛으로 오는 여자들이군.’
돈 만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딱 봐도 졸부일 가능성이 컸다.
아마도 물주로 불리는 저 돼지 그런 케이스겠지.
술을 다 따른 미숙이 말했다.
"아쉽네. 원래 첫잔 거부하면 다른 거 시키려고 한건데."
"네? 다른 거 뭐여?"
"담금주."
"담금주요?"
"담금주 모르니?"
그때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던 현성이 대신 나섰다.
"정우는 오늘 처음 출근한 신입입니다. 아직 이쪽 용어를 못 배워서 그러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부탁드릴게요, 숙이 누님."
현성의 말을 들은 미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오늘 처음 출전한 신입이었어? 어쩐지 순진하더라니···."
"넵."
"그럼 누나가 오늘 아다 떼 줘야겠네?"
"하핫, 그건···. 근데 담금주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자 현성이 잘했다는 듯 몰래 눈짓으로 싸인을 보냈다. 실은 그가 대기실에 있을 때 해준 조언이 있었다.
-정우야. 너 이 바닥에서 잘나가고 싶으면 절대 꽁씹같은 거 해주지마라.
-꽁씹요?
-그램 마. 2차 나가더라도 무조건 돈 받고 나가라고.
-그게 무슨 말인지···.
-원래 이일 하는 놈들이 여자랑 실컷 잔다는 생각에 몰래 연락처 주고받아서 퇴근 후 떡치고 다닌 단 말이지.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인마, 여자가 정 고프면 다른데서 꼬셔서 먹으라고. 손님한테 공짜로 따먹히고 다니면 금방 신선도가 떨어져.
-아···.
-실제 정빠 같은 데선 2차는 거의 안 나가. 왜냐고? 그래야 더 여자들이 매달리거든. 지명도 하고, 술도 팔아주고, 선물도 주면서 어떻게든 한번 자빠져 볼라고 애를 쓴단 말이지. 물론 정빠 다니는 애들은 와꾸가 뛰어나니까 그런 것도 있지만···. 암튼 꽁씹 절
대 좋아하지 마.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도 말고.
"담금주가 뭐긴, 담금주지."
잠시 기억을 떠올리던 내게 미숙이 재차 설명했다.
"그러니까 어떤···."
"아하! 뭘 담구냐고? 호홋, 내가 뭘 담그면 좋아할 것 같아?"
미숙의 시선이 야릇하게 바뀌더니 나의 허벅지 사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사타구니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미친, 술잔에 좆을 담그란 소린가?’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무엇을 요구하든 한 술 더뜰 생각이었다.
"저 그럼 이건 좀 작네요."
"응?"
나는 맥주잔을 들어 스트레이트 잔에 든 술을 바꿔 따랐다. 그리곤 다시 맥주잔을 내밀었다.
"제건 안들어 가거든요. 저런 잔에는."
"푸하하, 얘 말하는 것좀 봐!"
적절한 임기응변에 분위기가 다시 달아올랐다.
미숙은 내가 마음에 드는지 자기 잔을 부딪히더니 건배를 외쳤다.
"특대 사이즈 담금주는 나중에 마시고 일잔 짠 하자."
"네, 누님."
긴장이 풀리자 파트너끼리 서로 술 잔을 부딪혔다.
나는 해장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으므로, 거침없이 술을 들이켰다. 지금은 양주를 병째 들이 부어도 모두 해독이 되는 만독불침의 몸이다.
"이야, 술도 넙죽 잘마시네. 남자네 남자야."
"감사합니다."
"마담이 술 많이 팔아달래지?"
"아닙니다. 누님께서 주신 술이니 마시는 거죠."
"대답은 넙죽 잘하네. 한 잔 더 마셔."
미숙이 다시 술을 따랐다. 가만 보니 자기 잔은 거의 비워지지도 않았는데 나에게만 글라스로 양주를 따르고 있었다.
[술로 죽일 생각일까요?]
‘진상 피우기 전에 예열 시키려는 거겠지. 대체 무슨 짓을 시킬지 궁금한데?’
나로선 이들이 진상을 피우던 말던 아무 상관없었다.
오로지 내 목표는 미션 클리어. 꽁씹이든 뭐든 어떻게든 여자 5명만 확보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사람을 골라 받고 싶었다.
도무지 가운데 앉은 물주라는 여자와는 합방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끔찍한 기억은 일본 원정의 추억만으로도 충분하다.
술이 한 순배 돌자 미숙에게서 호구조사가 들어왔다.
"애인은 있어?"
"네?"
"여자친구."
"아뇨. 왜요?"
"아니 그래보여서. 풉!"
"네?"
"아니 얼굴이 그 모양인데 여자친구 바라는 건 너무 양심없는 거 아니니?"
미숙은 나를 골리는데 맛 들인 모양이었다. 술을 최대한 자제한다지만 내가 연거푸 원샷을 때리는 통에 자기도 안 먹고는 배길 수 없었다. 불콰해진 두 볼과, 뻘개진 귓불이 이미 약간은 취한 것처럼 보였다.
"하하, 물론 지금은 없지만 항상 없지는 않았어요."
"그으래?"
미숙의 혀가 슬슬 꼬이기 시작했다.
취기가 오른 그녀는 은근 슬쩍 내 몸에 찰싹 달라붙으며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무슨 재주로 여자를 꼬셨을까나?"
"소개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내세울 건 이것뿐이거든요."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다리를 쩍 벌렸다.
미숙이 흥미로운 눈으로 사타구니를 쳐다보았다.
"확인해 봐야겠는데?"
"확인요?"
미숙이 갑자기 젓가락으로 술잔을 땅땅 거리며 두들겼다.
"자자, 다들 주목!"
"뭐에요 언니?"
"왜?"
파트너들과 대화를 나누던 다른 여자들도 미숙에게 집중했다.
"적당히 술도 먹었는데 우리 게임이나 할까?"
"무슨 게임?"
"유치한 건 사양이야."
"당연히 화끈하게 가야지."
미숙이 얼음통에 녹고 있던 얼음을 집어 들었다.
"얼음 찾기 게임."
"오, 좋은데?"
"얼음 찾기 게임이 뭔지···."
옆에 앉아 있던 현성이 대신 설명했다.
"파트너가 몸에다 얼음을 숨기면 뒤져서 찾아내는 거야."
"숨겨요?"
"말로 하지 말고 시범으로 해."
옆에 앉은 돼지가 현성을 어깨동무하며 끌어 당겼다. 아무리 봐도 강압적으로 당하는 느낌이지만, 현성은 프로답게 실실 웃으면서 더욱 파고들었다.
"누님~."
"우리 애기 얼음 가져와봐."
"넵."
현성이 잽싸게 얼음통에서 얼음을 집어 들었다.
"숨겨."
현성이 돌아서서 얼음을 입에 삼켰다.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 위치지만,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돼지가 호응했다.
"울 애기 어디다 숨겼을까나?"
‘우엑, 씨발 저녁에 먹은 김치찌개 올라올 것 같네.’
이미 두 사람은 애칭까지 서로 정한 모양이었다.
육덕을 넘어선 거구의 돼지가 가냘픈 현성을 애기라고 부르며 떡 주무르듯 몸을 어루만졌다.
"여깄니?"
돼지가 현성의 가슴팍을 주물렀다. 얼음을 입에 문 현성은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니면 여기?"
이번엔 바지춤.
추행에 가까웠지만 당하는 현성은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은근히 독한 놈이었다.
‘저걸 참는다고?’
[프로는 다르군요. 확실히.]
‘저 씹돼지가 나한테 저 짓거리 했으면 당장 날라 뺨차고 갈비뼈 날려버렸다.’
[주, 주인님.]
"아항, 여기서 숨겼구나."
돼지가 현성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덩치가 워낙에 좋다보니 체구가 작은 현성이 품에 꼭 안겼다.
돼지는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현성에게 입술 박치기를 시도했다.
‘우윽!’
눈뜨고는 못 봐줄 광경이었다.
저건 성폭행이나 다름없다.
강제 프렌치 키스라니!
차마 현성이 불쌍해 고개를 돌렸다. 쩝쩝거리는 소리는 한참을 이어졌다. 잠시 후 이빨 사이에 얼음을 베어 문 돼지가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거야? 쉽지?"
오, 신이여.
부디 현성을 구원하소서.
나는 그에게 축복을 빌어주었다.
그는 분명 이 바닥에서 대성할 것이다.
"자, 우리도 해볼까?"
현성이 당하는 모습에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키는데 갑자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정화라는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언니. 다른 사람이 숨겨줘야 재밌죠."
"니가 할래?"
"야 신입. 너 일루와봐."
정화가 건방지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가 미숙을 향해 말했다.
"언닌 눈감아."
"오케이."
미숙이 다소곳이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들은 정화가 어디에 얼음을 숨길지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신참. 오늘 처음이랬니?"
"네."
"신고식 한 번 제대로 해보자. 열중 쉬어."
"네?"
"군대 안갔다 왔니?"
"아, 네넵."
두 팔을 허리 뒤로 돌려 열중 쉬어 자세를 취하자 정화가 씩 웃더니 바지춤을 벌렸다.
"어, 어?"
그러더니 얼음을 팬티 속으로 쏙 밀어 넣는 게 아닌가.
‘아흑, 씨발, 이게 뭐야!’
얼음이 대물 틈으로 빠지더니 불알과 팬티 사이에 걸렸다.
< 754.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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