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8. 중수의 자격-77- >
정음을 집까지 바래다 준 도훈은 곧바로 정마담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뭐야? 오늘부터 나오라는 거 아니었나?’
도훈은 혹시나 자신이 날짜를 착각한 줄 알고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선수 부족하다고 이번 주부터 금요일, 토요일 나오라지 않았던가?’
[저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희한한 사람이네. 방학 부터 나간다던 사람을 급하다면서 주말 알바라도 오라 할 땐 언제고···.’
도훈이 다시 통화를 시도하려는데 마침 정마담 쪽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하셨나요? 부재중이 남아있어서···.
왠지 피곤해 보이는 목소리.
낮게 깔린 목소리 끝이 심하게 갈라져 나왔다.
"정 사장님. 저 이정웁니다."
-이정우? 이정우가 누구지?
"왜 저번 중고차 박미영 팀장님 소개로···."
도훈은 자신이 불러놓고 이름조차 까먹어버린 정마담의 태도가 살짝 짜증났지만, 워낙 관리하는 선수들이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며 이해했다.
사원은 사장 한명만 기억해도 되지만, 사장은 모든 사원들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 미영이? 아! 그때 그···. 미안해, 내가 요새 좀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어. 기억하지 이정우. 그 안면마비.
"네. 기억하시네요. 오늘부터 가게 나오라고 하셔서 연락드렸어요."
-그랬구나. 미안, 내가 깜빡- 콜록! 콜록!
수화기 너머로 거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폐 깊숙한 곳에서 갈려나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폐병 환자 같았다.
"어디 아프세요?"
-콜록콜록! 아이고, 죽겠네. 독감이 심하게 걸렸는지 도통 낫질 않아. 그저께 병원에 왔더니 폐렴끼가 있다면서··· 콜록! 지금 이틀 째 입원중이고.
"저런···."
-오뉴월에 감기라니 내가 별꼴을 다···. 아참, 내가 이런 얘길 왜 너한테 하고 있니.
정마담은 심한 고열과 기침 때문인지 정신이 없어 보였다. 겨우 기침을 멈춘 정마담이 다시 도훈에게 말했다.
-아무튼, 전화 잘했어. 오늘부터 출근하면 돼. 내가 가게에 연락해 놓을게.
"아···. 그럼 사장님은 안 계시고요?"
-나는 당분간 몸 좀 추슬러야 출근할 수 있을 거 같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몸 상하면서까지 일 할 순 없잖니. 아는 동생한테 가게 맡겨 놨으니까 잘 따르고. 혹시 모르고 있음, 콜록! 김상무에게 물어봐. 그게 더 빨라.
"김상무님은···."
-기억 안나? 저번에 가게에 있던 잘생긴 지배인 있잖아."
"아아, 네 기억나요."
-암튼 좀있다 연락해 놓을 게. 그럼 수고.
"네, 쉬세요."
뚝-
통화를 끝마친 도훈은 어처구니가 없는 마음에 일단 차에서 내렸다.
‘그러니까, 나를 채용한 정 마담이 한동안 가게에 못 나오는 상황이라는 거지, 지금?’
[저는 그렇게 들리는 군요.]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시작부터 뭔가 꼬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가게는 당분간 새끼마담이 대신 맡고 있고. 아니지. 김상무라는 사람이 실질적인 지배인이겠구나, 현재로선.’
[아마도요.]
‘이거 좀 복잡해지겠는데.’
[왜 그러십니까?]
‘생각해봐. 내가 이번 호빠 알바를 시작한 이유가 뭐야?’
[박미영 팀장에게 소개 받아서?]
‘아니지. 그건 계기고.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 미션 때문이잖아.’
[그렇죠.]
‘더 정확히는 미션에 걸린 경매 낙찰권을 얻기 위해서였고.’
[맞습니다.]
‘문제는 정마담은 내가 안면마비가 와서 얼굴이 뒤틀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단 말이야. 박미영 팀장에게 보증도 받아서 원래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고.’
[네.]
‘하지만 새로 바뀐 마담은 나에 대해 인수인계를 못 받았을 거 아냐.’
[흐음.]
‘한마디로 나에 대한 조력자가 전혀 없는 상태로 쌩판 경험없는 호빠 알바를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얼굴도 빻은 상태로.’
[그렇겠네요. 그래도 김상무라는 사람은 주인님에 대해서 좀 알지 않습니까?]
‘얼굴이야 봤겠지. 근데 제대로 기억이나 하려나? 가게에 일하는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데, 잠깐 면접만 보고 갔던 사람을.’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그럼 미션은 포기하시는 건가요?]
도훈은 담배를 연거푸 피우며 계속 생각했다.
시작부터 꼬여버린 상황.
정마담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면 모를까, 현재로선 굉장한 악조건에서 미션을 받아든 꼴이 되고 말았다.
‘정신조작류 스킬하고 아이템 사용 금지랬나?’
[네. 미션 자체의 난이도도 굉장히 높은 편입니다. 사실 빻은 얼굴로 뭘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군요.]
‘하-. 진짜. 안 그래도 거지같은 미션에 완전 무장해제 상태로 시작하게 생겼구만.’
도훈이 담뱃재를 손가락을 튕기며 재를 꺼뜨렸다.
[그럼 포기···.]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할 순 없잖아. 어쨌건 경매 낙찰권은 꼭 필요하니까.’
일전에 가상현실에 접속한 이후 도훈은 경매장에 있는 수많은 아이템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원하는 물건을 우선 낙찰 받을 수 있는 미션 보상을 어떻게든 얻고 싶었다.
‘도전하겠어.’
[오오!]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도훈은 다시 차에 올라 본인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어제 백화점에서 고른 정장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자, 호리호리한 제비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캬,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이제는 자신의 얼굴이지만, 첫눈에 봐도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본 주인 이도훈이 가진 타고난 얼굴에, 그간 갈고 닦은 색기와 매력이 더해져 지금은 누가봐도 끌리는 남자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 미션을 수행할 순 없었다. 애초부터 빻은 얼굴이 할 수 있어라는 미션의 전제는, 얼굴을 빻아야지만 가능했다.
"이 잘생긴 얼굴을 일부러 망가뜨려야 하다니···."
[기운 내십시오. 얼굴이 좀 바뀐다고 주인님이 주인님이 아닌건 아니니까요.]
‘그래. 위로 고맙다. 그때 그 마사지 팩 꺼내줘 봐.’
[넵.]
도훈은 페이스 오프 마사지 팩을 꺼내들어 얼굴에 붙였다.
‘그때 그 뒤틀린 얼굴로 바꿔줘.’
[넵.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팩을 떼어나자 금새 못생긴 도훈이 되어 있었다. 분명 곰곰히 뜯어보면 도훈이지만, 이목구비가 미묘하게 틀어지면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으으. 이게 정녕 내 얼굴이라니."
아침에 홍보 포스터 찍으러 갈 때는 모델 제의를 받을 만큼 훈남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두 번 보기도 싫을 만큼 추남으로 변해 버렸다.
심각한 낙폭에 도훈이 자괴감을 느꼈다.
‘그 말이 정말 맞나봐.’
[어떤 말이요?]
‘본래 성형외과의사가 말하길 미남과 추남의 차이는 3%라고 하잖아.’
[3%요?]
‘응. 얼굴에서 딱 3%만 바뀌면 미남이 추남이 되고, 추남이 미남이 될 수 있다더라고. 그만큼 미묘한 차이가 크다는 말이지. 생각해보면 쌍꺼풀과 외까풀은 한껍데기 차이거든. 그게 인상을 바꾸고.’
[아하. 어쨌든 기운 차리십시오, 주인님. 얼굴은 빻았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주인님에겐 강력한 한방이 있으니까요.]
‘이거 말이지?’
도훈이 바지춤 위로 대물을 움켜쥐었다.
묵직한 대물은 여전한 위용을 과시했다.
아무리 얼굴이 바뀌었다한들, 대물이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것만 있으면 세계도 정복할 수 있을 만큼 든든했다.
‘내 파트너가 얼굴 안보고 이것만 밝히는 여자였으면 좋겠군.’
도훈은 이어 나머지 스타일링을 마무리했다. 매직드라이로 머리를 예쁘게 만들고, 백옥 크림을 이용해 피부 결을 가다듬었다.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호박에 줄긋는 수준.
[큰 차이는 없어 보이는데요.]
‘아니야. 그래도 이런 사소한 게 중요해. 원판이 못생긴 건 본인 잘못이 아니지만, 헤어스타일이나 피부 등은 전혀 다른 문제거든.’
[그런가요?]
‘요컨대 꾸밀 줄 아는 남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거야. 얼굴은 좀 못났지만 깔끔한 인상을 줄 수 있잖아. 그게 중요한거거든.’
[흐음.]
‘어쨌든 이제 슬슬 출발해야겠다. 내 차는 두고 가야 하나?’
[차를요? 일이 새벽에 끝나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가면 술시중 들어야 할 거 아냐. 호빠니까.’
[아···. 그렇군요.]
‘그리고 새벽에 데리고 올 대리기사도 미리 섭외해 놨으니.’
[민주양 말씀이시군요.]
‘응.’
[하긴 10시간 뒤면 역용이 풀릴 테니 그땐 상관 없겠네요. 그리고 말 나온김에 민주양에게 좀 잘해주십시오. 아까 정음양에게 하던 것의 반만 해도 엄청 감동 먹을 텐데요.]
‘민주에겐 그게 잘해주는 거야.’
[네?]
‘생각해봐. 민주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를. 학생 주제에 선배이자 조교인 자신을 막대해서 그렇단 말이지.’
[흐음.]
‘그런데 내가 갑자기 깍듯이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이 된다고 해서 민주가 정말 좋아할까? 오히려 매력을 잃어버리겠지. 자고로 누구나 몸에 맞는 옷이 있는 거야. 민주의 경우엔, 그게 왕 싸가지 이도훈이고. 1:1 맞춤식이랄까?’
[거참. 대답은 청산유수네요.]
‘얼굴이 빻은 마당에 말 빨이라도 통해야 뭘 해보지.’
채비를 마친 도훈은 호빠 가게를 향해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 저녁 8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
김상무 초저녁부터 골이 나 있었다.
"이것들이 청소 똑바로 못해? 여기 꽁초 안보여?"
룸을 일일이 점검하던 김상무는 쇼파 틈에 처박힌 꽁초를 기어코 찾아내더니 웨이터들을 닦달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안 계신다고 이따위로 할 거야? 어?"
"다시 치우겠습니다."
"이것들이 말이야, 빠져 가지고 진짜! 한 따까리 해야 정신차리지?"
"시정하겠습니다."
"개시 전 룸 다시 돌아 볼거야. 그때도 이 상태면 뚝배끼 확 깨버린다."
"넵!"
김상무가 한 껏 역정을 내고 나오는데, 입구밖에서 가슴이 훤히 패인 옷을 입은 최마담이 그의 어깨를 은근슬쩍 어루만졌다.
"가게 개시도 전부터 역정이야, 김상무는."
"아, 오셨습니까 최사장님."
김상무가 한 걸음 물러서더니 거리를 갖추고 깍듯이 인사했다. 최마담은 김상무의 모습에 오히려 미간을 찌푸렸다.
‘얘는 나만 보면 거리를 두려고 하네.’
"호호, 내가 무슨 사장이니. 임시로 언니 가게 맡아 주는 건데. 그리고 둘이 있을 땐 이름 불러도 된다고 했잖아."
"아닙니다. 애들 다 듣습니다."
최마담, 최희령은 정마담과 한 살 아래 동생이었다. 정마담과 함께 화류계 생활을 입문했으며, 1년 전 근사한 스폰을 하나 물고는 한동안 두문불출 하고 있었다.
몸 져 누운 정마담은 김상무 혼자 가게를 맡는 것이 벅찰거라고 생각했고, 이쪽 생활에 빠삭한 동생을 불러 임시로 가게를 맡겨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흔쾌히 언니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 같았던 최마담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정마담의 심복인 김상무.
잘생긴 얼굴에 충직한 김상무를 예전부터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희령은 이번 일이 그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녀의 스폰서는 집도 차도 사주고 용돈도 넉넉히 주는 편이었지만 나이가 60에 가까운 노인네다 보니 젊은 남자의 살결이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류계 생활을 10년 넘게 전전했던 최희령은 궁하다고 화류계 남자를 찾고 싶진 않았다. 원래 그 바닥 생활에 서로 빠삭할수록 서로를 너무 잘 알게 되고 경멸하게 되는 게 당연했다.
‘고 놈 참 따먹고 싶게 생겼단 말이지.’
희령은 김상무의 날카로운 코끝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김상무는 화류계에 몸담고 있긴 했지만, 애초에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저 얼굴이면 그냥 선수를 했어도 훨씬 돈을 잘 벌었을 텐데 우직하게 가게 관리를 맡으며 정마담에게 충성을 받쳤다.
한번은 김상무가 탐이 난 희령이 정마담에게 물었다.
-쟤, 언니 기둥서방이지?
-아닌데?
-근데 왜 언니만 졸졸 따라다녀? 다 늙은 아줌마가 뭐가 좋다고?
-보톡스 맞아서 주름 다 폈거든 이것아? 그게 아니고 오갈데 없는 앨 받아줬더니 엄청 충성하더라고. 정이 고팠던 아이 같아.
-쟤 깜빵 다녀왔다며?
-어.
-죄목이 뭔데?
-그건 말 안하던데. 야, 너 그리고 쟤한테 눈독 들이지마. 스폰 한테 바람 피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면서 그러니?
-안 걸리면 그만이지 뭐.
"깐깐하시긴. 아무튼 오늘도 상무님만 믿어요."
"네, 최사장님."
끝까지 자신을 깍듯하게 대하는 모습에 희령도 두 손 두발 다 들고 말았다.
‘거 진짜 뻐팅기네. 다음에 기회 되면 술에 약을 타서라도 따먹어 버려야지. 한 번 자고 나도 네가 나를 피할 수 있을까?’
치덕거리는 최희령을 피해 가게를 빠져나오던 김상무에게 웨이터 한명이 다가왔다.
"저 상무님."
"왜?"
"손님이 한분 찾아오셨는데요."
"이 시간에? 아직 선수들도 출근 안했는데 무슨 손님?"
"그게 아니라 김상무님을 개인적으로 찾아오신 손님입니다."
"나를?"
"네. 여기 일하러 왔다면서···."
"선수 모집은 정사장님 퇴원하시고 한다고 하고 쫓아 보내. 사장님 면접 안 거치고 선수 들인 일은 없으니까."
김상무가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웨이터가 난처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저, 그게···. 이미 면접을 봤다던데요?"
"뭐?"
정마담이 쓰러진 건 3일 전.
근래에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은 자신의 기억엔 없었다.
"누군데 대체?"
"이쪽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상무가 웨이터를 따라갔다.
누군지 몰라도 거짓말을 했다면 혼쭐을 내줄 생각이었다.
< 748. 중수의 자격-7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