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2. 중수의 자격-71- >
"예? 켁켁!"
음료를 홀짝거리던 정음이 제풀에 놀라 목이 멨다.
어색한 반응에 민주의 눈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뭘 그렇게 놀라니? 정말 사귀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조교 선생님."
도훈이 목소리를 깔며 으르렁 거렸다.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
하지만 민주는 평소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질투에 눈이 멀어 자제력을 잃은 모습이었다.
"호호, 얘 반응이 좀 그렇잖아.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지. 뭘 또 그렇게···."
도훈의 입술 끝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정음은 민주와 도훈의 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민주는 도훈의 바람기를 의심했다.
도훈은 두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불편했다.
‘이게 나를 엿 먹이려고 작정했나?’
[정음양 앞에서 주인님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는 걸 믿고 그러는 것이겠죠.]
로시의 추측대로였다.
어쨌거나 민주는 체육교육과의 대 선배이자, 학과의 조교.
둘만 있을 땐 도훈의 몸종(?)이나 다름없는 그녀라도, 공적인 자리에선 엄연한 갑의 위치였다.
하지만 정음을 방패삼아 자신을 도발하는 모양새가 영 못 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랑 전 그냥 친한 선후배 사이에요."
"원래 처음엔 다 그렇게 시작하지."
민주가 계속 관계를 몰아갔다.
"뭐 어때? 둘 다 선남선녀라서 잘 어울리는데. 아, 그러고 보니 도훈이 너 군대 가기 전에도 과씨씨 했지 않아?"
이번엔 불똥이 도훈에게 튀었다.
의도된 쓰리쿠션.
가락을 돌려 도훈을 때리는 수법이다.
‘저게 진짜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의도가 뻔해다. 치사하고 야비한 수법이다.
민주는 도훈과 정음이 사귈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적어도 썸을 타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훈의 과거를 들먹여 둘 사이를 이간질 하는 것이다.
정음이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면 무척 불쾌할 것이고, 설사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재차 언급을 통해 균열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명백한 흠집 내기에 도훈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옛날 일을 꺼내고 그러세요?"
"호호, 뭐 얼마나 됐다고? 너 신입생 때 나도 졸업반이었는데. 그때 사귄 사람이 우리 동기였지 아마?"
"조교 선생님."
도훈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
이건 정도가 지나친 도발이었다.
‘한 번 해보자는 거지?’
[수위가 도를 넘어서네요. 정음양이 몹시 불편할 것 같은데···.]
"아, 그 얘긴 저도 들었어요."
그때 조용히 앉아있던 정음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들었니?"
"네, 동기들 사이에서 한 번 소문이 돌았던 이야기라."
"호오."
"근데 뭐 그게 별 건가요? 요즘 누가 그런 걸 신경 쓴다고."
정음이 평소와 달리 되바라진 목소리로 받아쳤다. 늘 윗사람에게 예의바르고 깍듯하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사귀고 헤어지고, 또 다시 누군가를 만나고. 조교 선생님도 학부생 때 CC해보시지 않았어요?"
정음의 반격.
도훈은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이 빙의한 줄 착각했다.
그만큼 의외의 모습이었다.
[오, 정음양에게 저런 모습이!]
‘나도 좀 놀랬어. 원래 선배들한테 무척 예의바른 아인데···.’
[강민주 조교가 주인님을 곤란하게 하는 모습에 화가 난 모양입니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순한 타입은 아니었지 원래?’
정음은 본디 괄괄한 성격이었다.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남자애들하고 격의 없이 어울렸다.
더구나 고등학교 때 선발전에 나갈 정도로 태권도를 오래 배운 터라, 평소 뿜어져 나오는 기백이 여장부 못 지 않았다.
도훈을 만날 때는 천상여자로 돌변했지만, 또래들 사이에선 흔히 말하는 걸크러쉬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민주 또한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정음의 반격에 움찔 놀라고 말았다. 이제껏 풋내기쯤으로 여기던 정음이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을 쳐다보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가만있자니 선배로서 면이 서질 않았고, 찍어 누르자니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그녀는 회피를 선택했다.
"그, 그렇지. 요샌 뭐···. 아이고, 내가 괜히 쓸데없는 얘기를 꺼냈나 보다. 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민주가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화장실로 사라지자 정음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며 말했다.
"조교 선생님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응. 그러게."
"오빠가 기분 나쁠 거 같아서 저도 모르게···."
"아니야. 난처했는데 대신 나서줘서 고마워."
도훈은 정음이 더욱 사랑스러웠다.
자신의 남자를 욕보이자 참지 못하고 들고 일어서는 모습에서 감동을 느꼈다.
‘역시 본처다운 모습이랄까.’
[정음양은 늘 씩씩하니까요.]
그때 부르르 문자가 날아왔다.
-강민주 : 주인님, 혹시 기분 나쁘신 거 아니죠?
민주의 문자를 확인한 도훈이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도훈 : 너 뭐하는 짓이야?
-강민주 : 저는··· 주인님이 정음양한테 관심이 있는 거 같아서 밀어드리려고 그랬죠.
비겁한 변명이었다.
이간질이 실패하자 태세전환을 하는 것이다.
-이도훈 : 밀어? 아주 낭떠러지로 밀어 주던데?
-강민주 : 죄송해요. 제가 좀 지나쳤나봐요.
"정음아, 나 좀 담배 좀."
"네, 오빠."
도훈이 흡연자라는 걸 아는 정음이 흔쾌히 허락했다.
"아, 잠시만요."
그녀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도훈에게 건넸다.
"이거···."
"뭐야?"
"음, 혹시나 피우고 나서 입이 텁텁할까 봐요."
정음이 준 것은 박하향이 나는 캔디였다.
"이런 것도 들고 다녀?"
"오빠 주려고 가져왔어요."
"고마워."
참으로 세심한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도훈은 그런 정음을 불편하게 한 민주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흡연실로 이동한 도훈은 곧바로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지금 어디야?"
-아, 앗 주인님. 여자 화장실이요.
"오늘 좀 까분다?"
도훈이 화난 목소리로 다그치자 민주가 깨갱 엎드렸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정음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 갑자기 질투가 났나 봐요. 제가 잘못했어요.
"내가 학교에서 그러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죄송해요.
"한번만 더 까불어? 확 그냥···."
-주인님. 다신 안 그럴게요. 제가 잠시 미쳤나봐요.
"됐고. 빤스 내려."
-네?
"빤스 내리라고. 썅!"
다행히 흡연실엔 도훈 혼자뿐이었다.
잠시 후 부스런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민주가 대답했다.
-버, 벗었어요.
"그대로 휴지통에 처박아."
-아···. 네.
민주를 노팬티 차림으로 만든 도훈은 계속해서 명령했다.
"넌 오늘 좀 혼나봐야 겠다."
-하, 하앙··· 호, 혼내주세요. 주인님. 민주는 혼나야 돼요.
"립스틱 가지고 있어?"
-네, 가방에.
"꺼내."
-꺼냈어요.
"박아."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구멍에 처박으라고!"
도훈이 일부러 사납게 소리쳤다.
그럴수록 민주가 흥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 하아··· 바, 박을게요.
"너 같은 걸레 봊이라면 립스틱 정도는 그냥 들어가지 않아?"
-하, 학. 마, 맞아요.
"쑥 들어가지?"
-저, 젖어버렸어요.
"끝까지 밀어넣어."
-끝까지 밀어 넣었어요.
"좋아. 그대로 일어서."
-네?
"이제부터 봊이에 힘 꽉두고 다니는 게 좋을 거야. 빠지면 앞으로 너는 안 박아 줄테니까."
-주, 주인님!
"알았어? 걸을 때 조심하라고. 립스틱 떨어지면 너랑은 이제 다신 안 볼 테니까."
-주, 주인님 제발···.
"나는 쪼임 약한 여자랑은 박기도 싫어."
-하, 하악, 노력할게요. 제발 민주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뚝-
도훈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마침 담배도 모두 피웠기에 자연스럽게 흡연실을 빠져나왔다.
"전화하시고 오신 거예요?"
혼자 심심하게 기다리고 정음이 도훈에게 물었다.
"어, 잠시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
"아···. 오빠 친구는 아직 한 명도 못 봤구나."
정음의 대답에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그가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 또 평소엔 누구와 만나는지 관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도훈은 정음의 관심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가? 다들 다른 대학에 다니고 있어서 말이야. 하하. 군대가 있는 친구들도 많고."
"···그렇구나."
왠지 대답을 회피한 느낌이라 도훈도 찝찝했다.
연인이라 생각한다면 당연히 친구에게 소개시켜 준다는 말이 나왔어야 했을 것이다.
‘음, 정음이가 좀 실망한 눈친데?’
[그래 보이네요.]
‘그러고 보니 이도훈 이 자식은 친구도 없나?’
[없을리가요. 당연히 있죠. 다만 주인님 말대로 대부분 군대에 간 상황입니다.]
‘아, 그렇겠구나.’
이도훈의 몸으로 이정우의 혼백이 들어왔을 당시는, 군대에서 전역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1학년 마치자마자 군대로 직행한 이도훈은 또래 중에선 제법 빠른 편이었으니,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군대에 가 있거나 전역을 앞둔 상태였다.
도훈은 정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방금 전화 온 친구도 전역을 앞둔 친구야."
"아, 정말요?"
"응. 곧 말년 휴가라면서··· 나오면 얼굴이나 보자고."
"아···. 친한 분이세요?"
‘윽, 괜히 꺼냈나?’
[그러게 왜 뻥을 치셨습니까?]
‘더 안 물어 볼지 알았지. 안되겠다. 일단 아무나 지어내야지.’
"응.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
"그러시구나. 오빠 친구들 어떤 분인지 궁금해요."
"하하, 그, 그래. 나중에 기회되면 소개시켜 줄게."
"네."
도훈이 난처해하던 그때 화장실을 다녀온 민주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걸음걸이가 이상한게 똥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이었다.
"으, 음 미안. 좀 늦었네."
어기적거리며 걸어오던 민주가 황급히 자리에 앉았다.
도훈은 그녀가 왜 그렇게 걷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속으로 씩 웃었다.
"조교 선생님 어디 불편하세요?"
"아, 아니?"
"걷는 게 좀 불편해 보이셔서."
"아···. 그게 어제 스트레칭을 좀 심하게 했더니 허벅지가 당기지 뭐니. 호호."
"그러시구나."
‘구멍에 립스틱을 처 박으니까 그렇겠지. 크크.’
[짓궂으시네요. 주인님이 시키시고선.]
‘쟤는 좀 혼나봐야 돼. 어디서 주인한테 덤벼, 덤벼기를.’
도훈은 맞은편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앉은 민주의 다리 아사이에 슬쩍 발을 끼워 넣었다. 테이블 밑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보니 정음은 전혀 눈치를 못 챈 상황.
‘벌려 이것아.’
도훈이 발목을 옆으로 차며 다리를 벌리자 민주가 무릎에 바짝 힘을 주며 버텼다.
"으, 읍. 너, 너희들 근데 케잌은 안 먹니?"
"선생님이랑 같이 먹으려고요."
"그래. 내가 잘라줄게."
"포크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포, 포크."
"제가 가져올게요."
정음이 대신 일어서려고 하자 도훈이 말렸다.
"아냐. 내가 가져올 게."
도훈은 일어서는 척 하며 다시 한번 민주의 발목을 확 걷었다. 민주가 안간힘을 쓰며 버텨냈다.
‘후훗-. 안 떨어뜨리려고 용을 쓰는구나.’
카운터에 간 도훈은 포크를 건네받더니 다른 간식을 보며 말했다.
"조교샘. 혹시 허니 버터 브레드 드실래요?"
"응?"
"케잌 하나론 부족할 거 같아서요. 제가 살게요."
"괘, 괜찮은데···."
민주는 도훈이 무슨 수작을 벌이는지 몰라서 두려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과연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던 도훈은 갑자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지갑. 차에 놓고 왔네."
도훈은 점원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지갑을 차에 놓고 와서···."
"오빠, 제가 살게요."
정음이 가방을 뒤적이려고 하자 도훈이 완강하게 말했다.
"어헛! 어디 1학년이 선배들 앞에서 지갑을 열려고?"
"네?"
"원래 그런 건 예의가 아니야. 여기 대 선배님도 계신데."
"그래도··· 앞에 것도 조교선생님이 사셨으니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얻어먹겠어? 안 그래요 조교 선생님?"
도훈이 민주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며 능글맞게 말했다.
민주가 도훈의 의도를 깨닫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는 구나. 쉽게는 안 당하지.’
"그래. 내가 살 게."
"그럼 너무 죄송한데···."
얻어먹는 게 불편했던 정음이 미안해했지만, 민주는 이미 핸드폰을 꺼낸 상태였다. 도훈은 그녀가 맨 처음 계산할 때도 핸드폰 카드 결제 한 것을 눈 여겨 보고 있었다.
지문 인식을 통해 삼땡페이 결재를 활성화 시킨 민주가 도훈에게 폰을 건넸다.
"이걸로 계산하고 와."
"네."
대체로 삼땡페이는 지문인식 후 40여초의 시간동안 쓸 수 있다. 따라서 굳이 본인이 직접 가지 않아도 핸드폰을 받아 가면 결제가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내가 호락호락 당할 줄 알고?’
물론 도훈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계산대 앞에서 시간을 끌더니 페이 결제를 꺼버리고는 다시 소리쳤다.
"조교샘. 죄송한데 지문인식 다시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뭐?"
"이게 꺼져가지고."
"아, 아니 그게 왜···."
결국 민주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에서 카운터까지의 거리가 구만리처럼 보였지만, 어쨌든 이 시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도훈은 절대 용서해 주지 않을 기세였다.
‘기어코 나를 일으켜 세우는 구나.’
민주가 어기적거리며 카운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 할 수 있어. 힘만 꽉 주면···.’
립스틱 끝이 구멍끝에 아슬아슬 걸쳐졌다. 조금만 실수 하면 입고 있는 치마 사이에서 애액에 푹 젖은 립스틱이 굴러 떨어질 것이다.
< 742. 중수의 자격-7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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