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1. 중수의 자격-70- >
***
세미나실로 들어가자 사진작가 한명이 앉아 있었다. 빵모자를 눌러쓰고 검은 뿔 태 안경을 쓴 30대 남성이었다.
예술가 코스프레 하나?
"아, 오늘 사진 찍을 모델 분들?"
사진작가의 물음에 민주가 대신 나서 대답했다.
"네, 체육과 학생들이에요."
"이야, 인물이 훤칠한데? 모델 잘 뽑았네."
사진작가는 나와 정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쪽에 앉아요. 촬영 컨셉에 대해 얘기 좀 나누고 샷 들어갑시다."
우리 넷은 원형의 테이블에 빙 둘러 앉았다. 세미나실 구석엔 회색 배경판과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앞으로 커다란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창가엔 암막 커튼까지 미리 쳐진 것으로 보아 일찍 와서 미리 세팅을 해둔 것 같았다.
"아까 대학 관계자 분하곤 대충 얘기 했어요. 배경은 어제 따놨고, 인물 샷 찍으면 나중에 합칠 거예요."
"사진을 합성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혹시 이런 일 해 봤어?"
"아뇨. 오늘이 처음인데요."
"그래?"
사진작가는 안경을 고쳐 쓰더니 세심하게 나를 관찰했다.
노골적인 눈길이 민망할 정도였다.
"흐음, 잘 생겼네. 카메라 잘 받겠어. 이 친구 무슨 학과라고 했지?"
민주가 내 매니저라도 되는 양 대신 대답했다.
"체육교육과에요. 두 사람 다."
"아, 체육. 그래서 와꾸가 좋았구나. 의상도 직접 고르고?"
"네, 뭐···."
"옷 입는 센스도 훌륭하네. 혹시 다음에 기회 되면 모델일 해볼 생각 없어?"
"예? 저요?"
"아, 미안 미안. 내가 원래 배우나 모델 프로필 사진 전문이걸랑. 대학 홍보 포스터 모델하기엔 너무 아까운 거 같아서."
"말씀은 고맙습니다."
"그 얘긴 나중에 하고 일단 촬영 컨셉부터 잡아 보자고."
사진작가는 나와 정음을 두고 한참 설명했다. 사진 한 장 찍는데 무슨 이렇게 복잡한 논의가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초보자가 듣기엔 굉장히 전문적인 내용이라 대충 흘려들었다.
"···무슨 소린 지는 알겠지?"
"네 뭐, 대충은."
"여자 분은?"
"열심히 해볼게요"
"좋아, 좋아. 아주 둘 다 인물이 좋으니 작품 나올 것 같아. 자, 시작해 보자고. 조교선생님은 바쁘시면 이제 가셔도 좋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민주는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놀라 대꾸했다.
"저도 옆에서 뭐라도 도와드리려고요."
"아니에요."
"그래도 저희과 소속 학생들인데···."
"촬영할 때 괜히 아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더 긴장해서 표정이 안 나와서요."
"그, 그런가요?"
민망해 하던 민주가 머쓱해하며 물러났다. 나를 보는 눈빛이 무척이나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특히 정음과 단 둘이 있다는 사실이 몹시 불편한 듯 했다.
민주가 밖으로 나간 뒤 잠시 후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보나마나 민주겠지.’
-강민주 : 주인님 촬영 잘 하시고 있다가 봐요. 학과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굳이 대답하지 않고 문자를 씹었다.
민주는 무시할수록 더욱 불타오르는 여자니까.
"그러면 카메라 잘 받는지 한 번 봐 봅시다. 저기 한 번 서 봐요, 남학생부터"
사진작가의 말에 카메라 앞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정음은 옆에서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카메라 뷰파인더를 지켜보던 사진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장한 거 아니지?"
"네?"
"표정이 살짝 부자연스러워서."
"아, 제가 이런 촬영이 처음이라···."
"긴장 풀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무슨 면접 보러 온 취준생 같아."
"오빠, 파이팅."
정음이 응원했지만 여전히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도 모르겠고, 가만히 서 있는데도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무래도 이정우 시절 외모 컴플랙스로 사진을 기피했던 습관이 반사적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사진작가가 답답한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흐음, 안 되겠는데. 어색한 티가 너무 나. 다음은 여학생."
옆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정음과 바톤 터치를 하며 물러났다. 정음의 화면을 확인하던 사진작가의 표정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오, 좋은데? 카메라빨 되게 잘 받는다. 표정도 괜찮아."
"앗, 감사합니다."
"저 여학생처럼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야지. 옆으로 한 번 돌아봐요. 한 손 허리에 올리고."
"이렇게요?"
정음이 자세를 취하자 사진사가 흡족해 하며 셔텨를 눌렀다.
플래쉬가 터지자 정음이 움찔 놀라 물었다.
"방금 촬영 들어간 건가요?"
"아니. 표정이 너무 좋아서 한 번 테스트 해봤어. 카메라 의식하지 말고 시선 처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네."
찰칵-! 찰칵-!
정음은 처음 하는 촬영임에도 나와 달리 굉장히 칭찬을 많이 받았다. 내가 보기에도 정음은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분야는 정음양이 훨씬 재능 있어 보이는 군요.]
‘으으, 쪽팔려. 하필 정음이 앞에서···.’
[어쩔 수 없지요. 주인님이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니.]
‘아니, 나도 몰랐는데 카메라 앞에서 서니까 영 불편하더라고. 이정우 시절엔 키가 작다보니 사진 찍을 걸 엄청 싫어했거든. 셀카 같은 것도 거의 안 찍고.’
[지금이랑 그때랑 비교할 수 있나요? 주인님은 누가 봐도 객관적인 미남인걸요.]
‘그게 아니라···. 아 뭐라 해야 하지? 약간 카메라 울렁증 같은? 차라리 뭔가를 하면 모르겠는데, 혼자 카메라 앞에서 포즈잡고 멀뚱히 서있는 게 어색해 죽겠어.’
[흐음. 이건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군요.]
‘정음이 앞에서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모처럼 얼굴까지 단장하고 온 나로선 정음 앞에서 자존심을 구기자 괜스레 오기가 솟구쳤다. 특히나 달라진 외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정우 시절의 트라우마가 남아있다는 게 몹시 못 마땅했다. 몸뚱이는 바뀌었는데 정신은 그대로였다.
‘이대론 안 되겠어. 대책을 마련해야지.’
[대책이라뇨?]
"작가님 저 잠시 화장실 좀···."
"그래. 긴장 좀 풀고 와."
"네."
테스트 촬영을 하는 정음을 두고 나왔다.
[어쩌시려고요?]
‘이대론 쪽팔리니까 연기라도 하려고.’
[연기요?]
‘그래. 프로필 촬영하는 프로 모델 역할로.’
[아! 메소드 마스터 아이템이 있었군요!]
‘그렇지.’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빠르게 담배를 빨았다. 연기력을 끌어 올리는 메소드 마스터 담배였다.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나는 프로 모델이다.
수십 차례 프로필 촬영을 한 베테랑이다.
담배를 모두 피웠을 땐 어느새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다만 아이템의 지속시간이 빠르게 줄어들므로 서둘러야 했다.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온 나는 대뜸 작가에게 말했다.
"지금 바로 촬영 들어가도 될 까요?"
"바로? 괜찮겠어? 연습 좀 더 해 보지."
"아니에요. 속을 비우고 왔더니 긴장이 풀렸어요."
"아, 배탈이 난 거 였군. 그래. 한번 가보자고."
"오빠. 잘 하세요!"
정음이 귀여운 목소리로 나에게 응원을 건넸다.
역시 착한 아이다.
메소드 마스터의 효과 때문인지 조명을 받으며 카메라 앞에 서는데도 전혀 떨림이 없었다. 모든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오히려 약간의 희열감마저 들었다.
운동선수는 필드에 설 때 가장 흥분하고, 가수는 관객 앞에서 노래할 때 삶의 존재 의의를 느낀다고 한다. 프로 모델에 빙의한 나는 카메라 앞에서는 순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오, 표정 엄청 좋아졌는데? 바로 그거지!"
작가가 자기도 모르게 찰칵- 셔텨를 눌렀다.
순간을 포착하는 순발력이 무척 섬세한 작가같았다.
나는 그가 요구하는 데로 자세를 취하며 몇 장을 더 찍었다.
뷰 파인어로 찍힌 사진을 넘기던 작가가 혀를 내둘렀다.
"이야, 아까랑 완전 딴 판이네. 거를 게 없는 타선이야."
찰칵- 찰칵-!
셔터가 정신없이 돌아갔다.
서 있기만 해도 모델처럼 보인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카메라를 씹어 먹을 것처럼 압도적인 연기가 펼쳐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모델이 된 기분이었다.
"이거 너무 잘 나와서 뭘 골라야 될지 모르겠는데?"
"괜찮은가요?"
"괜찮다마다? 이렇게 잘하면서 아깐 왜 그랬지?"
"아···. 제가 실은 속이 불편해서."
"그랬구나! 지금 엄청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남학생은 이제 됐고, 여학생 이어서 찍고 투샷으로 갈게."
촬영은 연달아 이어졌다.
마지막 투 샷 장면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 촬영은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장비를 정리하던 사진작가가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내가 대학 다니면서 모델들 촬영 많이 했는데, 이렇게 잘 사진 잘 받은 사람은 학생들이 처음이야. 특히 이도훈 군이랬나? 자넨 체육 선생 하기엔 너무 아까운데."
"과찬이세요. 감사합니다."
"진짜야. 내가 유명한 배우나 모델들도 몇 번 찍어봤는데, 자네처럼 카메라 잘 받는 사람도 드물 거야. 암튼 나중에 배경이랑 합성하고 나면 완성본 보내줄게. 둘 다 표정이 너무 좋아서 보정도 필요 없겠다."
"네."
"근데 두 사람···. 혹시 사귀는 사인가?"
"예?"
"아니, 입고 온 의상 컨셉도 비슷하고. 무척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
정음이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작가가 계속 말을 이었다.
"맞구나? 어쩐지 딱 촉이 오더라니. 내가 커플 사진 찍어준 셈이네. 돈 받아야겠어."
나는 일부러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씩 웃기만 했다.
"암튼,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 여기 명함 줄 테니, 나중에 메일 하나만 남겨 줘. 거기로 홍보전단 완성본이랑 앞에 찍은 프로필 사진도 보내줄게. 아, 그리고 커플샷도."
"감사합니다."
이로서 나와 정음이 단둘이 찍은 커플샷이 생겼다.
우리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 탄생했다.
***
촬영을 마치고 나온 정음은 해방감에 펄쩍 뛰었다.
"야호! 끝났다."
아이처럼 기뻐하는 정음을 보며 도훈이 말했다.
"너 잘 하더라 오늘?"
"제가요? 오빠가 훨씬 잘 하시던데요? 작가님도 그랬잖아요. 바로 모델일 해도 되겠다고."
"모델은 무슨···. 참, 오후에 일 없으면 나랑 카페나 갈래?"
"좋아요. 조교 선생님한테 곧 끝난다고 문자 드렸어요."
"뭐? 언제?"
"오빠 잠시 화장실 다녀올 때요."
화장실 이라면 도훈이 마지막 투샷을 위해 메소드 마스터 담배를 피우고 올 때였다. 촬영이 막바지에 이른 그때 정음이 민주에게 문자를 남긴 것이다.
"그럼···."
도훈의 우려처럼 어느새 본부 앞까지 차를 끌고 온 민주가 두 사람을 향해 윈도우를 내려 손을 흔들었다. 양반은 아니었다.
"이제 끝났니? 고생했는데 내가 커피 한 잔 쏠게."
정음은 도훈의 속도 모르고 말했다.
"잘됐네요. 조교 선생님이 커피 사주신다니까 우리 얻어먹어요."
"음···. 그래."
도훈이 똥 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랜만에 단둘이 정음과 회포를 풀고 싶었는데, 민주가 훼방을 놓을 것이 걱정되었다.
‘민주를 혼구녕을 안 낸지 오래됐구나.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말을 안 들어 처먹어?’
[너무 그러지 마시죠. 민주양도 주인님을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음이 앞에서 이상한 짓만 해봐. 가만 안둘 테니까.’
도훈이 이를 뿌득 갈며 차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타려고 하는데 정음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윗사람 차를 탈 땐 보조석에 앉는 게 예의래요."
정음의 완고한 태도에 결국 도훈이 보조석에, 정음 혼자 뒷좌석에 앉았다. 민주는 옆 자리에 앉은 도훈을 보고 몰래 윙크하더니 몰래 한 쪽 치마를 걷어 올리며 허벅지를 훤히 드러냈다.
‘저런 미친!’
다행히 정음이 못 보는 각도였지만, 도훈은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며 엄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조교선생님 근데 안 바쁘세요?"
"응? 나? 괜찮은데? 왜?"
"아뇨. 요새 좀 바빠 보이셔서."
"바쁜 일은 얼추 끝났어. 이제 기말고사만 준비하면 이번 학기도 마무리지."
"그러시구나."
"사진 촬영은 재밌었니?"
"네!"
"호호. 교수님이 엄청 뿌듯해 하시더라. 이번에 우리과에서 학교 홍보 모델이 둘이나 나왔다고."
"신경써주신 덕분이에요."
"근데 저희 어디로 가요? 커피숍은 학교 안에도 있는데."
"촬영하느라 고생했는데 좋은 데 데리고 가야지."
"밖에요? 근데 저도 차를 가지고 와서···."
"응, 걱정마. 내가 나중에 둘 다 데려다 줄게. 정음이 집이 정자동 쪽이지?"
"네. 그럼 거기 들렀다가 다시 학교로 오면 되겠네."
도훈은 마침내 민주의 의도를 깨달았다.
굳이 자기 차를 끌고 온 것이 정음과 함께 있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훼방으로 놓으려는 것이었다.
‘이게 잔머리를 굴리네, 이제?’
[후후. 정음양이냐, 민주양이냐. 그것이 문제로군요.]
‘고민할 여지가 있냐? 민주는 혼구녕을 내주고 정음이는 예뻐해 줘야지.’
도훈은 민주의 의도대로 놀아나지 않겠다는 듯 각오를 다졌다.
학교 밖 커피숍에 도착한 셋은 음료와 케잌을 시켜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1학기도 다 끝나는 데 두 사람 뭐 좋은 소식 없어?"
"무슨···."
"애인 말이야. 이렇게 훈남 훈녀들이 썸씽이 하나도 없을 리가 없는데?"
민주가 빨대를 홀짝거리며 물었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에 도훈은 약이 올랐고, 정음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둘 다 대답이 없자 민주가 다시 물었다.
"혹시 둘이 사귀는 건 아니지?"
< 741. 중수의 자격-7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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