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0. 중수의 자격-69- >
정신 조작에 걸린 횟집 주인은 ‘동생’에 대해 술술 불었다.
대충 내용을 들어보니 ‘동생’이라는 사람은 혈연관계인 친동생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작년부터 같이 일하게 됐다고? 외지인이고?"
"네, 그렇습니다. 가게 일을 도와주시던 어머니께서 노환으로 쓰러지시는 후, 아르바이트 겸 보조로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냥 직원이나 마찬가지네. 평소 생활할 때 특이한 점은?"
"···지각을 자주 합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여러 가지를 캐물었지만, 그다지 의미 있는 정보는 없었다. 그때 세뇌에 걸린 횟집 주인은 특이한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여자를 무척 밝히는 편입니다."
"응?"
"술 먹고 떠들 때 얘기를 들어보니 여자들이 자기만 만나면 어쩔 줄 모른다면서···."
듣고 있던 창범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꼭 필요한 정보였으므로 계속 캐물었다.
"혹시 놈의 물건이 ···큰 편인가?"
"네, 대물입죠, 그렇고 말고요."
"대물에···. 호색한···. 불규칙한 생활 습관."
얘기를 하면 할수록 횟집 주인과 해당직원이 생각보다 깊은 사이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알려준 정보는 일주일만 같이 일해도 알법한 피상적인 내용뿐이었고, 그나마 건진 것은 대물이 확실하다는 사실 하나.
‘흐음. 이것만으론 증거가 불충분한데···. 놈이 대물남일 가능성을 배제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맞다고 할 수도 없고.’
중수에 오른 플레이어들은 특별한 파장을 발출한다.
후에 랭커에 진입하면 기도를 숨기는 법을 배우지만, 중수급 플레이어들은 넘치는 에너지를 내부로 갈무리하는 법을 모른다.
PK단은 이를 바탕으로 플레이어를 추적, 제거한다.
해서 일부 플레이어들은 PK단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위장과 은신을 통해 정체를 숨기기도 한다. 창범은 강원도 삼척에 숨어든 대물남이 혹여 시골로 은거한 플레이어 중 하나가 아닐까 의심했다.
‘하기야 이런 깡촌에 플레이어가 숨어 있을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 이곳에서 몰래 능력을 기른 뒤 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전략일 테지.’
단체 이름이 PK(Player Killer)일 뿐, 사실 두 단체는 완벽한 천적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강력한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가 역으로 PK단을 말살시킨 사례도 있었다.
어쩌면 PK단이 플레이어들을 지금처럼 사냥할 수 있었던 배경엔, 플레이어들끼리 독립적으로 흩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비유하면 PK단은 연대하는 사자.
플레이어는 독립적인 호랑이.
개개의 능력은 비슷하다면 뭉치는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다만, 강력한 호랑이는 사자무리조차 홀로 물리치는 것이다.
창범이 계속 생각했다.
‘근데 이상해. 왜 놈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거지?’
사실 강원도까지 넘어오면서도 그것이 가장 의문이었다.
노련한 플레이어는 죽을 때까지 정체를 숨기기도 한다.
사후에 이르러서야 플레이어였다는 것을 눈치 채는 경우도 있다.
‘아니지. 놈은 우리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구나.’
가칭 ‘대물 플레이어’는 우연히 발견되었다.
PC방 사장 조대근의 노련한 눈썰미가 아니었다면 스쳐지나갈지도 모르는 짧막한 야동 영상이 증거의 전부였다. 따라서 놈은 PK단이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
‘그렇다면 여전히 가능성은 있어. 이제 만나기만 하면···.’
"놈은 언제쯤 출근하지?"
"대중없습니다. 지 내키는 대로 출근하는 녀석이라. 지난번에 한 번은 휴가를 달라더니 무작정 홀로 일본여행을···."
"일본? 방금 일본이랬어?"
"네."
"거기에 대해 아는 데로 얘기해봐."
창범은 뭔가 결정적인 단서를 찾은 느낌이었다.
대물남이 출연한 야동은 일본에서 촬영한 영상물. 저번엔 사비를 들여 미호와 함께 프로듀싱한 업체를 찾아간 적도 있었다. 아쉽게도 별다른 증거를 찾진 못했지만, 대물남이 일본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듣자 뭔가 아귀가 착착 들어맞는 것 같았다.
내용을 전해들은 창범은 정신 조작을 풀고는 서둘러 횟집을 빠져 나갔다.
조작이 풀리고, 기억을 봉인당한 횟집 주인은 멍하니 접시를 들고 서 있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라? 이 손님은 주문시켜 놓고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야?"
창범이 있던 테이블에는 물 회 값 9,000원이 정확히 놓여 있었다.
***
급히 서울로 되돌아온 창범은 밤늦게 피씨방으로 달려갔다.
"찾았어요!"
"창범아, 미안한데 25번 테이블 좀 대신 정리 해주라. 아니 어떤 새끼가 라면 국물을 키보드에 엎어 놓고 그냥 가버렸지 뭐냐? 이런 니미럴, 기계식 키보드로 바꾼 지 얼마나 됐다고."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알바없이 직접 업장을 보고 있던 대근은 창범을 보자마자 대뜸 일을 시켰다. 여 아르바이트 생으로 변신한 미호는 이미 빨래장갑을 끼고 여자 화장실을 묵묵히 청소하는 중이었다.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야. 넌 뭐하는 데 그렇게 소집이 늦어?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겠니?"
"아니, 그게···."
"아오씨! 키보드에 건더기 다 꼈네. 대체 어떤 새끼야? 내가 회원정보 다 뒤져서 경찰에 기물파손으로 넘겨버릴 거야!"
"조 사장님. 아무리 사정이 그래도 여자 알바 하나는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정말 이 나이 먹고 여기서 변기나 뚫어야겠어요? 네?"
전쟁터처럼 정신없는 피씨방 분위기에 창범을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게 무슨 플레이어 잡는 킬러 단체야? 젠장, 아주 생계형 영웅이구만.’
"아니, 뭐하고 있어 창범아! 25번 자리 좀 치워달라니까. 짜식 진짜 말은 더럽게 안 들어요."
"아, 쫌!!!"
흥분한 창범이 결국 빼액 소리쳤다. 게임에 열중하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자 사장인 대근이 머쓱해 하며 진정시켰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희 알바가 살짝 흥분조절장애가 있어가지고···."
"아니 제가 왜 여기 알바에요? 저도 나름···."
"야야,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아니 놓으라고 윽!"
그러나 대근의 우악스러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칸막이 흡연실로 질질 끌려가는 창범이었다. 곧 이어 빨래 장갑과 뚫어 뻥을 든 미호까지 흡연실로 따라왔다. 뚫어뻥에선 정체모를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휴 진짜, 여자 알바 좀 채용하라니까! 이게 대체 뭔 꼴이에요!"
"유난히 히스테리구만. 오늘은 두나씬가?"
"연희거든요?"
"아, 연희. 고마워. 도와줘서. 근데 창범이 너 무슨 일 있냐? 왜 남의 가게 와서 소릴 지르고 그래? 매상 떨어지면 어쩌려고."
창범은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고 느꼈는지 불쑥 능력을 발출했다. 정신 조작 능력을 응용한 것으로 자신에게 강제로 집중하게 만드는 스킬.
창범이 갑자기 이능을 발휘하자 마법 계열 능력자인 미호가 곧바로 표정을 달리했다.
"어쭈? 지금 뭐하는 짓이지?"
마찬가지로 어지간한 정신 공격에는 끄떡없는 조대근 역시 머리를 세차게 흔들더니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창범을 때리려 한다기보다 자기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발동된 것이었다.
"뭐야? 지금 어그로 끈 거야?"
"이제 말 좀 통하겠네."
어그로를 끌던 창범이 능력을 해제했다.
"지금 PC방 사업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대체 뭔 일인데?"
"별일 아니기만 해? 능력 함부로 썼다고 협회에 확 꼰질러 버릴 테니까."
창범은 강원도를 방문해 대물남의 흔적을 뒤쫓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얘기를 모두 전해들은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난감해 했다.
"흔적을 찾았다고?"
"대물 플레이어가 확실해?"
기껏 강원도까지 달려가 정보를 구해온 창범은 둘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뭐에요? 지금 그 반응은."
"아니 하필 이 타이밍에···."
"오늘 소집 문자 받은 건 알지?"
"예?"
"저녁에 소집 있다고 연락했잖아."
"받기야 받았죠. 그래서 왔잖아요."
"지금 대물 플레이언지 뭐시긴가가 문제가 아냐."
"네?"
"강서 지구에 랭커급 플레이어가 떴다는 협회의 제보가 있었어."
"랭커 플레이어요?"
"그래. 지금 그것 때문에 인근 지구에서 최대한 협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그럼 대물 플레이어는요? 기껏 증거 찾아왔는데···."
"고생 많았다. 근데 내용을 들어보니 그 사람이 플레이어라는 사실도 확실치는 않은 거잖아?"
"그치만 얼마전 일본에도 다녀왔다고 하고···."
"문제는 그 대물은 지금 협회에 보고가 안 된 사항이라는 말씀이야. 그리고 놈보다 훨씬 위협적인 존재가 인근 지구에 등장했고. 어느게 더 급해 보이냐?"
창범 역시 곧바로 상황파악을 했지만 뭔가 억울했다.
휴가까지 써가며 전국을 돌아다닌 결과가 이것이라니.
"그럼 그냥 냅두자고요? 플레이어일지도 모르는데?"
"우선 순위에 따라 처리하자는 거지. 어쨌든 소재는 파악했다며?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그러다 다른 곳으로 도망치면요?"
"끄응."
대근도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긁적였다.
랭커급 플레이어의 등장은 협회에서도 주목하는 사항이었다.
자칫하면 수많은 PK단원들이 희생될지도 몰랐다. 이 문제로 전국에 내로라하는 PK단들에게도 지원요청이 하달된 상태였다.
그때 빨래장갑을 벗어던진 미호가 말했다.
"그럼 나라도 혼자 다녀올까?"
"어디를?"
"강원도."
"거길 왜 혼자가?"
"대물이라며? 흡정하기 딱 좋은···."
"연희씨, 아무리 그래도 그건···."
"지금은 세나거든요?"
"그세 바뀌었어?"
"아니 지금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요?"
"후-. 가만 있어봐 정리 좀 하자."
대근이 결국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꼬나물었다.
입에 물고 담뱃불을 붙이는데 갑자기 미호가 대근의 담배를 뺏어 들더니 자기 입에 날름 물었다.
"땡큐, 역시 천절하네 대근씨는. 담뱃불도 붙여주고."
"아니 그건 내가 피던···."
"왜? 간접키스로는 부족해서 그래?"
"야이, 미친 할망구야!"
"호호, 창범이가 질투하네?"
"그만! 우리끼리 투닥거릴 때가 아니야."
다시 담배를 꼬나문 대근이 상황을 정리했다.
"어쨌든 창범이 너도 수고했어. 휴일까지 반납하고 계속 혼자 추척해 단서를 발견한 건 충분히 칭찬받을 일이야."
"아니 내가 지금 그런 공치사 듣자고···."
"근데. 일단은 위중한 일부터 처리하자. 협회에선 우리가 대물 플레이어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 이것 때문에 협조 요청에 불응했다간 협회에서 내사가 들어올지도 모른단 말이지. 지원금 끊겼다간 그나마 쓰던 주간알바도 짤라야 한다고."
"하-. 진짜."
"그러니까 나 혼자라도 보내달라니까?"
"세나씨도 그쯤 해둬. 랭커급 플레이어를 상대하는 데 세나씨가 없으면 협회에서 당연히 의심하지 않겠어?"
"음."
"우선 인접 지구 문제부터 처리하자. 대물 플레이어는 그 다음이고. 오케이?"
"그러다 종적을 감춰버리면요?"
"그건 우리가 운이 없는 거겠지. 어쨌든 오늘 접촉 안했다면서. 증거는 확실히 없앴지?"
"네. 심문한 사람 기억은 봉인해 놨어요."
"그럼 됐어. 상대는 아직 우리가 뒤쫓고 있다는 걸 모를 거야. 이번 일부터 처리하고 그 뒤에 대물 플레이어 잡으러 삼척에 가보자고."
"우후~ 우리 다 같이 강원도 놀러가는 거양?"
갑자기 세나의 목소리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바뀌었다. 잠깐 사이에도 인격이 수십 차례 바뀌는 미호의 특성 때문이었다.
"저게 누구더라."
"수미요. 그 꼬맹이."
"꼬마 아니거든!"
"어우 정신없어. 잠깐, 이럴 때가 아니지."
대근이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각났다는 듯 흡연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얘기하다 말고 어디가요!"
"손님 지금 카운터에 서 있잖아. 계산은 해야 할 거 아니냐?"
"아니, 진짜."
창범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는데 수미로 변신한 미호가 창범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찌도 근데 담배 펴? 담배는 몸에 나쁘다는데."
"아오! 이 빌어먹을 집구석 같으니!"
창범의 절규가 피씨방을 울렸다.
***
새 옷으로 단장한 두 사람이 대학 본부 건물로 들어가자, 잠시 후 조교 강민주가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주이···. 음, 둘 다 늦지 않게 왔네?"
도훈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려던 민주는 옆에 정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도훈은 정음 몰래 윙크를 하며 민주에게 눈치를 줬다.
학과 후배도 있으니 자중하라는 사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조교 선생님."
"정음이 오늘 예쁘게 하고 나왔네?"
"아···. 감사합니다. 조교 선생님도 엄청 예쁘세요."
정음은 평소에도 빈말 같은 걸 할 줄 모르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전혀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는 도훈 옆에 딱 붙어 있는 정음이 괜히 얄밉게 느껴졌다.
‘앙큼한 계집애 같으니. 주인님 꼬시려고 꾸미고 나온 것 좀 봐.’
하지만 도훈과 단둘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절대 티를 내지 않기로 약속했던 민주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호호, 별말을 다 듣겠네. 여자는 무조건 어린 게 최고지. 도훈 학생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방금 전 물음에서 도훈은 민주가 은근슬쩍 정음을 견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참, 하필 이런 조합이라니.’
"저는 착한 사람이 더 좋더라고요."
"어머, 그럼 딱 나네?"
"예?"
도훈이 정색하자 민주가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농담이야 농담. 자, 촬영 기사님 안에 기다리고 계시니까 들어가자."
"네."
다행이 둔감한 정음은 민주가 자신을 의식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정음을 앞세운 도훈은 뒤에 있던 민주를 째려보며 그녀의 엉덩이를 콱 주물렀다. 그러면서 소리나지 않게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까불지 마. 여기 학교야.
도훈의 매서운 경고에 민주가 깨갱하면서 꼬리를 내렸다.
< 740. 중수의 자격-6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