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7. 중수의 자격-66- >
"···왜?"
미나의 질문은 너무도 함축적이었다.
무엇이 왜냐는 것일까?
왜 벌써 끝냈냐는 소린가?
나는 고개를 힐끔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아마 10분도 안 되어 카운터에서 전화가 걸려올 것이다.
대실에서 가장 민망한 순간, 나갈 타이밍이 도래한 것이다.
나는 말 없이 시계를 보며 대답을 갈음했다.
하지만 미나는 여전히 서운한 표정으로 누워있을 뿐이다.
이게 아닌가?
"왜 그랬어?"
이번에도 똑같은 질문.
설마···.
"왜 밖에 쌌어?"
"아···."
당연히 걱정할까 봐서지.
어차피 위대한 유산 패시브 때문에 임신할 확률은 제로다.
나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실컷 질싸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미나는 그 사실을 모르니 임신 걱정으로 다음 생리까지 피가 마를 것이다.
그게 싫었다.
"혹시 몰라서요."
"괜찮다니까 그래, 나한테는."
하지만 미나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녀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학생인 내가 애 설사 아빠가 되어도 혼자서 키울 수 있다는 의지로 충만했다.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미안요."
"나는 마지막까지 안아 주는 걸 좋아해. 다음부턴 그러지마. 알았지?"
"네. 근데 이제 나갈 시간 다 된 거 같아요."
"같이 더 있음, 안 돼?"
미나가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생각해 보니 대실이라고 꼭 시간을 지켜 나갈 필욘 없다.
돈만 더 지불하면 연장이라는 방법도 가능하다.
다만,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숙박을 끊는 게 경제적이기 때문에 대실 연장은 드문 일이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직 못 다한 일을 떠올렸다. 미나와의 만남은 애초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너무 늦지 않을까요?"
"상관없어. 너도 자취하지 않아? 여기서 저녁 시켜 먹음 되잖아."
미나가 계속 졸랐다.
두 번의 섹스가 그리도 좋았을까?
나도 물론 좋긴 했지만, 왠지 집착하는 모양새다.
"우리 자주 보지도 못하니까···."
아, 그게 아니구나.
미나는 나와의 헤어짐이 너무 아쉬웠던 모양이다.
가끔 섹스할 때만 만나는 사이.
다음을 기약하며 오매불망 망부석이 될 것이 두려웠던 것.
괜스레 미안해 졌다.
그녀가 이토록 전전긍긍하는 것이 순전히 내 탓인 것 같다.
"알겠어요. 그럼 연장 가능한지 한 번 물어보구요."
수화기를 누르고 카운터에 전화를 걸었다.
결과가 어찌 됐건 운에 맡겨볼 참이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대실 연장 가능 한가요?"
-죄송합니다. 저희 모텔은 인터넷 예약으로 숙박을 잡기 때문에 빈방이 없습니다.
"아뇨, 다른 방이 아니고 지금 있는 방을 연장하는 거요."
-그 방도 8시 이후 입실이 잡혀 있네요. 일찍 말씀하셨음 가능했을텐데 너무 임박해가지고.
"아···,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치자 미나가 물었다.
"왜? 안된데?"
"네. 숙박 예약 손님들 때문에 대실이 안 된 다네요. 빈방이 없다나 봐요."
"아···."
일이 공교롭게 되었지만 나는 이것이 운빨 대폭발의 영향임을 깨달았다. 섹스 후 급격히 올라가는 나의 행운도는 모든 사건이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루어지게 만드는 사기 스킬이다.
숙소 예약이 불쑥 잡혔을 리 만무하니 모든 것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일 터. 어떻게 이런 식으로 운빨이 적용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대체 신의 안배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미나가 서운한 얼굴로 투덜댔다.
"힝···. 같이 더 있고 싶었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요."
"그러네. 곧 나가야 겠네. 먼저 씻을게."
미나가 커다란 샤워 타올을 들고 일어서자 내가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다음에 볼 땐 아예 숙박으로 끊어요, 우리."
"진짜?"
"그럼요. 오늘처럼 계획 없이 말구 아예 작정하고 숙박으로."
"히히. 진짜지? 약속했다?"
"넵."
미나가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내 입술에 쪽- 키스를 했다.
"고마워, 도훈아."
미나가 씻으러 들어가자 나는 홀로 남은 방에서 담배를 태우며 기다렸다. 두 번의 질퍽한 섹스를 하고 난 뒤라 그런지 피로감과 함께 약간의 허탈감 밀려왔다.
‘그나저나 아무런 보상 없이 섹스를 한 것도 오랜만이군.’
[보상이 꼭 없다고 할 순 없죠. 미나양을 손절하기 싫어서 주인님이 억지로 꾸며낸 일이니까요.]
‘하긴 그렇네. 보상이 없는 게 아니라, 미나를 다시 내 여자로 만들었구나. 예전보다 더 집착하게.’
[근데 정말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최근 연두양이나 나연양도 그렇고 오늘은 미나 양까지···. 여자를 끊임없이 늘리기만 하고 내치질 않으니 앞으로도 감당 못 할 상황이 빈번히 속출할 겁니다. 그때마다 그 좆막음인가를 하시려고요?]
‘나도 생각하고 있어.’
[오늘은 다행히 별일 없었지만, 미션이나 위업에 지장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그리 될 겁니다.]
‘안다니까 그래.’
[저번에 분명 인연의 붉은 실 가위로 불필요한 인연들을 정리한다지 않았습니까?]
‘했지.’
[그런데 막상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답보 상태이십니다.]
‘아니 나도···.’
답답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로시의 말뜻이 무슨 의민지도 알고, 나 역시 문제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나도 그러곤 싶은데 막상 버리려면 얼마나 아쉽다고.’
[예?]
‘아니 들어 봐. 어떻게 나밖에 모르는 저런 여자를 내치겠어? 나를 데리고 살 수도 있다는 여잔데. 결혼도 안했는데 임심부터 하겠다잖아.’
[끄응. 미나양은 그렇다 치죠. 오랜 인연이기도 하고, 보기드문 명기의 소유자니까요. 하지만 나연양이나 연두양은 왜 손절 하지 않는 겁니까?]
‘나연이랑 연두는··· 예쁘니까.’
[네?]
‘예쁘다고. 나연이는 발레를 오래 배워서 그런지 몸 선이 유난히 곱고, 연두는···. 단발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여대생이 어디 흔하냐? 깜찍하고 통통 튀는 성격도 매력적이고.’
[결국엔 그 말이 그 말이잖습니까! 솔직히 남 주기 아까우시죠?]
‘인정.’
[흐음···.]
‘로시 네가 뭘 걱정하는 지 잘 알아. 나도 그 부분은 여전히 고민 중이고.’
[알면서도 고치질 못하시다니요? 주인님도 이제 어엿한 중수입니다. 미션의 난이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남아있는 위업들은 쉽사리 해결될 수준이 아닙니다. 그 와중에 어장 안 물고기 밥 주느라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한다면···.]
‘알았어, 나도 이제 욕심 비우고 진짜 쳐낼 애들 다 쳐낼 테니까 너무 뭐라 그러지 마.’
[휴우-.]
‘정이 많은 걸 어쩌냐, 그럼.’
나는 푸념하듯 로시에게 대답했다.
그랬다.
모든 건 내 욕심 탓이다.
적당히 맺고 끊을 수 있는 관계마저도, 끝내 떨쳐내지 못한 건 로시 말처럼 남 주기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서 그렇다.
어차피 나란 놈은 난봉꾼.
한 명에게 정착하기엔 지나치게 불순한 사상의 소유자다.
사과가 좋다고 수박이 싫은 거도 아니요, 때론 참외가 맛있을 때도 있고, 특별한 외국 과일이 땡길 때도 있는 법.
내 어장에 있는 여자들은 한마디로 과일이었다.
언제든 꺼내 따먹을 준비가 된.
"으으! 대체 누굴 버리란 말이야!"
"도훈아 통화하니?"
"네? 아, 아뇨."
"방금 뭐라고 얘기하길래."
"아, 혼잣말 한 거예요."
머리에 수건을 두른 미나가 샤워실 밖으로 나왔다.
"너도 얼른 씻어."
"네."
나는 미나와 바톤 터치를 하며 샤워를 마쳤다.
뜨거운 물줄기를 머리에 뿌리며 생각했다.
어쨌든 로시 말이 옳다고.
나는 조금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래서 아깝고, 저래서 포기 못 하면 끝내는 모두 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제풀에 지쳐 쓰러질 것이다. 그쯤되면 내가 여자를 따먹는 건지, 내가 여자들의 육변기로 전락하는 지도 헛갈리게 된다.
감당할 수 있는 사람까지만 감당하자.
감당 못할 인연은 아쉽지만 방출하는 수밖에.
근데 내가 몇 명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다섯?
아니 그건 너무 적다.
열 명?
그 정돈 가능하다.
스무 명?
무리하면···.
에라, 일단 씻자.
***
미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급히 차를 돌렸다.
아직 하지 못다한 일이란 정음의 선물을 사는 일이었다.
시간은 이미 8시를 훌쩍 넘었고, 어느덧 백화점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제발···.’
혹시나 몰라 다시 찾아간 백화점은 다행히 아직 개장 중이었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건물에 걸린 대형 간판에 정기 바겐세일로 9시까지 연장 영업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나이쓰! 운이 좋군.’
[다행히 아직 문을 닫지 않았군요. 하지만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급하게 차를 대고 후다닥 여성복 매장으로 뛰어갔다. 무엇을 사야 할지 고민하다 마네킹에 디피 된 여름 옷 한 벌을 통째로 벗겨 왔다. 정음이는 원판이 예쁘다 보니 뭘 입어도 잘 어울릴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속옷도 다시 샀다. 가장 무난한 종류로 위아래 세트로 구매하고 나니 다행히 시간을 넘기지 않을 수 있었다.
쇼핑을 다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데 뭔가를 잊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랐다.
‘가만, 정음이 한테 뭘 사주기로 했던 것 같은데···.’
[선물요?]
‘어. 내가 뭘 사주기로 했는지 혹시 기억나?’
[주인님이 저한테 말씀하셨다면 모를까.]
‘나 혼자 생각했나? 내가 뭘 놓쳤지?’
양손 가득 쇼핑백에 담긴 내용물을 떠올렸다.
속옷, 여름옷, 캔버스 단화···. 내가 준 옷으로 이미 한 벌을 쫙 빼입을 수 있다.
근데 뭔가 허전하다. 그게 뭐지?
‘아아! 빽!’
[빽이요?]
‘가방 사주기로 했잖아. 너무 허름해서.’
[그랬군요.]
나는 마감까지 시간을 확인하며 재빨리 1층 피혁 매장을 뒤졌다. 여성용 가방을 찾는데,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이정우로 살 때 자주 들르던 명품매장이었다.
‘가만, 기왕 사주는 거 비싼 게 좋겠지?’
나는 서슴없이 명품 매장으로 들어갔다.
이래뵈도 수중에 1억원의 현찰을 가진 남자다.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직원이 깍듯이 인사하며 나를 반겼다.
"어서오세요."
내가 걸친 옷은 비싼 옷이 하나도 없었다.
허우대만 좋을 뿐, 누가 봐도 가난한 대학생으로 보일 것이다. 사실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나?
"어떤 물건을 찾으시나요?"
하지만 이 백화점 직원은 차림새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다. 교육을 잘 받은 듯 손님의 나이나 차림새와 상관없이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역시 명품매장은 직원들도 명품이네. 서비스 태도가 훌륭해.’
"가방 좀 보러 왔어요."
"여자친구 분 선물하시게요?"
직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장시간 근무로 피곤할 텐데도 여전히 산뜻함이 남아있는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제법 예쁘잖아?
[주인님!]
‘아차차, 그래. 쓸데없이 끼 부리지 말아야지.’
예쁜 여자만 보면 혹하는 내 정신 상태가 문제다.
"여자 친구랑 곧 1주년인데 기억에 남는 선물을 해 주고 싶어서요."
굳이 궁금해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여자 친구 선물이란 걸 강조했다. 사전에 철벽을 치는 행위다. 이건 살짝 오번가?
"그러시구나."
다행히 직원은 나에게 큰 흥미가 없는 듯 했다.
이미 남자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학생도 이런 가방 많이 메나요? 너무 튀지 않을지 걱정이라."
"호호. 요샌 대학생도 많이들 들고 다녀요. 하나 쯤 가지고 있는 것도 괜찮을 거에요."
나는 매대에 진열된 가방을 둘러보는 척 텍에 적힌 가격을 확인했다.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비싼 가격이었다.
‘와우···. 무슨 이런 조그만 가방이 300만원 씩이나.’
[엄청 비싸네요.]
‘아니 비싼 건 알고 있었는데, 이건 그래도 작은 사이즌데···.’
[크기가 가격을 결정하진 않죠.]
‘하긴.’
명품이 달리 명품이겠는가?
재료비만 가지고 가격을 매겼다면, 어디 시장 통에 굴러다니는 가방과도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매장 직원의 추천을 받아 최근 여대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종류의 명품 가방을 구매했다. 당연히 현금 일시불이었다. 직원도 딱히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비트코인 이후 나처럼 젊은 부자들을 많이 봐왔을까?
"감사합니다, 고객님. 참, 영수증 버리지 마시고 꼭 챙겨가세요. 2주 안에는 다른 상품으로 교환 가능하거든요. 혹시 여자 친구분께서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면 바꿔야 하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마침내 쇼핑을 모두 끝냈다.
나는 정음의 선물을 잔뜩 들고 집으로 향했다.
내일 모델 촬영할 때 깜짝 선물로 줘야겠다.
벌써부터 비싼 선물을 받은 정음이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
‘광주 주민 센터 하 모양.’
마지막 타켓을 향해 광주로 내려가던 창범은 KTX 열차 안에서 뜻밖의 글을 읽게 된다.
-내가 야동에 나온 대물남 임(인증)-
이란 제목의 게시글.
조회수 8000여명에 댓글도 300개 달려 베스트에 오른 글이었다.
국내 최대의 야동공유 싸이트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그 글은 진위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야? 강원도에 산다고?’
놀랍게도 대물남은 자신이 사는 지역까지 공개한 상태였다.
정확한 주소는 아니지만 강원도 삼척에서 횟집을 운영한다고 직업까지 밝히고 있었다.
‘이런 젠장. 이걸 어쩌지?’
광주로 내려갈 계획이던 창범은 갑자기 스스로를 대물남이라 밝힌 존재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전라도 광주와 강원도 삼척은 정 반대편 위치.
앞선 여자 BJ제보에서 4번의 허탕을 친 창범으로서는, 광주보다 삼척이 더 끌렸다.
‘어차피 BJ를 찾는 목적도 대물남을 찾기 위한 거잖아? 근데 스스로 놈이 스스로 정체를 밝혔다면 굳이 돌아서 갈 필요가 있을까?’
두 정보 역시 근거가 미약하긴 마찬가지였다.
창범은 그렇다면 좀 더 빠른 길을 찾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에이씨, 돈도 없어 죽겠는데···."
광주편 KTX 표는 이미 시간이 임박해 환불금도 손해봐야 했다. 창범은 쓰라린 속을 삼키며 경춘선 표를 다시 매표했다.
< 737. 중수의 자격-6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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