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2. 중수의 자격-61- >
"도훈아!"
육탄공세에 당황하고 말았다.
방금 전에는 나와 다신 상종도 안 할 것처럼 차갑게 굴더니, 지금은 몇 년 만에 상봉한 친누이처럼 으스러지게 나를 껴안는 미나였다.
"어뜨케··· 난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흑흑."
[아니, 이게 통한다고요?]
‘나도 좀 놀라운 결관데.’
‘오빠 믿지 립밤’과 ‘메소드 마스터 담배’의 시너지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내뱉는 말에 신뢰감을 부여하는 립밤이 개소리의 설득력을 높였고, 피운 직후 10분간 발휘된다는 절정의 연기력이 나의 거짓말을 진실로 둔갑시켰다.
그녀는 분명 내가 젊은 나이에 의도치 않게 애 아빠가 되었거나, 혹은 임신 공격을 당해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사귀게 되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거짓 임신을 꾸민 꽃뱀(?) 사기극에 휘말린 피해자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셋 중 무엇이라 여기든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나에게 동정심을 느꼈고, 그로 인해 나에 대한 미움과 실망이 동정과 측은함으로 180도 바뀌게 되었으니까.
"어떡하면 좋아···."
"누, 누나."
"미안해, 정말. 나는 네가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내 멋대로. 미안해 도훈아."
"괘, 괜찮아요. 우선 이것 좀···."
다 큰 남녀가 커피숍에서 진하게 포옹하는 장면은 주변의 구경거리가 되기 딱 좋았다. 나는 훌쩍거리는 미나를 일단 진정시킨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찌 됐건 제 잘못이에요. 결국 죗값을 치르는 거죠."
"그런 소리 마. 어떻게 그게 너만의 잘못이니? 걔가 먼저 꼬리 쳤다면서?"
대체 걔는 누굴까?
존재하지도 않는 가공의 인물은 이제 미나의 지독한 저주를 받게 되었다.
"어쩜 여자애가 자기 몸 하나도 간수 못하고."
"누, 누나."
미나가 갑자기 눈빛을 바꾸며 말했다.
"가만, 근데 너 분명 안에는 안 쌌다고 했지?"
"네."
"확실해?"
"분명히요. 저 되게 조심스러운 거 아시잖아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뭔가 이상해."
"뭐가요?"
미나가 자기 일처럼 흥분하며 말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가 원나잇을 했다고 쳐."
"네."
"근데 생리를 시작 안 하면 당연히 걱정될 거 아니야."
"그렇겠죠."
"너라면 뭐부터 해보겠니?"
"저라면···. 글쎄요 그건 잘."
나는 미나의 의도를 뻔히 꿰뚫어 보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깨만 으쓱했다. 나의 어벙한 태도에 미나가 단언하듯 말했다.
"임테기가 빠졌잖아."
"임테기요?"
"임신 테스터 킷 말이야."
"아,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그래. 생리 중단이 걱정 되었다면 임테기부터 사서 테스트 할 거란 말이야. 보통은 그게 정상이지."
"근데 그런걸 쉽게 구할 수 있나요?"
여전히 나는 무지한 척했다.
아무것도 몰라서 당하는 순진한 바보 역할을 연기해야 했다.
"약국가면 누구나 살 수 있는 거야. 그게 뭐라고."
"아···."
"근데 그 여자애는 단지 생리가 안 되는 것만 가지고 임신이라고 단정짓는 거잖아."
"그렇···죠?"
"아까도 말했지만 생리 불순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야. 급격한 다이어트나 스트레스, 만성 피로, 과격한 운동으로 인해서 일이주 가량 늦춰지거나 아니면 한 달씩 건너뛰기도 한단 말이지."
"아, 정말요?"
"그렇다니까? 내가 운동 쪽으로 계속 강사를 해왔잖아. 예전에 PT를 너무 심하게 받은 여성회원 같은 경우엔 생리 불순을 호소하기도 했거든."
"제가 남자라서 그런 쪽으로 지식이 없어서 잘 몰랐어요."
미나는 점점 확신하듯 말했다.
"솔직히 지금 뭐라고 장담할 순 없는 상황이야. 정말로 그 여자애가 임신을 했을지도 모르고, 또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네."
"하지만 아무런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사랑하지도 않은 여자를 책임지려는 태도는 너무 바보 같다고 생각해."
"아···."
"도훈아. 이건 정말 잘 생각해야 하는 문제야. 만에 하나 그 여자애가 너랑 사귀고 싶어서 거짓말하는 걸지도 모르잖아."
‘예상대로 흘러가는군.’
[의도했단 말입니까? 지금의 결과를?]
‘당연하지. 질싸도 안 했고, 단순히 생리가 늦어진 것으로 임신을 확신할 순 없는 게 정상이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단서를 흘려주니 알아서 덮썩 물어버리는군.’
[놀랍습니다. 마치 마인드 컨트롤 하듯 상대의 생각을 조정하시는군요.]
‘마인드 컨트롤은 무슨. 별거 아니야.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니까?’
[아, 저번에 한 번 말씀하신 그것이군요.]
‘그렇지. 미나는 내가 다른 여자와 사귀는 걸 무척 못 마땅해 했어. 나한테 까인 것이 자존심을 다치게 했으니까. 그런데 그 사건이 나의 의지가 아니라 불가항력적 이유 때문이라고 둘러댔단 말이지. 확실하지 않은 애매한 정황증거만 가지고.’
[미나양이 그 부분에서 허점을 찾은 거군요.]
‘의도한 떡밥을 완벽히 물어 버렸달까?’
[캬, 역시 주인님의 잔머리 하나는···.]
‘지금부터가 중요해. 어쨌든 미나는 상처받았던 자존심을 다시 회복했어. 내가 자기를 거절하고 다른 여자를 만난 게 아니라, 피치 못 할 이유 때문이란 알았으니까.’
[호감도도 다시 회복되었겠군요.]
‘게다가 곤경에 처한 나를 동정하며 이제 어떤 식으로든 내 편이 되어 돕고 싶어 하겠지.’
[대단하십니다, 정말. 이번만큼은 싸대기 맞고 끝날 줄 알았거든요.]
‘뭐라고 인마?’
"···더 확인할 필요가 있을 거라고 봐."
로시와 투닥거리느라 미나의 앞 얘기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충격을 먹고 멘붕 증세를 보이는 게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일 것이다.
"죄송해요. 잠시 혼란스러워서 누나 말을 정확히 이해를 못 했어요."
"그러니까 임신인지 아닌지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고. 이건 네 인생이 달린 중요한 문제일 수 있으니까."
"아···."
"당장 그 여자애에게 연락해서 임테기 사서 테스트 해보라고 해."
나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 였다.
"그러다 정말 임신이면요?"
"그땐···."
미나도 그 순간만큼은 말을 망설였다.
굉장히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땐 네가 책임져야겠지. 그치만 어차피 져야할 책임이라면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요. 누나 만나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에휴···. 어쩌다 그런 사고를 쳤니."
"죄송해요."
한창 흥분해 있던 미나는 그제야 진정이 되는 지 나를 보고 눈을 흘겼다.
"넌 정말 안 그렇게 생겨가지고 은근 사고뭉치구나."
"술이 웬수죠."
"그러니까 왜 마시지도 못하는···. 됐고, 빨리 연락부터 해봐."
‘근데 누구한테 연락하지?’
[그러니까요. 사실상 있지도 않는 상상임신공격 아닙니까?]
‘음. 혹시 아이템중에 그런 것도 있나?’
[어떤 아이템 말씀입니까?]
‘왜, 망부석이 되지 마오 같은 아이템 보면 인공지능으로 평소의 대화 패턴을 인식해서 주기적으로 사람하고 문자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잖아.’
[네, 그렇죠.]
‘그거랑 비슷하게 가짜 대화를 생성해주는 아이템 같은 거. 미나 앞에서 확실히 해 둬야 할 것 같아서.’
[문자주작기 말씀이시군요.]
‘주작기?’
[방금 말한 아이템은 실존합니다. 주로 알리바이를 지어 내기 위해 사용되는 아이템이죠.]
‘오오, 천상계는 없는 게 없구나.’
[해당 아이템은 문어다리 어플처럼 스마트 워치에 설치되어 연동됩니다. 어플을 다운로드 받으시겠습니까?]
‘가만, 가격이 얼만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살 순 없는데.’
[잠시 만요. 디스플레이에 간략한 설명을 띄워 드리겠습니다.]
[문자주작기] 알라바이 생성 어플, 800P
-스마트워치에 설치됩니다.
-소유자의 핸드폰과 연동하여 미리 설정한 내용으로 문자조작을 가능케 해줍니다.
-‘사진’기능을 이용키 위해선 천상계의 사진 합성 Add on을 추가 구매하셔야 합니다.
-‘사진 합성 Add on’ 가격 : 200P
설명을 빠르게 캐치한 나는 로시에게 물었다.
‘사진 기능은 뭐지?’
[말 그대로 문자 외에 사진을 추가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미지를 합성하여 실제처럼 완벽하게 재구성해 줍니다.]
‘꼭 필요한 기능이네. 당장 구매해. 애드온도 함께.’
[네, 곧바로 설치하겠습니다. 문자주작기 어플의 다운로드가 시작됩니다.]
다운로드 바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로시가 어플을 설치되는 동안 나는 미나에게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근데 연락하면 뭐라고 말해야 하죠?"
"솔직하게 물어봐. 정말 임신은 맞는 거냐고."
"그래도 그건···."
"아니. 망설일 필요 전혀 없어. 이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야.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데?"
"네···."
그때 어플이 모두 깔렸다는 알림이 들려왔다.
‘다 깔았네. 로시 문자주작기는 어떻게 쓰지?’
[내용을 저에게 설명해 주시면 인공지능이 자체 판단을 하여 실제 사람처럼 문자를 생성해줍니다. 사진 증거 역시 마찬가지고요.]
‘오케이 알았어.’
나는 간략히 설명하고 미나 앞에서 문자를 보냈다.
-이도훈 : 미안한데 혹시 임신 테스터기로 확인해 볼 수 있어?
주작기에서 알려준 번호로 메시지를 보내자, 잠시 후 사람이 보낸 것 같은 답장이 되돌아왔다.
-최지윤 : 뭐라고? 오빠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오빠 진짜 너무 한 거 아냐?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인공지능이 가상으로 만들어 낸 최지윤이란 인물은 소름 돋을 정도였다. 상세하게 설정을 하긴 했지만, 보여주는 반응이 사람과 구분이 안 될만큼 똑같았다.
"최지윤이란 아이야?"
"네. 과 후배요."
"흠. 그래도 계속 물어봐. 쪽팔림은 잠깐이지만, 이것 때문에 평생 발목 잡힐 수 있는 일이니까."
"네."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이도훈 :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그래. 정말 임신이라면 대책도 세워야 하고.
-최지윤 : 알았어. 안 그래도 두통약 사러 약국 가는 길인데 하나 사올 게.
함께 메시지를 읽은 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미심쩍었나 보네."
"그런가요?"
"당연하지. 원래 긴가민가 할 때가 제일 무서운 거야. 피임 안하고 있을 때 괜히 콘돔없이 섹스하면 다음 생리때까지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모르지?"
"아··· 제가 그런걸 몰랐네요."
"그러니까 배려 좀 해. 여자중에서도 애가 잘 서는 사람은 정말 한 번에 되기도 하니까."
인공지능이 잠시 후 약국에서 산 임테기 사진을 보내왔다.
어디서 차용한 이미진지 몰라도, 막 산 것처럼 포장도 그대로였다.
-최지윤 : 지금 해볼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이도훈 : 응, 미안해.
-최지윤 : 됐어. 오빠 말대로 확실히 하는 게 좋으니까, 나도.
‘캬, 이건 뭐 사람이 보내는 거 같은데? 로시 니가 주작하는 거 아니지?’
[무슨 소리십니까? 천상계의 인공지능 기술이 그만큼 뛰어난 것이죠.]
‘보통 테스트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5분 안에 결과가 나옵니다. 물론 시간이 더 걸려나 검출되기도 하지만 10분 이내면 판별이 가능하구요.]
‘오케이. 인공지능이 그정도는 판단 하겠지.’
[당연하죠.]
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미 메소드 마스터 담배의 효과는 떨어진 상태였다.
결과가 나온 이후에도 연기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나는 미나에게 잠시 양해를 구했다.
"누나, 저 잠시 담배 좀."
"그래."
미나는 내가 담배를 피우고 온다고 하자 그러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나를 지지하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미나의 모습에 살짝 양심이 찔려왔다
‘후. 근데 괜히 미안해지네. 저렇게 착한 여자를 속여도 되는 걸까?’
[다 주인님의 욕심이지요.]
‘그러게. 솔직히 손절 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너무 어처구니 없이 끝나는 거잖아. 난 그게 마음에 안들었어.’
[관계를 맺는 건 주인님 마음이어도 관계를 끊는 건 허락없이 안되다는 건가요?]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이기적이군.’
[그래도 아시니 다행입니다.]
‘아니. 정말로 미나를 보내주더라도 좋은 모습으로 헤어질 수 있는 거잖아. 서로 안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선다면 그거야 말로 미나에겐 안 좋을 것 같았어.’
[그래서 이런 자작극을 벌렸다고요?]
‘주작이라도 상관없어. 여기서 실제로 상처받는 사람 따윈 없으니까. 말해봐 내가 누구에게 피해를 줬지?’
[피해는··· 없죠.]
‘그게 중요한 거야. 내가 기망을 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손해를 입혔으면 모를까, 지금의 거짓말로 피해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오히려 나에게 실망하고 자존심을 다친 미나를 다독였을 뿐.’
[흐음. 궤변같지만 그럴싸 하군요.]
‘어차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런 거짓말이라면 상관없어. 내가 지금 죄책감을 느끼는 건 순진한 미나를 속였다는 사실 뿐이니까.’
담배를 피우고 나오자 다시 연기력이 끌어 올랐다.
몰랐는데, 연기란 단순히 대사나 행동만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었다. 눈빛 하나, 단순한 호흡 하나까지 살아 숨쉬는 모든 게 연기였다.
담배를 피우고 나온 나는, 어느덧 여자친구의 임테기 결과를 기다리는 철없는 대학생으로 변해 있었다.
핸드폰이 울리기를 꽉 쥐고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있자, 미나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내 손등을 어루만졌다.
"도훈아, 너무 걱정하지마. 잘 될 거야."
"네, 누가 정말 고마워요."
그때 시간에 맞춰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가로 선이 한 줄만 난 임테기 사진이었다.
< 732. 중수의 자격-6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