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1. 중수의 자격-60- >
‘아씨, 어장관리 어플 고장 난 거 아냐? 왜 접근하기 전에 미리 경고를 안 하는 건데?’
난처한 상황 앞에, 나는 애꿎은 로시에게 화를 냈다.
[고장이라뇨? 그럴 리가요. 어장 관리 어플의 충돌 방지 기능은 주인님이 관리 대상과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 알려주는 게 아닙니다.]
‘그럼?’
[주인님이 다른 여자를 꼬시고 있을 때나, 동시에 공략 중인 두 대상의 동선이 엉키지 않게 경고해 주는 역할이죠. 뭔가 혼동하신 거 아닙니까?]
‘아···.’
[차라리 주인님이 속옷 매장 직원을 꼬시려고 했으면 경보가 울렸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해했어. 아무튼 난감한 상황이네. 미나는 삐진 것 같고, 아직 정음이 선물은 한개도 못 샀는데···.’
"언제는, 임용 끝날 때까지 공부에 집중한다고 여자 안 사귄다더니···. 다 거짓말이었니?"
그 말을 할 때 미나는, 정말로 섭섭한 표정이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면 딱 저럴까?
이건 뭐 어디서부터 변명을 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딱 걸리고 말았다. 도저히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젠장. 그때 상식 개변을 걸어 놨는데도 전혀 먹히질 않다니···.’
[상식개변 스킬은 최면이나 세뇌처럼 절대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대상자로 하여금 강한 암시를 주어 기존의 상식을 살짝 비틀어 놓는 방식이죠. 그때 주인님은 대학 생활 중 여자를 절대 안 사귀겠다고 암시를 걸어놓고, 이제와 스스로 그걸 깨뜨려 버렸으니 상
식개변 조건에 위배 되어 풀려버린 것이죠.]
‘그럼 어쩌지? 도저히 방법이 없는 건가?’
[깨어진 암시는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습니다. 이미 다른 상식으로 대체된 상황이니까요.]
‘음···.’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솔직하게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미나 입장에선 섭섭한 것도 당연한 일.
때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미안해요. 저는···."
"아니. 사과하지 마."
방금 전까지 들끓고 있던 미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폭풍 속에 고요같은 느낌.
오히려 저런 차분한 눈빛이 더욱 심장을 조여오는 것 같다.
"···네?"
"난 사과 받을 자격없어.너 역시 그럴 필요도 없고."
미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우린 진지한 사이도 아니었잖아."
"······."
바짝 날 선 말이 사납게 휘 갈퀴고 간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다.
이제껏 공들여 쌓은 호감도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굳이 정보창을 보지 않아도 뭔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무척 위험한 순간이다.
버스는 이미 떠나 버린 것일까?
"미안해. 오랜만에 만나 놓고 너한테 괜한 얘기를 했구나. 그럼 쇼핑 잘해."
"가, 가시려고요?"
"지금 우리 사이에 더 할 얘기가 있을까? 이제 곧 여자 친구도 생길 사람한테."
[손절각 나왔습니다.]
‘완전히 돌아선 거 같지?’
[어차피 관리할 사람도 많은데 그만 보내 주시죠.]
‘미나를? 어림없는 소리!’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헬스장의 그녀다.
육감적인 핫바디에 잦이 브레이커를 가진 명기의 미나.
이대로 허무하게 그녀를 떠나보낼 순 없다.
그것도 내 잘못으로.
이건 용납할 수 없다.
"자, 잠시 만요!"
그렇다.
나는 질척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그녀를 보내면 영영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존심따윈 포기했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여자다.
"왜?"
미나가 잔뜩 삐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미 그녀는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기 때문에 가시 돋힌 말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가지려니 애매한데, 이제와 남 주자니 아깝니?"
"아, 아니···."
무심하게 내던지는 말 한마디가 상처난 곳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자극적이다. 그녀는 말로 나를 도려내고 있었다.
"됐어. 나 솔직히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오늘 도훈이 너한테 정말로 실망했어."
"미나 누나···."
"그래, 뭐. 난 매일 볼 수 있는 학생도 아니고, 주변에 어린 대학생들이 더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이해해. 그러면 적어도 나한테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공부에 집중한다고 여자 안 만나겠다면서? 그래서 나한테 풀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잖아. 어떻게 그래놓고 나한테···. 내가 뭐가 되니 이러면?"
[주인님, 이건 정말로 답이 안 보이는데요?]
‘와씨, 이건 완전 좆 된 거지?’
[네. 확실하게 좆됐습니다.]
‘안 돼! 방법을 찾아. 이건 정말 아니야. 정보창.’
[네? 이 와중에요?]
‘정보창 켜라고. 어떻게든 방법을 알려줄 거 아냐?’
[하-. 평소엔 신경도 안 쓰시다 이렇게까지 집착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주인님이 뭐가 아쉬울 게 있다고요?]
‘모르겠어?’
[뭘요?]
‘미나 말이 맞단 말이야! 남주긴 존나게 아깝다고!’
[아니! 이, 인성···.]
‘그래! 나 인성 개 쓰레기다! 내가 여자를 버리면 모를까, 여자가 나를 버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얼른 정보창이든 뭐든 그녀를 막을 방법을 알려달란 말이야!’
[휴-. ···알겠습니다. 정보창 띄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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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송미나 (비 처녀, 일시 20세 5개월)
나이 : 24 #필라테스 강사 #핫 바디 #잦이 브레이커
호감도 : 65/100 (급격한 하락!)
개방성 : 중
성감대 : 입술, 젖꼭지, 밑 가슴 접힘 부위.
*애무 포인트 : 그녀는 이빨로 젖꼭지를 잘게 깨무는 걸 좋아합니다.
성욕지수 : 상 (임신확률 : 64%)
공략팁
*위 대상은 이미 공략되었습니다.
*위 대상을 공략하여 ‘헬스녀를 공략하라’ 미션을 완수하였습다.
*위 대상을 공략하여 ‘도전과 응전’ 이벤트를 완수하였습니다.
*위 대상에게 적용된 상식 개변이 깨어진 상태입니다.
-상식 개변 파괴 여파로 호감도가 급락하였습니다.
-그녀는 당신의 이중적인 태도에 무척이나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아아, 환멸해 버렸습니다.
-그녀는 그간 품었던 애틋함과 자신의 헌신적인 노력이 배신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감언이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무슨 말이든 지어내 거짓말이라도 하십시오. 몸으로 얽힌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호감도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다음의 행동을 추천합니다.
-추천 멘트 : "나 진짜 누나밖에 없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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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창을 쭉 훑는데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90 가까이 넘나들던 호감도는 60 중반으로 내려 앉았고, 다시 마음을 돌릴 방법은 거짓말 외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시계만 보네? 더 할 말 없지? 나 간다."
"자, 잠깐만요."
나는 일어서는 그녀의 손을 억지로 붙잡았다.
미나는 우악스러운 힘에 이끌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놔, 이거."
"제 말 한 번만 들어보세요."
"또 무슨 변명을 하려고?"
미나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토라진 미나는 이제껏 보았던 친절함과 상냥함이 완전히 실종된 모습이었다. 착한 여자의 질투는 이정도로 살벌하구나.
차라리 민주같은 M성향의 여자였다면 바람 피우다 걸렸다 한들 이 정도로 애증을 표시하진 않았을 거다. 오히려 고통을 받는 데서 묘한 쾌감을 느끼고 더 심하게 애착을 드러냈겠지.
하지만 미나는 그런 타입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고, 상처받은 자존심에 굉장히 분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호감도가 너무 떨어진 상태라 당장 상식 개변을 쓰기도 뭐했다. 일단 떨어진 호감도부터 다시 올리는 게 급선무다.
나는 주머니에서 ‘오빠 믿지’ 립밤을 꺼내 급하게 발랐다.
미나는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나의 행동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요, 입술이 바짝 말라가지고."
"흥!"
"누나. 저한테 오늘 많이 실망했다면 죄송해요."
"사과는 진즉 들었어. 더 들을 필요도 없고."
"근데 누나가 한 가지 아셔야 할 게 있어요."
미나는 대체 무슨 변명을 늘어 놓는지 들어나 보겠다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예전엔 마냥 나에게 잘해주는 운동 좋아하는 착한 누나였는데, 지금은 그 어떤 면접관보다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다. 사람이 저렇게 돌변할 수 있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질투
의 위대함이란!
"제가 그때 그런 말을 한 건 사실이에요. 저는 당장 여자를 사귀기보다 임용 시험에 꼭 붙고 싶었거든요."
"근데?"
"하지만 주변에서 저를 가만 놔두지 않더라고요. 알아요. 변명처럼 들린다는 거. 그치만 사실이에요. 제가 절대로 먼저 꼬신 게 아니에요."
"누가 먼저 시작했던, 너는 이제 그 애랑 사귈 거잖아."
"······."
"내가 진짜로 화나는 게 뭔 줄 알아?"
"······."
"내가 너한테 사귀자는 말을 했을 땐 그렇게 거절해 놓고서 다른 여자는 받아 줬다는 거야."
얼마나 화가 났는지 미나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상처받은 자존심.
미나는 지금 자신이 까였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거기서 엄청난 모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여자는 되고, 자신은 안 되고.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건 바로 그런 비교의식이다.
열등감을 느낀 사람은, 영혼에 상처를 받는다.
"그게 아니에요."
"뭐라고?"
"누나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요."
둘러대야 했다.
어떻게든 납득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내가 자신을 배신해야 했던 이유.
그런거면 딱 하나 뿐이다.
"잠깐 저 담배 좀 펴도 되나요?"
"뭐?"
미나가 황당해 했다.
다행히 흡연실이 비치된 커피숍이었고, 장소만 이동하면 됐다.
"말하기 힘들어서 그래요. 잠시만요."
"하-. 나 참."
미나가 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고, 잠시 흡연실을 들렀다. 흡연실로 향한 건 다름이 아니었다. 바로 연기력을 올려주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AV촬영할 때 쏠쏠한 성과를 보였던 메소드 연기 담배 말이다.
[저는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이게 아이템까지 써가면 해야 할 일인지요.]
‘그런 판단은 내가 해. 그냥 아이템이나 재깍 줘.’
[···알겠습니다.]
담배를 피우자 연기가 피어 올랐다.
연기가 피어 올라서 연기력을 올려주는 것일까?
아무튼 다시 미나에게 돌아갔을 때 나는 눈빛부터 달라져 있었다.
사연을 가득 담은 그렁그렁한 눈빛.
내가 생각해도 소름 돋을 연기력이었다.
"말할게요."
목소리 톤도 착 가라앉았다.
바닥까지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 울림만으로 절절한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래."
"저. 임신공격 당했어요."
미나의 눈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확장되었다.
나는 오히려 이 시점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맞아요. 제 잘못이에요. 유혹당했고, 실수해 버렸어요. 진짜 사귈 생각은 1도 없었어요. 술 먹다가 자제력이 흐트러져서."
"자, 잠깐만 도훈아. 방금 임신···."
미나는 스스로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던지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확 톤을 낮췄다.
"···임신이라고 했니? 너가 여자친구를 임신시켰다고?"
"여자친구가 아니에요. 이젠 결혼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아니 무슨···. 진짜야? 확실해?"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으로 모든걸 말할 수 있다면 지금 내 모습이 그럴 것이다.
"저번 주부터 걔가 그러더라고요."
"뭐라고?"
미나는 갑자기 아까의 냉정함을 잃고 당황하며 나의 말을 경청했다.
"생리가 멈췄다고."
"생리가?"
"네."
"얼마나 됐다는데?"
"몰라요. 한 이주? 아무튼 펑펑 울면서 그러더라고요. 아직 대학도 졸업 못했는데 어쩔거냐면서. 책임지라고."
"잠깐, 잠깐 도훈아. 누나말 잘 들어봐."
미나는 갑자기 나에게 굉장히 호의적으로 변했다.
마치 내가 억울한 누명을 쓴 피의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생리가 멈춘 건 안 좋은 징조긴 하지만, 꼭 그게 임신이라고 확신할 순 없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나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거울로 볼 수 있다면, 내가 봐도 토 나올만큼 완벽한 연기였다.
"그··· 생리라는 게 항상 일정한 게 아니거든. 혹시 불순이라고 들어봤어? 생리 불순."
"잘 모르겠어요."
"사람에 따라서 생리 주기가 변하거나, 한 달씩 거르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지. 어떻게 그것만 가지고 임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아···."
"너 그때 안에 쌌어?"
"아니요."
"안 쌌어?"
"술에 취해서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안에는 확실히 안 쌌어요. 그건 확실해요."
"근데 어째서 임신이라고 생각한거야?"
"인터넷에 막 물어보니까 쿠퍼액으로도 가능하다고."
"그리 쉽진 않을 텐데."
"그치만 그렇다고 제가 막 울고 있는 아이한테 따질 수도 없잖아요."
"너 그 아이 사랑해?"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었다.
어차피 임신시킨 여자따윈 없다.
모든건 나의 자작극일 뿐이다.
"아뇨."
"근데도 사귀는 건 책임감 때문이야?"
"네. 결혼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실수 때문에 결혼한다고?"
"모르겠어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사실. 이럴 줄 알았음···. 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 누나가 사귀자고 할 때 사귈 걸 그랬어요. 그냥 누나를 만났으면 이럴 일도 없었는데···. 제가 그냥 쓰레기같아요. 전 왜 이럴까요? 흐, 흐윽."
감정이 솟구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메소드 연기가 펼쳐지자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와락-
갑자기 얼굴에 물컹한 덩어리가 느껴졌다.
미나가 나를 꽈악 껴안고 있었다.
< 731. 중수의 자격-60-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