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0. 중수의 자격-59- >
오후 수업을 마친 도훈에게 조교 강민주가 전화를 걸어왔다.
-도훈학생, 엊그제 말한 표지 모델 건 때문에 연락했어요. 어떻게, 결정은 했나요?
무척이나 사무적인 말투.
도훈은 그녀가 공적인 자리에서 전화를 걸었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였다면 대번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아양을 떨었을 테니까.
"네, 조교 선생님. 해보겠습니다."
-아, 진짜로? 교수님. 도훈 군이 괜찮다고 합니다.
민주는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하고는 다시 말했다.
-잘 생각했어요. 그럼 내일 오전 중 대학 본부로 들를 수 있을까요? 학교 홍보처 직원이랑 촬영일자 조율을 해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상대 모델도 함께인가요?"
-1학년 정음 양에게도 곧 연락 할 거예요.
"네."
-그럼 ‘내일’ 보도록 해요.
민주가 유독 내일 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통화를 끊었다.
아마도 오늘은 사정이 있어 못 본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민주가 무척 바쁜 모양이네.’
[어쨌든 대학 교직원이니까요. 잡무가 많겠죠.]
‘그나저나 잘 됐다. 안 그래도 쇼핑하려고 했던 참이니 겸사겸사 같이 둘러봐야겠다.’
[뭘 말입니까?]
‘사진 촬영하니까 새 옷이 필요하지 않겠어? 호빠 출근할 때 입을 수트도 사야 하고.’
도훈은 정음에게 연락해 함께 쇼핑을 가자고 할까 하다 돌연 생각을 바꿨다.
"아니다. 같이 가서 옷 사준다 하면 분명 부담스러워서 싼 옷으로 고를 거야. 이럴게 아니라 어울리는 옷을 내가 직접 골라서 선물해 줘야지."
그뿐 아니라 정음과 함께 쇼핑을 가면 수트를 고르는 일도 불편할 것 같았다. 교생실습까지 다 끝난 마당에 호스트빠 선수들이 입는 화려하고 제비같은 스타일의 정장을 고르는 것은 공연한 의심을 살 게 뻔했다. 대학교를 오는데 정장을 빼입고 올 일도 없을 테
고.
‘정음이 비싼 거 사줘야지.’
도훈은 백화점으로 혼자 쇼핑을 하러 나섰다.
주차장에 차를 댄 후 차 내부에 비밀 장소에서 현금을 꺼냈다. 그는 비상시를 대비해 오카모토에 받은 현금 1억 중 500만원 가량을 차 안에 숨겨놓고 있었다.
‘그때 정마담에게 선수금으로 받은 돈이 100만원 맞지?’
[네.]
‘그럼 그 100만원으론 내 옷을 사고···.’
도훈은 내친김에 5만원짜리 묶음 하나를 더 챙겼다.
일부러 20장씩 따로 정리해 100만원 단위로 갈라놓은 것이었다.
‘이건 정음이 선물 사줘야지.’
[100만원어치나요?]
‘100만원 가지고 뭘? 위아래로 풀세트 뽑으면 그것도 빠듯해. 그냥 너무 금액이 크면 정음이가 부담스러워 할 테니 이 정도로 그친 거야.’
[그렇군요. 주인님은 정음양에겐 정말 관대하신 것 같습니다.]
‘정음이한테 받은 게 너무 많아서 그래.’
도훈은 일단 자신의 물건부터 고르기로 했다. 현금 200만원을 가방에 챙긴 채 들고 다니는 모습이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현금을 뭉텅이씩 들고 다님담. 신용카드라도 하나 만들어야겠는데 요샌 대학생은 발급 안 해 줄텐데.’
"손님, 구두 보러 오셨나요?"
1층 매장을 지나가는데 남자 직원 하나가 도훈에게 물었다.
‘구두? 그래. 구두부터 골라야겠다.’
"네. 면접 때문에 그러는데 깔끔한 걸로 추천 좀 해주실래요?"
직원은 도훈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물었다.
"면접이면···. 어디? 공직 계통인가요? 아니면 일반 회사?"
"그건 왜요?"
"아, 직장에 따라서 구두 스타일도 달라지거든요. 아무래도 공직쪽이면 최대한 보수적인 스타일로 가는 편이 좋구요, 회사도 계열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니까요."
도훈은 호빠 선수용 복장이 필요했므로 적당히 둘러댔다.
"아, 제가 그··· 패션 쪽."
"오, 패션."
"그 디자인 관련 회사 사무직에 지원하거든요. 저는 그쪽은 잘 모르는데 아무래도 회사 분위기가 상당히 화려한 걸 추구하는 거 같아서."
"패션 쪽, 화려한 거. 오케이. 잠시만요. 딱 적당하게 있습니다."
직원은 가운데 버클이 달린 검은색 로퍼 하나를 들고 왔다.
"지금 같은 계절엔 딱 로퍼죠. 어때요. 깔끔하고, 세련됐고. 어떤 옷하고 매칭시켜도 잘 어울리고,"
"그런가요?"
"한번 신어보세요."
도훈이 구두를 신고 거울을 보자 발이 딱 맞는 게 느낌이 무척 편했다. 구두지만 운동화와 비슷한 착감이 났다.
"양가죽으로 되어 가지고 굉장히 부드럽죠? 촉감도 좋고."
"그렇네요."
"사이즈는 어떠세요? 보기는 딱 좋은데."
"잘 맞는 거 같아요."
이걸로 하시죠. 추천드립니다."
"네."
도훈은 망설임 없이 쇼핑을 하는 편이었다.
구두에 이어 벨트, 지갑 같은 피혁 제품을 먼저 고른 도훈은 이제 수트를 보기 위해 2층 매장에 들렀다.
‘와, 3개 샀다고 벌써 50만원이나 털렸어? 이럼 계산이 안 맞는데···.’
필요해서 구매하긴 했지만 생각 외로 큰 지출에 도훈은 난감했다. 정마담이 준 100만원이란 돈은 형편없이 적은 금액이었던 것이다.
[가진 돈도 훨씬 많으신 분이 뭘 그렇게 벌벌 떠십니까? 더 쓰시죠.]
도훈이 고민하다 대답했다.
‘가죽 제품은 어차피 두고두고 오래 쓰니까 질 좋은 걸로 고른 거야. 가격 신경 안 쓰고. 근데 알바 때문에 사는 옷 때문에 예산을 초과할 순 없지.’
[주인님은 무척이나 검소하신 편 같습니다.]
‘내가? 흐흐. 전혀. 전생에 이정우때 는 옷에 명품으로 도배하고 다녔어. 차 빼고 몸에 걸친 것만 수천만원 넘었을걸?’
[아니 그런 분이 어쩌다 이렇게 검소하게···.]
‘검소한 게 아니라 쓸데없이 낭비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땐 부자였고, 지금은 가난한 대학생이니까. ㄱ리고 한 가지 재밌는 사실 알려줄까?’
[뭐요?]
‘어차피 내가 입으면 싸구려 정장도 고급 수트처럼 보일거라는 사실이야.’
[으으, 완전 자뻑입니다 주인님.]
‘패완얼 모르냐, 패완얼? 얼굴이 명품이고 몸매가 고급이면 나머진 거들 뿐이라고.’
한창 자랑질을 하던 도훈은 백화점에서 가장 저렴한 수트 매장으로 들어갔다. 할인이 30%나 들어간 세일 제품을 파는 곳이었다.
"옷 좀 보러 왔는데요."
"네, 손님."
싹싹하게 생긴 젊은 남자 직원이 도훈을 반겼다.
"어떤 스타일로 찾으시나요?"
도훈은 나이 차가 적어 보이는 직원을 보자 마음이 편해졌다. 끽해야 2어살 위의 형처럼 보였다.
"일단 싸고."
"잘 오셨네요. 저희 매장은 할인 제품이 많습니다."
"좀 화려한 걸로요."
"화려한 거요?"
"네. 제가 촬영용 의상을 찾고 있거든요."
"오, 촬영이요?"
"네. 우연히 단역을 맡아 가지고."
"아, 혹시 배우 지망생이신가요?"
매장 직원은 도훈의 생김새를 보고 멋대로 추측했다.
키도 훤칠하고 잘생긴 게 딱 연기자를 하면 어울릴 페이스였다.
"뭐···. 굳이 따지면 그렇죠?"
"맡은 배역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호빠 선수요."
"네?"
"음, 그러니까 유흥업에 종사하는 제비 역할이에요."
"제비! 캬, 진짜로 제비는 아니고요?"
친화력 좋은 직원이 그새 농을 건넸다.
도훈은 뜨끔했으나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설마요. 배역이 그렇다는 거죠."
"하하, 농담입니다. 너무 잘생기셔서 선수라고 해도 믿겠네요."
"감사합니다."
"가만있자, 어차피 단역에 잠깐 입을 의상이니까 비쌀 필요도 없겠고. 호빠 선수처럼 보이려면···."
직원은 신이 나서 옷을 골랐다.
그러더니 푸른색 계통의 화려한 정장을 가지고 왔다.
"이건 어떻습니까?"
"색이 와···."
"보통 사람들은 소화 못하죠. 하지만 손님분이 입으면 정말 잘 어울릴 겁니다."
"살짝 날티 나는 것 같은데."
"그게 포인트죠. 호빠 선수 역할이라면서요? 원래 그쪽 애들은 눈에 팍팍 티게 입어주거든요."
"한 번 입어 봐도 되나요?"
"그럼요."
도훈은 직원이 골라 준 옷으로 갈아입고 내친김에 미리 산 구두와 벨트까지 착용했다. 풀세트로 세팅해서 나오자 직원이 감탄하며 말했다.
"이야! 이 옷은 완전히 손님을 위한 옷이네요. 맞춤 정장인줄?"
"그런가요?"
"네. 현직 선수라고 해도 믿겠어요. 제가 여자였음 당장 놀러 갈듯요."
"하하, 감사합니다."
"진짜로 선수는 아니시죠?"
"아니요. 대학생입니다."
"근데 촬영하는 작품이 뭐예요? 저도 영화 좋아하는데 나중에 보러 가게요."
"아···."
도훈이 급조해 둘러댔다.
"대물···. 이라고."
"대물요?"
"네."
"그거 드라마로 있지 않았나요?"
"아마 그럴 거예요. 이번에 영화 시나리오로 각색 됐거든요."
"그렇구나. 재밌겠네요. 꼭 보러 갈게요."
"전 어차피 단역이라 잠깐 나와요."
"그래도요. 저희 매장 옷이 나온다는 데 안 보러 갈 수가 없죠."
"암튼 이걸로 주세요. 얼마죠?"
도훈의 쇼핑은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마음에 들면 그 자리서 금액을 지불하고 바로 들고 나왔다. 위아래로 풀세팅을 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쇼핑을 마친 도훈은 이제 정음의 선물을 준비했다.
‘여자 옷은 처음인데 뭐부터 골라야 하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층을 옮기는 데 우연히 속옷 매장이 보였다.
‘그래. 기왕 사주는 거 속옷까지 싹 다 맞춰줘야지.’
속옷은 왠지 연인에게 주는 선물처럼 보일 것 같았다. 몸매를 훤히 알고 있다는 은근한 사인이기도 하고. 정음이 민망해하면서 기뻐하는 상상에 도훈은 벌써부터 흐뭇해 졌다.
"어서 오세···. 아, 여자 친구 선물 하시게요?"
매장 직원이 방문한 도훈을 보고 물었다.
"네."
"세트로 보시나요?"
"세트요?"
"네, 브라랑 팬티···."
여직원은 도훈을 보고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남자들이 여친 선물을 사기 위해 매장을 들르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도훈의 잘생긴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설렜던것이다. 도훈이 속으로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거참, 여자들이 나만 보면 사족을 못 쓰지?’
[주인님 버프를 받기 때문이지요.]
‘버프라니?’
[주인님은 현재까지 수많은 여성을 공략하면서 이런저런 호감도 버프가 중첩된 상태입니다. 그런 버프들이 주인님에 대한 호감도를 끌어올리고 있죠.]
‘오호. 그래서 여자들이 나한테 유독 친절한 거야? 처음보는 사람들도?’
[그렇죠. 외모 이상의 매력을 발산하니까요. 주인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처음에 비해서 엄청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흐흐. 역시 여자 꼬시는 건 외모가 최고네.’
[그만큼 중수에 어울리는 격을 갖췄다는 얘기죠.]
"사이즈는 혹시 아세요?"
여직원이 연신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도훈은 직원의 몸매를 지긋이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귄지 얼마 안 되서···."
"아···. 사이즈를 정확히 아셔야 하는데. 브라는 안 맞으면 엄청 불편하거든요."
"그니까 막 엄청 크진 않는데, 또 막 작지도 않아요."
"그럼 B컵?"
"B컵이 어느 정도죠?"
직원은 난감해하더니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B컵이에요."
"아···."
도훈도 민망한 척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네, 비슷한 것 같아요."
‘와, 이건 찌르면 넘어갈 분위긴데. 사이즈도 알아서 알려주고 말이야.’
[적당히 하십시오. 세상 모든 여자를 다 눕힐 생각입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 도훈아? 이도훈 맞지?"
그때 누군가 도훈에게 말을 걸어왔다. 도훈이 낯익은 목소리로 고개를 돌리자 트레이닝을 복을 입고 있는 잘 빠진 여성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미나··· 누나?"
***
하-. 하필 속옷을 고르는데 마주칠 건 뭐람?
우연히 백화점에서 미나를 만난 나는 카페테리아가 있는 8층으로 올라 커피숍에 들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누나는요? 필라테스 학원은 잘 돼요?"
미나가 생글생글 웃으면 대답했다.
"잘 되지. 요샌 타임 별로 꽉 차서 자리도 없을 지경이거든."
"오, 축하해요. 누난 잘 되실 것 같았어요."
"고마워. 너도 대학생활 잘 하고 있는 것 같네?"
"네?"
"방금 여친 선물 사주려던 거 아니야?"
얼굴은 웃고 있지만 어딘가 목소리에 날이 선 느낌이었다.
하긴 오랜만에 만난 곳이 하필 여성 속옷 매장이라니.
뭐라고 둘러댈 말도 없어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여친은 아니고요."
"여친도 아닌데 속옷을?"
"그냥 뭐 여친 될수도 있는 아이라."
"흠."
미나가 커피를 홀짝이며 턱에 팔을 괴었다.
뭔가 할 말은 많은데 굉장히 참는 느낌이었다.
속마음을 읽어볼까?
{하-. 진짜 섭섭하네. 연락 자주 안 할때부터 느꼈는데 그새 여친 사귄거 봐.}
처음엔 주로 나에 대한 불평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정도 현실을 인정하는 부분도 있었다.
{하긴. 일하고 있는 나보다는 또래 대학생들이 훨씬 잘 어울리겠지. 내가 괜히 욕심내는 걸지도 몰라. 그냥 놓아주자.}
"암튼, 잘 된 일이네. 축하해."
"아직 사귄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잘 되고 있으니까 속옷도 사주는 거 아니야?"
"음, 뭐···."
"사이즈도 아는 거 보면···. 벌써 잤니?"
"네?"
미나 답지 않은 돌직구였기 때문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아마도 질투심 덕에 평소보다 흥분한 상태로 보였다.
"잤구나?"
확신하듯 말하는 미나의 태도 앞에 나는 겸연쩍어 하며 대답했다.
"뭐, 어쩌다보니···."
"괜찮아. 나 신경 쓰지마. 우리가 사귄 것도 아닌데 뭘."
말은 괜찮다면서 미나의 목소리엔 섭섭함이 가득 묻어나왔다.
하, 이거 또 미안하게 만드네.
< 730. 중수의 자격-5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