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1. 중수의 자격-50- >
[주인님 뒤, 뒤에!]
로시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경고가 다소 늦었다. 날카로운 칼이 방심하고 있는 도훈의 등판을 향해 찌르고 들어왔다.
그때.
어디선가 검은 물체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불광으로 윤을 낸 끝이 뾰족한 구두였다. 구두 끝은 정확히 잭나이프의 중간을 걷어 올렸고, 놓친 칼은 공중으로 튕겨 오르더니 석면 천장에 박혀 부들부들 떨었다.
"아, 아니!"
보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신묘한 발차기.
도훈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너는!"
그는 오전에 도훈과 한 번 겨룬 적 있던 조폭 민수였다.
보스의 말에 듣고 그를 다시 만나러 갔다가, 오락실에서 싸움이 벌어지던 것을 보고 참견할지 말지 망설이던 차였다.
한눈에 보아도 양아치 놈들은 도훈에게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이를 의식한 듯 도훈은 자신과 싸울 때와 달리 본 실력의 1/10도 발휘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한 놈이 몰래 칼을 꺼내 기습하는 모습에 참지 못하고 중간에 끼어들고 만 것이었다.
"아, 또 뵙는군요. 이도훈씨."
"아까 봐놓고 무슨."
"뭐, 뭐야 네놈은? 일행이냐?"
젝나이프를 천장에 박히고 황당한 표정을 짓던 놈이 민수에게 물었다. 민수는 도훈에게 끼어든 것에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하고는 무서운 눈으로 양아치를 노려보았다.
"···하여간 근성까지 썩어빠진 새끼들이라 그런지 아무 데서나 연장을 꺼내 들기는."
그때 하나둘 몸을 일으키던 양아치들이 슬금슬금 주위로 몰려들었다.
"저 새낀 또 뭐야?"
"아 씨발 방심했다."
"야, 쪽수로 밀어붙여. 그래봤자 둘뿐이야."
"맞아. 동시에 덤비면 충분히 해볼 만해."
놈들은 도훈에게 일대 다수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놓고도 스스로 실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방심해서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훈 역시 평소에 누군가를 때려본 적이 별로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민수가 도훈을 향해 말했다.
"이런 잔챙이 놈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도훈은 민수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어깨를 으쓱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괜히 사람들 많은 데서 폭행 시비에 휘말려봤자 득이 될 게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어찌됐건 자신의 신분은 평범한 대학생이고 민수는 현역 조폭이었으니까.
"잔챙이? 너 이 새끼 지금 우리보고 잔챙이랬냐?"
"양복 쳐 입은 꼬락서닐 보니 어디 나이트 삐끼같은데?"
"비끼?"
"야. 너 어디 나이트 다니냐? 요새 물 좋아?"
양아치들은 상대가 누군지도 몰라보고 잔뜩 약을 올렸다. 민수는 이미 칼을 꺼낸 든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그냥 놔두지 않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이 새끼들이 감히 큰 형님이 모셔오라는 사람을···.’
민수는 도훈과 전혀 달랐다.
본래부터 손속이 잔인하고 인정사정이라곤 없는 인물이었다.
특히 약자에 대한 멸시에 뿌리 깊은 인간이었는데, 질 낮은 양아치들이 건달 이미지를 흐린다고 평소에도 무척이나 질색하는 성격이었다.
민수는 주먹을 풀더니 손목에 찬 롤렉스 금장시계를 풀어 손에 감아쥐었다.
"시간 아까우니까 동시에 덤벼라."
"뭐?"
"이 삐끼 새끼가 대낮부터 약을 사발로 처드셨나. 미치셨어요?"
"야! 조져!"
파바바바박!
그러나 조짐을 당한 것은 되려 양아치들이었다.
그들은 감히 뭘 해보지도 못하고 민수의 발차기와 주먹질에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았다. 더욱이 민수는 상대가 죽던 말던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무자비한 인물.
그는 쓰러진 양아치들의 면상을 구둣발로 짓밟으며 아주 아작을 내버렸다. 입에서 피가 터지고 머리가 깨지자 놀란 구경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누군가는 신고 전화를 넣는지 핸드폰으로 들고 연락하는 사람도 보였다.
양아치를 단숨에 때려눕힌 민수는 괜히 경찰과 얽히면 좋을 일이 없다고 판단해 도훈에게 말했다.
"일단 피하시죠. 일이 복잡해 질 것 같습니다."
민수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도훈에게 깍듯이 대했다. 약자며멸시의 또 다른 말은 강자숭상. 그는 도훈이 자신보다 한참 위에 있다고 봤기에 나이에 상관없이 그를 존중했다. 도훈 역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양아치들을 보고는 동의했다.
"그래야겠네. 아참 그전에."
도훈은 놀란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고생에게 다가갔다. 괜히 도훈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본전도 못 찾고만 여고생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어쩔 줄 몰라고 있었다.
"야. 니들 이리와 봐."
"네, 넵 오빠!"
"잘못했습니다!"
도훈은 곧바로 태도를 바꾸는 고등학생을 보고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교사가 될 사람이라는 마음에 한 마디 훈계를 남겼다.
"몸에 안 좋으니까 담배 같은 거 피지 마라. 한 번 만 더 내 눈에 띄면 진짜 혼난다."
"끄, 끊을게요! 정말로!"
"죄송해요, 오빠."
"오빠는 무슨. 아저씨랄 때는 언제고."
도훈은 꼬리를 바짝 내린 여고생들의 태도에 흡족해하며 민수를 따라 가게 밖으로 나왔다. 가게 밖 도로 편에는 검은색 벤츠 한 대가 정차해 있었는데, 민수가 도훈과 같이 나오자 검은 정장을 입은 험상궂은 사내가 깍듯이 예의를 차리며 차 뒷문을 열어 주었
다.
민수가 도훈을 향해 말했다.
"일단 타시죠."
"그래. 여길 벗어나고 봐야겠어."
도훈이 차에 오르자 민수는 차 문을 연 조폭에게 명령했다.
"넌 남아서 뒷수습하고 와. 우리 이름 안 나오게 입단속 확실히 하고."
"네, 형님."
뒷정리를 맡긴 민수가 도훈과 나란히 차에 오르자 벤츠가 출발했다. 도훈은 고급스러운 내장재를 보며 신기해하고 있다가, 민수가 들어오자 아무렇지않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근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 위치 추적을···."
"내가 분명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도훈이 목소리를 깔고 경고하자 민수가 곧바로 사과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큰형님께서 도훈 형님을 수소문 해보라 말씀하셔서."
"큰형님?"
도훈은 의외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하다 다시 말했다.
"가만, 내가 왜 근데 형님이야? 나 아직 대학생 밖에 안됐는데···."
"저희 세계에서는 주먹쎈 놈이 곧 형님입니다, 형님."
"그래도 부담스러우니까 그런 호칭은 좀 자제해 주면 좋겠는데."
"네, 형님. 아, 아 아니. 알겠습니다."
도훈은 민수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에 그가 조폭이라는 사실이 딱히 거슬리진 않았다. 오히려 타이밍 좋게 나타나 주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근데 큰형님이란 분은 왜 나를 보자는 거야?"
"저희 큰형님께서 도훈 형···. 이도훈 님을 꼭 한 번 뵙고 싶어 합니다."
"나를?"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직접 들어 보시는게···."
도훈은 입이 무거운 민수가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스킬을 발휘해 그의 속마음을 읽었다.
{큰 형님이 도훈 형님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하실 것 같아. 어쨌든 실력은 내가 보장하니 형님께서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거야.}
마음의 소리로 민수의 속셈을 미리 파악한 도훈은 깜짝 놀랐다.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를 스카웃 하다니? 어디로?’
[설마 조폭 입단 제의 일까요?]
‘조폭? 뭔 소리야? 내가 왜 조폭을 해?’
[아마 아까의 싸움이 저 민수라는 분에게 깊은 감명을 줬나 봅니다. 그래도 타이밍 좋게 등장해주어서 다행입니다.]
‘그렇긴 한데···. 음, 이건 곤란한데. 나는 교사가 되어야 할 운명이잖아. 내 몸에 걸린 제약도 그렇고.’
[그렇죠. 사범대 커리큘럼을 무사히 이수하고 임용시험까지 통과해서 꼭 교사가 되셔야 합니다. 만에 하나 진로를 이탈한다면 신께서 무척이나 노여워하실 테니까요]
‘그러니까. 근데 무슨 명분으로 거절한담?’
도훈이 고민 끝에 대답했다.
"음, 설마 지금 바로 가는 건 아니지?"
"네?"
"아니 오늘 저녁엔 선약이 있어서."
"아···. 그렇습니까?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습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찾아 뵐 것을."
민수가 무척 아쉬워했다. 도훈이 말했다.
"혹시 명함 하나 있어?"
"네. 잠시만."
민수가 정장 포켓에서 머니클립을 꺼냈다.
척 보아도 명품처럼 보이는 값비싼 물건.
그러고 보니 타고 다니는 차도 그렇고, 아까 잠시 푼 시계도 그렇고 굉장히 돈이 많아 보이는 차림새였다.
꺼내 준 명함 역시 황금색으로 테두리가 있는 흔히 볼 수 없는 명함이었다. 도훈이 명함을 확인하자 최민수라는 이름과 함께 주식회사 도원건설의 실장이라는 직책이 박혀 있었다.
"최 실장?"
민수가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요샌 저희같은 사람들도 합법적으로 사업을 해서···."
"사업이라고?"
"네. 여러 가지로 손을 대고 있습니다. 건설이라든지 유흥업소 운영같은. 물론 합법적으로요."
"아···."
도훈은 순간 혹하는 마음이 들었다.
만약 조폭이 된다면 민수와 같은 부를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시간 되실 때 꼭 연락 한 번 주십시오. 큰형님 뵈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음, 알겠어."
"그럼 댁으로 모셔 드릴까요? 양 기사 회사로 가지 말고 국성대 방면으로 차 돌려."
"넵."
"아, 잠시만."
도훈이 뭔가 떠오른 듯 방향을 바꿨다.
"아, 집 쪽으로 가지 말고 다른 곳에 좀 내려줄 수 있을까?"
"어디 말씀입니까?"
"그게···."
***
차가 멈추자 운전기사가 잽싸게 내려 뒷문을 열어 주었다.
도훈은 VIP급 대우에 머쓱해하며 차에서 내렸다.
"아냐, 따라 내리지 마."
"아니 그래도···."
"내가 불편해서 그래. 암튼 나중에 여유 있을 때 다시 연락할게."
"네. 기다리겠습니다."
차 문을 닫으려던 도훈은 뭔가가 생각난 듯 동작을 멈추며 말했다.
"참, 그리고 앞으론 위치 추적이나 그런 건 삼가줬음 좋겠어. 누군가 내 사생활을 캐는 것 같아서 기분이 몹시 안 좋거든."
"넵. 유념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도훈을 향해 깍듯이 인사한 민수가 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뒤에 박힌 고급스러운 엠블럼이 야간 조명에 반짝거렸다.
"휘유-. 차 한 번 기깔나게 좋구나."
자신의 중고차를 비교하니 괜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부러우십니까?]
‘아니 뭐. 차야 좋으면 좋으니까.’
[아뇨. 조폭으로 잘 나가는 민수의 모습이 말입니다.]
도훈이 피식 웃었다.
‘부럽기는 무슨. 그냥 저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거지.’
[그 제안은 어쩌시려고요?]
‘뭐? 큰 형님이 보자는 거? 대충 뻐팅기다 뭉게야지 뭐. 근데 오늘 보니까 민수도 제법 써먹을 데가 많은 것 같아서 적당히 관계는 유지하는 것도 괜찮겠어.’
[조폭하고 친분을 둔다는 말씀입니까?]
‘그냥 필요에 맞게 써먹겠다는 의미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민수가 나를 꽤 높이 대우해 주는 거 같으니까 말이야.’
차에서 내린 도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젠가 와봤던 익숙한 골목 풍경.
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분명 이 근처의 투룸 중 하나일 것이다.
[한데 여긴 왜?]
‘내가 당하곤 못 사는 성격인 거 알지? 오늘 곤경에 처했던 걸 떠올리니 이것들 혼구녕을 꼭 내줘야겠다 싶어서.’
[그래서 나연 양 집으로.]
‘그리고 아직 충전이 남기도 했잖아.’
[아, 그렇군요. 아침에 희주양하고 3번, 점심 먹고 경희양과 한 번, 그리고 오후에 빛나양과 또 한 번을 포함해서 모두 5번의 충전을 채우셨군요.]
‘이제 딱 한 번 남았어. 그것만 채워지면 비밀의 문고리를 이용할 수 있다고.’
도훈이 하루종일 발정 난 개처럼 여자들을 건드리고 다닌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바로 비밀의 문고리를 충전하여 경비가 삼엄한 고회장의 저택에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실수로 질싸를 해버린 한지연의 임신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나연의 집 위치를 떠올려 원룸 앞에 도착한 도훈이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나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머, 오빠가 웬일로 전화를 다 주시고? 의대생 행세 하느라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는데, 도훈의 부끄러운 비밀을 쥐고 있다는 사실에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즉 앞으로 도훈을 마음데로 요리할 수 있다는 모종의 자신감이었다.
도훈 역시 라진 분위기를 감지했다.
‘이것 봐라?’
"의대생은 무슨. 지금 어디야?"
-집이요."연두랑 같이 있어?"
-아뇨. 연두랑은 아까 헤어졌어요. 오빤 그 경찰 언니랑 데이트 잘했어요?
"데이트라니? 아까 까페 나오고 헤어졌는데."
-피. 같이 차에 타는 거 우리가 다 봤거든요?
"그건 내가 차를 놔두고 와서 잠깐 차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한 거야."
-후후. 차를 아주 멀리 두셨나 봐요? 꽤 가시던데?
나연은 굳이 도훈을 미행한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설사 밝혀진다고 해도 어쨌든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도훈 역시 그녀의 속셈을 알아채고는 역시 가만히 두어선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음, 아무튼 그 일 때문에 할 말이 있어."
-혹시 연두한테도 연락했어요?
"아니. 일단 너 먼저 전화했어."
-왜요? 저보단 연두부터 설득하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이미 집 앞인데."
-네? 뭐라고요?
"너희 집 앞에 다 왔다고."
잠시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연이 2층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골목길을 훑었다. 그러자 정말로 가로등 밑에서 도훈이 전화기를 들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세상에. 진짜로 왔네?
"우리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어떨까?"
< 721. 중수의 자격-50-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