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9. 중수의 자격-48- >
‘하긴 일개 순경이 무슨 힘이 있겠냐만···. 총경 정도면 모를까. 가만, 총경 중에도 여자가 있던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던 도훈이 급히 생각을 중단했다.
아직까진 전 아내에 대한 복수 계획을 들켜선 곤란했다.
로시가 알게 되면 분명 막으려 들것 이다.
‘어, 어. 미션 보상. 코스프레 신이 내건 조건 달성한 거 맞지?’
[네. 스마트 워치로 보상을 확인하십시오.]
도훈이 스마트워치에 떠오른 화면을 클릭하자 상세한 설명이 떠올랐다.
코스프레의 신은 당신이 보여준 기지와 연기에 감탄했습니다. 코스프레의 신은 약조한 데로 3,000포인트와 ‘구속의 사슬’ 아이템을 후원하였습니다. 아이템은 현 시간부로 언제든 사용가능합니다.>
‘오. 드디어 대 PK단 병기를 입수했군. 지금 확인해 볼 수 있나?’
[네. 가방으로 전송해 드릴까요?]
‘오케이. 잠깐만 보고 다시 인벤토리에 넣어 두지 뭐.’
[인벤토리요?]
‘그 왜, 아이템 다시 전송시키면 돌아가는 곳 있잖아. 그게 인벤토리지 뭐야.’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천상계로의 전송과 인벤토리의 개념은 살짝 다릅니다. 알고 계십니까?]
‘무슨 소리야?’
[천상계에서 아이템을 받아오는 데는 포탈의 확보와 시차라는 딜레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이 말씀하신 ‘공간압축 인벤토리’는 조금의 시차도 없이 곧바로 물건을 꺼내 쓸 수 있게 해주는 보관함 성격의 아이템입니다. 아이템들의 아이템
이랄까요?]
‘잠깐. 그런 게 있었다고? 진작 말을 했어야지! 그럼 맨날 옷 홀딱 벗고 전송할 곳 찾느라고 고생 안 해도 됐을 거 아냐?’
[한번도 물어보질 않으셨으니까요. 그리고 공간압축 인벤토리는 경매장에서만 구입가능합니다. 일반적인 마켓에선 취급하지 않는 종류거든요.]
‘경매장? 가만 나도 이제 경매장에 입찰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이제 어엿한 중수니까요. 중수부턴 경매에 대한 입찰과 보유한 아이템을 경매장에 등재 시킬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오오. 그렇단 말이야?’
도훈은 예전부터 말로만 듣던 경매장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경매장 한 번 구경해 볼 수 있나?’
[지금요?]
‘응. 딱히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잠깐만 둘러보게. 그 인벤토리라는 게 있는지도 보고.’
[흐음, 그렇다면 조용한 곳으로 장소를 옮기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왜?’
[지난번 대도서관 기억 나십니까?]
‘응. AR인가 VR인가로 들어가는 곳? 스킬북이 있는.’
[맞습니다. 경매장 또한 마찬가집니다. 워낙 고가의 물건이 많다 보니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등재된 아이템을 3D 스캐닝한 상태로 띄워둡니다. 다만 경매장에 접속한 상태에서는 외부 자극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니 되도록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시는 게 좋습니다.]
‘혼자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곳이라···.’
도훈은 주변을 둘러보다 뽑기방과 오락실이 합쳐진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니 도훈이 생각하는 기계가 보였다.
‘오케이. 저기로 들어 가자.’
[네? 오락실을요? 더 어수선할 것 같은데.]
‘아니 코인 노래방 말이야.’
[아!]
도훈이 떠올린 조용한 장소는 코인 노래방이었다.
혼자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고, 사람이 안에 들어있으면 밖에서 비치기 때문에 딱히 방해하지도 않는다. 도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전 몇 개를 교환기로 바꾸어 코인 노래방 부스에 들어갔다.
"괜히 멍때리고 앉아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도훈은 동전을 잔뜩 넣어놓고 인기곡 위주로 닥치는 데로 예약을 걸었다. 곧 반주가 흘러나왔지만, 도훈은 마이크를 들 생각도 하지 않고 로시에게 말했다.
"자, 경매장은 어떻게 들어가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잠시후 스마트 워치가 주인님의 시신경을 교란시킬 것입니다.]
‘응? 교란이라니? 그때처럼 현실 위에 겹쳐지는 방식 아니야?’
[대도서관은 AR방식이고, 경매장은 공간의 제약을 없애기 위해 VR 방식을 이용합니다. 살짝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어지럽다니?’
순간 도훈의 시야가 뿌옇게 흐릿해졌다.
"어, 어 뭐야?"
마치 필름이 끊기는 것처럼 주변이 새까맣게 암전되더니 곳 이어 동굴 밖에서 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조그만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으으, 뭐야 이 어색한 느낌은?’
[신체가 동기화 하는 과정입니다. 가상의 공간으로 의식 세계를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엔 다소 시간이 걸립니다.]
일렁이는 빛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주변 하얗게 밝아졌다.
잠시 후 도훈은 모든 것이 새하얀 세상 위에 혼자 우뚝 서 있었다.
"우앗! 뭐야?"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전후좌우 위아래가 모두 하얀 벽지가 발라진 거대한 방 안에 홀로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반갑습니다, 주인님. 이렇게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늘 마음의 소리로 들려오던 로시의 목소리였다.
"어, 너는?"
도훈이 고개를 돌리자 안드로이드 로봇을 닮은 깡통 같은 기계 하나가 집게로 된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로시입니다."
"네가 로시라고?"
"가상이 세계에서는 저도 실체를 가질 수 있거든요."
"아니, 가만. 이런 깡통 로봇이었다고?"
"왜요? 인간이 생각하는 안드로이드의 기본적인 형태가 아닌가요?"
"아니 무슨 천상계 기술력이 이따위야? 이런 건 1960년대에 개봉한 스페이스 오디세이때나 등장한 로봇이잖아."
"흐음. 지금 모습이 마음에 안 드시면 바꿔보겠습니다."
갑자기 로시의 모습이 깜빡이듯 점멸하더니 어느 순간 훨씬 인간에 가까운 휴머노이드 로봇이 나타났다. 그것은 무성체로 신체의 주요부위가 모두 밋밋한 형태였다. 심지어,
"대머리였어?"
"네?"
"아니 너 지금 대머리잖아?"
"워, 원래 로봇은 머리카락이···."
"기왕 형태를 바꿀 거면 섹시한 미인으로 해달라고. 목소리랑 하나도 안 어울리잖아!"
도훈의 요구에 로시가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거참··· 취향하고는."
"응? 방금 약간 사람같았는데."
"오해십니다."
다시 로시의 형체가 깜빡이더니 이번엔 엄청난 모습의 미녀가 등장했다.
마치 고대 명화에나 나올 법한 하늘거리는 드레스와 금발로 땋은 머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여신의 형상이었다.
"오, 오오!"
도훈은 입을 떡 벌리며 다물지를 못했다.
지금껏 예쁜 여자들을 많이 만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로시가 변신한 모습은 감히 삿된 생각을 품는 다는 게 경외감이 들 지경이었다.
로시는 얼이 빠진 도훈의 모습에 베시시 웃었다.
"이번 건 조금 마음에 드시나 보죠?"
"로시, 우리 결혼하자."
"무, 무슨···."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인간은 아직도 무능해. 오직 신만이 완벽한 피조물을 창조하실 수 있지. 바로 너처럼."
흥분한 도훈이 로시를 껴안았다.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을 들이 박을 듯이 덤볐지만 그의 손은 로시의 형상을 투과하며 허공을 통과해 버릴 뿐이었다.
"어엇!"
"주인님. 정신 차리십시오. 여긴 가상의 공간입니다. 실제의 물리력이 통용되지 않는 공간이라는 뜻입니다."
영혼을 통과한 것처럼 반대편으로 튀어나간 도훈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에이씨, 쪽팔리게 진작 말했어야지."
그 사이 로시는 다시 처음의 깡통로봇으로 변신해 있었다.
"역시 안 되겠습니다. 주인님을 자극할 수 있는 외형은 되도록 피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팔리시면 곤란하니까요."
로시가 다시 깡통 로봇으로 모습을 바꾸자 도훈이 실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뭐야? 방금이 딱 좋았는데."
"어차피 지금의 외형은 가상으로 만들어 낸 아바타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게임속 케릭터같은 거죠."
"아니··· 완전히 사람 같았는데."
"놀랍도록 발전된 과학은 마법처럼 보이니까요."
"그나저나 방금 그 모습은 누굴 모티브로 한거지? 그렇게 완벽한 여자는 태어나 처음 봤는데."
"그보단 경매장에 더 집중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도 현실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주인님은 얼빠진 얼굴로 코인 노래방 부스에 기절해 있고요."
"아차, 맞아. 이럴때가 아니구나. 근데 경매장이 어딨다는 거야? 아무데도 없는데."
"바로 이곳입니다."
로시가 바퀴 달린 몸체를 한 바퀴 회전하자 갑자기 새하얗던 풍경이 박물관처럼 바뀌었다. 곳곳에 독특한 물건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우앗. 이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가상 세계에선 모든 것이 단지 환상이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이진법의 숫자가 매트릭스를 이루며 데이터를 시각화해서 보여줄 뿐입니다."
도훈은 영화 메트리스 속 세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보이는 건 실체가 없는 환상일 뿐.
사실상 VR 헤드셋을 머리에 쓴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간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로시가 바퀴 달린 몸체를 굴려 주르륵 이동했다.
"이곳이 경매 물품을 구경할 수 있는 곳입니다."
도훈이 그 뒤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근데 여긴 나밖에 없는 거야? 보통 경매장 하면 막 사람들 바글바글 모여있고 입찰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경매 입찰은 정해진 시간에만 열립니다. 또한 경매에 참여하신다고 해도 다른 플레이어와 만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저 금액을 적어 낼 뿐이죠."
"아···. 그렇구나."
"우선 입찰이 되기 전까지 물건을 둘러 보실 수 있는 공간입니다. 실물을 랜더링한 것이기 때문에 크기부터 색깔까지 완벽히 실제 아이템과 동일합니다."
도훈은 값비싼 보석이 박힌 왕관을 보았다.
위에서 내리쬐는 조명덕에 유난히 반짝이는 거대한 크라운이었다.
"오우, 이건 딱 봐도 비싸 보이는데? 뭐 하는 물건이지?"
"전시대 옆에 버튼을 누르면 상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거?"
도훈이 은색의 버튼을 누르자 빈 공간 위에 디스플레이가 나타나며 실행되며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위엄의 왕관
-본 왕관을 쓰는 대상은 카리스마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높은 카리스마는 눈빛만으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으며,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을 제공합니다.
-경매 시작가 : 25000 포인트.
"으헉, 뭐야? 이만 오천?"
"네, 위엄의 왕관은 높은 권력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가장 선호하는 아이템입니다. 착용한 자체만으로 카리스마 수치를 대폭 상승시키니까요."
"이 커다란 걸 머리에 쓰고 다닌다고? 미친놈 코스프레하게?"
"물론 형태는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합니다. 고급 아이템에 있는 형상변환 기능이지요."
"오."
도훈은 신기한 기분으로 전시된 진열품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날이 선 검부터, 보석이 박힌 건틀릿, 현대의 발명품인 스마트 폰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래지향적인 물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아이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다 훔쳐가 버리고 싶네."
"몇 번을 말하지만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환상입니다. 진짜 물건은 아이템 보관소에 삼엄한 통제하에 관리되고 있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신기한 아이템에 정신이 팔려있던 도훈은 문득 경매장을 방문한 목적을 떠올렸다.
"아참, 인벤토리. 그거 있나 보러 왔잖아."
"잠시만요. 이번 경매에 관련된 아이템이 있는지 검색해 보겠습니다."
안드로이드 기계로 변한 로시가 머리에 Led라이트를 반짝이더니 회전을 시작했다. 잠시 후 박물관처럼 생겼던 전시장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중세의 고풍스러운 성으로 배경이 바뀌었다.
"여긴 또 어디야?"
"제 5 전시실입니다. 인벤토리 관련 물품이 진열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아, 저깁니다."
도훈은 바퀴로 움직이는 로시를 따라 이동했다.
그곳에는 공중을 부유하는 반투명한 물체가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바로 이것입니다."
"저게 인벤토리?"
"형체가 없는 물건을 시각화해놓았을 뿐입니다. 설명을 한 번 열어 보시죠."
도훈이 은색 버튼을 찾아 누르자 눈앞으로 영상이 실행되었다. 자질구레한 설명을 건너뛰자 곧바로 사용 예시 화면이 나왔다.
영상 속에서 누군가 허공에 쑥 하고 손을 집어 넣는데 잠시후 그 속에서 커다란 방패가 끄집어 나왔다. 빈 공간에서 물건을 뽑아낸 것처럼 마술같은 광경이었다.
"우앗! 이게 인벤토리?"
"맞습니다. 평소엔 투명한 상태로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고, 소유자 주변을 머뭅니다. 그리고 필요시엔 허공에 공간을 열어 안에 있는 물건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설명에 따르면 내부의 공간은 고도의 나노압축 기술이 적용되어 대략 아파트 한 채 정도 보
유량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아, 아파트 한 채라니."
"놀라지 마십시오. 비싼 인벤토리는 거의 나라 하나를 품에 넣을 수도 있을 정도니까요."
"마, 말도 안돼."
설명을 듣는대도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다.
"이건 입찰가가 얼마부터 시작이지?"
"어디 보자···. 만오천 포인트군요."
"만 오천. 음, 마음에 들긴 하는데 생각보다 값이 나가네."
"시작 가가 그렇다는 것이지, 경쟁이 붙기 시작하면 더욱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찾는 플레이어가 많으면 그만큼 가격은 상승하니까요. 반대로 아무도 찾질 않으면 유찰이 되어 다음 경매 때는 시작가 10% 하락해서 시작합니다."
"음, 이해했어. 경매 시작일이 언제지?"
"지구 시간으로 한 달하고 보름 남짓 남았습니다. 왜요? 혹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생기셨습니까?"
도훈이 씩 웃었다.
"그보단, 우선 낙찰권을 받을 수 있는 미션이 아직 남아 있잖아."
< 719. 중수의 자격-48- > 끝
ⓒ 성난불기둥